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불면증> 패러디

읽을꺼리 2007. 5. 8. 23:12 posted by 조재형
이 글은 스티븐 킹 소설 <불면증>을 제가 패러디한 것입니다.

불 면 증


- 원작: 스티븐 킹 / 작업: 조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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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살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힘차게 살아가던 김노인. 몇 달째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을 한숨도 못 이루고 있었다.

'아~ 금방이라도 잠들 것같이 피곤한데, 왜 잠이 안오는 거냐.' 김노인은 벌써 몇시간째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거리다 저리 뒤척거리다 요리 뒤척거리다 조리 뒤척거리다 몸부림을 치면서 잠을 이루려 기를 쓰고 있었다.

'아니지. 어차피 죽으면 영원히 잘텐데, 이렇게 잠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 궁상떨지 말고 과감하게 일어나자.' 김노인은 충혈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다. 책상에는 그가 오래전에 우체국예금으로 구입한 인터넷 PC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었다. '이참에 인터넷을 배우는 거야. 나같은 늙은이라도 배울건 배워야 돼.' 막연한 두려움에 컴퓨터를 멀리했던 김노인은 용기를 내어 교재(제목: 이 책 읽어도 인터넷 못하면 당신은 사과껍질만도 못한 인간!)를 앞에 놓고 인터넷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과연 듣던 대로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였다. 교재를 따라 컴퓨터화면을 여기저기 눌러보니 신기한 정보들이 막 쏟아져 나왔다. 생각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그동안 잠 안온다고 투덜대기만 했으니, 난 참 바보였어.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내가 아냐. 나도 이젠 어엿한 정보화시대의 신세대야.' 김노인은 불면증에 시달린 후 처음으로 삶의 희열을 느끼며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 서핑을 즐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암초가 김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경고! 성인정보는 돈을 내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국물도 없습니다.

         갑자기 뜬 경고메시지에 김노인은 혈압이 솟구쳤다. "이럴수가!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졌단 말이냐! 동방예의지국에 어른공경하는 흐뭇한 전통은 어디로 사라진거냐. 나같은 늙은이는 경로우대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는 성인사이트에 들어가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오랜만에 젊은 아낙네의 모습을 통해 청춘을 되찾으려던 김노인의 야심은 자본주의의 벽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다. 마우스를 쥔 김노인의 손이 분노로 떨리고 있는동안 어느덧 날이 밝고 말았다.

          어수선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는 공원으로 산책나갔다. 몇 달째 계속된 불면증과 인터넷 좌절로 인해 그는 무척 피곤했다.

김노인의 앞으로 어린 꼬마가 지나갔다. '요즘은 어린애들도 인터넷 도사라던데, 쟤한테 물어볼까? 얘야~ 공짜로 사이트에 들어가는 패스워드 좀 가르쳐 주라. 아냐, 안돼. 어떻게 이 나이가 돼서 꼬마한테 그런 걸 물어보나.'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늙은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린이에게라도 물어서 알아야 한다."

그는 꼬마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꼬마 앞에 이상한 괴물녀석이 보였다. 꼬마만한 작은 키의 대머리였다. 커다란 눈엔 눈꺼풀이 없었으며, 귀끝이 뾰족했다. 그리고 녀석은 커다란 가위를 손에 들고 꼬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대머리녀석이 바로 코 앞인데도 꼬마아이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내가 잠을 못 자서 헛것을 보고 있는건가? 김노인은 충혈된 눈을 손으로 비벼보았으나 여전히 대머리 괴물이 보였다. 대머리가 꼬마를 보며 기분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가위를 치켜들었다.

꼬마에게 무슨 해꼬지를 하려는 게 분명해. 설마 저 커다란 가위로 꼬마를... 김노인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일제시대 때 나까무라 순사한테 10원을 주고 배웠던 '힘껏 뛰어올라 두팔벌려 두발모아 중력무시 공중낙하' 기술을 발휘했다. 체력을 심하게 소모시키는 큰 기술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지고 갈 새싹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뻑! 김노인의 중력을 무시한 기습공격에 대머리녀석은 나가떨어졌다. "아니, 저 늙은이가 어떻게 날... 인간에게는 내가 안 보일텐데. 일단 후퇴다. 너 다음에 또 만나면 죽음이야! 밤길 조심해." 대머리녀석은 공원숲으로 달려가더니 커다란 나무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나무 속으로 흡수된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김노인은 괴물녀석이 들어간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짝짝짝. 등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김노인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훌륭하십니다." 조금전의 대머리녀석과 똑같이 생긴 몸집이 작은 대머리 두녀석이 그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린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누구냐? 사람이냐 아니면 포켓몬스터냐? 피카츄?"

"아 긴장하지 마세요. 우린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오른쪽에 서있던 대머리가 말했다. "우린 인간이 아닙니다. 우린 인간의 생명을 관리하는 고차원의 존재들입니다. 저는 박사1이고 이 친구는 박사2라고 합니다."

"정말입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왼쪽에 있는 박사2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지마. 생명을 관리한다니. 너희랑 똑같이 생긴 아까 대머리 녀석은 꼬마아이를 해치려고 했어!" 김노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 때문에 꼬마에게 말도 못건넸어. 물어볼게 있었는데."

