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리 스톰 / Storm of the Century

작품 감상문 2007. 5. 12. 00:57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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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m of the Century

(1999년 시나리오)

스티븐 킹은 이제까지 발표한 작품들의 아이디어가 맨처음 떠올랐던 순간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It"의 스토리는 나무 다리를 건너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다가 "The Three Billy Goats Gruff"라는 전래동화가 연상되면서 소설을 생각해냈다. "쿠조 Cujo"는 병에 걸린 세인트 버나드 개를 직접 목격했을 때이다. "Pet Sematary"는 킹의 딸 나오미가 기르던 고양이가 집 근처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었을 때 딸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해 냈다.

그런데 몇몇 작품들은 어떻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런 작품들은 특별한 아이디어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로 인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우연히 강렬한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는데, 그 이미지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서 저절로 캐릭터가 생겨나고 스토리도 생겨나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킹 본인 조차도 그런 식으로 소설이 탄생하는 것에 대해 미스터리라고 말한다. "그린 마일 The Green Mile"이 그런 작품에 속한다. 킹의 머리 속에 감옥 안에 서있는 몸집이 큰 흑인 죄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흑인은 캔디와 담배를 실은 낡은 손수레가 굴러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흑인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감옥에 갇혀 있을까? 이야기는 킹의 머리 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Storm of the Century"는 스티븐 킹이 시나리오를 쓴 미니시리즈로서,1999년 미국 ABC방송을 통해 3부작 미니시리즈로 방송되었다.

킹이 시나리오를 쓰게 된 동기도 "그린 마일"처럼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감옥 안의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백인 남자의 이미지. 발꿈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팔은 두 무릎 위에 올려져 있으면서 두 눈은 깜빡거리지 않는다. 킹은 상상의 날개를 폈다. 이 남자는 "그린 마일"의 흑인죄수 존 커피같은 선량한 인간이 아닐거야. 아주 나쁜 사람.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감옥 안의 남자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항상 킹을 괴롭혔다. 운전하는 중에도, 눈검사를 받으러 간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을때도, 심지어는 한밤 중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도. (밤에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면 무서웠다고 한다.) 그 남자는 항상 감옥 안 침대에 앉아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킹의 머리 속에서 차츰 이야기가 만들어져 갔다. 그 남자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 감옥은 리틀 톨 아일랜드라는 섬에 있는 동네 슈퍼 뒤에 붙어 있다. 왜 감옥이 슈퍼에 있는 거지? 작은 섬마을에는 정식 경찰이 없고, 대신에 그 마을 주민이 마을 경찰을 맡아서 파트 타임으로 근무를 하기 때문이지. 그럼 리틀 톨 아일랜드의 마을 경찰은 누구? 당연히 동네 슈퍼 주인인 마이크 앤더슨이다. 마이크가 그 기분 나쁜 남자를 체포해서 자기 슈퍼 안에 직접 만들어 놓은 유치장 안에 가두어 놓았다. 그 기분 나쁜 남자는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있다. 그리고 기다린다... 무엇을? 사상 최대의 폭풍을!

1996년 10월 경이 되자 킹은 리틀 톨 아일랜드 섬마을 전체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를 써야 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시달렸다.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써도 되지만,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은 적당한 때에 써버리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Salem's Lot" 같은 작품들을 통해 한 마을 전체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를 많이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킹은 막상 "Storm of the Century"를 쓰려고 하자 이야기의 거대한 스케일에 눌려 좌절을 겪을 뻔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 짜릿한 자극이 생겨서 1996년 12월에 집필을 시작하고야 만다. 그 짜릿한 자극이란 섬마을같은 작은 공동체의 정서를 그려내겠다는 의지였다. 섬마을은 주민들 간에 학연, 지연, 혈연 등과 같은 것들에 의해 끈끈한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외부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정서가 뿌리내리고 있다. 마을에 위기가 닥칠 때면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친다. 여기서 스티븐 킹의 질문: 그렇다면 그렇게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것이 항상 옳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킹은 마을 경찰 마이크 앤더슨의 아내가 남편을 꽉 껴안으며 속삭이는 소리를 상상했다. "여보, 유치장 안의 그 남자를 죽여 버려요." 킹은 전율을 느꼈다. 그것이 자극이 되어 "Storm of the Century"는 무사히 집필될 수 있었다.

지금 소개하는 "Storm of the Century"는 킹이 쓴 시나리오가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고서 영상화 된 미니시리즈와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경험일 것이다.

