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아이들 [3]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 5. 9. 01:11 posted by 조재형

요새 안에서 그녀의 생활은 신기한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어떤 것은 즐거웠고(고옴의 미소, 피자, 근처 마당에서 벌어지는 게임 즐기는 소리들), 어떤 것은 불쾌했다(그녀가 요새로 들어오게 된 동기를 묻는 조사, 그녀가 요새 안에서 목격한 것들을 알아내려는 협박).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이 감옥이 대체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여기 감옥의 수감자들이 겨우 5명 밖에 안되는 이유는 뭐고(그녀까지 포함하면 6명), 고옴의 표현대로 나이를 먹어 쪼그라든 노인들만 갇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인이 플로이드를 호통치는 광경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는 이 곳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든 자유를 향한 고옴의 노력을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고옴교수는 그 날 저녁 이후로 나타나지 않아 그녀를 실망시켰다. 그녀 생각으로는 아마 플로이드가 체포된 후 이 곳 감옥의 경비가 더욱 엄격해진 탓인 것 같았다. 감시인 길리멋이 그녀에게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전번에 말한대로 포커를 가르쳐주지는 않았고, 그녀는 산책마저 금지당했다. 답답한 방 안에 친구도 없이 혼자 있자니 자기 발가락이나 세고 있는 일 외에는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녀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고 잠에 취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 무엇인가 창문 밖에서 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오후 내내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가봤더니 어떤 물체가 창문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그것은 쿵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누가 이런 걸 던졌나 싶어 창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작은 꾸러미 속에는 열쇠 하나가 들어있었고, 메모가 붙어 있었다. <바네사, 준비하고 있어. In saecula saeculorum 고옴.>

그녀는 라틴어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녀는 메모 속 라틴어가 그저 인삿말일 뿐 행동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길 바랬다. 그녀는 열쇠를 문에 넣고 돌려보았다. 문이 열렸다. 고옴의 메모는 지금 당장 그녀한테 문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호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 분명했다. <준비하고 있어.>하고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법. 감방 문이 열리고 햇빛이 작열하는 바깥으로 통하는 복도가 훤히 보이니까, 고옴과 그의 동료들은 싹 외면해버리고 혼자서 지금 즉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았다. 그렇기는해도 H.G.(하비 고옴)는 위험을 무릎쓰고 감방 열쇠를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니, 그의 말을 잘 따르기로 했다.

열쇠를 얻은 뒤로, 바네사는 더이상 잠에 취해 졸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거나 마당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고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저녁으로 변했다. 길리멋이 나타나 저녁식사로 피자와 코카콜라를 건네주고 가버렸고, 밤이 깊어졌고, 또 하루가 저물었다.

어쩌면 그들은 어둠을 이용해서 나한테 올꺼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달이 뜨고 밤하늘은 유유히 흘러다니건만, H.G.가 오거나 대탈출이 벌어질듯한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고옴 일행의 탈출계획이 들통나서 모두들 처벌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탈출계획에 그녀도 가담했다는 것을 조만간 미스터 클라인이 알게 되지 않을까? 비록 그녀의 가담 정도가 아주 경미한 수준이라지만, 초콜렛맨은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 자정이 지났을 무렵, 도끼가 목에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이드처럼 확 저질러버리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녀는 감방을 나와 문을 잠궜다. 될 수 있는 한 그림자를 숨기려 노력하면서 황급히 감옥 복도를 지나갔다. 다른 사람의 흔적은 안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을 감시하던 마리아상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데서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조심조심 행동하고 얼마간의 행운이 곂친 끝에, 그녀는 얼마전 잡혀온 플로이드와 미스터 클라인이 만났던 마당으로까지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출구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둠 속에서, 그녀의 변덕스런 방향감각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고 잘 빠져나온 행운을 굳게 믿으며, 그녀는 마당에 연결된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도망쳤다. 지붕이 덮혀있는 통로길을 따라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나가다보니 또다른 마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조금 전 마당보다 더 큰 마당이었다. 마당 가운데 서있는 두 그루 월계수에서 나뭇잎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렸다. 밤벌레들이 벽들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광장에는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했다. 그 때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서 벽에 둘러싸인 마당을 밝게 비추었다.

