세마리 숫염소 그러프

읽을꺼리 2007. 5. 9. 00:11 posted by 조재형

세마리 숫염소 그러프

(The Three Billy Goats Gruff)

   어느날 스티븐 킹은 나무다리 위를 걷다가 "세마리 숫염소 그러프"라는 전래동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불현듯 소설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 아이디어는 결국 <그것(It)>이라는 멋진 소설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탄생시킨 출발점이 되었던 전래동화 "세마리 숫염소 그러프"를 소개합니다. 이 동화의 주제는 "과연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옛날옛날에 숫염소 세마리가 살았는데, 세마리 모두 이름이 "그러프"였습니다. 염소들은 포동포동 살을 찌우기 위해 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물살이 급한 시냇물이 있어서 그 위로 나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리 밑에는 커다랗고 못생긴 트롤 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트롤의 눈은 접시만큼이나 컸고, 트롤의 코는 굵은 쇠꼬챙이만큼이나 길었습니다.

제일 나이 어린 숫염소 그러프가 첫번째로 다리를 건넜습니다.

"또각, 따각, 또각, 따각!" 다리를 건넜습니다.

"내 다리 위를 지나가는 게 누구냐?" 트롤이 소리쳤습니다.

"오, 저에요, 제일 쪼그만 숫염소 그러프에요. 살 좀 찌고 싶어서 산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숫염소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너를 잡아먹어야 겠다." 트롤이 말했습니다.

"오, 안돼요! 제발 저를 잡아먹지 마세요. 저는 너무 작아서 먹을 것도 없어요." 숫염소가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두번째 숫염소 그러프가 올 거에요. 그 염소는 저보다 더 크답니다."

"좋아, 그렇다면 너는 보내주마." 트롤이 말했습니다.

잠시 후, 두번째 숫염소 그러프가 와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또각, 따각, 또각,따각, 또각, 따각, 다리를 건넜습니다.

"내 다리 위를 지나가는 게 누구냐?" 트롤이 소리쳤습니다.

"오, 두번째 숫염소 그러프에요. 살 좀 찌고 싶어서 산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숫염소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너를 잡아먹어야 겠다." 트롤이 말했습니다.

"오, 안돼요! 저를 잡아먹지 마세요. 잠깐만 기다리면 커다란 숫염소 그러프가 올 거에요. 그 염소는 저보다 더 크답니다."

"좋았어! 그렇다면 너는 보내주마." 트롤이 말했습니다.

그러고나서 바로 뒤에, 커다란 숫염소 그러프가 왔습니다.

또각, 따각,또각, 따각, 또각, 따각!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번 숫염소는 너무 무거워서, 다리에서는 갈라지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내 다리 위를 시끄럽게 지나가는 게 누구냐?" 트롤이 소리쳤습니다.

"나다! 커다란 숫염소 그러프다." 끔찍하게 쉰 목소리로 숫염소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너를 잡아먹어야 겠다." 트롤이 소리쳤습니다.

그래, 올테면 와봐! 나에게는 두개의 창이 있다.

그걸로 네 놈의 눈알을 찔러 네 놈의 귀 있는 데까지 뚫고 나오게 해주마.

그리고 나에게는 두개의 돌덩이도 있다.

그걸로 네 녀석을 산산조각으로 으스러뜨리겠다. 뼈와 살을 분리해주마.

커다란 숫염소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트롤 괴물에게 돌진해서, 염소뿔로 괴물의 눈을 찌른 다음, 괴물을 산산조각으로 으스러뜨렸습니다. 뼈와 살을 분리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괴물을 시냇물로 던져 버리고서, 숫염소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으로 간 숫염소들은 너무너무 살이 쪄서, 다시는 집으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만약에 살이 빠지지 않으면, 숫염소들은 그렇게 포동포동한 채로 살아야겠죠.

자, 이렇게해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 The End --

그 날 오후 킹씨 가족과 왕자님은 차를 타고 시크릿 로드에 있는 마녀 헤이즐의 흉칙스런 집으로 갔습니다. 달려오는 차를 보고 고양이 바스타는 노란 눈이 휘둥그래져서 소리를 지르더니 도망가 버렸습니다.

마녀의 집으로 달려오고 있는 차는 킹씨 가족의 예쁜 빨간 캐딜락도 아니었고, 왕자님의 미스트 그레이 컬러 메르세데스 390SL 승용차도 아니었습니다. 너무너무 오래돼서 툴툴툴 소리가 나고 기름이 줄줄 새는 차였습니다.

