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워크 / The Long Walk

작품 감상문 2007. 5. 12. 01:0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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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g Walk

(1979년 리처드 바크먼 소설)

"나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시간 날때마다 걸어다녀 보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건강에 좋으니까요. 게다가 재미도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1962년)

아주아주 먼 옛날, 국가 안보에 내가 꼭 필요하다는 강력한 요청을 받고, 나는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훈련소에서 모진 고문...이 아니고 훈련을 받았다. 맨마지막 훈련은 행군이었다. 배낭 매고 총 들고 그냥 걷는 것이다. 부대장은 행군을 위해 운동장에 모인 훈련병들에게 힘찬 어조로 연설을 했다. "이제까지 여러분이 훈련소에 와서 받은 여러가지 훈련들은 모두다 지금의 행군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부디 훈련을 통해 다져진 체력과 강인한 군인정신을 발휘해서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행군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길 바란다. 자, 그럼 이제 렛츠 고~ 고~ 고~!"

나는 부대장이 괜히 훈련병들을 겁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걷는 것이 뭐가 힘들단 말인가? 나는 예전부터 걷는 것을 좋아해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길 좋아했기 때문에, 행군이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의 여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다. 군화 속 발바닥에서 무수히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물집들을 상대하는 동안, 걷는다는 것이 죽을만치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고 있으려니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던 아주 사소한 존재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잠깐동안의 휴식시간에 먹던 초코파이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몰고 가는 스쿠터 뒤에 타고 가던 하얀 원피스를 입은 민간인 소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쁜 여성이었다. 난 눈물을 흘렸다. 밤하늘에 무수히 깔려있는 초롱초롱 별님들을 바라보며 불러보는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라는 노래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감동적인 노래였다. 난 눈물을 흘렸다. 행군을 하며 걷는 내내 눈물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걷는다는 것이 눈물에 얼굴을 묻을 정도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킹도 걷는 괴로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킹도 힘들게 걸어본 경험이 있는 걸까?

"The Long Walk"는 스티븐 킹이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966년 가을에 시작해서 대학 신입생이던 1967년 봄에 완성한 소설이다. 킹은 이 소설을 67년 가을에 랜덤하우스 출판사가 주최한 소설 경연대회에 응모했다가... 미역국을 먹는다... 생일도 아니면서... -_-;;; 마음에 상처를 입은 킹은 "The Long Walk"가 아주 형편없는 수준의 소설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인기작가로 성공한 킹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Rage"라는 소설을 출간한다. 출판사측에서는 리처드 바크먼의 두번째 소설은 어떤 작품이냐고 물어보게 되는데, 킹은 이때 "The Long Walk"를 떠올린다. 그래서 이 소설은 리처드 바크먼의 두번째 소설로 출간되고 만다. 그렇다. 킹은 어린 시절 홧김에 "The Long Walk"가 형편없는 소설일거라고 단정해버리고 말았지만, 사실은 그 후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형편없는 소설이 아니니까. 아주 훌륭한 소설이니까. 하늘만큼 땅만큼.

미래의 미국은 말 한번 잘못하면 군인들한테 끌려가는 무서운 사회가 돼버린다. 이런 사회에서 전국민이 열광하는 끝내주는 스포츠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롱워크(the Long Walk) 경주. 매년 엄격한 신체검사와 심리검사를 거쳐 TV 중계로 소년들을 선발해서 롱워크 경주에 내보낸다. 주인공 레이 개러티를 비롯한 백명의 소년들이 올해의 롱워크에 참여하게 된다. 매년 경주를 진행하는 사람은 메이저(the Major)라는 군인인데, 국민들에게는 물론 롱워크에 참가한 선수들한테서도 존경과 열광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스타다.

롱워크 경주의 규칙은 간단하다. 길을 따라서 끝까지 걷는 사람이 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전국민이 열광할리 없다. 롱워크 선수는 시속 4마일 아래로 속도가 떨어지면 안된다.(4마일≒6킬로미터) 속도를 위반할 때마다 경고를 받는다. 그렇지만 그 후 한시간동안 또다른 경고를 받지 않으면 전에 받은 경고는 없던 것으로 처리된다. 시시한가? 여기 또다른 살 떨리는 규칙이 존재한다. 경고는 세번까지만 허용된다. 경고가 네번까지 누적되면 그 즉시 현장에서 죽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살해된다". 그렇다! 롱워크는 결국 목숨을 걸고 하는  스포츠였던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걷지 않으면 죽는다. 1명만 남고  99명 전부 다. 과연 그 한명은 누가 될 것인가? 이러니 전국민이 흥분하지 않겠는가?

롱워크 우승자에게는 상이 주어진다. 그 상이란 우승자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역시 죽음을 헤치고 거머쥔 우승에 걸맞는 화끈한 상이다.

개러티를 비롯한 백명의 소년이 롱워크 출발선에 집결해서 번호표를 받고 경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 "The Long Walk"는 시작된다.(개러티의 번호는 47번, 스티븐 킹이 태어난 해는 1947년, 우연의 일치인가? 작가의 유머인가?) 그리고 소설은 계속해서 소년들이 걷는 모습을 경기가 끝날 때까지 끈질기게 추적한다. 물론 그들이 경고 누적으로 차례차례 죽어나가는 모습도.