30 실내: 낮에는 탁아소로 사용하는 앤더슨의 집 계단

 

여전히 피파는 계단 손잡이 기둥 사이에 머리가 걸려서 꼼짝 못하고 있다. 아이들을 돌보는 몰리가 피파가 있는 계단에 앉아 피파를 위로하고 있다. 아이들이 피파를 쳐다보며 주위에 둘러서 있다. 몰리가 피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잼이 발라져 있는 피파의 빵을 들고 있다.

 

몰리

이제 괜찮아질거야, 피파. 마이크 아저씨랑 네 아빠가 금방 이리로 올거니까. 마이크 아저씨가 널 꺼내줄거야.

 

피파

어떻게요?

 

몰리

나도 잘은 모르지만, 무슨 마술같은 거겠지.

 

피파

나 배고파요.

 

몰리가 계단 손잡이 기둥 사이로 팔을 뻗어 빵을 피파의 입으로 가져간다. 피파가 받아 먹는다. 다른 아이들이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질 로비쳑스의 5살 난 아들이 있다.

 

해리 로비쳑스

앤더슨 아줌마. 피파한테 빵 먹이는 거 내가 해봐도 돼요? 나 뱅고어 축제 때 놀러 갔다가 원숭이한테 먹이 준 적도 있거든요.

 

지켜보던 아이들이 웃는다. 피파는 기분이 좋지 않다.

 

피파

해리! 난 원숭이가 아냐! 난 어린이야. 원숭이가 아니라구!

 

돈 빌스

얘들아 여기 좀 봐. 나는 원숭이야!

 

계단 밑에 있던 돈이 네살짜리 어린애 특유의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펄쩍펄쩍 뛰면서 겨드랑이를 긁어댄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따라하기 시작한다.

 

피파

나는 원숭이가 아냐!

 

그리고는 울어버린다. 몰리가 피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뭔가 위로의 말을 해주려 하지만 쉽지 않다. 계단 기둥 사이에 머리가 끼어버리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거기에다 원숭이라고 놀림까지 받는 것은 더더욱 불쌍한 일이다.

 

몰리

너희들 모두 가만 있어! 지금 당장 그만 둬! 나쁜 짓이야. 피파를 슬프게 만들었잖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멈추지만, 고약한 말썽장이 돈은 계속 몸을 긁어대며 날뛰고 있다.

 

몰리

돈, 그만 해. 나쁜 짓이야.

 

랠피

우리 엄마가 나쁘다고 그러잖아.

 

랠피가 돈을 붙잡으려 하지만, 돈이 뿌리친다.

 

돈 빌스

나는 원숭이로 변신한다!

 

돈은 두배는 더 심하게 원숭이 짓을 하고 있다. 랠피를 약올리려고... 물론 랠피의 어머니도 약올리려고. 그때 문이 열리고, 마이크와 햇치가 들어온다. 햇치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두여움과 안도의 감정이 교차하며 딸에게 달려간다.

 

피파

아빠아아아!

 

피파가 빠져 나오려고 또다시 머리를 뒤로 잡아 당긴다.

 

햇치

피파! 가만 있어! 그러다 귀라도 떨어지면 어쩔려고 그래?

 

랠피

(마이크에게 달려간다.)

아빠! 피파가 머리 걸렸는데, 돈은 원숭이 변신하는 걸 자꾸만 계속해요!

 

랠피가 아버지 품으로 뛰어 오른다. 햇치가 어린 소녀를 잡아 먹으려는 끔찍한 계단으로 올라가, 피파 옆에 무릎 꿇고 앉는다. 몰리가 등 뒤로 남편 마이크를 쳐다보며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제발 이것 좀 어떻게 해봐요!"

 

머리를 땋아내린 작고 귀여운 소녀가 마이크의 바지 주머니를 잡아 당긴다.

 

샐리 갓소

앤더슨 아저씨. 나는 원숭이 되는 거 금방 그만 뒀어요. 아줌마가 말하자마자 금방.

 

샐리가 몰리를 가리킨다. 마이크가 부드럽게 소녀를 떼어놓는다. 그러자 4살짜리 소녀 샐리는 엄지 손가락을 입 속에 쏙 집어 넣는다.

 

마이크

잘 했다 샐리. 랠피, 이제 내 품에서 내려와야겠다.

 

그는 랠피를 내려 놓는다. 그 즉시 돈 빌스가 와서 랠피를 밀어 버린다.

 

랠피

야! 너 왜 그래?

 

돈 빌스

잘 난 척 하지마!