킹씨 가족과 왕자님은 벼룩들이 즐겁게 뛰어다니는 헌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마녀 헤이즐을 속이기 위해서 불쌍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마녀의 집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마녀 헤이즐이 문을 열었습니다. 마녀는 길쭉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마녀의 코 끝에는 사마귀 하나가 나 있었습니다. 검은 마술 쿠키를 많이많이 만들기 위해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공포의 재료들을 휘젓고 있었기 때문에, 마녀에게서는 개구리 피, 부엉이 심장, 개미 눈알 냄새가 났습니다.

"왜 우리집 문을 두들기고 난리야?" 마녀가 킹씨 가족과 왕자님을 향해 꽥꽥 소리 질렀습니다. 마녀는 헌 옷을 입고 있는 킹씨 가족과 왕자님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저리 꺼져. 난 지금 바쁘다구!"

"우리는 오렌지를 구하러 캘리포니아로 가고 있는 불쌍한 가족입니다." 왕자님이 말했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녀가 사납게 소리 질렀습니다. "자꾸 귀찮게 굴면 당신들 확 오렌지로 만들어 버리겠어! 알아 들었으면 잘 가라구!"

마녀가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왕자님이 재빨리 문 틈에 발을 집어 넣었습니다. 나오미와 죠는 벌어진 틈을 힘껏 밀어서 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당신에게 팔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쿠키입니다. 이 쿠키를 먹기만 하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녀가 되는 겁니다. 인도의 마녀 인디라 쯤은 아무 것도 아니죠. 자, 이 귀한 쿠키를 단돈 천달러에 팔겠습니다."

"그런 걸 왜 돈 주고 사냐! 훔치면 되지!" 마녀 헤이즐이 소리 쳤습니다. 마녀는 아빠의 손에서 쿠키를 가로채서 확 먹어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전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마녀다!" 그리고나서 마녀가 어찌가 요란스럽게 웃어댔던지 문짝이 떨어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쿠키를 뺐겼다고 왕자님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뻤습니다. 그 쿠키를 구웠었던 엄마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 쿠키를 만들 재료를 구하느라 뉴햄프셔에 가서 300년 묵은 구운 콩을 찾아왔었던 아빠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와 죠는 어땠을까요? 마녀 헤이즐이 방금 먹은 쿠키가 사악한 쿠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와 죠는 마구마구 웃고 또 웃었습니다.

마녀가 먹은 쿠키는 방구 쿠키였던 것입니다.

마녀 헤이즐은 자신의 몸에서 흥미로운 변화를 느꼈습니다.

마녀는 배와 궁뎅이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스가 나오려는 것 같았습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습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마녀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너희들 누구냐?"

"나는 뉴햄프셔 왕국의 왕자다." 마녀가 알아볼 수 있도록 숙이고 있던 얼굴을 위로 치켜 올리며 왕자님이 우렁차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킹씨 가족이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내 아내의 손을 우유병으로 만들다니 당신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돼! 게다가 내 코를 바나나로 만든 것도 부끄러운 줄 알야야 돼! 게다가 우리 나오미와 죠를 밤이고 낮이고 쉴새없이 울게 만든 것도 부끄러운 줄 알야야 돼! 하지만 이젠 당신이 당할 차례다, 사악한 마녀 헤이즐!"

"이제 다시는 마술을 부리지 못할 거야."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달나라로 가게 될 거니까!"

"난 달나라같은 데 안 가!" 마녀 헤이즐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굴뚝이 무너져 마당으로 떨어졌습니다. "너희들 모두를 싸구려 골동품으로 변하게 만들어 줄테다. 얼간이 여행객도 사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고물 골동품으로!"

"그렇게는 안 될 걸." 죠가 말했습니다. "마녀가 먹은 것은 마술 쿠키니까. 마술 방구 쿠키니까."

마녀는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었습니다. 마녀는 킹씨 가족과 왕자님에게 주문을 걸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답니다. 방구 쿠키가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거지요. 마녀는 금방이라도 커다란 방구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주문을 걸 동안 방구를 못 나오게 하려고 궁뎅이를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뿡! 방구가 나왔습니다. 방구의 위력으로 고양이 바스타의 털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집안 창문도 죄다 깨졌지요. 그리고 마녀 헤이즐은 마치 로켓처럼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나 좀 내려줘!" 마녀 헤이즐이 소리쳤습니다. 소원대로 마녀 헤이즐은 곧 땅으로 내려 왔습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말이지요. 그리고나서 마녀는 또다시 방구를 뀌었습니다.