이 소설을 읽다보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소설 내내 주로 소년들이 걷는 모습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화끈한 액션장면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차근차근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모습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오랫동안 걷는 사람에게 어떤 신체적 변화가 생길 수 있는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신체적 변화에 발맞춰서 황폐해지는 사람의 심리가 더욱 처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 개러티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진행에 푹 빠져들다 보면, 처음 경기 시작때는 선수들끼리 농담도 하면서 마치 소풍가는 기분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차츰 선수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순간이 오고 남은 선수들끼리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친구로 극한 상황 속에서 걸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자신이 실제로 참여하는 듯한 체험까지도 하게 된다. 나는 그랬다.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을 둘러싼 소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주인공 개러티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와 체념의 감정에 동화된 나머지 가끔씩은 달아오른 감정을 식히기 위해 나는 책을 잠시 덮어야 했다.

내내 우울하게 전개되던 분위기에 걸맞게 이 소설의 결말도 우울하게 끝난다. 결말까지 오게 되면 더이상 우승자가 어떤 상을 받고 싶어할까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사실 궁금하기는 하지만. 결말부분에서 보여지는 극한의 묘사는 일품이다. 결국 롱워크의 우승자 조차도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모든 인간들도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죽음 앞에 한발자국씩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보면 롱워크 경주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롱워크 경주가 시작되면 좋은 싫든 살기 위해서는 기를 쓰고 걸어야만 하듯이, 우리 인생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세상에 태어나면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아웅다웅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모든 인간은 인생이라는 틀 안에서 롱워크 경주선수들인 것 같다. 죽기 싫으면 걸어라. 계속 걸어라. 죽을 때까지 걸어라... 걷지 않으면 인생 끝장이다.

롱워크 경주는 전국민의 인기 스포츠이기 때문에 선수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동네 주민들이 총출동해서 구경나와 있다. 각양각색의 구경꾼들 모습이 소설 속에서 무척 자주 언급되어 지는데, 그들 중에는 선수들을 염려하고 격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를 들면 수박을 들고 나와 선수들에게 전해주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한바탕 해프닝를 벌이는 아저씨-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 확실한 롱워크 선수들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을 느끼며 열광하는 사람들이다. 공개처형을 보러나온 사람들의 심리인 것이다. 그들은 선수가 경고를 4번 받아 군인들한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좋아서 아주 난리를 친다. 처음엔 구경나온 사람들한테 기분좋게 손을 흔들어 주던 롱워크 선수들은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구경꾼들의 속마음을 깨닫고서 냉소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선수들과 구경꾼 사이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면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 개러티의 에피소드다. 개러티는 계속해서 걷다보니 기진맥진해져 있는데, 미리 약속했던 장소에서 구경꾼들 속에 서있는 엄마와 여자친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개러티는 엄마와 여자친구에게 다가간다. 엄마와 여자친구의 손을 잡는다. 이제 경주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총을 든 군인이 개러티에게 경고를 준다. 경고 하나. 잠시 후 경고 둘. 잠시 후 경고 셋.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이 열광한다. 한 인간의 죽음이 임박한 것이다. 중계방송하는 TV카메라도 그런 모습을 열심히 화면에 담아 방송한다. 정말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The Long Walk"는 국내에 "롱 워크"(황금가지출판사), "롱워크"(희성출판사) 또는 "완전한 게임"(반도기획)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판이 출간되었다. 여러분도 이 작품을 읽고서 내가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던 그 아스라한 감정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이 작품을 강력추천한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서 이런 멋진 소설을 쓴 스티븐 킹의 재능이 부럽기만 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 그저... 여자생각 뿐이었는데...

이 소설은 아직까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영화로 만들면 의미심장한 주제가 살아 숨쉬는 멋진 영화가 탄생할텐데 왜 능력있는 감독들이 나서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모습만 보여주고 끝나는 지루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위험성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불현듯 롱워크 경주가 아주 친숙하게 느껴졌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물론이고 여러분 모두다 아주 오래전에 죽음의 경주를 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정자가 난자를 만나러 가는 죽음의 경주말이다. 롱워크가 걷는 경주라면, 우리가 체험했었던 경주는 꼬리로 헤엄치기였다. 평균 3억마리의 정자가 경주에 참가하게 되는데, 예선전을 통해 10% 약 3천만마리의 정자가 본선에 진출하게 되고, 본선에서는 결국 단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에 골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뒤처진 나머지 2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마리의 정자는 죽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롱워크 경주가 아니던가! 우리 모두는 이렇게 수많은 죽음을 뒤로 한 채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태어났기에 인간의 생명은 누구나 존엄하고 고귀한 것이며, 자살을 통해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은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2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열심히 살자구요~. 3억명과 겨뤄서 우승을 거머쥔 강인한 우리들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자꾸만 엉덩이의 꼬리뼈가 간지럽다. 꼬리뼈가 그 옛날의 활약상을 회상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