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한 [5]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54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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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꿈이란 것은 온몸이 극장좌석에 꽁꽁 묶인 채 원치도 않는 영화를 억지로 보는 것과 같다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의 의지로 꿈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복잡한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터무니없이 꿈이 끝나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술에 취해 강아지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씹어 먹던 그 날 밤에 나는 악몽을 꿨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을.


꿈 속의 배경은 시골에 있던 우리집이었다. 명색이 악몽인데 바로 그 장소 말고 더 어울리는 데가 또 어디 있을까?

마당에 아내와 동우가 있었다. 아내는 젖은 빨래를 빨랫줄에 널고 있었고, 동우는 마루로 올라가는 굵은 돌계단에 앉아 포켓몬스터 그림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이사오던 날 봤었던 냐옹이가 피카츄 목을 물어뜯는 자극적인 표지의 동화책.

동우가 읽고 있는 동화책 제목은 마치 불행을 암시하는 복선같았다. 피카츄 조심해! 냐옹이 화났다! 그렇다. 화난 고양이는 정말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은 동화책에도 나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인 것이다.

동화책을 읽고 있던 동우가 아내에게 물었다. "엄마, 고양이 인제 안 와?"

"왜?" 아내는 빨래를 줄에 거느라 동우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심심해."

"오겠지."

"아빠가 그랬는데, 고양이들이 나한테 미안해서 안오는 거래. 나도 미안한데. 내가 그때 호떡 가지고 놀려대서."

"다음에 오면 잘 해주면 되지. 고양이들 찾아오면 엄마랑 같이 고양이한테 맛있는 거 많이많이 주자."

"......엄마," 아내는 빨래그릇에서 물에 푹 젖은 셔츠 하나를 꺼내 들고 힘껏 흔들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셔츠가 부풀어 올라 펴졌다. 아내가 그 셔츠를 빨랫줄에 널었다. 동우가 부르는 소리를 못들었나 보다. "엄마, 엄마, 저기,"

"엄마 바쁜데 왜 자꾸 그래?" 빨래그릇에서 커다란 담요를 꺼내든 아내가 마지 못해 동우를 쳐다봤다. 붕대를 감아맨 동우의 오른손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아내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독대였다.

장독대 위에 수십마리의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다. 40마리 정도 되었다. 지난번에 지붕 위에서 섹스쇼를 벌이던 멤버들 외에 별의별 떨거지들이 죄다 모인 것 같았다. 수컷들이었다. 모두들 아내와 동우를 내려다보고 있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양이들 맨 앞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어미 고양이였다. 어미 고양이도 다른 고양이들처럼 내 가족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어미 고양이를 선두로 해서 고양이들은 여유있는 걸음으로 장독대 계단을 내려왔다. 내 가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일부는 사람이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무대문을 막아섰다. 고양이들은 징그럽게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누가 봐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놀란 동우가 포켓몬스터 그림동화책을 땅에 떨어뜨렸다.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엄마 뒤에 숨었다. "엄마, 고양이들 무서워."

아내는 갑작스런 사태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양이들을 훑어보기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빨랫줄에 걸려던 담요를 쥐고 있는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겁먹은 동우가 아내의 치마를 잡고 칭얼거렸지만 아내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들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고양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갔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막다른 길에 몰린 쥐를 바라보는 표정, 호랑이가 덫에 걸린 토끼를 바라보는 표정, 주사기를 든 실험실 연구원이 철창 속의 원숭이를 바라보는 표정.

"야 이 새끼들아, 니들 뭐야." 아내가 눈치를 살피며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안 꺼져? 저리 안 가? 죽고 싶어?"

고양이들은 아내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내가 빨래그릇을 걷어찼다. 속에 든 빨래가 쏟아지고, 빈 그릇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당에 굴렀다. 몇몇 고양이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을 뿐 대부분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 거리는 4∼5미터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내는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아내의 치마를 잡고 있던 동우도 따라갔다. 동우는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콧물이 주르륵 흘러 입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때였으면 아내가 정성스럽게 콧물을 닦아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아내는 마루 쪽으로 뒷걸음질쳐 가고 있었다.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하면 약삭빠른 고양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 즉시 달려들어 결판을 냈을 것이다.

고양이들이 다가왔다. 어미 고양이가 동우가 떨어뜨린 포켓몬스터 동화책을 밝고 지나갔다. 냐옹이가 피카츄를 물어뜯는 동화책 표지 위에 어미 고양이의 발자국이 찍혔다. 그 뒤로 수십마리의 수컷 고양이들 발자국이 이어졌다. 이젠 정말 아내와 고양이들 거리가 지척이었다. 고양이가 맘먹고 훌쩍 뛰어오르면 바로 아내를 덮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고양이들도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제는 뜸들이는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일까?

바로 그 때 아내가 손에 들고 있던 담요를 고양이들 쪽으로 냅다 던졌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담요는 멀리 날아가진 못했지만, 어미 고양이를 포함해서 일곱 마리 정도의 고양이들이 담요 속에 묻혀 버렸다. 마당에 떨어진 담요 주위의 고양이들이 순간적으로 놀라서 흩어졌다. 담요 속에서는 갇혀버린 고양이들이 나오려고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내가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치마를 잡은 채 콧물을 흘리고 있던 동우를 힘껏 안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아내는 마루 쪽으로 뛰쳐 나갔다. 아내는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오직 방 안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이다. 몇걸음만에 마루 위로 올라서는데 성공했다.

"엄마! 고양이가 쫓아와! 빨리, 빨리, 빨리!" 아내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동우가 엄마를 재촉했다.

담요 때문에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던 고양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쫓아오고 있었다. 담요 속에 있던 고양이들도 다 빠져나와 인간사냥에 동참했다.

젖은 담요 속에서 빠져 나오느라 온몸의 털이 물기에 눌러붙은 어미 고양이가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악몽 속에서 나는 그 고양이가 내지르는 소리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디서 감히 저 년이 잔머리를 굴려! 뭐하는 거야, 니들! 빨리 가서 저 년을 잡아! 멀뚱멀뚱 서있으라고 니들한테 다리 벌린 줄 알어? 어서 빨리 저 씨발년을 잡으란 말야!" 갑작스런 아내의 반격에 대책없이 당하고 만 것이 분한 듯 소리를 질러댔다.

동우를 안고 있는 아내가 신발을 신은 채로 황급히 마루를 뛰어 다녔다. 한쪽 팔은 동우를 안고, 나머지 한쪽 팔이 힘겹게 안방 문을 잡았다. 안방 문은 가늘고 긴 나무막대들이 가로세로 촘촘히 얽혀서 만들어진 문짝에 문풍지가 발라져 있는 미닫이 문이었다. 급하게 문을 잡느라 아내가 잡은 문 손잡이 주위의 문풍지에 구멍이 뚫렸다. 아내가 문을 왼쪽으로 밀쳐 열었다.

아내가 안방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쫓아온 고양이들 중 제일 선두에 있던 놈이 아내의 등을 뒤에서 덮쳤다. 갑작스런 충격에 아내는 동우를 안방 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우 위로 아내가 엎어졌다. 밑에 깔린 동우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붕대를 감은 동우의 오른손이 아내의 팔에 깔려 있었다. 손등의 붕대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내를 덮친 고양이가 아내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 그 하얀 목에 금새 핏물이 흘러 내렸다. 엎어진 자세에서 아내는 몸을 돌려 고양이 몸통을 잡았다. 놈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양이는 입을 꽉 다문 채 발톱으로 아내의 몸을 마구 할퀴어 대고 있었다. 아내의 옷 등쪽이 길게 찢어졌다. 아내가 있는 힘껏 몸부림을 치며 고양이 머리통을 잡고 밖으로 떼어 내려 애썼다. 아내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내가 팔에 힘을 주면 줄수록 목에 박힌 고양이 이빨이 전해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심해졌을 것이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내가 온 집안이 떠나갈 만큼 큰 비명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핏물로 범벅이 된 목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경직된 아내의 팔이 드디어 고양이를 목에서 떼어냈다. 그대신 아내의 목 한웅큼이 떨어져 나갔다. 김이 피어나는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아내는 고양이를 집어 던지고는 황급히 일어섰다. 엄마 밑에 깔렸던 동우는 바닥에 엎어진 채 울고 있었다. 아내는 동우를 돌볼새도 없이 서둘러 안방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오래되어 녹이 슬어있는 문빗장을 걸어 잠궜다.

아내는 서랍장 위에 놓인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 목을 물고 뜯느라 입가에 피가 잔뜩 묻은 고양이를 향해 휘들렀다.

"씨발놈아, 저리 가!"

고양이는 아내가 휘두르는 스탠드를 요리조리 피해다녔다. 아내는 방 구석에 달아난 고양이한테 스탠드를 집어 던졌다. 쇠로 만들어진 무거운 스탠드 손잡이가 고양이 목에 떨어졌다. 고양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아내는 고양이 옆에 떨어진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서 지랄을 떨고 있는 고양이를 내리쳤다. 고양이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네 번을 더 후려치자 고양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몸통은 납작해져 있었고, 머리는 터져 있었다.

아내는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동우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오른손 붕대는 예전의 하얀색이 아니라 온통 피로 물든 빨간색이 되어 있었다. 아내는 동우를 껴앉고 소리내어 울었다. "이리와 동우야. 엄마한테서 떨어지면 안돼."

"엄마, 목에서 피난다."

"괜찮아. 조금 있으면 다 나아." 아내는 목덜미로 손을 갖다댔다. 상처에 손이 닿아서 아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내는 목에 닿았던 손을 놀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손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빨간 페인트 통에 한참을 담궜다 꺼낸 손 같았다. 아내의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금 있으면 다 나아."

고양이들은 아내와 동우에게 이 상황을 곰곰히 따져볼 여유를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고양이들이 닫힌 안방 문 앞에 몰려와 있었다.

"야 이년아, 문 열어!"

"독 안에 든 쥐 꼬라지구만."

고양이들 발이 문풍지를 푹푹 뚫고 들어왔다. 문짝은 금새 구멍 투성이가 되었다. 뚫린 구멍으로 고양이들이 눈을 들이대고 안방을 엿보았다다. 옛날에 전통혼례를 올린 신혼부부의 첫날밤에 신방을 엿보려고 발버둥치는 음큼한 동네사람들 같은 모습이었다. 문짝 구멍에 들이댄 고양이 눈알들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문짝에 눈이 달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고 년 참 탐스럽게도 생겼다."

"조금만 기다려. 네 보지를 물어뜯어 줄 테니까."

아내와 동우는 부둥켜 앉고 울면서 방문의 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양이들의 붉은 눈알을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고양이들 눈이 문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태풍 전의 고요 같았다. 아내와 동우는 문짝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문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정말로 부서질 듯이 순간적으로 문짝이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문을 고정하고 있는 녹 슨 빗장이 덜그럭거렸다. 아내와 동우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비명을 질렀다. 보통의 교양있는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도저히 낼 수 없는 품위없는 비명소리였다. 공포에 휩싸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미친듯한 날카로운 비명소리. 품위고 교양이고 체면이고 벗어버린 가식없는 순순한 공포의 비명소리.

고양이들이 문짝을 박살내려고 문에 달려들어 몸통을 세게 부딪힌 것이다. 화들짝 놀란 아내가 문으로 달려갔다. 문짝 양 옆 가장자리를 손으로 눌렀다. 문이 그냥 부서지게 놔둘수는 없는 것이니까.

쿵쿵! 고양이들의 몸통 박치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럴때마다 아내는 움찔했다. 문짝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팔힘만으로는 부족했던 아내는 아예 몸 전체로 몸짝을 눌렀다. 그래도 고양이들이 문짝에 부딪치는 순간에는 여지없이 문이 흔들렸다. 문틀을 이루고 있는 나무막대들이 금새 부러질 것만 같았다.

안타까운 동우가 엄마를 도와주려고 문짝을 몸으로 막았다.

아내는 동우에게 소리쳤다. "안돼! 저리가, 동우야. 다쳐!"

"이리로 고양이들 들어오면 어떡해." 울쌍이 된 동우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막을 수 있어." 아내가 몸을 돌려 등으로 문을 막아섰다. 두 손은 문짝 가장자리를 꼭 잡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부딪히자 아내의 몸이 비틀거렸다. 이내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아내의 얼굴에는 불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고양이들 때문에 정신이 없는 듯 했지만, 목의 상처에서 너무나도 많은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우야, 저기 핸드폰 갖고와."

동우가 서랍장 위 TV 옆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재빨리 가져와 아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내가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전화가 119 구조대로 연결되었다. 아내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또박또박 현재 상황과 주소를 불러 주었다. 전화를 받고 있는 119 접수요원은 아내의 설명이 잘 이해 안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되풀이해서 고양이 얘기를 해야만 했다. "내 말 못 알아들어요? 고양이라구요, 고양이! 고양이가 우리 가족을 죽일려고 그런다구요. 나랑 내 아들 말이에요. 당신 귀 먹었어? 빨리 이리로 와서 우릴 살려달란 말야!" 답답했던 통화가 겨우 끝났다. 아내가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나에게 핸드폰이 있었다면 아내는 나에게도 전화를 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때 나는 핸드폰이 없었다. 시골로 이사오면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한 채 집필에만 전념한답시고 핸드폰을 처분해 버린 것이다. 그 때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니 핸드폰이 없었더라도 읍내 시장에서 집으로 전화 한통화만 했더라도 사정은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문짝이 흔들거렸다. 아내는 기진맥진한 듯 했다. 목에서 흐른 피가 등을 지나 문짝의 하얀 문풍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내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문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온 정신을 등이 닿아있는 문짝에 집중시키느라 시선은 방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동우는 훌쩍거리면서 아내가 집어던진 핸드폰을 주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눈길은 불안하게 버티고 서있는 엄마를 향하곤 했다. 엄마의 핑크색 블라우스는 목에서 새어나온 피로 물들어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불현 듯 동우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고양이들이 문짝에 부딪히는 쿵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소리. 무언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아이의 붉게 물든 붕대 위로 흙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동우는 흙가루의 움직임을 거슬러 올라 천장을 보았다.

