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아이들 [4]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 5. 9. 01:15 posted by 조재형

그녀는 하루 종일 고옴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큰 곤경에 처해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혼자 있도록 방치되지 않았다. 길리멋이 수시로 그녀에게 들러 음식과 음료를 갖다주었고, 오후에는 같이 카드놀이를 했다. 그녀가 파이브 카드 포커치는 요령을 금새 배워 길리멋과 한두 시간동안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는 동안, 마당에서는 정신병자들이 개구리경주를 벌이며 소리지르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나 목욕 좀 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안되면 샤워만이라도 어떻게 좀..." 그 날 저녁 길리멋이 저녁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몸이 너무 끈적끈적해서 못 살겠어요."

그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목욕할만한 데를 찾아볼께요."

"정말?"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역시 당신은 친절해."

그는 1시간쯤 뒤에 돌아와서 샤워실을 찾아내 허락을 맡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샤워실 가는 것이 좋기만 할까?

"샤워실에서 나 등 좀 밀어줄래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길리멋의 두 눈이 충격으로 껌뻑거렸고, 양쪽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를 따라오세요." 그가 말했다. 조용히 길리멋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녀는 샤워실로 가는 길을 마음 속에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감시인이 없을 경우에 혼자서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그가 안내한 곳으로 들어가 본 거울 달린 샤워실은 시설이 형편없어 실망스러웠다. 사실 지금 그녀가 처리해야 하는 일 중에서 샤워는 그리 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형편없는 시설 따위 상관하지 말자. 샤워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나는 문 밖에 있을께요." 길리멋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네요." 등을 밀어달라는 조금 전 말을 상기시키는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며, 그녀는 샤워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을 세차게 틀어놔서 샤워실 안이 온통 수증기로 가득하게 만들었고, 네 발로 엎드려 바닥을 비누로 문질렀다. 샤워실 안이 수증기 안개로 둘러싸여 앞이 안보이고 샤워실 바닥이 비누칠로 잔뜩 미끌미끌해지자, 그녀는 길리멋을 불렀다. 부르자마자 튀어들어오는 그의 놀라운 스피드에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쭐하는 대신 재빨리 그의 뒤로 돌아가 수증기 속에서 허둥대고 있던 그를 힘껏 밀었다. 그는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샤워기에 부딪혔고, 펄펄 끓는 물이 머리를 덮치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동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정신을 차리려는 그보다 먼저 그녀가 총을 낚아챘다. 그녀는 그의 몸통을 향해 총을 겨눴다. 그녀는 명사수가 아니었고, 지금 그녀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장님일지라도 표적을 못 맞출래야 못 맞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길리멋도 알고 있었다. 그가 양손을 들었다.

"쏘지마."

"만약 니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제발... 쏘지 마요."

"이제... 미스터 고옴과 그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라. 빨리 그리고 조용히."

"왜?"

"시키는 대로만 해." 손에 쥔 총으로 샤워실 밖으로 나가서 앞장 서라는 동작을  취하며, 그녀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어리석은 짓을 하면, 네 놈 등을 쏴버릴거다." 그녀가 말했다. "등 뒤에서 쏘는 게 신사다운 행동이 아니란 건 알지만, 난 신사도 아닌데 뭐. 나는 그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한 여자일 뿐이야. 그러니 나를 열받게 만들지마."

"... 알았어요."

그는 명령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녀를 데리고 샤워실 건물을 나와서 길게 이어진 통로를 지나 종탑과 그 주위에 모여있는 건물촌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항상 이 곳 요새의 중심부는 예배당일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종탑건물의 겉모습은 사각타일이 겹쳐있는 지붕에 하얗게 칠한 벽들이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했다. 바네사와 길리멋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펼쳐진 풍경은 신앙의 장소라기보다는 고풍스런 군사 벙커를 연상시키는 콘크리트 미로였다. 그녀는 이 건물이 핵폭탄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모든 통로들이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여기가 정신병원이라면, 소수의 특별한 정신병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곳일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그녀가 길리멋에게 물었다.

"우리들이 안방이라고 부르는 곳이에요." 그가 말했다.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죠."