뽀오오오옹! 방구가 나왔습니다. 방구 폭풍이 어찌나 세차게 불어 닥쳤던지 마녀의 집과 브릿튼 마을 물물 교환시장 건물이 폭삭 무너져 버렸습니다. 물물 교환시장에서 일하는 돔 카도즐이 화장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이제는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건물이 다 무너지고 남은 것은 화장실 변기와 그랜드 래피즈 마을에서 만든 가구 하나 뿐이었으니까요.

마녀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너무나 높이 올라간 나머지 마녀는 먼지만큼이나 조그맣게 보였습니다.

"나 좀 내려달라니까." 마녀가 소리쳤지만, 너무 멀어서 아주 작은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이제 내려올 때가 되었는데."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마녀 헤이즐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꺄아아아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녀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땅에 떨어지면 쿵하고 부닥쳐서 납짝해졌을 겁니다. (그런 꼴을 당해도 싸지요.) 하지만 땅에 부닥치기 직전, 마녀는 또 방구를 뀌었습니다. 2백만개의 달걀 샐러드 샌드위치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너무나도 거대한 방구였습니다. 방구 소리가 뿌직-뿌웅뿌웅뽕!!!

마녀는 또다시 하늘로 훨훨.

"안녕, 마녀 헤이즐." 엄마가 손을 흔들며 외쳤습니다. "달나라 구경 잘 해."

"거기서 오래오래 살아." 죠가 말했습니다.

위로 위로 계속 날아간 마녀는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밤 뉴스에서 킹씨 가족과 뉴햄프셔 왕국의 왕자님은 앵커우먼 바바라 월터스가 전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메인주 브릿튼 마을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747 여객기 승객들이 UFW를 목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UFW란 미확인 비행 마녀(Unidentified Flying Witch)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해서 사악한 마녀 헤이즐 사건은 끝이 났습니다. 마녀는 지금 달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계속해서 방구를 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킹씨 가족은 원래대로 브릿튼 마을의 가장 행복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킹씨 가족은 이제는 왕이 된 뉴햄프셔 왕국의 왕자님과 자주 왕래를 했습니다. 아빠는 열심히 소설을 썼고, 다시는 "바나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예쁜 손으로 예전보다 더욱더 멋지게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죠와 나오미는 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녀 헤이즐은 그 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마녀가 떠나면서 남겼던 그 지독한 방구를 또다시 겪을 일이 없으니, 너무너무 잘 됐습니다!

< The End >

마술 쿠키 네 개로 인해 벌어졌던 처참한 비극의 날로부터 한달쯤 지난 어느 날, 엄마는 숲 속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은 우유병 손을 가지게 된 엄마의 유일한 취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산책 나간 숲에서 엄마는 덫에 걸린 다람쥐를 발견했습니다.

저런, 불쌍하기도 해라! 다람쥐는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덫 주위에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답니다.

"불쌍해라." 엄마가 말했습니다. "나쁜 덫에서 너를 꺼내줄께." 하지만 엄마 손이 우유병인데, 과연 덫을 열 수가 있을까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지요.

그래서 엄마는 아빠랑 나오미랑 죠를 부르러 뛰어 갔습니다. 15분 후에 킹씨 가족 네 명 모두가 덫에 걸려 피 흘리는 불쌍한 다람쥐 주위에 모였습니다. 킹씨 가족이 피를 흘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킹씨 가족도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어요! 아빠는 얼굴 가운데 바나나가 달려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손이 우유병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이들 두 명은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 없었으니까요.

"다람쥐를 구해낼 수 있을거야." 아빠가 말했습니다.

"맞아." 엄마가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다람쥐를 꺼낼 수 있어.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해야지. 나는 불쌍한 다람쥐한테 내 손에서 나오는 우유를 먹일테야." 엄마가 다람쥐에게 우유를 먹였습니다. 엄마는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다람쥐가 희망에 부푼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나오미와 죠는 끔찍한 덫의 입을 열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덫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덫이 너무 오래 돼서, 날카로운 이빨과 이음새에 온통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열리지 않아." 나오미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슬프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안돼. 덫이 꿈쩍도 안 해!"

"안 열린다."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 죠가 말했습니다. 눈에서 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주루룩 주루룩 흘러 내렸습니다. "도저히 열 수가 없어."

그러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방법이 있어.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아빠는 몸을 굽혀서 덫의 이음새로 우습게 생긴 바나나 코를 갖다 댔습니다. 아빠는 양 손으로 바나나 코를 꽉 짰습니다. 아이쿠! 아파라! 하지만 그 덕분에 바나나 기름 여섯 방울이 흘러 나왔습니다. 바나나 기름은 한 번에 한 방울씩 녹 슨 덫 이음새 사이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해보렴." 아빠가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덫이 손쉽게 열렸습니다.

"옳타쿠나!" 나오미가 외쳤습니다.