천장이 뚫리고 있었다.

"엄마! 저기 천장 좀 봐!" 놀란 동우가 아내에게 뛰어 들었다. 두려운 마음에 아내를 꽉 껴앉는다.

자꾸만 위태롭게 흔들리는 문짝에 시달리고 있는 아내도 천장을 보았다. 아내의 얼굴에 절망스런 표정이 피어났다.

천장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조금씩 천장 구멍에서 흙가루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단추구멍만하던 천장이 점점 더 넓어져 갔다.

"안돼." 아내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조금씩 떨어지던 흙가루가 이제는 덩어리 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구멍이 넓어지는 속도는 흙을 긁어대는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점점 속력을 더해갔다.

넓어진 구멍으로 지붕으로 올라간 고양이들이 흙을 긁어대는 발들이 쉴새없이 들락날락거렸다. 고양이들은 신이 나서 고함을 질러댔다.

"엄마, 무서워. 우리 이제 죽는 거야?" 엄마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아니. 이제 조금 있으면 119 아저씨들 올거야. 아까 엄마가 전화하는 거 봤지? 금방 온댔어. 어쩌면 아빠도 지금쯤 집에 거의 다 왔을지도 몰라."

세차게 문짝에 충돌하는 고양이들 때문에 아내의 몸이 비틀거렸다. 아내는 등으로 문을 막고 두 손으로 문 양쪽을 단단히 잡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맥이 풀린 모습이었다. 천장에 난 구멍을 보는 순간부터 자신이 질게 뻔한 게임에서 공연히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진짜 게임이었다면 그냥 쉽게 지금의 게임을 포기해 버리고 다음 게임을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쉽게 쉽게 되풀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천길 낭떠러지로 아내와 동우를 몰아가고 있었다.

동우를 안심시키려고 별의별 말을 다 꾸며내면서도 아내는 천장 구멍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천장 구멍으로 고양이들이 내려올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그동안 정말 운좋게도 하늘이 도와서 구조될 확률은 얼마나 될는지 헤아려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최악의 상황이 닥쳐 버렸다.

천장에서 커다란 흙뭉치가 한꺼번에 여러개 떨어져 내렸다. 안방 속에 뿌연 흙먼지가 가득 날렸다. 아내와 동우는 눈을 찌뿌린 채 두려운 순간을 맞이했다.

흙먼지가 진정되자 천장이 드러났다. 솥뚜껑만한 커다란 구멍이 천장에 나 있었다. 어미 고양이를 비롯한 20마리정도 되는 고양이들이 구멍 주위에 모여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언니, 나 왔어." 어미 고양이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울음소리를 냈다. 이 년의 울음소리는 아내와 동우에게는 그저 고양이 울음소리로만 들렸겠지만, 악몽 속의 나에게는 그 뜻이 똑똑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 암컷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사랑이 가득 넘치는 정겨움의 표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내와 동우도 눈치챘을 것이 분명하다.

어미가 천장 구멍에서 훌쩍 뛰어내려 안방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 뒤를 이어 수컷들도 안방에 도착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걸 이 난리를 피운거냐? 씨발아." 수컷 중 하나가 아내에게 으르렁거렸다.

안방에 내려온 고양이들은 아내와 동우에게 다가가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는 것 같았다.

아내는 문짝에서 벗어나 동우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갔다. 마루에 있는 고양이의 몸통 박치기 한방에 금새 문짝이 부서지며 안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내가 마루 쪽을 내다보았다.

수십마리의 고양이들이 마루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장독대에 나타났을 때보다 그 수가 더욱 불어나 있었다. 그 많은 고양이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내가 마루 위의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방문을 잡고 있는데 온정신을 쏟던 아내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동우를 꼭 안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엄만 너를 사랑해. 동우도 엄마 사랑하지?"

"119 아저씨들 안오는거지? 아빠도 안오는거지? 우리 이제 죽는거지?" 동우가 눈물을 흘렸다. 피로 물든 손 붕대로 눈물을 닦았지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엄마랑 같이 가야될 것 같다." 이제껏 목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흘렀는데도 꿋꿋이 버텨왔던 아내가 동우를 보면서 체념의 말을 했다.

어디로 가냐는 물음 대신 동우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희들이 원망스러워. 죽어서도 너희들을 못 잊을거야." 아내가 어미 고양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얘네들 전부 다 끌고 온거지? 우리 남편이 너한테 꼭 복수해 줄꺼야." 아내가 울고 있는 동우 얼굴에 키스했다. 동우가 엄마를 꼭 껴안았다. "동우야, 엄마가 너 끝까지 못 지켜줘서 미안하다."

동우는 아무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아내도 흐느껴 울었다.

드디어 어미 고양이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재미없다. 확 쓸어버려."

안방과 마루에서 대기하던 고양이들이 한꺼번에 부둥켜 안고 있는 아내와 동우에게 몰려 들었다. 수십마리가 덮쳐오자 아내는 금새 방바닥으로 무너졌다. 동우를 아래로 놓고 몸으로 아이를 감싸서 최대한 고양이들의 손길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등을 내보인채 무너져 있는 아내를 수컷 고양이들이 떼로 몰려들어 공격했다. 아내는 옷이 뜯겨 나갔다. 피로 물든 블라우스도, 멋진 꽃무늬가 박혀있는 치마도 가차없이 날아갔다. 날카로운 고양이들 발톱이 아내의 하얀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억센 고양이들 송곳니가 아내를 물어뜯었다. 아내의 등과 옆구리에서 피가 분출했다. 등 피부가 벗겨져 척추뼈가 드러났다. 아내가 격심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곧이어 고양이들이 아내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이제 아내는 목까지 터져버려 비명소리 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저 맥없는 바람소리만 구멍 난 목에서 새어 나왔다. 아내는 핏덩이가 돼버렸다.

동우를 보호하던 아내가 옆으로 쓰러졌다. 죽음 앞에 고스란히 노출돼 버린 동우가 몸을 웅크렸다. 아내를 공격하던 고양이들 중 일부가 동우한테 달라붙었다. 옷을 찢고 맨살이 드러나자 냉혹하게 아이마저 피바다를 만들었다. 붕대가 다 풀어진 오른손도 고양이들의 먹이가 되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아내와 동우를 고양이들이 물어뜯고 할퀴었다. 방 안에는 온통 죽어가며 신음하는 사람소리와 살육의 쾌감에 환호하는 고양이들 소리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방바닥이 사람이 흘리는 핏물로 물들었다. 바닥에서 난리치는 고양이들의 몸에도 피가 흠뻑 묻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어미 고양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였다.

고양이들에 의해 똑바로 눕혀진 아내의 몸이 남김없이 난자당하고 있었다. 어미 고양이가 아내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마리 고양이들한테 소리쳤다. "유방이라구, 유방! 그 씹쌔기가 지 마누라한테서 제일 좋아하는 게 그 유방이라구! 거길 싸그리 터뜨려버려!"

명령대로 고양이들이 아내의 가슴을 집중적으로 물어뜯었다. 금새 가슴이 뜯겨 나가고 그 자리에서 피가 들끓었다. 파헤쳐진 가슴 속으로 가슴뼈가 드러났다.

"이 조그만 놈을 저기로 끌고 가자." 동우에게 가 있는 고양이들이 외쳤다. 고양이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을 내고 있는 동우를 낮은 서랍장 쪽으로 끌고 갔다.

그 순간 놀랍게도 이제는 얼굴도 가슴도 심지어는 성기까지도 뜯겨버려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된 아내가 손을 뻗어 동우의 왼손을 붙잡았다. -동우의 오른팔은 고양이들에 의해 찢겨 나갔다.- 아내는 동우를 곁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듯 잡은 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아내는 몸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치기까지 했다. 발끈한 고양이들이 아내 몸 위에 올라가 더욱 세차게 물어 뜯었다. 애처롭게 몸부림치던 아내의 몸은 완전히 생기를 잃었다. 그러나 아들의 손을 움켜쥔 엄마의 손은 고양이들이 아무리 물어뜯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고양이들은 아내의 손목을 팔에서 뜯어냈다.

고양이들이 동우를 서랍장으로 끌고갔다. 동우의 왼손에 엄마의 오른손이 단단히 붙어있는 채로. 동우의 머리가 서랍장 바로 밑에 왔다. 서랍장에는 25인치 TV가 놓여 있었다. 고양이들 몇마리가 서랍장으로 올라갔다. 낑낑대며 TV를 동우쪽으로 밀었다. 조금씩 조금씩 커다란 TV가 동우 머리가 누워있는 서랍장 끝으로 밀려나갔다. 동우는 의식이 혼미해져서 자기 머리 위로 평소에 즐겨 보던 TV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TV가 서랍장 끝에 다왔다. 방바닥에 있던 고양이들 몇마리가 더 가세해서 힘껏 TV를 밀었다. 서랍장 끝에서 밀려나 균형을 잃고 잠시 허공과 서랍장 사이에서 비틀거리던 25인치 TV가 떨어져 내렸다. 그 시커먼 몸체가 정확히 동우 머리 위에 떨어졌다. 단단한 물건이 퍽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동우의 머리가 TV 속에 파묻혔다. TV와 충돌하는 순간 동우의 몸이 한번 크게 꿈틀거리더니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TV 밑으로 검은 피가 흘러 나왔다.

피로 온통 젖어버린 수컷 고양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자 이젠 일이 다 끝난 거 같다."

어미 고양이가 안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내와 동우가 신체 곳곳이 갈갈이 찢기고 박살난 채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렇군." 암컷이 껄껄대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네 자식 복수를 도와줬으니 약속을 지키시지."

"그래, 저번처럼 우리한테 다 대줘야지."

수컷들이 신이 나서 웅성거렸다. 전부들 눈이 번뜩거리며 생기에 넘쳤다.

"그래야지." 어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로 다리 벌릴 걸 그동안 그렇게 비싸게 굴었나?" 수컷들이 낄낄대며 웃어댔다.

"나한테는 이게 중요한 일이니까." 어미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밖으로 나가자." 몸에 표범같은 점들이 박힌 수컷이 말했다.

"그냥 여기서 해." 몸에 피 한방울 묻지 않은 어미 고양이가 사람의 피로 질척거리는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수컷들이 어미의 제안에 당황했다. "왜? 그 새끼가 돌아올까봐 겁나? 뭐가 겁나? 마누라랑 아들새끼까지 이렇게 해놓고서. 그 놈 보이기만 하면 잡아 먹으면 되지, 안 그래?" 어미가 다리를 벌렸다. 빨간 속살이 드러났다. 암컷의 속살은 아내와 동우가 죽어가는 모습에 잔뜩 흥분해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수컷들이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럼 즐겨볼까?"

수컷들 수십마리가 어미 고양이에게 몰려 들었다. 하드코어 포르노쇼가 우리집 안방에서 벌어졌다.

악몽 속에서 난 그 망할 년이 섹스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아야만 했다. 수십마리의 수컷이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을. 어미 고양이가 방바닥과 수컷들 몸에 묻은 피를 흥건히 뒤집어 쓴 채 쉴새없이 쾌락의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섹스가 다 끝난 후 고양이들이 밖으로 흩어졌다. 어미 고양이는 마지막까지 안방에 남아 우리 가족의 시체에 침을 뱉은 후 여유있게 사라졌다. 나는 그 년의 가랑이에서 수십마리의 수컷 고양이가 뿜어놓은 정액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보았다. 역겨웠다.

악몽은 마지막 장면은 내가 읍내 시장에서 강아지를 사오던 날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섰을 때 보았던 장면이기도 했다. 고양이들이 벌인 아수라장이 끝난 후의 안방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 엉망으로 어질러진 안방이 피바다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아내와 동우가 흉칙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6]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양이의 한 [4]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5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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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음날 아침, 잠을 깼을 때는 지난 밤의 고양이 신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내와 충동적으로 섹스를 벌이던 때에 고양이들이 떠나갔는지, 아니면 우리 부부의 섹스가 끝난 후에도 고양이들이 한참동안 더 섹스쇼를 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내에게 너무도 열중해서 섹스가 끝난 후에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어쨌든 고양이들은 다 가버렸다. 그래서 조용하다. 다행이다. 아침에도 그 자식들이 그 난리를 치고 있었다면 난 화가 나서 돌아버렸을 것이다.

어미 고양이는 왜 수컷들까지 데리고 와서 우리집 지붕에서 난리를 친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재수없는 고양이였다. 다음에 또 얼씬거리면 그때는 정말로 슬럼프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지난 밤의 섹스 때문인지 아침에 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붉게 음탕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남편 노릇 톡톡히 했다는 칭찬의 미소일까?