지금은 별다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통로에 붙어있는 사무실 대부분에 불이 꺼져 있었다. 한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없는데, 컴퓨터 한 대가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다른 사무실에서는 텔렉스 기계가 글씨로 가득찬 종이용지를 뱉어내고 있었다. 바네사와 길리멋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계속 건물 심층부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모통이 하나를 돌자마자 엎드려서 리놀륨 바닥을 닦고 있는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갑작스런 만남에 양쪽 모두 당황하고 있는 틈을 길리멋이 재빨리 이용했다. 그는 바네사를 벽으로 확 밀치고 달아났다. 그녀가 몸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얼마 안있어 비상벨이 울리고 경비병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녀는 낯선 곳에서 막막해졌다. 앞에는 똑같이 불길하게 보이는 출구 3개가 있었는데, 그녀는 망연자실해서 굳어있는 청소부를 뒤에 내버려두고 간단히 가장 가까운 출구로 뛰어갔다. 그녀가 선택한 출구는 또다른 모험을 안겨주었다. 출구를 따라서 수많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방에는 시계 수십개가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표시하고 있었다. 다음 방에서는 검은 전화기 50대가 윗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다음 방은 제일 큰 방이었는데, 모든 벽에 TV 스크린들이 붙어 있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스크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스크린이 꺼져 있는데, 딱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유일하게 켜져있는 스크린에서는 얼핏 보기에 진흙 레슬링 경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사실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포르노 영화였다. 맥주캔을 배 위에 올려놓고 의자 속에 몸을 쭉 편 채 포르노를 보고 있는 것은 콧수염 달린 수녀 한 명이었다. 바네사가 들어오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반항하면 죽여버리겠어."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젠장."

"고옴과 동료들은 어디 있어?"

"뭐?"

"그 사람들 어디 있냐니까! 어서 말해."

"홀 밑에. 왼쪽으로 돌아서 한 번 더 왼쪽으로 돌면 돼." 그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난 죽기 싫어."

"그럼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있어." 그녀가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신앙심이 깊어서 칭찬받겠구만." 그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방을 나자가 그는 무릎이 꺽이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뒤에서는 신나는 진흙 레슬링이 펼쳐지고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 또다시 왼쪽으로. 길을 따라 가보니 방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녀가 한 군데를 골라 방문을 노크하려는 순간 건물 전체로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조심성 따위는 던져버리고 요란하게 문들을 열어 제꼈다. 방 안에서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투덜대면서 왜 이렇게 비상벨이 요란하냐고 묻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세번째 방에서 고옴을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바네사." 복도로 튀어나오면서 그가 말했다. 그는 긴 조끼만 걸치고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정말 당신이야? 어? 정말이구나!"

잠에 취한 눈으로 다른 방에서도 사람들이 나왓다. 이레냐, 플로이드, 모터스헤드, 골드버그. 쪼글쪼글한 얼굴들을 보니 바네사는 그들의 전체 나이가 400살에 육박한다는 고옴이 말이 믿겨졌다.

"정신차려, 이 늙은이들아." 고옴이 말했다. 그는 바지 하나를 찾아내서 입었다.

"비상벨이 울리는데-" 동료 한 명이 말했다. 하얗게 세버린 그의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사람들이 금방 올거야-" 이레냐가 말했다.

"상관없어." 고옴이 대답했다.

플로이드는 벌써 옷을 다 차려 입었다. "난 준비됐어."

"그런데 우리는 인원이 너무 많아요." 바네사가 걱정이 돼서 말했다. "우리는 살아선 여길 못나갈 거에요."

"이 여자 말이 맞아." 동료 한 명이 그녀를 훓어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주둥이 닥쳐, 골드버그." 고옴이 쏘아붙였다. "바네사는 총을 갖고 있단말야, 안 그런가?"

"딱 한 개." 백발노인이 말했다. 바네사는 그가 모터스헤드 일거라 생각했다. "총 하나로 경비병들을 모두 다 상대하겠다는 거로군."

"다시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골드버그가 말했다.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야." 고옴이 말했다. "어쩌면 우리한테 남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고옴 말이 맞아." 이레냐가 말했다.

"그럼 게임은 어떻게 되는 건데?" 골드버그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게임은 잊어버려." 플로이드가 말했다. "개구리로 국이나 끓여 먹으라지."

"너무 늦었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놈들이 오고 있어요." 통로 양쪽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린 갇혀 버렸어요."

"좋구만." 고옴이 말했다.

"당신 미쳤군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우릴 쏴버릴 수 있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플로이드가 투덜댔다. "난 죽어서 여길 나가고 싶지는 않아."

