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이 말하는 드라마의 고문 장면

뉴스 2009. 2. 27. 02:13 posted by 조재형

☞ 잡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스티븐 킹의 칼럼 "Torture and 24"가 실렸습니다.

이 칼럼에서 킹은 자신의 성향부터 밝힙니다.

스티븐 킹의 집안은 공화당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킹의 할아버지는 민주당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너무 싫어해서 "백악관에 사는 그 병신 자식"이라고 불렀음).
하지만 스티븐 킹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좌파 성향을 갖게 되었고 그 후로 쭉 민주당에 투표하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서 기쁘지만 그보다 더 킹을 기쁘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부시가 텍사스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부시가 더 이상 허튼 짓을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고문이 행해지던 관타나모 수용소를 새 대통령이 패쇄하기로 결정한데 대해서 킹은 기뻐합니다.
이라크의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에서 미군이 고문 행위를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킹은 치를 떨었습니다.

킹은 고문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드라마 "24"의 팬이고 그 드라마가 공식적으로 자행되는 고문을 옹호한다고 격렬한 비난을 당하는 것에 짜증을 느낍니다.

그 동안 수많은 인기 드라마에서 고문이 주된 극적 장치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겠지만, 사실은 많이도 등장했습니다.

드라마 "로스트"에서 사이드가 벤자민 라이너스한테서 정보를 캐내던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굉장히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섬에 오게 되었는지를 벤자민이 솔직하게 말할 거라는 엄청난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으니까요.

사이드와 잭이 소여한테 하는 행동은 또 어떻구요? 손톱 밑에 나무 꼬챙이를 찔러넣는다니!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죠.
케이트가 항의하자 잭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킵니다. "이것은 소여가 자초한 일이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드라마 "The Shield"에서는 경찰 기동타격대가 범인의 얼굴을 뜨거운 가스렌지에다 처박습니다.
드라마 "Breaking Bad"에서는 월터가 마약상을 지하실 기둥으로 끌고가 자전거 도난 방지용 자물쇠를 채워 질식시킵니다.

드라마의 고문 사례는 그 밖에도 많지만, 다들 공통점은 고문 당하는 사람들이 고문 받을만한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24"도 마찬가지입니다.

"24"의 주인공 잭 바우어는 물고문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쇼핑하던 무고한 사람을 마구 끌어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잭의 고문 행위는 사이드, 기동타격대의 빅 매키, 월터가 전혀 받아보지 못한 맹렬한 비판에 시달리고 맙니다.

잭이 "선"을 대표하는데 반해 사이드, 빅 매키, 월터는 "악"을 대표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악질경찰 빅 매키 조차도 자신이 가하는 고문을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인간 쓰레기를 소탕하고 있는 것이니까.

스티븐 킹이 보는 관점은 이렇습니다.
비평가들은 잭 바우어의 방식이 테러와의 전쟁 수행 과정에서 가해지는 부도덕한 행위를 정당화시킨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드라마에 이와 같은 신비로운 정치적 관점을 적용시키니까, 사이드가 소여의 손톱 밑에 나무 꼬챙이를 찔러넣는 것은 오락거리가 되고, 잭 바우어가 악당의 눈에 볼펜을 갖다대는 것은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드라마 "24"가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에서 일어난 잔혹 행위를 촉발시켰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진짜 있다면, 잭 바우어가 하루 종일 테러 소탕을 위해 뛰어다니기 훨씬 전에 베트남에서 벌어진 훨씬 더 끔찍한 잔혹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그렇더라도 드라마에 책임을 돌리는 풍조는 은근히 남아있습니다.

그러고보면 당국자들은 참 속 편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만이니까요.
"이것은 우리가 한 잘못이 아니다. 텔레비전의 폐해일 뿐이다."

드라마의 고문 장면이 순전히 허구이며, 간단한 해결책을 얻고자하는 비현실적이고도 감정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줄 뿐이라는 사실을 대다수의 시청자는 알고 있습니다.
"24"를 비판하는 비평가들은 그런 사정을 이해 못합니다.

그리고 스티븐 킹은 또 하나 지적합니다.
잭 바우어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 상황이 닥칠 때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인 고문 행위를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미친 녀석이 덴버를 폭파시켜버린다거나 로스앤젤레스의 전체 인구를 독가스로 공격하려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다면,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당 의원 데니스 쿠시니치 조차도 그 미친 녀석을 델코 자동차 배터리로 전기 고문해서 정보를 캐내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티븐 킹의 이성과 본능 사이에 있는 경계지대에는 야만적인 짐승이 살고 있습니다.
잭 바우어가 고문용 볼펜을 꺼내들 때면 킹의 그 속마음은 항상 기뻐합니다.
"그 나쁜 놈한테 솜씨 좀 보여줘, 잭 바우어!"
킹의 속마음은 소리칩니다.
"그 놈은 비열한 겁쟁이일 뿐이야. 그러니 쓴맛을 톡톡히 보여주라구!"

드라마의 고문 장면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 장면이 교육적인 것은 아니지만, "24"는 심야뉴스도 아니고 뽀뽀뽀도 아닙니다.
"24"는 현실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오락 드라마입니다. 매주 44분을 투자하여 시청하면, 손쉬운 해결책과 신속한 해법이 있다는 환상을 느끼게 해줍니다.
물론 스티븐 킹은 현실이 드라마처럼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잭 바우어가 위험을 해결해나가는 활약을 보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스티븐 킹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합니다.
"드라마 24에 태클을 걸고 싶은 분들이시여. 내가 이 고문 장면을 집에서 따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테니, 잭 바우어한테 볼펜을 돌려주고 그가 세상을 구하도록 놔두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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