아침을 먹고 어제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랬던 것처럼 집필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좀 쓸 수 있을까?

노트북을 켜고 원고 파일을 열어 지난 번에 쓰다만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마지막 부분. 동우가 고양이한테 손등을 다쳤을 때, 막 쓰고 있던 부분 말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부분에서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원고를 보기만 해도 전해지는 중압갑, 키보드에 손을 올려 놓기만 하면 느껴지는 막막함. 슬럼프는 나를 떠날 생각이 없나보다. 게다가 지난 밤의 결렬한 애정생활로 인해 피곤하기까지 했다.

나는 원고쓰기를 포기하고 -며칠째 계속 슬럼프가 당연스런 일상으로 느껴졌다- 노트북으로 지뢰찾기 게임을 했다. 한참을 그러다 싫증나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뒹굴거렸다. 그마저도 조금 지나자 답답해졌다. 피곤한 데 잠이나 잘까?

바깥바람을 쐬고 오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가?" 아내가 물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께. 머릿 속이 답답해서 소설이 잘 안 써지네. 한번 휘하고 나갔다 오면 다 잘 될거야." 아내의 불룩한 가슴을 가볍게 만졌다. "갔다 올께요, 가슴씨."

철이 없다는 아내의 핀잔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30분을 기다려 버스를 잡아 타고 읍내로 나갔다.

읍내에는 제법 큰 시장이 있다. 도시의 쇼핑센터같은 화려함이나 편리함같은 것은 없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할 꺼리가 많고 가끔씩은 약장수 차력쇼같은 것까지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모습들을 둘러보고 나니 머리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시원해졌다. 진작에 외출 한번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는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나에겐 기분전환이 필요한 거였어. 이제까지 왜 그 좁은 골방에만 틀어 박혀서 슬럼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을까? 곤경에 빠진 인간은 항상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거든. 가족들 데리고 바닷가 같은 데 갔다오면 기분이 더 나아질지도 몰라.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개장수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빨간 고무통에 강아지들을 담아 놓고 팔고 있었다. 강아지들 모두 예쁘고 귀여웠다. 이 놈, 저 놈 만져보고 쓰다듬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동우 생각이 났다.

고양이가 오지 않은 다음부터 그 애는 활력이 없어졌다. 엄마가 놀아주지 않을 때는 그냥 혼자 놀아야 했으니까. 내가 읍내로 나올 때도 동우는 안방에서 게임기를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애가 게임할 때의 표정을 안다. 시무룩하고 지친 표정. 매일 같은 게임만 해대서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래도 달리 할 수 있는 놀이가 별로 없으니 동우는 게임만 해댄다.

동우에게 강아지를 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요물같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아이의 정서에는 더 좋겠지. 온몸이 푹신한 하얀 털로 가득한 강아지를 샀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됐는지 내 주먹보다도 덩치가 작았다. 개장수는 작은 종이박스에 강아지를 담아 주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종이박스 안의 강아지를 만지작거리며 동우를 생각했다. 강아지를 받으면 얼마나 기쁜 표정을 지을까? 설마 아내가 귀찮게 웬 강아지냐고 화를 내지는 않겠지? 아내에게도 바람 쐬러 우리 식구 모두 바닷가에 한번 갔다 오자고 말하는 것도 꼭 잊지 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골 생활에 지친 아내도 굉장히 기뻐하겠지? 그러고 보면 기분전환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나 혼자서 슬럼프에 허우적대느라 식구들 생각을 진작에 못했던 것이다. 나는 새로운 가능성에 기분 설레였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서 소설에 도전해 보는 거야.

마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집을 향해 걸어 갔다.

도중에 마을 이장을 만났다. 이장은 고양이한테 상처 입었던 애는 어떠냐, 그 강아지는 왠거냐, 요새 소설은 어떻게 됐냐, 별의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물어봤다. 그냥 대충대충 대답하고 서둘러 빠져 나왔다. 그 후로 집이 있는 산골짜기로 걸어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 여럿을 만났다. 한껏 기분이 좋았던 나는 흔쾌히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그 사람들은 생전 마을 사람들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내던 외지인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집에 왔다. 강아지 상자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간만에 식구들한테 깜짝 선물을 줄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나무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이 보이자마자 나는 우리집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붕의 기왓장들 일부가 마당으로 떨어져내려 산산조각 나 있었다. 기왓장이 없어진 지붕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신발도 벗지 않은채 서둘러 마루로 올라갔다.

안방문짝이 방 안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지럽혀진 방 안에 누워있는 아내와 동우를 보게 되었다.

결국 나는 동우에게 강아지 선물을 하지도 못했고, 아내에게 바닷가로 기분전환하러 가자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한테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집에 도착한 지 30분 후에 119 구조차량이 도착했다. 구조할 사람들은 이미 죽은 뒤에. 구조대원의 전화를 받고 그로부터 또 20분 뒤에 경찰차가 도착했다. 잡아갈 놈들은 이미 모두 다 도망가 버린 뒤에.

8.

그 날 이후로 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소설가가 겪은 소설같은 악몽!

신문, 방송은 온통 우리 가족의 비극으로 채워졌다. 심지어는 CNN 뉴스시간에도 나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나에 대한 인터뷰는 물론이고 시골 우리집에도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몰려 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그 작은 시골 마을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난리를 쳤다. 내가 겪은 일들은 언론매체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과장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아내와 동우의 죽음에 고양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언론 앞에 밝혔다. 시체에 난 할퀸 자국과 물어뜯은 자국, 안방의 핏자국에 들러 붙은 짐승 털들, 마당에 떨어진 동우의 동화책에 남겨진 발자국들, 안방 구석에서 발견된 고양이 시체같은 증거로 보아 확실했다.

나는 얼마전 어미 고양이가 동우의 손을 할퀴었다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고양이들을 혼내 주었다는 얘기도 했다. 아마도 그게 고양이를 화나게 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새끼 고양이를 죽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몇대 때려 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미 고양이가 수컷들을 끌고와 우리집 지붕 위에서 섹스쇼를 벌였고, 그 때문에 성적으로 흥분한 내가 아내를 엎어놓고 뒤치기를 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에 고양이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고만 말했다. 부끄러운 진실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고양이들이 일으킨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만 말해 주었다.

"화가 난 고양이가 나에게 원한을 품었나 봅니다. 짐승이 인간한테 그런 감정을 품어서 보복을 했다는 생각이 허황되게 들리겠지만, 하여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어찌됐건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맙게도 고인이 된 내 가족을 위해 발벗고 나서 주었다. 모두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노인들이고 한창 농사일에 바쁘고 한마을에 살면서 우리 가족이랑 별로 친분도 없었지만 이장 어른의 지휘 아래 경찰과 합동으로 산을 샅샅이 뒤져 지랄같은 고양이들을 잡아 들였다. 물론 기자들의 카메라가 줄곧 헌신적인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나중에는 방송국의 요청으로 자원봉사 사냥꾼들까지 합세했다.

일주일이 조금 못되는 수색작업으로 37마리의 산고양이들이 잡혔다. 대부분은 포획 과정에서 죽었다. 나는 기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물학 교수라는 사람 -방송국에서 불렀을 것이다- 과 함께 잡혀 온 고양이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모두 다 수컷. 그 망할 놈의 어미 고양이는 없었다.

그렇게 수색작업은 끝났고, 어미 고양이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고, 나의 유명세도 차츰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9.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더 이상 시골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 참혹한 일이 벌어진 집에서 태연하게 소설이나 쓸 수 있겠는가?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새로 얻은 지하 전세방에 틀어 박혀 술만 마셔댔다. 아내와 동우의 장례식을 치르고, 기자들에 파묻혀 인터뷰 세례를 받고, 시골에서 고양이 수색작업을 지켜보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당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의 의지-주로 언론의 집요한 의지-에 이끌려 피곤하고 정신없는 상태였다. 나 자신의 처지를 차분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몇몇이 위로방문차 찾아왔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 버렸다- 연립주택 지하에 틀어박혀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술을 먹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했다. 예전에 문학기자 같은 사람들과 인터뷰할 때는 마치 글쓰기가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허풍떨기도 했지만, 사실 난 우리 가족을 글쓰는 것보다 몇억만배 정도 더 사랑했다. 내가 소설을 쓰면서 괴로워했던 것은 작품이 완성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보다는 팔릴 소설을 못 쓰면 우리 가족들을 쫄쫄 굶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더 컸다. 나는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특기인 글쓰는 일로 우리 가족을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런 행운의 작가들이 이 세상에는 굉장히 많이 존재하니까.

나는 어떻게든 우리 가족들한테 아픔을 주는 사람이 되긴 싫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가족을 시골 촌구석으로 끌어 들였고, 고양이가 우리 가족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치했으며, 어미 고양이가 앙심을 품도록 동우의 상처를 빌미로 또 슬럼프를 빌미로 새끼 고양이를 죽여 버렸고, 결국 아내와 동우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치도 못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가족의 죽음은 고스란히 나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맨정신으로는 그 거대한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가족들이 죽은 뒤로 거의 2달 동안을 술에 쩔어 살았다. 강아지와 함께. 동우에게 선물하려고 읍내 시장에서 샀던 그 하얀 강아지말이다.

일부러 챙긴 것은 아니었는데, 전세방에 짐을 풀고 보니 강아지도 실려 있었다. 그래서 그냥 방에다 놔두었다. 특별히 돌봐주지는 않았다. 먹이를 준 적이 한번도 없어서 강아지는 내 술안주 쪼가리나 훔쳐 먹으면서 연명했고, 방에다 오줌을 싸든 똥을 싸든 치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지하 전세방의 모습은 엉망이 되었다. 불도 제대로 안켜서 어두운 방 안에는 개 배설물에 이리저리 널린 술병들, 김치같은 술안주들이 어울려서 누구나 감탄할 만한 악취 중의 악취가 가득했다. 난 방 안을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냄새가 나같은 놈에게 딱 어울리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나같은 좃같은 놈한테는.

강아지에게는 내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는 술에 잔뜩 취하면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했다. 강아지 이름은 내 이름이니 나한테 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내 이름을 구실로 강아지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기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장에서 너를 사지 않고 서둘러 집에 왔었어도 가족을 살릴 수 있었어!

어쨌든간에 나는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대며 강아지한테 온갖 욕을 다했다. 이 씨발놈아, 이 좃같은 놈아, 이 똥같은 놈아, 이 참새 보지같은 놈아, 이 개같은 놈아.... 웃다가 울다가 정신없이 욕하면서 술을 들이부으면서 나의 무능력함을 자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오후 내내 잠으로 시간을 보내다 밤에서야 깬 것이었다. 창문을 통해 옆집의 불빛이 희미하게 나의 방을 비췄다. 나는 더듬더듬 술병을 찾아 또 버릇대로 소주를 마셨다. 2병을 단숨에 비웠다. 머리 속이 빙빙 돌았다. 방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내 주위가 온통 비현실적인 몽롱하고 흐릿한 분위기로 변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강아지가 있었다. 먹을 것을 못먹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병에 걸린건지 배를 드러낸채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평소대로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날은 그렇지 못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얼큰하게 올라온 취기 속에서, 옆집 조명이 연출하는 무겁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강아지의 불룩하게 솟은 하얀 배가 빛을 내고 있었다. 캄캄한 밤하늘에 홀로 떠있는 보름달같이 눈부신 빛을 내고 있었다.

나에게 빛은 어울리지 않어. 나는 어둠 속에 찌그러져 있어야 마땅한 놈인데. 저 지랄같은 개새끼는 왜 저렇게 환하게 빛나는 거지? 뭐가 좋다고?

빛을 꺼뜨리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술이 그렇게 하라고 속삭였다.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왔다. 식칼을 주제넘게 빛을 내고 있는 강아지의 배에 갖다댔다. 강아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강아지가 죽어 있었는지, 아니면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어도 숨은 붙어 있었던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물보호협회나 보신탕 금지 추진본부나 개사랑 동호회 같은 데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주저않고 단숨에 강아지 배를 갈랐다. 순식간에 강아지 배에서 빛이 사라졌다. 배가 식칼에 잘리고 갈라지면서 속이 드러났다. 뱃속에서 검은색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어둠의 피가 분출했고, 어둠의 내장이 튀어나왔다.

죽은 강아지에 대한 눈꼽만큼의 연민도 없이 계속 소주를 마셨다. 어두운 방 안에 어울리지 않게 깝죽대던 빛이 사라져서 기분이 좋았다.

빛은 타인의 것, 어둠은 나의 것. 어둠은 당연히 나의 것. 패배자의 것. 실패자의 것. 미친 놈의 것.

나는 어둠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갈라진 강아지의 뱃 속에서 흘러나온 꼬불꼬불한 내장을 식칼로 잘라가면서 씹어 먹었다. 씹을 때마다 입 안 가득 국물이 흘러 나왔다. 무척 질겼는데, 별다른 맛이 느껴지진 않았다. 술에 단단히 취했던 탓이겠지. 그래도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듯이 강아지의 내장을 술안주로 삼아 꾸역꾸역 먹었다.

술에 취한 건지, 배가 부른 건지 나는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아내와 동우와 고양이가 나오는 꿈을. 악몽을.

[5]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양이의 한 [3]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47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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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슬럼프에 관한 내 생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반은 맞았다. 슬럼프가 온 것이 틀림없다는 내 예감은 적중했다.