"협박해! 협박하란 말이야!" 고옴이 말했다. "놈들한테 허튼 짓하면 우릴 모두 총으로 죽여버리겠다고 말해!"

이레냐가 웃었다. 틀니를 침실에 두고 와서 입 언저리가 움푹 들어갔다.

"당신 얼굴 표정이 유난히 이뻐보여." 고옴이 이레냐에게 말했다.

"고옴 말이 맞아." 플로이드가 말했다. 이제는 싱글벙글 기쁨에 젖어있다. "우리 목숨이 위태로운데 놈들이 감히 쓸데없는 짓은 못할 거야. 우리를 순순히 놔 줄 수 밖에 없겠지."

"너희들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골드버그가 궁시렁댔다. "외부로 나간다해도 우리를 반겨줄 곳은 아무데도 없어..."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곧 이어 복도 양끝으로 경비병들이 몰려와 막아버렸다.

고옴은 바네사의 총을 잡고 자기 심장을 향해 총부리를 갖다댔다.

"침착하게 잘 해." 그는 조용히 속삭이면서 입술로 살짝 키스를 보냈다.

"제이프 부인, 무기를 내려 놓으시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미스터 클라인이 나타났다. "이제 그만해요. 당신은 완전히 포위됐으니까."

"이 사람들 다 죽여버리겠어." 약간 머뭇거리며 바네사가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는 현재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당신들한테 경고하겠어. 나 지금 이판사판이야. 날 쏘면 이 사람들도 전부 죽일거야."

"알았어요..." 클라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왜 당신은 그 사람들이 죽을까봐 내가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일 뿐인데. 전에 내가 말했잖아요. 모두 정신병자라고, 살인자라고..."

"우린 둘 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텐데." 클라인의 얼굴에 나타난 불안한 표정을 보고, 바네사는 더욱 확신을 얻었다. "지금 당장 요새의 철문을 열어놓고, 내 차 시동장치에 차 키를 꽂아놔. 미스터 클라인, 당신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하면 여기 인질들을 가차없이 쏴버리겠어. 자 이제 당신 똘마니들 여기서 내보내고 내가 요구한 대로 준비해."

미스터 클라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부하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옴의 눈이 반짝거렸다. "잘 했어." 그가 속삭였다.

"길 안내 좀 해줄래요?" 바네사가 고옴에게 부탁했다. 고옴의 뒤를 따라 바네사 일행은 시계와 전화기와 비디오 스크린이 가득한 방들을 지나 복잡하게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갔다. 한 걸음씩 내딪을 때마다 바네사는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올까봐 불안했지만, 확실히 미스터 클라인은 그녀의 협박대로 노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았다. 바네사 일행은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건물 밖으로 무사히 나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경비병들이 어디엔가 숨어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차가 준비되어 있는 마당으로 가는 동안, 바네사는 계속해서 인질들 4명 쪽으로 소총을 겨냥했다. 차 있는 곳에 와보니 철문이 열려 있었다.

"고옴." 그녀가 속삭였다. "차 문을 열어요."

고옴이 문을 열었다. 그가 전에 말한대로 나이가 들어 늙으면 몸이 쪼그라든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작은 차에 5명이 탄다는 것은 상당히 빠듯한 일이었다. 바네사가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운전석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숙이는데 총알 하나가 날아왔다. 그녀는 어깨를 후려치는 고통을 느꼈다. 소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개새끼들." 고옴이 말했다.

"그 여잔 그냥 놔두고 빨리 가자." 뒷좌석에 앉은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옴은 이미 차에서 내려 바네사를 뒷좌석 플로이드 옆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운전석으로 달려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운전할 줄 알아?" 이레냐가 물었다.

"물론이지. 내가 운전 하나는 끝내준다구!" 그가 소리쳤다. 기어를 삐걱거리며 자동차는 철문을 지나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네사는 과거에 총에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이제 경험을 하고 보니 -만약 이 난리통에서 목숨을 건진다면- 다시는 총상을 입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 난 상처에서 출혈이 심했다. 옆에서 플로이드가 그녀의 상처를 지혈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고옴의 난폭한 운전 속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저기 길이 있어요-"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고옴에게 말했다. "저쪽에."

"저쪽이란 게 어느 쪽이야?" 고옴이 소리쳤다.

"오른쪽이요! 오른쪽!" 그녀도 소리질렀다.