월계수 두 그루와 나무에서 뻗어나온 그림자만 빼면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가 평평한 마당 바닥 위에 페인트로 그려진 복잡한 그림 위에 걸쳐 있다. 호기심에 빠져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녀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어떤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모양. 그녀는 그림의 정체를 알아내려 고민하면서 조용히 그림 주위를 걸어다녔다. 잠시 후 위아래가 뒤바뀐 채 전체 그림을 거꾸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당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림의 디자인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세계지도였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작은 섬에 이런 게 있었다니. 지도 위에는 전세계 주요도시들이 표시돼 있고, 수백개 자잘한 선들이 바다와 대륙을 가로질러 위도와 경도같은 지리정보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도에 그려진 수많은 기호들이 무척 특이했지만, 이 지도가 정치적인 정보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분쟁지역의 국경, 국가의 영해 통치범위, 접근 금지구역. 이 모든 것들이 매일 변하는 국제정세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이, 분필로 그려진 선들이 그 위로 여러차례 다시 그려져 있었다. 어떤 지역들은 심각한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휘갈겨쳐진 분필선들이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이 요상한 세계지도에 푹 빠져들었다. 정신을 지도에만 팔고 있느라 하마터면 지도의 북극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뻔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려다 달빛 속에 드러난 사람을 자세히 보니 고옴이었다.

"움직이지 마." 세계 저편에서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따랐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불안하게 마당을 두리번거리던 H.G.는 마당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바네사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오지 않아서." 그녀가 이유를 설명했다. "당신이 나를 아주 잊은 걸로 생각했어요."

"상황이 나빠져서 그랬어. 놈들이 우릴 한순간도 빠짐없이 감시하더군."

"하비, 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여기는 휴일을 보낼만한 곳이 아니라구요."

"물론 자네 말이 맞아."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여기는 희망이 없는 곳이야. 희망이 없어. 당신 혼자서 여길 빠져나가야 돼. 우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려. 놈들은 우릴 절대 놔주지 않을거야. 진실이 너무 끔찍하거든."

"무슨 진실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잊어버려. 우리가 만났던 사실도 다 잊어버리라구."

바네사는 비쩍 마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렇겐 못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어요."

고옴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당신이 알아야할지도 몰라. 어쩌면 전세계가 알아야할지도 모르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샛길 안으로 끌고 갔다.

"저 지도는 뭐죠?" 그녀의 첫번째 질문이었다.

"우리들이 게임을 하는 곳이야." 그가 마당 바닥에 어지럽게 그려진 분필선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한숨 쉬었다. "물론 항상 게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자네도 알겠지만 시스템은 썩어버렸거든. 그것은 문제의 본질과 이성적 해결 모두에 해당하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야. 처음에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어. 20년간을... 20년간을..."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운 듯, 자꾸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개구리를 가지고 놀았던 거야."

"하비, 당신 말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일부러 어렵게 말한 거에요 아니면 혹시 당신한테 치매끼가 있는 걸까요?"

바네사의 푸념에 그는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졌고, 신통하게도 효과가 나타났다. 시선은 여전히 세계지도에 고정한 채, 그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미리 정리한 다음에 말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과거에 대한 고백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권력다툼으로 세계가 파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1962년 세계의 권력자들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날을 잡았다. 그들로서도 멸망한 지구를 바퀴벌레들이 지배하게 된다는 생각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만약 지구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인간의 생존본능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라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권력자들은 밀실 안에 모였다. 지성적인 회담같은 것은 없었다. 공산당 정치국, 국회, 의회의 지도자들-세계를 지배하는 군주들-이 얼굴을 맞대고 하나의 거대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앞으로 발생하는 국제문제들은 특별위원회가 감독하며, 위원회는 정치적 취향에 휘둘리지 않고서 인류가 집단자살을 면할 수 있게 원칙들을 제시할 수 있는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인물들이 운영한다는 약속이 정해졌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지성과 윤리의 엘리트들-최고 중의 최고-로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의 지혜가 한 데 모여 인류를 새로운 황금시대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어쨌든 권력자들이 도출해낸 이론은 이렇게 결정나 버렸다.