집필실에 들어와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어제까지 쓰다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그 다음 문장을 어떤 식으로 이어나갈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 속에 글쓰기를 방해하는 커다란 장벽이 생긴 것이다.

반은 틀렸다. 고양이를 죽이면 나를 성가시게 하던 슬럼프의 원인이 사라져 다시 원래처럼 빛의 속도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물거품이 되었다. 새끼 고양이를 살해하고 말았는데도, 나는 이렇게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다! 슬럼프의 신이시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 정성이 부족한 겁니까?

나는 이제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지독한 슬럼프를 앓고 있었다. 노트북 컴퓨터 속의 소설 원고는 한 글자도 추가되지 않은 채 내 무능력의 명확한 증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괴로워하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흘러만 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훌쩍 일주일도 지났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식구들한테 글 쓴다고 속이고, 집필실에 틀어 박혀 속만 태우는 것이었다. 소설가로서의 최후를 걱정하며 마지막 힘을 다해 노트북을 켠다해도 하는 일이라곤 고작 지뢰찾기나 카드게임으로 하루를 꼬박 보내는 것이었다. 이제는 노트북 속의 소설파일을 열어보는 것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파일을 연다고 해도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 괴로움만 더해질 뿐이었다. 차리리 집필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잠을 잤다. 정말이지 내 처지는 근로의욕을 상실한 게으른 노숙자와 다를 바 없었다.

슬럼프의 신은 새끼 고양이만으로는 성이 안 찬 것일까? 원래대로 어미 고양이를 죽였다면 이런 비참한 결과는 오지 않았겠지?

난 은근히 어미 고양이를 기다렸다. 다시 눈에 띄면 아예 요절을 내고 싶었다. 새끼 고양이를 끝장냈을 때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확 불타올라서 모든 것을 제껴두고 나서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마당에 나갈 때마다 장독대를 볼 때마다 어미 고양이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오지 않았다.

아내도 동우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식구들은 아예 고양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시골생활의 무료함을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와 동우는 내가 고양이한테 한 짓을 다 알고 있는 걸까? 상관없다. 지금 내 코가 석자다. 식구들 기분까지 눈치볼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어미 고양이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그래서 슬럼프의 신을 위해 내가 또다시 뭔가 뜻깊은 일을 벌일 수 있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나는 소원대로 어미 고양이를 또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6.

밤이었다.

잠을 자다 깼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내 잠을 깨운 이상한 소리는 우리 집 천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돌아누운 아내의 등쪽을 향하고 누워 있던 나는 그 소리를 따라 천장 쪽으로 몸을 뒤척였다.

천장에서 나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내 아랫도리를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 소리는 여자의 신음소리였다. 그냥 신음소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포르노 영화같은 데 나오는 과장된 여자의 신음소리였다. 섹스의 쾌감을 견디다 못해 흐느끼듯 토해내는 숨막히는 육체의 언어. 신음소리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여자의 신음소리 같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미친 여자가 야밤에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겠는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잠이 덜 깨서 몽롱한 기분이었다. 달빛이 쏟아져 밝아진 마당의 분위기는 몽롱한 기분을 더욱 부추겼다.

지붕을 쳐다봤다.

꽉 찬 보름달 아래 우리집 지붕 위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다. 고양이들 무리 속에서 마당에서까지도 들릴만한 여자의 신음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지붕 위의 사정을 자세히 볼 수 없어서 장독대로 올라갔다. 얼마 전까지도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놀러오던 그 장독대로.

장독대에 서서 지붕 위의 광경을 보니 넓고 넓은 우주 공간에 붕 떠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붕 위에서는 대략 20마리 정도의 고양이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었다. 짙은 줄무늬가 있는 놈, 표범처럼 둥근 점들이 있는 놈, 아예 온몸이 새까만 놈, 정반대로 온몸이 눈처럼 하얀 놈 등등 고양이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런 고양이들이 모인 원 안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섹스를 하고 있었다.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동물들이 섹스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원숭이류 중에는 인간과 비슷한 체위를 하는 것들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항상 같은 체위를 고집한다. 암컷의 뒤를 수컷이 덮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붕 위에서는 고양이라는 짐승이 너무나 인간적인 행위를 천역덕스럽게 벌이고 있었다. 암컷은 지붕 위에 누워 있었고, 수컷은 암컷의 몸 위에 올라타고서 열심히 허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수컷이 허리 돌리는 폼이 인간 뺨치게 능숙했다. 암컷은 수컷의 등을 끌어안고서 수컷의 움직임에 리드미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암컷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인간같은 신음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 소리가 매우 자극적이어서 내 츄리닝 바지 앞이 불룩 튀어 올랐다. 고양이 암컷과 수컷의 긴 꼬리가 단단히 얽혀서 섹스의 흥분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둘의 섹스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고양이들의 모습도 꼭 사람같았다. 놈들은 서로의 귓 속에 대고 소근거리는가 하면, 굉장한 음담패설이라도 들은 듯 폭소를 터뜨리며 옆에 있는 고양이의 팔을 툭 치기도 했다.

환상일까? 고양이들이 저럴 리가 없어. 꼭 사람같잖아!

나는 섹스에 한창 열중인 암컷 고양이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장독대와 지붕 사이가 고양이의 땀구멍까지 들여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것은 아니었지만, 난 단번에 암컷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집에 놀러오던 그 어미 고양이었다. 내 아내와 아들의 사랑을 받던 고양이, 내 아들의 손을 할퀴고 간 고양이, 덕분에 나의 슬럼프 공포증을 유발해 슬럼프의 신 앞으로 새끼 고양이 목숨을 바치게 만든 빌미를 제공했던 고양이. 바로 그 어미 고양이였다. 노란 털에 검은 줄이 쳐진 암컷 고양이.

내 집에서 뭐하는 짓이지? 불룩 튀어나온 츄리닝 바지 속의 물건이 단단히 염원하는 것과는 달리 나의 머리 속은 어미 고양이가 하는 짓이 못마땅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훠어이 훠어이, 이 놈들아! 당장 꺼지지 못해?" 나는 손을 휘휘 저어가며 고양이들한테 소리쳤다.

섹스쇼 구경에 열중하던 고양이들의 시선이 장독대 위의 나에게로 모아졌다. 섹스쇼의 두 주인공들도 하던 짓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고양이들이 거의 동시에 나를 향해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섹스쇼는 계속 진행됐고, 구경꾼 고양이들도 쇼 관람에 열중했다. 저 놈들이 나한테 야유를 보냈어, 나를 무시했어.

고양이들은 나를 외면했지만, 어미 고양이만은 달랐다.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극적인 신음소리를 쉴새없이 내뱉으면서. 어미는 웃고 있었다. 어미의 눈웃음은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리로, 지붕으로 올라와, 나랑 같이 놀자.

물론 나는 지붕으로 올라 갈 수 없었다. 담장과 지붕 사이의 거리는 오밤중에 건너기에 만만치 않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 터무니없는 일이다. 내가 정말로 저 어미 고양이랑 섹스를 하고 싶은 기분이라도 들었다는 것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렇치만 내 츄리닝 바지 앞이 솟아오른 이유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갑자기 어미 고양이의 시선이 나에게서 멀어졌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불규칙한 빠른 울음소리를 냈다. 부둥켜 안고 있던 수컷의 허리 움직임이 순식간에 격렬해 지는 순간이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댔다. 장난하듯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진지한 자세로 변했다.

마침내 섹스는 끝났다. 더 이상 신음소리도 없었다. 수컷은 죽은 듯이 어미 고양이의 몸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어미 고양이가 기분좋은 웃음을 흘리며 또다시 나를 쳐다봤다. 이리로, 지붕으로 올라와, 나랑 같이 놀자, 이젠 네 차례야.

나의 츄리닝 바지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섹스를 끝낸 수컷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수컷이 구경꾼들 옆으로 걸어갔다. 구경꾼 고양이들은 수컷한테 소리를 지르고 툭툭 건드리고 난리가 났다. 수컷의 축 늘어진 성기가 드러났다. 그것은 사람의 성기랑 크기나 모양이 똑같았다. 어떻게 사람보다 훨씬 작은 고양이가 그런 물건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나는 이미 이사오던 날에 어미 고양이의 성기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그것을 꼭 빼닮은 것을.

이번에도 내 눈은 자연스레 어미 고양이의 성기로 향했다. 수컷이 떠나버려 누워 있는 어미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내 츄리닝 바지는 텐트 수준을 넘어 에펠탑 수준으로까지 불끈 솟았다. 어미의 성기는 예전보다 더 자극적인 모습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잔뜩 클로즈업된 포르노 영화의 성기 확대장면을 보는 기분. 어미의 성기는 수컷이 흘리고 간 하얀 액체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고 있었고, 섹스의 흥분으로 한껏 부어 올라 있었다. 숨을 쉬려는 것인지 아니면 입맛을 다시는 것인지 성기는 힘겹게 꿈틀거렸다.

어미가 누운 채로 구경꾼 고양이들을 둘러봤다. 구경꾼들이 얌전하게 어미를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어미가 무리 중 한 고양이를 앞발로 가리켰다. 다른 고양이들의 입에서 실망의 한숨소리가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운의 수컷이 태연하게 어슬렁거리며 어미한테 접근했다. 수컷이 어미의 정면에 와서 서자, 어미가 수컷의 아랫도리로 앞발을 갖다댔다. 살살 문지르며 애무하는 것이다. 수컷의 사람같은 물건이 부풀어 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것보다 컸다. 나도 사우나같은 데서 지지않는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 놈의 물건은 그 이상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직접 내 눈으로 보았으니 확실한 것이었다. 구태여 내 몸을 꼬집어 보지 않아도 꿈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수컷이 한껏 발기된 성기를 어미한테 밀어 넣었다.

아! 아앗!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전율을 느꼈다. 삽입 순간에 어미 고양이가 내뱉은 짧은 신음소리는 정말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니야, 사람의 목소리가 아냐. 요물의 목소리야. 저 년은 요물이야. 인간을 홀리는 요물귀신이야.

수컷의 허리운동이 시작되고 어미는 자극적인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어미는 섹스의 쾌락을 쫓느라 이제 나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장독대에서 내려왔다.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고양이 섹스쇼는 내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마땅히 고양이들을 쫓을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생각이 나더라도 실행에 옮길 힘도 없었다. 잠에서 덜 깬 몽롱한 기운에 멍하기만 했다.

안방으로 들어와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내는 내가 방을 나설 때와 똑같이 등을 돌린 채 열심히 잠자고 있었다.

나는 천장을 향해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신경쓰이게도 어미 고양이의 신음소리가 쉴새없이 또렷이 들렸다. 수컷 고양이는 별 소리를 안내는데, 왜 유난히 어미는 시끄러운 걸까?

너 들으라고 일부러 그러는거야.

마음 속이 심란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떴다. 어두운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주같이 넓게만 보이는 어두운 천장이 내 머리 속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천장이 투명하게 사라졌다. 보름달과 별무리들이 어우러진 밤하늘이 펼쳐졌다. 내 바로 앞에 고양이들이 둥글게 원을 이루며 모여 있었다. 밑에서 쳐다보는 시점이라 고양이들의 엉덩이, 발, 꼬리같은 것만 보였다. 고양이들 가운데에 수컷에게 엉켜붙은 어미의 뒷모습이 있었다. 어미의 엉덩이가 벌어져 있었다. 수컷이 힘껏 허리를 내지를 때마다 어미의 몸뚱아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단단히 엉겨붙은 고양이들의 꼬리는 뻗치는 쾌감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꿈틀거렸다. 나의 상상력은 그런 세세한 모습까지도 다 볼 수 있었다.

내 성기는 무너질 줄 모르고 계속 츄리닝 바지 속에서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변태인 것이 확실했다. 인간이 고양이들의 교미에 흥분해서 잠을 못 이루다니.

아랫도리에서 뻗치는 기운에 압도되어 더 이상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아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아내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이불을 들추고 아내 쪽으로 바짝 붙었다.

아내의 가슴을 만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의 유방. 나의 보물 1호. 아내의 얇은 런닝을 통해 부드럽고 탄력있는 유방의 감촉이 전해졌다. 확 달아오른 기운에 나는 아내의 등에 내 몸을 붙였다. 나의 성난 아랫도리가 아내의 엉덩이에 닿아 헐떡거렸다.

"으음, 왜 그래? 잠 안 자?" 아내가 내 손길에 잠을 깼다. "이거 무슨 소리야?" 아내도 고양이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고양이들이 우리 집에 소풍 왔어."

"뭐?"

나는 잠이 덜 깬 아내를 엎드리게 만들었다. 아내의 잠옷 바지를 벗겼다. 그 속의 하얀 팬티도 벗겼다. 그리고는 아내의 살찐 엉덩이를 끌어 안았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아내의 엉덩이를 덮쳤다.

천장에서는 계속해서 어미 고양이의 음탕한 신음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우리집 천장에서는 고양이들이 너무나 인간적인 섹스를 펼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아내와 함께 너무나 짐승같은 섹스를 벌였다. 그 순간 나는 짐승이 되었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양이의 한 [2]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45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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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이는 아내와 동우에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만 봤다하면 아내와 동우는 고양이 자랑하느라 바빴다. 나는 마치 고양이 서커스단의 단장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매일매일 조련사들-아내와 동우-이 단장인 나에게 찾아와 시시콜콜한 훈련성과를 보고하는 듯한 기분. 단장님 오늘은 고양이들이 훌라후프를 30분이나 돌렸습니다 단장님 오늘은 고양이들이 거리로 나가 시민들한테 서커스표를 팔았습니다 단장님 오늘은 고양이들이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습니다. 물론 아내와 동우가 내게 해 준 얘기들은 좀 더 그럴 듯한 현실적인 얘기들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동우: "아빠! 나 고양이 만졌어. 고양이들이 이젠 내 옆에도 막 오고 내가 등을 쓰다듬어도 가만있어!"