고옴이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오른쪽이 어느 쪽이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옆에 앉은 이레냐가 고옴의 손을 다시 운전대로 끌고 갔다. 자동차가 춤추듯이 흔들렸다. 이리저리 덜컹거릴 때마다 바네사는 고통때문에 신음했다.

"찾았다!" 고옴이 말했다. "저기 길이 보여!" 그는 액셀을 밟아 속력을 더 높였다.

엉성하게 닫혀있던 차 뒷문 하나가 열려서 바네사의 몸이 밖으로 떨어지려 했다. 모터스헤드가 플로이드 쪽으로 몸을 날려 가까스로 그녀를 안전하게 끌어당겼다. 열린 문은 다시 닫을 새도 없이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서있던 이정표 바위에 충돌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이쯤에서 한숨 돌려도 되겠어." 운전을 계속하며 고옴이 말했다.

에게해의 밤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은 고옴 일행의 차만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서 불빛이 따라오고 있었고, 맹렬히 추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가 수도원에 소총을 떨어뜨리고 갔기 때문에, 클라인으로서는 그녀가 인질을 총으로 쏴죽일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빨리 가야겠어!" 플로이드가 말하며 입이 찢어질 듯 활짝 미소지었다. "놈들이 우릴 쫓아오는데."

"무슨 짓을 해서든 저 놈들을 따돌릴테다." 고옴이 말했다.

"헤드라이트 꺼." 이레냐가 말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 눈에 덜 띄지."

"그럼 나보고 어떻게 길을 보란 말야." 시끄러운 엔진소리 속에서 고옴이 불평했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 길도 아닌데도 아무데나 막 달리고 있으면서."

모터스헤드가 웃음을 터뜨렸고, 바네사도 -그녀의 이성이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웃음을 터뜨렸다. 피를 많이 흘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백발노인 4명과 바네사를 태우고 문짝이 하나 빠진 자동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미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몰고 갔을 것이다. 이 노인들이 클라인의 말처럼 정신병자들이 아니라는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를 바네사는 보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노인들은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고옴은 운전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베르디의 노래를 부르는가 싶더니 "오버 더 레인보우"를 가성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만약 어질어질 기운없는 그녀의 마음이 확신하는대로 이 노인들이 그녀처럼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먼젓번에 고옴이 그녀에게 설명했던 얘기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부 사실이란 말인가? 지금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이 노인들이 인류의 멸망을 막아냈다는 것이 사실일까?

"놈들이 우리 뒤를 따라붙었다!" 플로이드가 말했다. 그는 뒷좌석에서 무릎 꿇고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젠 다 글렀나본데." 웃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모터스헤드가 말했다. "우리 모두 다 죽게 생겼어."

"저기 봐!" 이레냐가 외쳤다. "저기 또 길이 있어! 저기로 가자! 빨리 저기로 가!"

고옴이 운전대를 힘껏 돌리자, 차는 거의 넘어질듯이 기우뚱거리면서 달리던 길을 벗어나 새 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리느라 앞에 보이는 길이 겨우겨우 흔적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어두웠지만, 고옴의 운전 스타일은  그런 사소한 불편 정도에 벌벌 떠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는 엔진이 숨 넘어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까지 속력을 올렸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뒷좌석으로 튀어오른 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멋 모르고 길 한가운데 서있던 염소 한 마리가 차와 충돌하기 직전 가까스로 달아났다.

"우리 지금 어디가는 거에요?" 바네사가 소리쳤다.

"난 모르겠는데." 고옴이 대답했다. "자네는 아는가?"

그들이 어디로 가던지간에 그들의 스피드는 적당하게 빨랐다. 이번 길은 방금 지나왔던 길보다는 평평했기 때문에 고옴이 운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는 또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터스헤드가 몸을 숙여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가 바람에 마구 날리는 가운데 그는 추적자들이 쫓아오는지 살펴 보았다.

"우리가 놈들을 따돌렸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쳤다. "우리가 놈들을 따돌렸다구!"

나머지 동료들도 기쁨에 겨워 들썩거렸다. 모두들 H.G.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길이 사라진 것 같다고 모터스헤드가 말하는 소리를 고옴은 미처 듣지 못했다. 고옴은 자기가 낭떠러지로 차를 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곧이어 자동차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낭떠러지에서 추락했고, 차 안의 사람들은 낭떠러지 아래 바닷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5]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