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 On Writing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3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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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Writing

(2000년 글쓰기 지침서)

2000년 10월 17일 교보문고에 갔다가 하드커버로 나온 On Writing을 보고야 말았다. 신문기사를 보고 On Writing이 출간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한국서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고 싶었지만 하드커버책이라서 가격이 비쌀 것이 비오는 날의 우산처럼 확실했다.(뭔 소리여?) 3분을 교보문고에서 방황하며 고뇌하다 결국 주머니를 톡톡 털어 구입하는 대담한 행동을 벌이고야 말았다. 덕분에 그후로 3주동안은 경제적인 궁핍함을 이유로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실화다!) 그래서 집에 있는 동안 On Writing을 읽기 시작했다.

On Writing은 스티븐 킹이 글쓰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자신의 집필비법을 공개한 글쓰기 지침서이다. 그러나 일반작문법 강의서같이 딱딱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이 아니다. 스티븐 킹이 누군가. 내노라하는 인기작가 아닌가. 글쓰기에 그다지 관심없는 사람이더라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알차게 꾸며졌다. 그리고 스티븐 킹의 팬이라면 더욱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앞부분에 킹은 글쓰기 지침서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물어보면서도, 자신과 같은 대중작가들에게는 그런 질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킹의 생각으로는 대중들에게 엄청나게 팔리는 통속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자기 나름대로 글쓰는 방법이 있으며, 그것을 알려주는 일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인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하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밝히려 한다는 것이다.

On Writing의 전반부는 글쓰기와 직접적인 관련없이 스티븐 킹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에피소드별로 소개하고 있다. 한편의 자서전같은 것이다. 킹 본인의 표현으로는 취업할 때 제출하는 자기소개서같은 내용이니 부담없이 읽어달라고 말하고 있다.(그래서 나도 팍팍 읽었다.)

정말 킹의 인생이 속도감있게 죽 나열된다. 혼자된 어머니 밑에서 여기저기 이사다닌 일, 괴짜였던 형때문에 소동에 휘말렸던 일, 몸이 아파 초등학교 1학년을 휴학하고 집에 있을 때 엄마의 권유로 난생처음 소설을 썼던 일(엄마한테 돈을 받고 팔았다!), 극장에서 본 공포영화를 소설로 써서 학교친구들한테 팔다 걸려서 교장선생님한테 불려갔던 일("스티븐, 왜 너같이 재능있는 아이가 이런 쓰레기같은 것을 쓰는 거니?"), 잡지사에 원고를 보냈다 받은 거절통지서가 날이 갈수록 수북히 쌓이던 일, 고등학교때 수학여행가서 난생처음 술을 먹고 맛이 가서 여학생들 자는 방에 들어가 술주정한 일, 대학 때 만난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종아리를 용기내서 슬쩍 만졌는데 화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가 미소를 지어주던 일(결국 그 여학생이 킹의 아내가 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생기고 돈이 없어 전화도 없이 트레일러하우스에서 살며 불안하게 작가의 꿈을 키우던 일, 첫 장편소설 "캐리Carrie"를 출판사에 넘기던 날 부부가 침대에 누워 과연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던 일, 형과 함께 침대옆에 앉아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좋아하시던 담배를 어머니 입에 물려드리던 일, 인기작가로 성공은 했지만 알콜중독과 마약중독에 빠져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 등등이 소개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엿본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하물며 그 누군가가 스티븐 킹이라면! On Writing의 전반부는 이렇게 킹의 인생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아무렇게나 나열한 것이 아니라 킹의 인생을 통해 과연 한사람의 프로소설가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를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여겨진다.

On Writing의 후반부는 책 본연의 목적에 맞게 본격적으로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티븐 킹같이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 설명을 위해 스티븐 킹은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수동태보다는 능동태표현을 써라, 부사를 남발하지 마라같은 기초문법에서 시작해 많이 읽고 많이 써보라, 글을 중단없이 꾸준히 써라,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 특징만을 효과적으로 잡아내는 묘사능력을 길러라, 평소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주의깊게 보라 등등의 조언이 이어진다. 그리고 주위에 자신이 쓴 글을 냉철하게 읽고 장단점을 정확히 판단해 줄 "이상적인 독자"(Ideal Reader)를 두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솜씨좋은 작가라도 자기만족에 빠져서 3류작품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그 예로서 자신이 직접 쓰고 영화감독까지 한 누구나 고개를 끄떡인다는 졸작 Maximum Overdrive가 언급된다. 아~ 나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킹은 글쓰는 작업이 매우 외로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누군가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마음의 안정도 되고 큰 힘이 된다고 한다. 자신의 경우에는 아내 태비사가 그런 역할에다 "이상적인 독자" 역할까지 해주어서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며, 아내를 마구 칭찬한다.(그렇다! 스티븐 킹은 공처가인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작품들은 대개 처음부터 완전한 줄거리를 생각해 놓고서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보통은 작품소재 속에 캐릭터들을 풀어 놓고서 그들이 자신들의 성격과 의지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 지 관찰하고 그 결과를 써나간다는 것이다. 킹 본인은 물론 독자들도 캐릭터들의 의외의 행동에 놀라면서 점점 흥미를 갖게 되고,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미리 짜여진 줄거리에 맞추다 보면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을 제한하게 되어 어색한 작품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줄거리 중심의 작품으로서 Insomnia나 Rose Madder 등은 부자연스런 작품이 되버렸다고 하면서, 줄거리 중심 작품이면서도 본인이 흡족해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The Dead Zone을 꼽았다.