아내: "자기야! 이젠 고양이들이 여기가 자기 집처럼 편안한가봐. 장독대로 쓰는 저기 작은 창고 있지? 가끔씩 그 속에서 고양이들이 자고 가나봐. 낮에 창고에서 나오는 걸 여러번 봤어."

식구들의 말에 나는 나름대로 대꾸를 해주지만, 식구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동우에게: "그러지마, 동우야. 함부로 만지다 고양이가 우왕! 하고 문다, 물어. 그럼 얼마나 아픈데. 잘못하면 아주아주 나픈 병에 걸릴 수도 있어. 개한테 물리면 광견병, 고양이한테 물리면 광...고양이병."

아내에게: "뭐야? 그럼 혹시 우리 이사오기 전부터 원래 이 집 창고에서 숨어 살던 고양이들인가? 우리가 새로 이사와서 경계를 하다가 이제는 안심이 돼서 창고에서 다시 살겠다 이건가? 쫓아내는 게 좋겠어. 창고 속에다가 고양이들이 똥싸고 오줌싸고 냄새가 이만저만이 아닐 꺼야. 병균이 우글거릴 거야."

그러나 식구들은 내 의견과는 반대로 고양이들과 너무도 친하게 지냈다. 고양이들도 우리 식구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눈치챘는지, 이제는 마루에까지 올라와서 낮잠을 잘 정도로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그 속에서도 나에 대한 경계심은 남아 있었다. 내가 나타난다고 무조건 도망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내가 그 안으로 접근하기만 하면 슬그머니 달아나 버렸다. 나는 그저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내가 먹을 것을 아무 것도 던져주지 않으니까 고양이들이 싫어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뭐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이 시골 구석까지 내려온 것은 고양이 사육하려고 그런 건 아니니까. 내가 진짜 정성으로 돌보아야 할 것은 집필 중인 소설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집필실에서 한창 작업 중이었고, 아내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동우 혼자 마당에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울부짖는 고양이 소리가 들리더니 동우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노트북 화면 속의 소설에 푹 빠져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마당으로 뛰쳐 나갔다. 처음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마당에 서있는 동우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러다가 동우 발 밑에서 무언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어미 고양이와 새끼를 발견했다. 그 순간 교양이들의 눈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 고양이들은 땅에 떨어져 있던 빵같은 것을 덥석 물고는 장독대 위로 뛰어올라 담장 쪽으로 사라졌다. 동우의 발밑으로 빨간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동우에게 다가갔다. 동우는 맨처음의 커다랗던 비명소리와는 달리 이제는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고통을 속으로 꾸역꾸역 참고 있는 사람처럼. 잘못 건드리면 참고 참았던 고통이 터져버려 온동네가 떠나가 버릴듯한 울부짖음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동우 앞으로 걸어갔다.

오 맙소사. 동우는 오른손을 허공에 쳐든 채 말없이 떨고 있었다. 오른손이 손목에서부터 손등까지 여러 갈래로 길게 찢겨져 있었다. 고양이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손등이 길다랗게 찢어진 상처 아래쪽은 아예 피부가 왕창 벗겨져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손등의 피부는 완전히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동우의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손 근육과 뼈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피아노 건반처럼 손등 속의 새하얀 뼈들이 쉴새없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동우만큼이나 손뼈들도 놀라서 발작하는 중이었다. 동우의 손등을 따라 쉴새없이 흐르는 피는 손가락을 따라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내 귀에는 그 핏방울들이 마당에 떨어지며 내는 뚝!뚝!뚝!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동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온통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가늘게 닫혀진 동우의 눈이 나를 발견했다. "어떡해... 나 어떡해? 고양이가..." 침을 흘리며 떨리는 아이의 입술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집중해서 쓰던 소설 속의 현실과 지금 마당에서 겪고 있는 진짜 현실이 뒤섞여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때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아내는 순식간에 아이의 발 밑에 흐르는 빨간 액체의 의미를 알아 차렸다. 소리를 지르며 동우 앞으로 뛰어나왔다. 손등의 상처를 보고는 완전히 흥분해서 아이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왜 그래?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아내가 아이를 자꾸 흔들면 손등 피부가 완전히 떨어져 버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내의 손목을 붙잡아 동우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아내의 손이 처음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아내의 손목에 힘을 주자 순순히 아이의 어깨에서 풀어졌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힘을 주었던 탓인지, 아내가 아픈 소리를 냈다. 아내가 나를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진정해. 당신까지 흥분하면 동우는 어떡하라구. 방에 가서 소독약하고 깨끗한 천 여러장 가져와. 손등을 감싸게 깨끗한 천으로 말야." 나는 침착하게 보이려 애썼다. 그래도 목소리는 좀 떨리고 있었다. 아내는 군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릎을 꿇고서 동우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동우 손에 뚜껑 열렸네. 손에 바람 들어가서 춥겠다. 하지만 걱정마. 아빠가 병원 데리고 가서 고쳐줄께. 그러기 전에 우선 손에 열린 뚜껑 닫아야겠다."

나는 활짝 벗겨져 있는 동우의 손등 피부를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손등 속에서 하얀 손가락 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흔들거림에 자칫하면 손등 피부는 금방이라도 손등에서 떨어져 나갈 듯이 애처롭게 손등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피부를 조심조심 원래의 손등 자리에 덮어 놓았다. 손가락 뼈들이 난리치는 통에 덮어 놓은 손등 피부가 들썩거렸다.

나는 동우의 상처 난 손등을 양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동우의 손이 내 손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동우는 아무말도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난 울지 말라고, 이젠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차츰 동우의 손이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아이 손의 흔들거림이 점점 잦아들더니 평온을 되찾았다.

아내가 내가 말한 물건들을 들고 나왔다.

나는 아내에게서 건네 받은 소독약 연고를 동우의 상처난 손등에 발라 주었다. 우선은 벗겨졌던 피부의 경계선에, 그 다음은 손목에서부터 내려온 길다란 세로줄들에. 손등 피부를 들추어내서 그 안에다가도 소독약을 발라주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괜히 세균에 감염될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나니 확실히 피는 별로 흐르지 않았다. 마당에 흥건히 흘러내린 핏물을 봐서는 이미 나올만한 피는 다 나와버린건지 모르겠지만. 연고 다음에는 아내가 갖고 나온 흰 수건을 동우의 손에 칭칭 감았다. 이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끝이었다. 잘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종합병원 응급실 레지던트 솜씨 같았다.

나는 동우를 등에 업고 마을 이장 집으로 찾아갔다. 평소에 별로 왕래도 없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읍내 병원으로 가기 위해 마을 앞으로 하루에 5번만 찾아오는 시골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장 승용차를 얻어타고 우리 부부는 동우와 읍내 병원에 가서 정식으로 치료를 했다. 의사는 우려할 만한 정도의 상처는 아니라며 안심시켜 주었다. 병원에 올때까지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아내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을 했다.

치료받고 손에 붕대를 감은 동우를 데리고 우리 부부는 또다시 이장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부터 잠이 든 동우를 안방에 눕혔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아이를 바라 보았다.

한동안 눈물만 흘리던 아내가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게 왜 이런 촌구석에 살자고 그랬어? 꼭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소설 쓰는거야? 봐! 이렇게 동우가 다치고 그러잖아! 우리 아들 좀 봐!"

"지선아, 진정해. 애 다친 거 갖고 왜 여기 이사온 거까지 들먹거리구 그래? 고양이 위험하다고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먹을 거 줘가면서 집안으로 끌어들인 건 너잖아." 평소같았으면 난 아내와 대판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지금의 나는 평소의 상태가 아니었다. 내 머리 속은 심각한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진정해. 손등에 상처난 것 뿐이야. 그딴 걸로 생명에 지장생기는 거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넌 아들이 다쳤는데 아무렇지도 않니? 아까부터 계속 왜 그렇게 무덤덤하니? 나 혼자 호들갑 떠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좀 마. 기분 나뻐."

"내 눈? 내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더 이상 아내와 말장난하고 싶지 않았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

"이젠 너도 고양이들이 싫어졌지? 난 훨씬 옛날부터 맘에 안들었어. 그 새끼들 다 죽여버릴꺼야."

마당으로 나왔다. 동우가 흘린 핏자국이 검게 변색된 채 말라있었다. 그걸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천장을 장독대로 사용하고 있는 작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는 문도 없이 출입구가 뻥 뚫려 있는 구조였다.

창고 속에서 퀴퀴한 냄새가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창고 특유의 냄새인지, 고양이들이 남기고 간 냄새인지 구분이 안갔다. 이사오던 날 호기심에 한번 들어와 보고난 뒤로는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창고였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는 전에 살던 집주인이 들여놓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멋대로 쌓여 있었다. 녹 슨 농기구들, 기계부품들, 썩은 목재들, 플라스틱 물통들... 쓰레기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아내는 창고 안에서 고양이들이 잠을 자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떠올리며 창고 속을 둘러 보았다. 썩은 목재들이 세워져 있는 사이로 종이박스가 하나 있었다. 위가 트인 종이박스 속에는 낡은 옷들이 깔려 있었다. 고양이들이 종이박스 속에서 옷가지들을 이불 삼아 잠자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고양이들이 없었다. 있었더라면 당장 내 손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냥 나오려다 창고 입구에 세워져 있는 쇠파이프들을 발견했다. 그 중 골라 손에 들었다. 어른 팔뚝만해서 묵직한 게 손에 잡고 휘두르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휘둘러서 뭔가를 두들겨 패기에는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파이프 몸체에는 여기저기 하얗고 노란 이끼같은 것들이 들러 붙어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덥석 잡고서 마당으로 나왔다.

그 다음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속을 뒤져 고등어 두 마리를 찾아냈다. 그 와중에 하얀 냉장고 여기저기에 쇠파이프를 잡았던 손에서 옮겨온 얼룩이 묻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고등어 두 마리를 부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당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러고 돌아서려니 좀 찝찝했다. 마당에 고등어 두 마리만 덜렁 놓여져 있으면 고양이들이 의심할지도 몰랐다. 다시 부엌에 들어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왔다. 쇠파이프로 고등어를 두드려 팼다. 고등어가 너무도 간단하게 박살났다. 대가리고 몸통이고 할 것 없이 산산조각났다. 그 부서진 고등어를 쓰레기 봉투 안에 주워 담고, 봉투 끝을 묶어 놓았다. 그리고는 아내가 쓰레기 봉투를 밖에 내다놓기 전에 임시로 놓아두는 부엌 옆의 수돗가에 놔두었다. 미끼가 완성된 것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문턱이 높았다. 다리를 들어올려 문턱을 지나면 바로 아래에 있는 굵직한 돌계단 2개를 밝고 내려가야 했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던졌다. 고양이에게 접근할 때 구두소리를 내면 곤란할테니까. 나는 양말만 신은 채로 문턱 밑의 돌계단에 완전히 엎드렸다. 높은 문턱을 방패 삼아 내 모습이 은폐될 것이다. 고개를 살짝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서는 고양이들이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장독대도, 고등어 미끼가 있는 수돗가도 다 잘 보였다. 녹 슨 쇠파이프를 힘껏 쥐어 보았다.

고양이 새끼들, 나타나기만 하면 다 죽여버릴테다.

그 후 몇시간을 계단에 엎드린 채 하염없이 고양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내가 부엌에 들어와서 저녁상을 차렸다. 아내가 여기서 뭐하는 있는 거고, 냉장고 안에 둔 고등어는 어디 갔으며, 시커멓게 묻은 얼룩은 뭐냐고 물었다.

"고양이들한테 우리 가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겠어. 물론 그 놈들이 후회할 때는 이미 저 세상에 간 뒤겠지만."

아내는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동우랑 같이 저녁 먹자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말도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잠시 후 저녁을 다 먹은 아내는 상을 부엌에 갖다 놓고 나가면서, 밤새 이러고 있을 거냐고 물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안 하자 그냥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었을 때, 아내가 다시 나와서 잠 안 잘 거냐고 물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 대답이 없자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을 부엌 계단 위에서 망을 보면서 나는 오늘 낮에 고양이한테 상처입은 동우를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기분의 정체를 음미해 볼 수 있었다.

소설가가 느끼는 무거운 기분의 정체.

그건 바로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신호였다.

나는 여기 시골로 이사오기 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슬럼프에 시달려 왔었기 때문에 슬럼프가 찾아오는 기분을 잘 알고 있다. 슬럼프가 '나 왔수다'하고 말하고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컨대션인 때와 슬럼프 때와는 확실히 머리에서 느끼는 기분상태가 틀리다.

지금 내 머리 속은 오늘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느끼던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꽉 들어 찬 느낌, 머리 속이 빈틈없이 콘크리트로 채워진 느낌이다. 아무리 글을 쓰려고 해도 벽이 가로막는 듯한 막막한 두려움에 시달리게 하는 느낌.