 

마이크가 돈 빌스를 번쩍 들어올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 보게 된다. 병신같은 돈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돈 빌스

난 아저씨가 하나도 안 무서워! 우리 아빠는 마을 읍장이야! 아저씨 월급은 우리 아빠가 주는 거라구!

 

돈이 혀를 길게 빼더니 마이크의 얼굴에 대고 마구 흔들어댄다. 에벨레벨레~. 마이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마이크

남을 밀면 너도 밀리게 돼있어. 돈 빌스, 잘 기억해둬라. 인생의 교훈이니까. 남을 밀면 너도 밀리게 된다.

 

돈은 무슨 뜻인지 이해는 못하지만, 마이크의 무서운 목소리 톤에는 반응한다. 결국 꼬마는 망나니짓을 또 저지르고 다니겠지만, 어쨋든 지금은 얌전해졌다. 마이크는 돈을 내려놓고 계단 쪽으로 걸어간다. 마이크 뒤로 보이는 반쯤 열린 문에는 "어린이 집"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문 안쪽의 방에는 작은 탁자들과 의자들이 놓여 있다. 천정에는 다양한 색깔의 모빌들이 매달려 있다. 그 곳은 몰리의 탁아소 교실이다.

 

햇치가 딸아이 머리 꼭대기를 밀고 있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피파는 영원히 머리가 끼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또다시 두려움에 벌벌 떤다.

 

햇치

우리 귀염둥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피파

하이디 세인트 삐에르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마이크가 손을 뻗어 햇치를 옆으로 물러나게 한다. 햇치는 성공하길 기대하며 마이크의 행동을 지켜본다.

때는 한겨울. 장소는 리틀 톨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작은 섬. 이 곳은 또다른 킹의 작품 "돌로레스 클레이본 Dolores Claiborne"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내가 운영하는 탁아소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을 해결한 마을 경찰 마이크 앤더슨은 자신의 가게이면서 마을 경찰 사무실도 겸하고 있는 동네 슈퍼마켓으로 돌아온다. 곧 큰 폭풍이 몰아칠 거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생필품을 사느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슈퍼마켓 안은 대충격! 거의 70년 동안 이 작은 섬마을에는 살인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남편이 죽었던 것도 제외시키자. 살인인지 사고사인지 끝내 결론이 안났으니까.) 마이크는 현장으로 출동한다.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를 지팡이로 수십차례 후려쳐서 살해한 사건이었다. 범인은 섬마을 사람이 아니라 처음보는 남자였는데, 도망치지 않고 태연하게 살인이 일어난 방에 앉아 있다. 범인의 이름은 앙드레 리노지. 마이크는 리노지를 체포해서 슈퍼 뒤쪽에 마련된 유치장에 가두어 버린다. 리노지가 마이크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뭔 소리냐? 마이크는 무시해 버린다.

그날 밤 눈보라를 동반한 사상 최대의 폭풍이 리틀 톨 아일랜드를 덮친다. 섬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돼 버리고, 주민 대부분은 마을에 설치된 대피소로 몰려든다. 그리고 주민들이 하나둘씩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살인현장을 비롯한 마을 곳곳에는 이상한 문구들로 뒤덮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마이크는 두려운 눈길로 리노지를 바라본다. 리노지는 유치장 침대에 걸터 앉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다. 리노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지?

나는 "Storm of the Century" 시나리오를 읽으며 정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리노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민들을 하나둘씩 살해하며 점점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사건 전개가 긴장감 있게 전개되었다. 특히 폭풍이 몰아치던 날 밤, 마을 주민들이 동시에 꾸게 되는 악몽이 인상에 남는다. 악몽 속에서 TV리포터가 등장해 리틀 톨 아일랜드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며 리노지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1587년 버지니아의 로아노크 섬처럼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이 섬칫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조사한 내용을 소개하겠다.

[출처: The Compton's Encyclopedia]

1587년 버지니아주 로아노크 섬으로 114명의 영국 사람들이 이주했다.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존 화이트라는 사람이 개척단의 리더였다. 섬 개척은 무척 험한 일이었고 시간이 지나자 물자가 부족해졌다. 존은 물자를 구하러 잉글랜드로 갔다. 그런데 3년이 지나서야 다시 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로아노크 섬에 돌아왔을 때 섬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단지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들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사람들만 공중으로 증발해 버린 것처럼. 존이 찾아낸 유일한 단서는 섬의 나무 하나에 새겨져 있는 "CRO"라는 글씨였다. 존은 그 세 글자가 로아노크 섬에서 가까운 Croatoan 섬을 쓰려던 것으로 생각하고서, 그의 가족과 동료 영국인들을 찾기 위해 크로아토안 섬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버지니아주 로아노크시 관계자는 스티븐 킹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로아노크는 1671년까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킹이 버지니아 로아노크와 노스 캐롤라이너 로아노크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시나리오 속에서 킹은 로아노크의 나무에 새겨진 글씨는 "CROATON"이라고 설명한다. 시나리오 후반부에 리틀 톨 아일랜드에서도 "CROATON"이란 글씨가 발견된다.)