"다람쥐가 나왔다! 나왔다!" 죠가 외쳤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쳤기 때문이란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나는 다람쥐한테 우유를 먹였지. 아빠는 바나나 코로 덫에 기름을 쳤구. 그리고 나오미와 죠는 덫을 열어서 다람쥐를 구하게 된 것이지."

킹씨 가족은 기뻤습니다. 마녀 헤이즐의 사악한 주문에 걸린 후로 기쁜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눈치 채셨겠죠? 오, 물론 눈치 채셨을 것으로 믿고 있을께요. 다람쥐는 사실 그냥 단순한 다람쥐가 아니었습니다. 킹씨 가족들처럼 다람쥐도 사악한 마녀 헤이즐의 주문에 걸렸기 때문에 모습이 변한 뉴햄프셔 왕국의 왕자님이었던 것입니다.

덫이 열려서 주문이 풀어지자, 킹씨 가족 앞에는 다람쥐 대신 블루스 브라더스 영화에 나오는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눈부신 왕자님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들은 따뜻한 마음씨로 불쌍한 모습이었던 저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왕자님이 말했습니다. "선뜻 하기 힘든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힘으로 여러분한테 걸려 있는 사악한 마녀의 주문을 없애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입니다!"

오, 해피 데이.

아빠의 바나나 코가 사라지고 원래 모습으로 코가 다시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빠가 갑자기 훨씬 잘 생기게 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꽉 짜서 쭈글쭈글해진 바나나 보다는 보기 좋았습니다. 엄마의 우유병도 원래의 건강한 핑크빛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나오미와 죠가 울음을 그쳤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그저 미소를 짓더니 곧이어 왈칵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뉴햄프셔 왕자님도 웃게 되었고, 또 그러니까 아빠와 엄마도 따라서 웃었습니다. 왕자님은 엄마와 나오미와 함께 춤을 추었고, 죠를 어깨에 태우고 놀았습니다. 왕자님은 아빠와 악수를 했고, 다람쥐로 변하기 전에는 아빠 소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섯명 모두 호숫가에 있는 멋진 킹씨 가족 집으로 갔습니다. 엄마가 차를 끓여 왔습니다. 모두들 테이블에 둘러 앉아 차를 마셨습니다.

"우리가 그 마녀한테 본때를 보여 줘야만 해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누군가가 마녀한테 피해를 입지 않을 거에요."

"백번 천번 만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왕자님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마술 주문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주문이라면 마녀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왕자님이 아빠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엄마에게도 나오미와 죠에게도 귓속말로 소근거렸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키득키득거리더니 마침내 후련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킹씨 가족과 사악한 마녀 by 스티븐 킹

(The King Family and the Wicked Witch)

  스티븐 킹은 세계적인 공포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모범가장이기도 합니다. 모범가장인 킹이 자신의 자녀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쓴 동화를 소개합니다. 단란한 가정을 파괴하려는 사악한 마녀의 음모에 맞서는 킹씨 가족의 대활약! 오오~ 감동이어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티븐 킹 가족

브릿튼 마을의 시크릿 로드에는 사악한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녀 헤이즐입니다.

마녀 헤이즐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녔을까요? 언젠가 한번은 그녀가 뉴햄프셔 왕국의 왕자님을 다람쥐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린 꼬마가 애지중지하던 새끼 고양이를 생크림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엄마와 아기가 쇼핑을 하는 동안 유모차를 커다란 말똥 덩어리로 변하게 만드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심술궃은 할망구 마녀였던 것입니다.

메인주 브릿튼의 롱 호숫가에는 킹씨 가족이 살고 있었어요. 모두들 착한 사람들이었답니다.

아빠는 소설을 썼습니다. 엄마는 시도 쓰고, 맛있는 요리도 만들었습니다. 나오미라는 소녀는 여섯살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녔지요. 큰 키에 갈색 생머리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죠라는 소년은 네살이었습니다. 죠도 학교에 다녔습니다. 비록 일주일에 이틀 뿐이었지만. 죠는 작은 키에 엷은 갈색 눈을 가진 금발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녀 헤이즐은 브릿튼에 사는 그 누구보다도 킹씨 가족을 미워했습니다. 킹씨 가족이 브릿튼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이기 때문에, 마녀 헤이즐이 킹씨 가족을 너무너무 미워하게 된 것이었어요. 반짝거리는 킹씨 가족의 빨간 캐딜락 자동차가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지저분하고 다 쓰러져 가는 그녀의 집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심술궃은 증오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마녀 헤이즐은 반짝거리는 밝은 빛깔을 싫어했어요. 편의점 밖의 벤치에 앉아 엄마가 죠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것을 보게 되면, 마녀는 마법주문을 걸고 싶어서 뼈만 앙상한 손가락이 근질근질했습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빨간 캐딜락이나 파란 트럭 안에서 아빠가 나오미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게 되면, 마녀는 아빠와 딸을 몽땅 잡아들여 펄펄 끓는 가마솥 안에 집어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녀는 주문을 걸었습니다.