슬럼프가 확실했다. 나는 이제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고양이였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처음부터 고양이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미 고양이가 화근이었다. 이사오던 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거시기를 애무하고, 내가 아내 가슴 주물럭거리는 것을 장독대 위에서 지켜보고, 동우의 손을 긁어놓고, 덕분에 이제까지 한번도 거른적이 없던 오후 집필시간을 오늘 공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고양이는 요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미묘한 감정상태를 연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어떤 계기로 인해 도중에 끊어지게 되면 슬럼프가 되는 것이고, 그걸 원래대로 복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때로는 몇 십초만에 정상을 되찾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생을 슬럼프에 시달리다 작가를 포기하게 되는 수도 있다. 언제쯤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는 고대로부터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괴롭히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아온 슬럼프의 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소설가로서의 마지막 돌파구로 여기 시골까지 이사왔는데, 또다시 슬럼프에 빠지면 이번엔 또 어떻게 헤어나올 수 있을까? 불안했다. 이렇게 작가생활이 쓸쓸히 끝날 수도 있었다. 글쓰는 일을 포기하고 나면 무얼하면서 먹고 살 수 있지? 난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어떡하든 이제 막 찾아온 슬럼프를 벗어나야만 했다. 어제까지도 순조롭게 집필하던 소설이 아까워서라도 무슨 방법이든 짜내야 했다. 글쓰기 공포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내 머리 속을 확 뚫어줄 수 있는 방법을.

그렇다. 고양이다.

고양이로 생긴 문제는 고양이로 풀어야 했다. 단순히 혼내주는 것만으로는 불안하다. 동물들이란 아이큐가 심각하게 낮은 존재라서 혼쭐이 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며 다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성가신 고양이로 인해 나의 미묘한 감정상태는 다시 흔들려 버리고 슬럼프는 계속 나와 함께 붙어다닐 것이다.

확실하게 죽여 버려야지. 가능하다면...

고대인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쳤듯이, 나도 순조로운 창작활동을 기원하며 고양이를 슬럼프의 신에게 제물로 바칠 것이다. 예전의 슬럼프를 가족들의 행복한 서울생활을 제물로 바쳐 벗어났듯이, 이번 슬럼프의 제물은 고양이였다.

물론 동우를 해꼬지한 복수도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고양이들이 쉽게 내 손에 걸려들까? 그 재빠른 놈들이.

마음 속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의 슬럼프 장벽이 더욱더 두꺼워지고 무거워졌다. 어쨌든 시도는 해야만 한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한번 혼쭐이 나면 다시는 우리집에 안 찾아 올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나니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고 있었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다 아내와 동우가 잠든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마루에 환하게 불을 켜놓고 있었고 집 앞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도 함께 어우러져 마당 전체는 물론 장독대까지도 훤히 볼 수 있었다.

초저녁부터 쭉 엎드린 자세로 있었지만, 난 전혀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았다. 슬럼프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모든 신경을 흥분상태로 만들었다. 오직 고양이들을 기다리는 일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고양이 두 마리가 장독대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쁜 새끼들, 역시 모습을 나타냈군. 먹이를 주면서 잘 대해주던 아이를 상처 입히고는 뻔뻔스럽게 또 나타났군. 그러니 아이큐 낮은 짐승이지.

나는 혹시나 고양이들 눈에 띌까봐 문턱 밑으로 더욱 몸을 수그렸다.

고양이들이 창고 옆에 난 계단을 통해 장독대에서 마당으로 느릿느릿 내려왔다. 놈들은 잠시 불꺼진 방을 기웃거리더니 수돗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정확히 나의 미끼에 걸려들었다. 쓰레기 비닐을 발톱으로 뜯고서 속 안의 내용물을 다 끄집어 내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내가 정성껏 먹기 좋게 다듬어 놓은 고등어 두 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쇠파이프를 손에 들고 부엌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구두를 벗어 던진 양말차림이어서 걷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하며 아주 조금씩 수돗가의 고양이들에게 다가섰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고양이들은 고등어를 먹느라 정신없었다. 놈들이 쩝쩝거리며 입을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냐, 이놈들아, 마지막 만찬이니 맛있게 먹어라.

나와 고양이와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하지만 아직 쇠파이프의 사정권은 아니었다. 난 딱 두 발자국만 더 걸어가서 액션을 취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어미 고양이의 대가리를 쇠파이프로 후려칠 것이다.

그 때 느닷없이 새끼 고양이가 고등어를 먹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녀석의 시선이 나의 시선과 정통으로 부딪혔다. 새끼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무표정하게 짧은 울음소리를 냈다. 냐아아아옹∼.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에 난 당황했다. 바보같이 서투르게 어색한 동작으로 어미의 머리를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쇠파이프는 벌써 몸을 피해 달아나는 어미 고양이의 머리를 빗나가서 땅에서 길게 솟아오른 수도 파이프를 때렸다. 깡! 하는 타격소리가 고요한 새벽에 울려 퍼졌다.

나는 휘청거리며 몇번 더 쇠파이프를 휘둘렀지만 붕붕 허공 가르는 소리만 났을 뿐, 도망치는 고양이들에게 닿지도 않았다.

고양이들이 쏜살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창고 옆 계단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집 대문이 닫혀 있고 담장도 높아서 고양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장독대로 올라가는 방법 뿐이었다.

고양이들이 계단을 향해 훌쩍 뛰어 올랐다.

나는 급한 마음에 수돗가 물받이 통에 있는 플라스틱 바가지를 고양이들한테 집어 던지며 쫓아갔다. 한심하게도 바가지는 고양이들 위에 있는 계단을 맞고 튕겨 나가고 말았다.

어미 고양이는 가뿐하게 계단을 달려 장독대로 올라갔다. 나의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바로 윗계단을 때리고 떨어지는 바가지에 놀랐는지, 새끼 고양이가 계단에서 발을 헛딛어 마당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렇더라도 떨어진 즉시 다시 계단으로 뛰어올랐다면 동작이 굼뜬 나를 따돌리고 무사히 장독대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새끼 고양이는 마당에 떨어져서 당황한건지 아니면 나이가 어려서 상황판단이 잘 안되는 건지, 다시 계단으로 갈 생각은 못하고 마당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장독대 위에서 어미가 새끼를 향해 목이 찢어질 것처럼 거칠게 소리질렀다.

나는 우연히 찾아온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 일단 장독대 계단을 막아섰다. 그리고 새끼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그 즉시 마당 한쪽 구석으로 몰았다. 몸을 지그재그로 이리저리 흔들며 구석으로 유인했다. 허둥대며 날뛰던 새끼는 내 몸을 피한답시고 뛰어다녔지만 내 의도대로 나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는 가운데 마당 한구석에 몰리고 말았다.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까지 좁혀졌다. 나는 쇠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새끼는 구석에서 튀어나와 필사적으로 내 오른쪽으로 도망쳤다. 고양이가 지나가면서 구두없이 양말만 신고 있는 내 발을 스쳤다. 그 간지러운 털의 느낌은 기분 나쁘게 소름끼쳤다. 그와 동시에 어떤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몸을 틀며 정확히 내 발 밑을 내달리는 새끼 고양이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퍽. 쇠파이프가 정확하게 고양이 머리에 맞았다. 단 한방에 새끼 머리가 박살났다. 발 밑을 스치는 고양이 털이 전해준 민감한 확신이 인도하는 대로 휘두른 단 한방에.

조그만 고양이 머리는 산산이 부서져서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머리는 이제 큼직한 몇가지 파편들로 쪼개져 있었다. 머리가 없어졌는데도, 몸통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목에서는 핏줄기가 죽죽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머리 없는 몸통은 움직임을 멈췄고, 목에서 나오던 피의 양도 점점 줄어 들었다.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뒤돌아 보았다.

장독대로 도망갔던 어미 고양이가 어느새 마당에 내려와 있었다. 어미가 나를 노려봤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대신 어미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정도로 니네 가족한테 죽을 죄를 진 거니?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거야?

난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지? 내가 정말 바라던 게 이런 거였을까?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글쓰기 인생에 슬럼프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 놈의 시골생활에서도, 아니 내가 죽는 날까지 아무런 소설도 나오지 못할 거라고 두려워했다. 실제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려고 시도해 보지도 않고서 성급하게 고양이와 슬럼프를 연관시켰다. 슬럼프에 관해서는 내가 전문가라는 생각에 빠져서.

어쩌면 시골에서 글을 쓰는 동안 알게 모르게 소설이 성공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쌓였는지도 몰랐다. 그 스트레스를 동우가 다치는 사고를 빌미삼아 고양이들한테 풀려고 했던 건지도 몰랐다. 확실치는 않다.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조금 전까지는 확실히 고양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확실히 슬럼프 걱정없이 완벽하게 멋진 소설을 일사천리로 완성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젖었었다. 슬럼프의 신이 고양이의 목숨을 먹고 내 창작능력을 도로 토해낼 것이라는 환상.

환상은 사라지고 죽은 고양이만이 남았다. 슬럼프의 신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힘이 풀린 난 쇠파이프를 마당에 떨어뜨렸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에게 다가갔다. 어미는 이제 나같은 건 신경쓰지도 않았다. 내 옆을 무심히 지나서 이제는 아무 움직임도 없는 새끼의 몸통으로 다가갔다. 흩어진 새끼 머리 파편들을 묵묵히 훑어보고 나서, 어미는 새끼 몸통을 덥석 물었다. 몸통을 입에 물고는 그대로 마당을 지나 창고 계단을 올라 장독대까지 올라갔다.

어미가 새기를 입에 문 채 아주 잠깐동안 나를 바라봤다. 세로로 찢어진 검은 눈동자가 나에게 원한의 메시지를 남겼다.

꼭 갚아주겠어.

어미는 장독대 담장을 타고 넘어 우리집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고양이가 사라진 뒤에도 우두커니 장독대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벌인 일들이 꿈만 같아서 쉽사리 헤어날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마당에서 벌어졌던 고양이와의 추격전은 끝나고 다시 조용한 새벽이었다. 아내는 잠이 깊이 들었는지 나와 보지도 않았다. 우두커니 나혼자 마당에 서서 대책없이 멍하니 있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바닥을 내려다봤다. 어미가 새끼를 물고 가면서 새끼의 목에서 새나온 핏자국이 마당에서 장독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쇠파이프로 새끼 머리를 부숴 버렸던 자리에는 큼직하게 시뻘건 피터지는 자국이 남았다. 내 발 밑 여기저기에 새끼 머리 파편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나는 그 파편들을 빠짐없이 주웠다. 머리통, 뇌수, 눈알, 아래턱 등이 조각조각 모아졌다. 모두다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파편들 전부를 힘껏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 밖은 산이니까 들짐승이나 새들, 아니면 땅 속의 미생물같은 것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쇠파이프도 가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역시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당에는 고양이들이 쓰레기 봉투에서 파헤친 고등어를 비롯한 음식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일일이 손으로 집어서 봉투에 담고 묶었다.

이제는 내 자신을 돌아볼 차례였다.

입고 있는 셔츠며, 바지며, 양말까지도 말이 아니었다. 녹슬고 이끼낀 쇠파이프에서 묻은 이상한 얼룩에, 고등어 비린내를 비롯한 음식 썩는 냄새에, 고양이한테서 묻은 시뻘겋다 못해 까맣게 보이는 피에 젖어 있었다. 전부다 벗어버리고 벌거숭이가 되었다. 부엌에 들어가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가져와 옷가지들을 전부다 담았다. 그리고는 방금 전에 수습한 음식쓰레기 봉투와 함께 대문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며칠 후면 쓰레기차가 와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 다음엔 뒤집힌 채 마당에서 뒹굴고 있는 -고양이들한테 집어던지는 용도로 사용했던- 바가지를 집어서 수돗가로 왔다. 바가지 한가득 물을 담아 몸에 끼얹으며 목욕을 했다. 몸은 시원했지만, 머리를 짖누르는 무거운 기분 -슬럼프!- 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욕을 끝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방에 들어갔다. 평소 때는 동우는 자기 방에서 잤지만, 오늘만큼은 엄마랑 안방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 나는 옷장에서 속옷과 츄리닝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이불 위에 누웠다. 곧바로 잠이 들었다.

4.

다음날 오후 늦게 서야 일어났다. 머리 속이 숨막히게 답답했다.

슬럼프!

어제 저녁을 굶어서인지 뱃속이 밥 달라고 난리였다. 나는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아내가 차려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밥상머리에 앉은 아내는 별로 말이 없었다. 마당의 고양이 핏자국이랑 대문 밖의 쓰레기 봉투들을 보았다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을 텐데.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제 새벽에도 안방 문을 가만히 열고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을 속속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상관 않기로 했다.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한 구태여 밝히고 싶지 않았다.

꾸역꾸역 밥을 다 먹고 나서, 마당으로 나갔다.

동우녀석이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며 놀고 있었다.

마당에는 핏자국이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동우가 흘렸던 것도, 새끼 고양이가 흘렸던 것도 전부 다 말이다. 아내가 물청소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동우에게 갔다. 오른손은 붕대를 하고 있어서 왼손으로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며 놀고 있었다. 놀고 있는 폼이 이제는 별로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나를 보자 동우가 웃었다. "아빠, 잠꾸러기. 지금 일어나면 어떡해. 소설 언제 써?"

소설얘기에 무겁운 머리가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애써 동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제를 딴데로 돌려야지. "이제 손 안 아퍼?"