바네사는 고옴의 짧은 설명이 그녀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 수백가지 질문들을 꾹 참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옴이 계속 말을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이론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어. 정말 멋지게 실현되었다구. 국제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특별위원회 멤버는 총 13명이었어. 러시아인 1명, 나를 포함한 유럽인 몇 명, -물론 요니요꼬씨도 멤버였지- 뉴질랜드인 1명, 미국인 2명... 우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집단이었어. 우리 중에서는 나를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도 2명 끼어있었고-"

이제 그녀는 고옴의 정체를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의 얼굴을 전에 어디서 봤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때는 그도 그녀도 무척 젊었을 때였다. 그녀는 어린 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그의이론을 무조건 암기하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조언은 권력자들간에 의견일치를 보도록 이끌었고, 안정적인 경제구조를 확립하고 신생국가들이 문화적 주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어. 물론 지금에 와선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엔 매혹적으로 들리는 일들이었다구. 그런데 사실 위원회 출범 초기부터 우리의 관심사는 주로 영토문제였어."

영토문제?

고옴은 앞에 있는 지도를 품에 껴앉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전세계를 알맞게 나누는 일에 도움을 주었단 말이야."그가 말했다. "작은 전쟁들을 통제해서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게 하고 독재정치가 세상에 범람하는 것을 막았어. 우리는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 되어, 더러운 때가 너무 두껍게 낀 곳이 생길 때마다 깨끗이 청소했어. 굉장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아주 행복하게 받아들였어. 우리 13명이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각국 정부의 최고권력자들만 빼면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이 즐겁기까지 했다구."

바네사는 생각했다. 이것은 자기가 나폴레옹이라고 믿는다는 과대망상이 한 단계 더 발전한 수준이다. 고옴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친 게 확실하다. 영웅을 꿈꾸는 정신병이다! 그래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병이다. 사람들은 왜 그를 가둬놓는거지? 그는 남에게 피해를 끼칠 능력도 없는데.

"옳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갇혀있는 것은-"

"물론 그건 보안을 위해서야." 고옴이 대답했다. "어떤 무정부주의자 그룹이 우리가 활동하는 장소를 찾아내 우리를 납치해 버린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라구. 우리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처음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스템은 썩어버렸거든.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 중요한 결정을 내려줄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점점 더 스스로 고민해서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고, 점점 더 자신들의 권력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리는데만 탐닉하게 되었어. 위원회 활동이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단순한 조언자 역할을 벗어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권력자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

"재밌네요." 바네사가 말했다.

"한동안은 그렇게 잘 지냈지. 그랬던 것 같아." 고옴이 대답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갑작스럽게 무너졌어. 10년정도가 지나자 눌려왔던 압력이 터졌어. 이젠 위원회 멤버 절반이 죽어버렸거든. 골로바텐코가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어. 부캐넌-뉴질랜드인-은 매독으로 죽었는데, 본인은 끝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구. 노환으로 인해 요니요꼬, 베른하이머, 사우어버츠도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 이제 조만간 남은 우리들도 모두 저 세상 구경을 하겠지. 그래서 클라인이 우리가 죽었을 때 임무를 떠맡을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눈꼽만치도 신경을 안 써. 아무런 대꾸도 없다구! 우리는 그저 머슴생활이나 하고 있는거야." 그는 좀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권력자들한테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는 한, 그들은 행복한 거라구. 젠장..." 격앙됐던 목소리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다 때려칠거야."

바네사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아실현의 순간이 온 것일까? 고옴의 머리 속에 있는 정상적인 인격이 세계지배라는 허황된 이야기를 벗어던지려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의 회복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탈출하고 싶어요?"

고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내가 살던 집에 가보고 싶어. 바네사, 난 위원회 활동을 하느라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왔어. 정말 미칠 지경이야." 바네사는 생각했다. 그래, 그도 자기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거로군.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지구 평화를 위해 희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자신이 맡고 있다는 막중한 임무를 뽐내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말 않고 미소만 지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지! 상관안해. 나는 여길 나가고 싶어! 내가 바라는 것은-"

"목소리 좀 낮춰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고옴은 이내 이성을 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죽기 전에 작은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이야. 우리들 모두 같은 마음이지.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그가 말했다.