어느날 마녀 헤이즐은 멋진 옷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브릿튼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파마했습니다. 그녀는 페이버 제화점에 가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그녀는 그런대로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녀는 브릿튼 편의점에서 아빠의 소설책 몇 권을 샀습니다. 그리고나서 차를 타고 킹씨 가족의 집으로 가서는 아빠의 소설책에 사인받으러 온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녀는 일부러 차를 타고 온 것이었어요. 마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서 올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녀는 킹씨 가족한테 자기가 마녀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핸드백 속에 마술 쿠키 네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불행을 부르는 마술 쿠키가 네 개.

네 개의 쿠키! 검은 마술이 가득 들어있는 네 개의 쿠키!

바나나 쿠키 한 개, 우유병 쿠키 한 개, 그리고 가장 끔찍한 훌쩍훌쩍 쿠키 두 개. 마녀를 킹씨 가족 집에 들여 보내지 마세요! 오 제발. 그녀를 들어오게 해선 안돼요!

그렇지만 그녀는 착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활짝 웃고 있었어요... 그리고 아빠의 소설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으~래서 킹씨 가족은 그만 마녀를 집 안에 들여놓고 말았습니다. 아빠는 마녀가 가져온 책에 사인해 주었고, 엄마는 차를 대접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죠는 자기 이름을 얼마나 잘 쓰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마녀 헤이즐은 웃고 또 웃었습니다. 너무 웃어서 얼굴이 부서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잘 해 주시니, 저도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마녀 헤이즐이 말했습니다. "쿠키 네 개를 구워 왔습니다. 하나씩 드셔 보세요."

"쿠키다," 나오미가 소리쳤습니다. "옳타쿠나!"

"쿠키다," 죠도 소리쳤습니다. "쿠키다!"

"너무 먹음직스러워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쿠키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킹씨 가족은 쿠키를 집어 들었습니다. 마녀 헤이즐은 웃음 지었습니다. 그리고 킹씨 가족의 집을 나와 차에 탔을 때는 환호성을 지르고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어찌나 심하게 웃었던지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고양이 바스타는 깜짝 놀라 숨어 버리기까지 했답니다. 마녀 헤이즐은 사악한 계획이 성공해서 행복했습니다.

"나는 바나나 쿠키를 먹을테야." 아빠가 말했습니다. 아빠가 쿠키를 먹자,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빠의 코가 바나나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무실에 앉아 아무리 소설을 쓰려고 애써도, 아빠는 "바나나"라는 단어 밖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마녀 헤이즐의 사악한 바나나 마술 쿠키를 먹었기 때문이지요.

불쌍한 아빠!

"나는 우유병 쿠키를 먹을테야." 엄마가 말했습니다. "쿠키 이름이 참으로 재미있구나." 엄마가 쿠키를 먹자, 사악한 쿠키가 엄마 손을 우유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마나, 끔찍하기도 해라. 손이 우유병이 되었는데 엄마는 요리를 할 수 있을까요? 시를 쓰려고 타자기를 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니죠! 엄마는 심지어 자기 코를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불쌍한 엄마!

"우리는 훌쩍훌쩍 쿠키를 먹을테야." 나오미와 죠가 말했습니다. "쿠키 이름이 참으로 재미있구나." 아이들은 쿠키를 먹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울고 또 울고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아이들의 눈에서 흘러 내렸습니다. 바닥 카페트에는 아이들이 흘린 눈물이 쌓여 물 웅덩이가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도 흠뻑 젖어 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쉴새없이 울음야 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울었습니다.

마녀 헤이즐이 만든 사악한 훌쩍훌쩍 쿠키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킹씨 가족은 브릿튼 마을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브릿튼 마을에서 가장 슬픈 가족이었습니다. 엄마는 쇼핑하러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엄마의 우유병 손을 보고 웃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소설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나는 단어라고는 바나나뿐이었고, 코가 바나나였기 때문에 글쓰는 타자기를 제대로 쳐다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죠와 나오미는 그저 하염없이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마녀 헤이즐은 사악한 마녀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녀의 가장 위대한 주문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으니까요.

[2]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양이의 한 [6]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57 posted by 조재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11.