"움직이려고 하면 쪼끔 아프고 간지럽고 그래. 근데 많이 안 아퍼. 엄마가 며칠 있으면 다 낫는대."

"그것 참 다행이다."

"근데 오늘은 고양이들 안 왔어. 꼭 만나서 사과해야 되는데."

가슴이 놀라서 움찔했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쇠파이프, 새끼의 박살난 머리, 어미의 눈빛. 원한을 품은 눈빛.

꼭 갚아주겠어!

동우랑 고양이 얘기하기 싫었다. 아니 어느 누구와도 다시는 고양이 얘기하기 싫었다. "아빠는 이제 글쓰러..."

동우가 성한 왼쪽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자기 말을 아빠가 꼭 들어줘야 한다는 듯이. 비겁하게 피하면 안된다는 듯이.

"어저께 엄마가 호떡 먹으라고 후라이팬에 구워 줘서 마당에서 먹었어. 엄마가 2개 줬는데 하나 먼저 먹고 남은 것도 또 먹을려고 그러는데 고양이가 왔었거든. 엄마 고양이랑 새끼 고양이랑. 자기들도 호떡 달라고 막 내 바지 잡고 그래서 나도 화가 나고 그러니까 고양이들 골탕 먹으라고 장난쳤어." 동우는 입 안이 마른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음, 그래서 '이거 먹어'하면서 호떡을 고양이들한테 주는 척하다가 고양이들이 잡을라고 그러면 '뻥이야'하고 약올리면서 호떡을 고양이들이 못잡을만치 높게 들었어.

그래도 고양이들이 자꾸 달라고 그래서 내가 계속 그렇게 장난쳤어. 한 열번정도. 그랬드니 화났나봐. 엄마 고양이가 이렇게..." 동우가 붕대를 칭칭 동여맨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어저께는 막 아프고 그래서 고양이가 막 밉고 그랬는데, 오늘 생각해 보니까 내가 잘못했어. 아빠, 그치? 내가 잘못했지?"

"글쎄. 고양이들이 먼저 우리 동우한테 귀찮게 매달리고 그랬으니..." 동우가 내가 새벽에 한 짓을 알면 뭐라고 할까? 나보고 고양이를 찾아가 사과하라고 그럴까?

"엄마한테도 말해봤는데, 내가 잘못했대. 그래서 아까부터 마당에 나와서 고양이들 기다렸어. 근데 아직도 안 와."

고양이들은 오지 않을 꺼야. 아빠한테 험한 꼴을 당했거든.

"동우한테 아프게 해서 고양이들도 미안하니까 안 오는 건지도 몰라. 조금만 더 기다려 보다가 안 오면 방에 들어가서 놀아. 아빠는 글쓰러 들어갈께."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동우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집필실로 도망쳤다.

정말이지 고양이 얘기는 이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양이의 한 [1]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42 posted by 조재형
한국 공포장르의 고전 "전설따라 삼천리"와 "전설의 고향"의 전통을 오늘날에 되살려, 고양이를 소재로 공포소설을 써 보았습니다. 많이 미흡한 작품이지만, 그러려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세요.

경고: 소설 내용 중에는 자극적인 성묘사와 잔인한 살인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정신적인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고양이의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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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 소설은 언제 나오나요?'

그 당시 만나는 문화계 인사들은 항상 이렇게 물었다.

그럼 나는 항상 거의 똑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한창 집필 중이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출판사에 원고를 넘길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이번엔 정말입니다. 아,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소설가다. 3년동안 아무런 글도 못 쓰고 있는 한심한 소설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는 글을 쓰느라 바쁜 척 온갖 엄살을 다 떨면서도, 막상 집필할 때 쓰는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두고는 멍하니 게임이나 하고 포르노나 보고 있는. 뭐 간판만 소설가지 백수나 다름없다. 아니 백수인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처음부터 내 인생이 이렇게 한심했던 것은 아니다. 이래뵈도 꽤 이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나름대로 화려하게 등단했던 몸이다. 팍 까놓고 말해서 그때도 그 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에 아는 형이 있어서 돈을 발라가며 로비를 해서 얻은 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작품이 문학상 수상작으로서의 자질이 어느 정도는 있었으니까 로비도 먹혀 들어간 것이다. 아무나 돈 싸들고 간다고 문학상을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상을 탄 후 나는 5개월 뒤에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상을 수상했던 덕분인지 출판 불황이다 뭐다했어도 꽤 팔려 나갔다. 어떤 평론가는 나에게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거대한 재목'이라는 극찬까지 해주었다. 물론 내가 사주는 술을 떡이 되도록 처먹고 술김에 한 말이기는 해도. 그 후 1년 뒤 또 한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번엔 반응이 없었다. 출판사도 나도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분 나쁘게 평론가와 신문기자들이 내 소설을 비난했다. 신인다운 패기 없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잔뜩 화가 난 나는 서둘러 5개월 뒤 단편소설집을 펴냈다. 이번엔 정말 300권도 팔리지 않았다. 출판사 사장마저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지고 있었다. 처음의 반짝 성공 후 실패를 거듭한 전업소설가로서 예전 작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걸작을 내놔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들어 온종일 괴로워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그 동안 나는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두고 있는 몸이었기에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짓눌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아내가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해대며 친정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빨리 뭔가 쓰자. 돈이 될만한 걸작을.

어떻게 쓰면 그렇게 될까?

내 머리 속은 돌멩이들로 가득 찬 듯이 무거웠다. 그 무거운 머리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단 한 줄의 글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3년을 놀았다. 웃음을 잃어 가는 아내와 날이 갈수록 성장해서 4살이 된 아들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그러다 문득 환경을 바꿔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하고 삭막한 도시에서 벗어나 탁트인 시골에서 살면 도시생활로 무거워진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환경을 바꾸면 생활이 바뀔테고, 그러면 안써지던 글도 잘 써지겠지. 유명한 소설가들도 다들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글쓰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잘먹고 잘살고 있지 않던가?

그 즉시 시골에서 살만한 집을 알아보았다. 까마득한 산골에 있는 시골집을 소개받았다. 맘에 쏙 들었다. 완전히 도시와 격리되어 모든 것을 잊고 집필에만 열중하기에는 그만이었다. 집주인이 도시로 이사가고 나서 오랫동안 비워놨던 집이라서 임대료도 거저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그 곳으로 이사가자고 졸라댔다. 딱 일년이야 그 동안 소설을 완성시켜서 그 다음엔 꼭 서울로 올라 올 거야. 도시에서만 자라난 아내는 망설였지만, 이번이 소설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기회라고 설득하는 내 앞에서 결국 오케이하고 말았다. 그녀도 백수로 망가져가는 내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간단히 집수리를 해놓고 우리 식구는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이삿집 트럭이 시골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까지 해주었다. 젊은 사람들은 죄다 떠나버려 노인들만 우글거리는 마을이라 우리 가족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마을 청년회 회장이라는 사람의 나이가 64살이니 나는 이 마을에서 애기나 마찬가지였다. 작년에 칠순잔치를 했었다는 이장님은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살게 돼서 기쁘다며 오래오래 이 마을에서 잘 살으라고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물론 난 속으로는 '오래오래 여기서 썩으라니 택도 없는 소리 마슈!'라고 생각했지만, 공기좋은 곳에서 살게 되어서 너무 좋다고 괜히 기쁜 척을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래 내 계획은 딱 일년만 살다가 이 마을을 뜨려고 했었다. 끝내주는 소설 하나만 완성시키고 나면. 이 마을은 내게 있어 그저 성공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우리집은 마을 뒷산 언저리에 있었다. 마을에서도 좀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 기를 쓰고 들르지만 않는다면 아주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무대문을 열고서 들어서니 넓은 마당을 지나서 마루가 보이고 그 양옆으로 방이 있었다. 왼쪽의 넓은 방은 안방이었고, 왼쪽의 작은 방 두개는 각각 내 집필실과 아들 녀석의 방이었다. 아내는 서울에서 전세로 살던 연립주택보다 시원시원하게 넓어서 좋다고 말하며 웃었다. 정말 좋아서 웃은건지 애써 좋은 척 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일을 저질렀고, 이제부터는 이 시골 구석에서 생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동우녀석은 마당을 깡총깡총 뛰어 다녔다. 이사오기 전에는 동네 친구들과 헤어진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좀 괜찮아진 모양이다. 애들은 그게 좋다. 뭐든 안좋은 일들을 금방금방 잊을 수 있으니.

이삿짐 차가 가버리고 나서 아내와 나는 집 앞에 풀어놓은 자잘한 짐들을 부지런히 날랐다. 가구는 전에 살던 집주인이 남겨 놓고 간 것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사치를 부리기엔 우리 가족은 가난했다.

"아빠 저거 봐!" 이불을 옮기려는데 동우가 내 바지를 붙잡고 소리쳤다.

마당 왼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고, 창고 옆에 붙은 시멘트계단을 올라가면 창고 지붕이 장독대였다. 집주인이 남겨놓고 간 커다란 항아리들이 조용히 앉아있는 곳이었다. 항아리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엎드리고 앉아서 나와 동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란 털 사이로 검은 줄이 쳐져 있는 귀여운 고양이들이었다. 하나는 꽤 컸지만, 나머지 하나는 새끼였다.

"엄마고양이랑 새끼고양인가봐." 작은 상자를 옮기던 아내가 나와 동우 옆에 와서 말했다. "너무 귀엽다 그치?"

"응 귀여워.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다." 동우는 조금전까지 펄쩍 뛰어 다니던 것과는 달리 내 옆에서 얌전히 서 있었다.

고양이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눈도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냥 우리 가족을 바라볼 뿐이다.

"엄마고양인지 아빠고양인지 그냥 보고 어떻게 알아?" 언제나 새끼 옆에 붙어 있는 동물을 보면 누구나 암컷일거라고 짐작한다. 수컷은 언제나 새끼를 팽개치고 다니는 책임감 없는 나쁜 놈이라는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것 같다. 남자는 다 그런거라고. 정말 섭섭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알아 거시기 까봤어?' 라고 아내에게 묻고 싶었지만, 아이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아빠고양이가 엄마고양이가 시장간 동안 새끼고양이를 돌봐주고 있는 지도 모르잖아. 동우야 그치?"

"글쎄, 내 동물적인 직감으로는 엄마고양이가 맞는 것 같애."

동물적인 직감? 요즘 네 살짜리 꼬마들은 어디서 그런 끔찍한 표현을 배우는 걸까? TV에서 그런 것도 가르쳐 주나?

"2 대 1! 우리가 이겼다. 엄마고양이 만세!." 아내가 동우녀석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다. "아빠가 졌네~."

나는 다수결의 횡포라고 맞서고 싶었지만, 이내 단념했다. 고양이한테 고추가 달렸냐 안 달렸냐하는 사소한 일로 다 큰 남자어른이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거대한 재목'이라고까지 불렸었던 재능 있는 소설가가- 말다툼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난 그렇게 유치한 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한다는 자체가 나의 유치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나는 머리가 복잡해 졌다. 고양이 한 마리로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다니.

그 때, 어른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위로 쭉 폈다. 그러더니 엉덩이를 깔고 항아리 위에 앉아서 뒷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하얀 배가 드러난 가운데, 벌어진 다리 가운데에서 짙은 빛깔의 갈라진 속살이 우리 가족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더 확실하게 보여 주려는 듯, 앞다리로 허벅지 살을 당겼다 놓았다 주물럭거렸다. 허벅지의 움직임에 따라서 고양이의 갈라진 속살은 금붕어의 주둥이처럼 뻐끔뻐끔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새끼고양이는 자기 엄마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음탕한 짓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하게 엄마의 성기와 놀라고 있는 우리 가족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 가족이 자기를 두고 아빠니 엄마니 하는 소리를 알아 들었나? 나는 어미 고양이의 돌발행동에 어쩔 줄 몰라하며 신음소리같은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엄마고양이 맞네."

아내는 멍하니 고양이 거시기를 구경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동우도 엄마처럼 넋이 나가있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네 살짜리 사내아이한테 보여 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옳은 걸까? 얘는 지금 고양이 거시기를 보고서 어떤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런 것도 TV에서 가르쳐 주었을까?

"고양아 니들 여기 사니? 만나서 반갑-" 어색한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나는 아무말이나 내뱉었다. 장독대 앞으로 몇걸음 나서며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들은 내가 앞으로 나가려고 발을 떼는 순간 이미 몸을 움찔거렸다. 어미 고양이가 앉아있던 몸을 순식간에 웅크렸다. 고양이들은 장독대에 붙어 있는 낮은 담장으로 올라가 달리더니 우리집 지붕으로 훌쩍 뛰어 올랐다. 담장과 지붕 사이는 거리가 1미터는 좀 넘는 것 같았는데도, 고양이들은 아무 문제없이 지붕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고양이들은 지붕 위에서 우리 가족의 얼빠진 모습을 힐끔 쳐다보더니, 반대편 지붕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집 뒤에 있는 산으로 가는 것 같았다.

"들고양인가?" 아내가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산에 사니까 산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하는 짓이 꽤 야한데?"

"잘 씻지 않아서 가려웠나봐. 자자, 얼른 짐 다 나르고 푹 쉬자."