"뭐가요?"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거야?"

"하비, 당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요. 당신은 위험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치만-"

"잠깐만." 고옴이 말했다. "내가 이제까지 당신한테 해 준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거야? 내가 이 곳에서 곤경에 빠진..."

"하비 당신의 얘기 참 멋진 스토리에요..."

"스토리? 스토리라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지?" 그가 후끈 달아오른 상태에서 말했다. "오호라... 알겠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로군. 그렇지? 바로 그거였어! 나는 방금 자네한테 이 세상 가장 큰 비밀을 알려줬는데, 자네는 날 못 믿겠다!"

"당신이 거짓말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나를 미친 놈으로 봤다는 소리네!" 고옴이 화를 냈다.  그의 성난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러자 건물들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고 빠르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당신이 한 짓을 봐." 고옴이 말했다.

"내가 했다니요?"

"우리가 위험에 빠지게 됐잖아."

"이봐요 H.G. 이렇게 된 건-"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당신은 여기 가만있어. 내가 뛰쳐나가서 놈들을 유인할테니까."

그는 뛰려다말고 그녀에게 돌아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그의 입술에 갖다댔다.

"내가 미쳤다면," 그가 말했다. "날 미치게 만든 건 바로 당신이야."

그는 짧은 다리로 꽤 빠르게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월계수 있는 곳에 다다르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멈추라고 소리쳤다. 고옴이 무시하고 계속 달리자, 경비병 하나가 총을 쐈다. 총알이 고옴 발 밑에 있는 세계지도의 해양부분에 구멍을 냈다.

"알았다구," 그가 소리쳤다. 발을 멈추고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Mea culpa(내가 잘못했어)!"

총소리가 멈췄다. 경비병들이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트자, 그들의 상관이 걸어나왔다.

"오, 시드니 당신이로군." H.G.가 미스터 클라인 대위에게 말했다. 대위는 부하들 앞에서 자기 이름이 아무렇게나 스스럼없이 불려지자 몸을 움찔했다.

"밤이 깊은 시간에 뭐하는 겁니까?" 시드니가 물었다.

"별구경." 고옴이  대답했다.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대위가 말했다. 바네사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옴이 서있는 넓은 마당을 거치지 않고서 그녀의 감방까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쯤은 비상경계령이 내려져서 길리멋이 그녀의 감방을 이미 체크했을 것이다.

"자네 말이 맞아." 고옴이 말했다. "난 혼자가 아니었어." 좀 전에 그녀가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니, 이제 그는 그녀를 배신하려는 것인가? "당신들이 가둬놓은 여자를 봤었는데-"

"어딨어요?"

"벽을 타고 넘어갔어." 그가 말했다.

"이런 젠장!" 대위가 말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그녀를 추적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그 여자한테 말을 해줬지." 고옴이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 벽 잘못 타다가 목 부러진다. 군인들이 철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낫다-"

철문을 열어준다. 이런 사실을 슬그머니 알려주다니, 고옴은 완전히 미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필리펜코-" 대위가 말했다. "하비를 숙소까지 모셔다 드려."

고옴이 투덜댔다. "난 어린애가 아냐. 고맙지만 혼자서도 갈 수 있어."

"하비와 같이 가라."

경비병이 H.G.를 데리고 사라졌다. 오랫동안 서성거리던 대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드니, 도대체 누가 똑똑한 아일까?"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또다시 마당은 텅 비어버렸다. 달빛에 물든 세계지도만 남긴 채.

바네사는 주위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은신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그녀를 추적하러 나간 경비병들이 지나갔던 길을 쫓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길리멋과 산책하던 낯익은 길에 이르게 되었다. 용기백배한 그녀는 계속 서둘러 통로를 따라가서 전자눈으로 감시하는 마리아상이 버티고 서있는 마당에 도착했다. 조각상의 눈길을 피하려 벽쪽에 바짝 붙어 몸을 웅크리고 걷다보니 결국 그렇게도 원하던 철문을 보게 되었다. 철문은 열려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노인이 불평했던 것처럼, 경비상태는 정말 형편없었고,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녀가 철문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자갈바닥을 구르는 부츠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어깨 너머로 살펴보니 손에 소총을 들고 있는 시드니 대위가 나무 뒤에서 걸어나왔다.