악몽에서 깨어난 시간은 오전 10시쯤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방을 둘러보니 가관이었다.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고, 말라붙은 피가 방바닥에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식칼 한자루와 차갑게 식은 채 죽어있는 작은 강아지가 있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불리던 불쌍한 강아지가 내가  부엌에서 가져온 식칼에 배가 갈라져 죽었던 것을 기억했다. 아니, 죽은 다음에 배가 갈렸던 건가? 뭐, 순서는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안주랍시고 잘라먹은 강아지 내장 일부분이 쩌억 벌어진 강아지 뱃속에서 뽑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기억은 안나는데 강아지 목이 절단되어 머리가 빈 소주병 주둥이에 꽂혀 있었다. 술김에 그랬나보다. 소주병의 강아지 얼굴에서는 한쪽 눈알이 길게 힘줄을 늘어뜨린 채 눈구멍에서 쑥 빠져 나와 있었는데, 나머지 한쪽 눈알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내 뱃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아지가 불쌍했다. 자기는 원치도 않았는데, 내 이름으로 불리며 온갖 학대를 다 받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결국 이렇게 살해되다니.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의 불행을 강아지에게 분풀이한 못난 내 자신이.

잔인하게 살해된 강아지를 보니 간밤의 악몽이 떠올랐다. 시골의 외딴 집 안방에서 벌어지던 살육의 현장이. 악몽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랐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 악몽을 잊고 싶었지만, 내 바램과는 달리 자꾸만 자꾸만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거리의 행인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한때는 TV에 나와서 "화가 난 고양이가 나에게 원한을 품었나 봅니다. 짐승이 인간한테 그런 감정을 품어서 보복을 했다는 생각이 허황되게 들리겠지만, 하여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어찌됐건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같이 웃기는 소리를 해대던 나를 행인들이 아직도 알아보고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폐인이기 때문에 혐오의 눈길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재수없으면 다가와서 한푼 달라고 구걸당하기 딱 좋은 그런 종류의 거지같은 인간으로 전락한 덕분이었다. 나는 그동안 술에 찌들어 살면서 한번도 씻지도 머리를 자르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지냈다. 그동안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내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어떨지는 뻔했다. 나를 보고 슬슬 피해가는 사람들이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난 그런 꼴을 당할만 했다.

그보다 지금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난 밤의 악몸이 도무지 눈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이게 다 그 요물 고양이가 하는 짓이야. 그 암컷 년이 내 가족을 몰살시키고 욕보이고서도 만족못하고 나를 미치게 만들어서 자살이라도 하게 만들려고 내 꿈에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거야.

나는 무작정 거리를 달렸다. 바람이 내 얼굴을, 내 몸을, 내 썩어버린 마음을 후려치면서 달아났다.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힐 것 같은 어미 고양이의 저주가 제발 사라지기를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기도했다. 아마도 슬럼프의 신한테였을 것이다. 슬럼프의 신이시여! 제발 저를 인생의 슬럼프에서 빠져 나오게 하소서! 겨우 이런 지랄같은 꼴을 당할려고 제가 이제까지 살아온 겁니까! 겨우 이런 꼴을 당할려고!

가슴이 폭발할 것 같이 고동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를 멈췄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 한복판에 큰 대자로 누워 버렸다. 예쁜 하늘이 보였다.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은 순수하고 멋진 하늘이었다. 그림책에 넣어도 될 만큼 근사한 하늘이었다.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악몽 속에서 동우를 안은 채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내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의 단호한 말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희들이 원망스러워. 죽어서도 너희들을 못 잊을거야. 네가 얘네들 전부 다 끌고 온거지? 우리 남편이 너한테 꼭 복수해 줄꺼야.

우리 남편이 너한테 꼭 복수해 줄꺼야... 꼭 복수해 줄꺼야.

아내의 그 말이 생각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 속이 터져버릴 것 같이 찌릿찌릿했다. 견딜 수 없이 극심한 에너지같은 것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이제까지 간밤의 악몽은 그저 악몽이라고만 생각했다. 더 심하게 생각해서 어미 고양이의 저주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간밤의 악몽이 전해주는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 남편이 꼭 복수해 줄꺼야.

아내가 나에게 메시지를 전해준 것이다. 저승에 있는 아내가, 원한에 사무쳐 죽은 아내가 이승에 남아 바보같이 허무한 짓꺼리나 하고 있는 남편에게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해주려 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원통하게 죽었다고, 허탈하게 인생을 끝내야 했다고, 그러니 남편인 당신이 가만있으면 안된다고, 원한을 풀어달라고, 꼭 복수해 달라고.

지금 당장.