우리 가족은 다시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내 손에 잡힌 짐은 동우의 그림책을 끈으로 묶어놓은 것이었다. 맨 위에 묶인 그림책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피카츄 조심해! 냐옹이 화났다! 포켓몬스터의 주인공 노란 피카츄가 고양이한테 목을 물리는 그림이 표지였다. 목을 물린 피카츄가 괴로운 비명을 지르는데 피카츄를 데리고 다니는 모자 쓴 소년은 그 뒤에서 뭐라고 막 소리지르고 있었다.

냐옹아 피카츄를 죽여! 목을 뜯고 피를 마셔! 이제부터 냐옹이 네가 주인공이다! 피카츄같이 순해빠진 놈은 필요없어. 너처럼 잔인한 놈이 난 좋아!

그림책 표지 속의 고양이 이름이 냐옹이던가?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동그란 얼굴 주위로 수염이 삐죽 튀어나온 그 고양이 그림을 보고 있느려니 방금 전의 고양이들이 생각나서 기분이 묘해졌다. 특히 어미 고양이가 인상에 남았다. 암컷 고양이의 거시기도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었기에.

그러나 어수선한 이삿짐 정리를 하느라 고양이 생각은 이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2.

시간이 지날수록 시골집으로 이사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일 집필실에 눌러 앉아 노트북 컴퓨터로 글을 써나갔다. 글을 쓰는 속도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꾸준히 빨라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3년을 백수로 지내며 글 한줄 못쓰고 빌빌대던 사람이 정말 나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집필 중인 작품의 제목은 "마지막엔 누구나 혼자가 된다". 사업에 실패하고 노숙자로 전락한 한 중년남성이 방황하던 여대생과 만나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에서 나는 밑바닥까지 몰락한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거칠어질 수 있는지 묘사하고 싶었다. 이전의 내 작품성향보다 많이 과격한 작품이었다. 내 계획대로만 완성된다면 오랜 동안의 공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문제작이 탄생할 것이다. 계획대로만 완성된다면.

나로서는 글이 잘 써져 신났지만, 사실 아내와 동우에겐 많이 미안했다. 모두들 자극적인 도시생활이 그리울텐데도 묵묵히 참고 견뎌 주었다.

그래도 아내와 동우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나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웃음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불후의 명작으로 태어날 나의 소설을 위해. 정말 난 웃긴 놈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내와 동우에게 가끔씩 웃음을 되찾아 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앞에서 얘기했던 고양이였다. 이사오던 날 마주쳤던 고양이.

엄마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

그 고양이들은 항상 장독대 항아리 위에 앉아서 마당에서 얼쩡거리는 우리 가족을 커다랗고 둥근 눈으로 쳐다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우리 가족이 한발짝이라도 장독대 쪽으로 다가가면 고양이들은 쏜살같이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 뒤로 좀 익숙해졌는지 아내와 동우가 장독대로 먹을 것을 던져주면 낼름낼름 받아 먹기는 하는데, 절대로 접근은 허용하지 않았다.

무료했던 아내와 동우는 매일매일 찾아오는 고양이들을 보는 것이 큰 낙이 되었다. 내가 집필실로 쓰는 골방에서 나올때마다 나를 붙들고 오늘도 고양이가 왔다갔다, 너무 귀엽다, 엄마고양이가 새끼고양이랑 꼭 같이 다니더라, 새우깡을 주었는데도 잘 먹더라 생선만 먹는 건 아닌가보더라, 고양이가 하품하는 거 봤냐... 하여튼 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풀어 놓았다. 나는 가족들이 고양이 얘기를 하면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시골생활이 얼마나 외로웠으면 도시에서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도둑고양이들한테 정을 쏟을까. 빨리 소설을 완성해서 서울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는 고양이들이니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골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있는데, 동우가 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아빠 나와봐. 빨리빨리, 지금 나와야 돼."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동우는 자꾸 재촉하기만 했다. 아빠 글쓴다고 조용해야 되니까 TV 볼륨도 줄이던 애가 웬 호들갑인가 싶어서 마루로 나갔다.

마당에 아내가 쭈그린 채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나를 돌아보고는 씩 웃으며 손으로 승리의 V자를 지어 보였다. 동우도 아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같이 쭈그려 앉았다. 무슨 일인데 저래?

아내와 동우 앞으로 세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 고양이 두 마리가 앉아서 열심히 새우깡을 먹고 있었다. 장독대에 있어야 할 고양이들이 어떻게 마당에 내려왔지?

"우리가 얘네들 길들였어. 동우랑 내가." 새우깡 봉지를 들고 있는 아내가 신이나서 말했다. "고양이들이 오늘도 장독대에 놀러 왔길래 새우깡을 던져 줬거든, 너무 잘 먹드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마당에 새우깡을 놓으면 마당으로도 내려 오겠다 싶은거야, 그래서 장독대 계단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아래쪽으로 새우깡을 놓았더니 고양이들이 처음엔 주저하더니만 이렇게 내려왔어. 어때 신기하지?"

좀 놀랍기는 해도 엄청나게 신기할 것까진 없었다. 이사온 지 꽤 지나서 우리 가족들 얼굴도 익숙해졌겠다, 나타나기만 하면 먹을 거 던져 주겠다, 고양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잖은가? 나는 한동안 아내와 동우 뒤에서 고양이들이 과자 먹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다 살짝 고개를 쳐든 어미 고양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이사오던 날이 생각났다. 장독대 위에서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며 음부를 애무하던 어미 고양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고양이가 내 생각을 읽은 걸까? 과자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시선은 줄곧 나에게로 향해 있다. 나를 보고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 착각이겠지.

"고양이가 자기 경계하나봐. 자기 나오니까 계속 쳐다보내. 아까까진 새우깡 먹느라 정신없더니만." 아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자기 좋아하는 거 아냐? 애 하나 딸린 유부녀가 애 하나 딸린 유부남을 유혹하다?"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웃는다. 동우도 따라 웃는다. 이 녀석, 도대체 4살짜리 꼬맹이가 엄마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웃는 걸까?

"실없는 소리 하지도 마." 나는 머리 속을 뒤흔들던 고양이 거시기 생각을 떨쳐 버리고, 고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저 아내 곁에 섰을 뿐인데, 어미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캬∼하는 소리를 내더니 냅다 뛰어 달렸다. 어미의 울음소리에 즉시 반응한 새끼도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새끼는 어미보다 뛰는 것이 좀 느린 듯 했다. 고양이들은 창고 옆에 난 계단을 뛰어 올라 늘상 앉아 있던 장독대 항아리 위에 앉았다. 어미가 나를 보고 또다시 캬∼하는 경계의 울음소리를 내더니, 고양이 두 마리 다 담장을 타고 우리 집 밖으로 뛰어 내렸다.

"아빠 때문에 고양이 도망갔다." 시무룩해진 동우가 투덜댔다.

"미안해서 어쩌냐. 괜찮아. 고양이들 또 올거야."

"아빠! 다음부터는 고양이들한테 오지마!" 동우가 자기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죽을 죄를 진 건가?"

"그럴지도." 아내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쨌든 고양이가 자기 좋아하는 건 아닌가봐. 자기 오니까 싫은 소리 내면서 달아나네. 아니지. 좋아하는 사람이 오니까 부끄러워서 숨은 건가? 혹시 유부녀가 한번 튕겨보는 거 아냐?"

"실없는 소리 하지도 마." 나는 아직도 고양이에게 미련이 남은 듯 쭈그리고 앉아서 마당에 떨어진 새우깡 쪼가리들을 쳐다보고 있는 아내의 등 뒤에 다가가 꼭 안아 주었다. "너 웃는 얼굴 보니까 참 좋다."

"내가 언젠 맨날 울었나?"

"지금 너 많이 힘든 거 알아."

"............"

"조금만 참자. 지금 쓰는 소설 다 쓰면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자." 아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 소설은 느낌이 아주 좋아. 꼭 대박 날거야. 나 믿지?"

"그럼 내가 널 믿어야지, 딴 남자 믿냐? 옆집 아저씨 믿어도 돼?"

난 낄낄대며 아내를 더욱더 꼭 안았다. 아내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유방을 만지작거렸다. "나 니 가슴 너무 좋아. 세계 제일이야." 아내가 뻥치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다.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은 정말로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날 몸에 착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은 아내를 보는 순간 난 그녀를 사랑하게,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녀의 가슴을 사랑하게 되었다. 허전하게 작지도 않고 무식하게 커다랗지도 않은 딱 좋은 정도의 아름다운 그 가슴. 그 자리에서 나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야 말았다.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난 아내의 가슴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만약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서 가슴을 제거해야 한다면? 난 아마 자살할지도 모르겠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니 가슴 내 보물 제 1호야. 누구한테도 안뺏길거야." 아내의 유두를 비틀며 그녀를 더욱 힘차게 안았다. 아내가 몸을 움찔하며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내는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들고 있는 새우깡 봉지가 부스럭 소리를 냈다. 내가 아내의 유방을 제대로 작업중이라는 신호겠지. "이렇게 네 유방을 내 손으로 느끼고 있으면 정말 행복해. 그치만 더 행복할 때는 네 유방을 내 혀로 느끼고 있을 때야. 거기다 더더더 행복할 때는 네 유방을 내..."

"저기 좀 봐!"

느닷없는 아내의 큰소리에 부부간의 에로틱한 분위기는 깨졌다. 아내는 장독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독대 항아리 위에 조금전에 도망갔던 고양이 두 마리가 태연히 앉아 있었다. 고양이들이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부둥켜 안고 있는 우리 부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난 고양이 따위에 관계없이 방금 전까지 훌륭하게 진행되던 유방 마사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내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던 나는 일어선 아내의 히프를 잠시 멍하니 감상하다 힘없이 일어섰다.

"고양이들이 다 보고 있는데, 부끄럽잖아. 쟤네들 언제부터 저기 있던거지?"

"지들이 본다고 뭘 알겠어?"

"아까 네가 한 말 고양이들이 다 엿들었겠다."

"뭐, 네 유방에 대한 나의 감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던거? 야 여기서 장독대까지 거리가 있는데 어떻게 듣냐? 그리고 큰소리도 아니고 우리 둘만 듣게 작게 말했는데."

"고양이들은 귀가 좋잖아."

"지선이 유방 한 세트는 상훈이 보물 제 1호다! 이런 말을 들어버렸다구? 설마 들었더라도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른텐데 뭐." 나는 아내에게만 들릴만한 작은 목소리로 고양이들을 향해 말했다. "고양이들아, 정말 지선이 말대로 니들이 그렇게 귀가 좋아서 내 말이 들린다면 오른손 들어봐라."

새끼고양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인형처럼 꼼짝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미 고양이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정확히 오른쪽 앞발을 들어올렸다. 나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장독대 항아리 위에 굳게 딛고 서 있던 오른쪽 앞발을.

"어머, 상훈이 네 말 다 알아들었나봐. 그렇게 작은 소리로 말한건데. 그리고 사람 말도 무슨 뜻인지 다 아나봐." 아내가 감탄했다.

나도 감탄했다. 정말 아내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 천재 고양이가 놀러 오다니! 놀라움과 경이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양이는 들어올린 앞발로 코를 부비더니 다시 항아리 위에 내려 놓았다.

"뭐야? 그냥 코 간지러워서 손으로 긁은거니?" 아내는 실망한 나머지 고양이한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니지. 혹시 내 남편 말 듣고 손 들었다가 때마침 코가 간지러워서 긁은거였니? 그렇겠지? 자 그럼. 이번엔 내가 명령한다! 옆에 앉은 네 새끼 등을 긁어봐!"

고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미도, 새끼도.

"거봐, 쟤네들이 뭘 알겠어? 그냥 짐승이지 뭐. 그 손에 들고 있는 새우깡이나 던져줘. 고양이들이 그거 먹고 싶어서 힘들게 또 여기까지 온거지, 지선이 밑에서 머슴 살려고 온 거 아니다."

아내가 주먹으로 내 팔을 툭 쳤다. 나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아내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집필실로 쓰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고양이 때문에 -그리고 나의 보물 제1호를 마사지 하느라- 글쓰기가 너무 오래 지체되었다. 잠시 팽개쳐 두고 나온 소설을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글쓰는 리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조급한 감정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시골집으로 이사오고 나서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집필실에 들어가면서 옆방의 동우에게 고양이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해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동우는 언제 토라졌냐는 듯 활짝 웃으며 나에게 "진짜야?"라고 물으며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아내와 동우가 던지는 새우깡 세례를 받으며 고양이들이 장독대에서 마당으로 내려왔다. 아내와 동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내는 미련을 못 버렸는지 고양이한테 명령을 내렸다. "새우깡을 만지지는 말고 혀로만 핥아라!" 이번에도 실패.)

나는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한 채, 집필실 책상 위에 놓여진 노트북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쓰다만 소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소설 속의 주인공 남성이 창녀 취급하는데 대해 화가 난 여대생이 난리를 치는 장면이었다.

날 우습게 보지마! 이제까지 네가 시키는대로 다 해왔다고 내가 바본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새꺄! 너를 그때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난 생각했어. 날 건드리면 널 가만 두지 않겠다고. 웃어?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 넌 내가 어-얼마나 무서운 년인지 몰라!

여대생의 마지막 대사를 되뇌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나는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리 속이 회오리 바람이 몰아 치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조금 전의 불안감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렇게 소설이 잘 써지다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자신도 못 믿을 정도였다. 신이 난 나는 더욱더 집필 속도를 올렸다. 고양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