"제이프 부인, 초콜렛 좀 드시겠소?"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     *     *     *     *     *     *     *

"여기는 정신병원이더군요." 클라인이 그녀를 조사실로 데려오자, 그녀가 말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당신들은 날 여기에 감글할 권리가 없어요."

그는 그녀가 불평하는 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당신은 고옴에게 말을 했어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고옴도 당신에게 말을 했구요."

"그 사람이 나한테 말거는 게 어쨌다는 거죠?"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그 사람이 말거는 게 어쨌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도 당신한테 물었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 클라인이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녀는 그가 졸도하지나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제이프 부인, 난 꼭 알아야 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기가 자꾸 클라인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한테 이상한 말들을 해댔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는 미쳤어요. 내 생각엔 당신들도 죄다 미쳤어요."

"그가 당신한테 어떤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그냥 쓸데없는 얘기."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제이프 부인." 클라인이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협조해 주세요."

"그가 말하길 여기에 어떤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대요. 그 위원회가 세계정치에 관련해서 결정을 내려주는 곳인데, 그가 위원회 멤버 중 한 명이래요. 뭐 대충 그런 얘기였어요."

"그리고나서?"

"그리고나서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해줬어요. 고옴, 당신은 정말 미친 것 같다고."

미스터 클라인이 억지로 미소지었다. "물론 그가 내뱉은 말들은 완전히 지어낸 얘깁니다."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바네사가 말했다. "미스터 클라인, 제발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나는 어엿한 성인여자-"

"미스터 고옴은-"

"그는 자기가 교수랬어요."

"그것도 그의 과대망상입니다. 미스터 고옴은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그는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지금 당신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건 정말 행운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누구?"

"그는 혼자가 아니랬어요. 나도 그의 동료를 목소리를 들어봤어요. 그 사람들도 전부 정신분열증이에요?"

클라인이 한숨 지었다. "각자 증상에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미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한창 때 그들은 모두 살인자였어요." 그는 말을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잠시 주저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연쇄살인범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이 세상과 격리되어 여기에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곳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모두 무장을 하고-"

바네사는 경비원들이 왜 수녀로 변장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클라인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내 말을 믿어요. 당신이 여기에 머무는 것을 언짢아하는 것만큼 내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럼 날 내보내줘요."

"우리측 조사가 끝나면요." 그가 말했다. "그때까진 협조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미스터 고옴이나 다른 환자들이 당신에게 어떤 계획같은 것을 같이 하자고 접근해 오면, 나한테 즉시 보고해 줘요. 그렇게 해주겠죠?"

"내 생각에는-"

"그리고 앞으로는 멋대로 여길 탈출하려는 행동을 자제해 주세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당신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일 합시다. 시간이 난다면."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잠이나 푹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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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아 그녀는 계속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그녀 앞에 놓인 여러가지 사실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터무니없는 것일까? 그녀는 몇가지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고옴이 알려준 것, 클라인이 알려준 것, 그녀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 그 어떤 것도 속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없었다. 모든 해결책들은 그녀를 이 곳까지 오게 만든 산길처럼 종착역이 어디가 될 지 흐리멍텅하기만 했다. 그녀는 낯선 길을 탐험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이 빚어낸 현재의 결과때문에 괴로웠다. 현재의 그녀를 보라. 피곤에 찌들고, 이리저리 치여다니다, 탈출의 희망도 없이 붙들려 있다. 하지만 낯선 길에 대한 모험심은 그녀의 천성이었다. 언젠가 전남편 로널드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괴팍한 모험심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만약 이제와서 그녀가 그녀의 괴팍한 본능을 애써 무시하려 든다면, 그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머리 속으로 쓸모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며 눈을 뜬 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그녀는 마음 속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