나는 누워있던 길바닥에서 일어났다. 길을 걷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설렁탕 한그릇을 시켜 먹었다. 요 몇 달새 처음으로 먹어보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열 숫갈쯤 떠먹고 있을 때, 속이 울렁거렸다. 식당 화장실로 가서 정신없이 토했다. 뱃 속에 들은 것을 다 토해내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헛구역질을 해댔다.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닦고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남은 설렁탕을 국물 한방울 남김없이 다 비웠다. 그러고 나서도 한그릇을 더 시켜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서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던 시골집에 도착한 것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오후 6시였다.

시골집은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누군가 대문 옆에 검은색 스프레이로 '재수없는 집'이라고 낙서를 해놨다. 대문은 한쪽이 떨어져 나가 기울어져 있었다. 마루를 비롯해서 집안 곳곳이 부서지고 깨져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기와지붕에 난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고양이들이 뚫어 놓은 구멍. 그 구멍 주위로 잡초들과 넝쿨식물들이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구멍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나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나타나던 장독대를 바라보았다. 전주인이 남기고 갔던 커다란 항아리들이 다 깨져 있었다.

장독대 밑 창고 건물로 들어가봤다. 새기 고양이를 때려 죽인 쇠파이프를 발견했던 곳이면서, 망할 놈의 고양이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기도 했다. 창고 입구에는 아직도 녹 슨 쇠파이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번 것보다 약간 길고 굵은 것이었다. 이런 것에 한번 정통으로 맞는다면 코끼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서 무심코 창고 안을 둘러보았는데, 예전에 보았던 종이박스가 아직도 있었다. 고양이들이 들어가 잠자리로 삼던 박스였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일부러 가서 박스 안을 들여다 보았다.

당첨!

박스 안에 새끼 고양이들이 있었다. 박스 안을 가득 채울만큼 많았다. 바로 이것이다. 아내는 이런 것을 알리려고 나에게 악몽을 꾸게 한 것이다. 그 고양이 년이 수많은 놈팽이들과 씹질을 했으니 지금쯤은 틀림없이 새끼들을 낳았을 것이고 그런 꼴을 가만 놔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처참하게 죽어간 동우를 생각한다면, TV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그 암컷의 새끼들을 방치해 둬선 안된다고.

나는 종이박스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박스가 움직이자 조용히 있던 새끼 고양이들이 갸냘픈 울음소리를 냈다. 악몽 속에서와는 달리 그 녀석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대충 이런 것이 아닐까? 얘들아 우리 지금 이사가는 거니? 그래. 너희들 모두 이사보내 줄게. 저 세상으로. 거기가면 엄마 고양이를 대신해 동우라는 착한 애가 너희들을 돌봐줄꺼다. 아주아주 아아주 잔인하게 말이다.

종이박스를 거꾸로 뒤집어 흔들었다. 새끼들이 마당 바닥으로 쏟아졌다. 전부 15마리였다. 죄다 각양각색이었다. 까만 놈, 하얀 놈, 노란 놈, 파란 놈, 빨간 놈, 점박이 놈, 줄무늬 놈, 심지어는 기형인 놈도 두 마리 있었다. 다리가 전혀 없이 몸통만 있는 놈과 눈이 다섯 개 달린 놈. 별로 놀랄 것도 없다. 난잡한 집단 성행위의 결과물이라면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 태어난지 얼마 안된 듯 전부 다 주먹만한 크기였다.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했다. 마당에 엎어져서 울어대기만 하고 있다.

나는 새끼들을 죄다 밟아 죽였다. 머리통을 밟아 죽였다. 아마 나한테 TV가 있었다면 그걸로 이 새끼들 머리를 쳐죽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제법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듯 몇몇은 꾸물꾸물 기어서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런 놈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밟아 죽였다. 전부다 머리가 터지면서 피를 예쁘게 쏟아냈다.

모두다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니 오줌이 마려웠다. 집필실로 쓰던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오줌을 쌌다. 한때는 신성한 문학작품의 탄생을 염원하던 곳. 오늘 보니 딱 화장실로 그만이었다. 김건모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오줌을 뿌리고 다녔다.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나서 안방으로 갔다. 고양이들이 몸통 박치기를 해대서 떨어져 나간 문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피로 가득했던 바닥의 장판도 없어져 버렸다. 그냥 맨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그 날의 비릿한 피냄새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처럼 숨을 못 쉴 정도로 지독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천장에 난 구멍으로 오후의 마지막 햇빛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구멍 주위로부터 넝쿨식물들이 들어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온 방 안을 가득 채우게 될 것 같았다.