역사적 사실이야 어쨌든 리틀 톨 아일랜드 사람들은 악몽을 꾸고 난 뒤 엄청난 두려움에 벌벌 떤다. 시나리오 후반부에 가면 드디어 리노지가 받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하게 된다. 정의와 인간성을 위해 사악한 괴물 리노지에 맞서 싸우자는 소수파와 현실적 사정을 감안해서 리노지에게 원하는 것을 줘버리자는 다수파가 맞선다. 이 부분이 작품의 절정을 이루는 클라이막스이면서 위에서 소개한 킹의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것이 항상 옳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결국 마을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게 되고 그들 앞에 음흉한 미소의 리노지가 나타나 묻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인가? 아니면 리틀 톨 아일랜드도 로아노크 섬처럼 될 것인가?

"Storm of the Century"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대사 중간중간 사이에 스티븐 킹이 친절하게 자세한 설명을 써놓아서 실감나게 몰입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곳은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섬입니다, 우린 이 사람의 무례한 행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전 날에 남편이 죽었잖아요, 지금 이 여성이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있는 동화는 제 소설 "샤이닝 The Shining"의 꼬마 주인공 대니 토랜스가 무지 좋아하던 동화입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시시각각 마을 사람들을 조여오는 공포가 스피드있게 펼쳐져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까 궁금한 나머지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폭풍이 몰아치는 섬마을 대피소에 와있는 듯한 현장감이 팍팍 느껴졌고... 그리고 읽고 난 뒤에는 깊은 감동의 물결이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마음 속에 아련한 슬픔이 느껴지는 게 마치 오래 전 처음으로 킹의 소설 "It"을 읽고 난 뒤의 기분 같았다. 그만큼 시나리오에서 느껴지는 여운이 엄청났다. 특히 시나리오 결말에 가면 폭풍이 섬을 휩쓸고 지나간 뒤 10년 후의 이야기가 짧게 펼쳐진다. 그 부분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특히 마이크 앤더슨이 겪게 되는 일은... 정말 가슴 아팠다.

"Storm of the Century" 시나리오는 나에게 있어 최고였다. 소설과는 달리 등장인물들의 대사 위주로 전개되는 시나리오의 특성에 내가 그만 홀라당 넘어간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은 아들이 전기톱으로 엄마의 몸통을 절단내는 식의 영화를 공포장르의 최고라고 생각하는 하드 고어 팬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시시하다고 불평이 쏟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공포장르가 인간의 마음 속에 슬픔의 감동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기꺼이 감동에 동참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강력추천한다. 혹시라도 스티븐 킹이 "Storm of the Century" 속편을 쓰게 된다면 정말정말정말 대찬성이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옮긴 미니시리즈는 과연 어떤 수준일까?

미니시리즈 "Storm of the Century"는 2001년 국내에 "센트리 스톰"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다. 미국에서는 런닝타임 248분에 테이프 2개짜리로 출시되었지만, 국내에는 달랑 테이프 1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티븐 킹의 인지도가 낮아서 테이프 2개로 출시할 경우 대여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비디오를 보지 못해서 어느 부분이 잘려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출시가 안되는 것보다는 잘렸더라도 출시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사이트에 올라온 평을 보면 이제껏 방송된 스티븐 킹 미니시리즈 중 최고라는 호평까지 들을 정도이니 비록 국내판은 삭제판이더라도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만약 비디오 가게에 테이프가 없다면?

비디오 가게 한복판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3박 4일동안 단식농성에 들어갈 것을 추천한다. 놀란 가게 주인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센트리 스톰] 테이프를 어여 가져다 주오."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보고 싶은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게 되던가 아니면 가게 주인한테 맞아 죽던가 결판이 날 것이다.

그러다 결국 국내에 이 미니시리즈가 "스티븐 킹의 센트리 스톰"이라는 제목으로 DVD가 출시되었다. 당연히 이 DVD에는 비디오와 달리 삭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