On Writing 후반부에 글쓰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과 빗대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작가지망생들에게 나도 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어!라는 격려를 퍼붓고 있다. "당신은 할 수 있고, 꼭 그래야만 합니다. 당신이 용기를 가지고 일단 시작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On Writing 끝부분에 가서는 99년에 킹이 겪은 교통사고에 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과정, 사고를 계기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것 같은 좌절감에 시달린 일, 그 좌절감을 극복한 일 등을 열거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지망생들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주려 했던 것 같다. 킹은 좌절감에 시달릴 때 아내가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하며 마구마구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그렇다! 스티븐 킹은 공처가인 것이다.)

책 맨끝에는 On Writing을 집필하는 동안 흥미있게 읽었던 책들의 목록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킹의 독서취향을 엿볼 수 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같은 고전에서부터,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속편 "한니발"이나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시리즈같은 최근작품들까지 다양하다. 눈에 띄는 건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아내 태비사의 작품이 두편이나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스티븐 킹은 공처가인 것이다.)

On Writing은 부담없이 글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멋진 책이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스티븐 킹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소한 일상까지도 엿볼 수 있는 재밌는 책이다.(집필작업은 주로 아침시간에만 한다던가, "2번째 원고 = 1번째 원고 - 10%"라는 공식을 지키고 있다던가, 주로 소설을 중심으로 일년에 70~8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던가 하는 것들)

우리나라에도 "On Writing"이 번역출간되었다. 김영사에서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읽어보고 스티븐 킹의 내면을 살짝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시길 추천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스티븐 킹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었던 일화가 On Writing에 소개되어 있다. 그 부분을 아래에 소개한다.(나한테도 그런 기회가 빨리 왔으면...)

*          *          *          *          *          *

더블데이출판사 빌 톰슨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아파트에 혼자 있었다. 아내 태비는 애들을 데리고 처갓집에 가있었고, 나는 "뱀파이어가 우리 마을에"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앉아 있어요?" 빌이 물었다.

"아니오." 짧게 대답했다. 우리집 전화기는 부엌 벽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부엌과 거실 사이 문간에 서있었다. "그래야 되요?"

"꼭 그런건 아니구." 빌이 말했다. "캐리Carrie의 페이퍼백 출판권이 시그넷출판사로 40만달러에 넘어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엄마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애 입 좀 닥치게 할 수 없어? 스티븐이 입만 열었다하면 시끄러워 죽겠어." 어린 시절엔 정말 그랬지만, 빌이 전화를 건 그 날 1973년 5월의 어머니날에 나는 완전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받느라 문간에 서있는 것은 늘 그래왔던 것이었지만, 그때 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웃으면서 빌이 전화받다 어디갔냐고 물었다. 물론 그는 내가 전화를 꼭 붙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잘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이제는 정신차리고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 지금 당신이 말한 게 4만달러였죠?"

"40만달러에요." 빌이 대답했다. "통행규칙에 따라서 -내가 빌과 맺었던 계약을 의미한다- 당신 몫은 20만달러입니다. 축하해요, 스티브."

나는 계속 문간에 서있었다. 내 앞으로 나있는 거실을 통해 침실을 보았다. 내아들 죠가 잠잘 때 눕는 작은 침대가 보였다. 샌포드거리에 위치한 우리 아파트는 90달러짜리 월세였는데, 내가 딱 한번 얼굴을 마주했던 이 남자가 전화를 걸어서는 내가 행운의 복권에 콕 당첨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에 힘이 없어졌다. 쓰러져 버리진 않았지만, 문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확실합니까?" 빌에게 물었다.

빌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에게 아주 천천히 아주 똑똑하게 다시 한번 금액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가 말해준 금액에는 '4'라는 숫자 뒤에 '0' 다섯 개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 뒤로 30분 더 대화를 나눴지만, 한마디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빌과 통화를 끝내고 태비를 찾아 장모님 댁에 전화했다. 처제 마르셀라가 아내는 벌써 집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끝내주는 뉴스가 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나는 아파트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몸이 막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난 신발을 신고 거리로 나갔다. 뱅고어 시내 번화가에서 문을 연 가게는 라베르디어 잡화점뿐이었다. 갑자기 태비에게 어머니날 선물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와일드하고 비싼 것으로. 하지만 사람사는 게 어디 맘대로 되던가. 라베르디어에 아주 와일드하고 비싼 물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난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아내 선물로 헤어드라이기를 샀다.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부엌에서 애기보따리를 풀면서 라디오 음악소리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헤어드라이기를 아내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는 헤어드라이기를 난생 처음 구경해보는 사람같이 보였다. "이게 뭐야?" 그녀가 물었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내에게 페이퍼백 출판권 얘기를 했다. 그녀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더 얘기해 주었다. 태비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어깨 너머로 비좁고 어수선한 방 4개짜리 우리 아파트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