방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미 고양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창고에서 가져 온 쇠파이프를 옆에 놓고 가끔씩 담배를 피워대며 시간을 죽였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왔다. 달빛이 강해서 아주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희미하게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완전한 암흑이었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있는 안방과 같이 좁은 곳에서 그 년과 엉켜 붙어 싸운다고 내가 크게 불리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그랬다. 일단 내 손에만 잡히면 그 년이 아무리 앙탈을 부리더라도 꽉 움켜쥐고 쇠파이프로 절단을 내 줄 것이다.

안방 가장자리는 많이 어두웠지만 내가 있는 주변은 비교적 밝았다. 위를 올려다 보았다.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내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3류 캬바레 댄스홀 무대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 이건 나를 위한 무대였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악당을 물리쳐야 하는 나만을 위한 무대였다.

어린 시절에 자주 가던 오락실이 생각났다. 그 곳에 가면 항상 구경하던 전투기 게임이 있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맨날 남들이 하는 것을 구경만 했다. 그러다 어쩌다 엄마가 갑작스럽게 기분이 좋아져서 돈이라도 주게 되면 나는 여지없이 오락실로 달려가 그 오락을 했다.

나는 "착한" 전투기를 조종했다. 그러고 있으면 위에서 "나쁜" 전투기들이 쏟아져 내려와 나한테 해꼬지를 하려고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그 놈들을 전부 쳐부쉈다. 하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잔챙이들을 물리치면 첫판 두목 전투기가 등장한다. 그 놈은 먼저 전멸한 조그만 전투기들과는 달리 덩치가 엄청나게 커서 내 전투기의 총알 몇방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녀석이 강력한 총알을 비오듯이 쏟아냈다. 그 빗발치는 총알세례 속을 피해 다니는 것은 어린 나로서는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첫판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그래도 돈만 생기면 그 오락만 하고, 돈이 없으면 남이 하는 것을 구경이라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동전을 넣고 경쾌한 음악이 울리면서 착한 전투기가 막 비행을 시작할 때 오락기 화면 한가운데에 영어로 글씨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Good Luck !

게임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나타났던 글씨였겠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눈여겨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어를 몰랐던 나는 중학교에 다니는 동네 형한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굿 럭이었다.

'행운을 빕니다'라는 뜻이었다. 맘에 들었다. 그 때부터 오락을 할 때면 항상 그 영어문장이 뜰 때마다 마음 속으로 굿 럭을 외쳤다. 첫판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 후로도 그 오락을 하면서 첫판을 깬 적은 없었다.

갑자기 왜 오락실 추억이 생각났는지는 몰랐다. 별로 기분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는 항상 그 오락 앞에서 항상 패배자였던 것이다. 굿 럭은 헛된 환상이었다.

그 때 마당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미가 나타난 것이다. 마당에 죽어있는 제 새끼들을 목격하고 숨이 끊어질 듯한 거칠은 비명소리를 길게 내지르고 있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어미만이 낼 수 있는 비명소리를.

나는 쇠파이프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보니 천장에서 내리쬐는 달빛 조명이 지금의 상황을 연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나를 위한 최상의 무대였다.

마당에서 어미가 이리저리 미친 듯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복받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나보다.

나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마루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마루로 올라섰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격렬하게 그르렁대고 있는 검은 실루엣의 물체는 두 눈이 악마처럼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잘 있었냐, 고양아. 내가 너 만나기 전에 미리 네 새끼들한테 인사 좀 했다." 손에 들고 있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말했다. 묵직하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집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넌 내 새끼 손을 긁어놨었어. 그래서 난 네 새끼를 죽였지. 그랬더니 넌 내 새끼에다가 내 마누라까지 죽여놨더군. 일이 점점 커져 버렸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여기서 당사자끼리 끝장을 보자구. 결국 너와 나 둘 중에 누군가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었어. 자, 덤벼봐! 이 썅년아!"

어미 고양이가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고함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 들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냐? 저 고양이는 요물이야. 나한테 원한을 품고 있어.

아니야, 넌 오락실에서 첫판도 못 넘기던 그 옛날의 꼬마아이가 아니야. 넌 어른이야. 넌 이 게임에서 이길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어. 넌... 제기랄! 넌 소설가잖아! 뭐든 상상하는대로 이루어낼 수 있잖아! 제발 이번엔 이길 수 있다고 억지로라도 생각을 해보란말야! 바보야! 아내의 목소리가 나의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나는 마음 속으로 마법의 주문을 외쳤다.

굿 럭!

붉은 빛을 흘리며 내 얼굴을 향해 뛰어 오른 어미 고양이의 괴물같은 두 눈을 향해 나는 쇠파이프를 힘껏 휘둘렀다.

- The End -

(조재형 2001.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