"저런 뭔가 급한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유감입니다. 그러나 우린 그 대머리녀석과는 틀립니다. 우린 인간의 생명이 타고난 수명대로 다할 수 있도록 관리하지만, 그 박사3 녀석은 재미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놈입니다." 박사1이 침착하게 말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수가..." 김노인은 왠지 박사1의 말에 믿음이 갔다.

박사2가 두 팔을 쫙 벌리고 외쳤다. "모든 것이 신의 뜻입니다. 인샬라관세음보살오마이갓! 신께서 우리들을 만드셨고, 박사3도 만드신 겁니다."

"아니 어떻게 신이 그런 망나니같은 박사3을 만들었지?"

"창조행위를 많이 하다보면 어쩌다 불량품도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신께서 하시는 일에 어찌 우리같은 미물이 불평을 하리요, 인샬라관세음보살오마이갓!" 박사1도 두 팔을 쫙 벌리고 외쳤다. "사실 우리들이 김노인 당신 앞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김노인은 우연이라는 것을 평생 믿어본 적도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이 대머리박사들을 만나고 보니 무엇이든 못 믿을 것이 없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관리한다는 우리들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우리 인간을 관리한다는 당신네들도 못하는 일을 어떻게 나같은 인간이 할 수가 있어?"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끝까지." 박사1은 침착하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대학생이 초등학생을 앞에 놓고 불법과외를 가르치는 듯한 분위기였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두패로 갈라져 온통 대립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닭파와 계란파의 다툼이죠.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싸움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자기파의 주장이 옳다면서 조금도 타협을 보려고 하지 않죠."

"당신은 어느쪽이죠? 닭이 먼절까요, 계란이 먼절까요." 박사2가 박사1의 말을 가로막으며 김노인에게 물었다.

"글쎄, 난 닭과 계란이라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는 반대지. 내 생각에는 닭도 계란도 먼저가 아냐. 제일 먼저인 것은 고구마야."

"................그게 무슨 뜻이죠?" 박사1과 박사2가 굳은 표정으로 동시에 물었다.

"그냥 농담 한번 해본 건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보기보단 유머감각이 없구만. 하긴 인간을 관리하는 몸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지.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웃음이 점점 없어지지. 스트레스 해소에는 그저 지렁이랑 팔씨름하는 게 최곤데... 이것도 농담인데 역시 안 웃는구만. 자네들 병원 한번 가봐야겠어. 심각해."

박사1이 억지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계란파의 대부 아리까리박사가 와서 강연회를 합니다. 아리까리박사 잘 아시죠? 뉴스같은 데 나와서는 '계란 후라이같이 야만적인 음식을 먹지 맙시다. 그대신 켄터키치킨은 막 먹읍시다'같이 닭파를 자극시키는 망언을 일삼는 과격파 인사입니다. 그런 아리까리박사가 오늘 저녁 여기 마을회관에서 '계란을 우대하고 닭 위에 군림하는 사회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계란파 조직원들 앞에서 강연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정보를 입수한 닭파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강연이 시작되면 강연회장에 난입해서 계란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계란 후라이를 50개나 만들어 먹어치울 예정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계란 후라이를 먹은게 아니다 달걀 후라이였을 뿐이다'라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변명을 늘어 놓으며 계란파의 이념적인 분열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계는 멸망입니다."

"으~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 먹다니, 그것도 50개씩이나. 인간으로서 어쩌면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가!" 박사2는 머릿가죽을 마구 꼬집으며 절규했다.

"세상이 멸망? 뭔소리여? 겨우 우리 마을의 다툼 정도로 세상이 망해?"

"카오스이론이란게 있죠." 박사1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잘난체하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게 애쓰는 눈치였다. "중국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 한번만 해도 반대편 미국에서는 그것 때문에 태풍이 몰아치는 법입니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대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까 말한대로 닭파의 강연회장 난동으로 결국 계란파는 계란과 달걀의 이념노선 차이로 인해 보수적인 계란파와 진보적인 달걀파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자 뒤늦게 계란파도 가만있질 않고 반격에 나서게 되죠. 결국 계란파의 교란작전에 휘말려 닭파도 영계에 대한 입장차이로 인해 실증적 사고를 중시하는 닭파와 추상적 개념을 중시하는 영계파로 분열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다툼의 주체가 2개에서 4개로 늘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완전 혼란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당신의 마을에 국한되던 싸움이 인터넷, 국제항공, 위성방송, KFC 등을 통해 전세계로 퍼지게 되고 끝없는 싸움 끝에 인류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나면 전세계는 닭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닭이?" 김노인은 미래의 현실에 충격을 먹었다.

"후후후, 놀라셨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계란이 나서기엔 팔도 다리도 콧구멍도 아무것도 없으니 결국 닭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박사2가 냉소적인 태도로 말했다. 결국은 닭이 최고라는 듯이.

"그러니 이 모든 파멸의 발단이 되는 오늘 강연회에서 닭파의 난동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대가!" 박사1의 손가락이 김노인의 가슴을 콕 찍었다.

"당신들이 직접 하지그래?"

"저희는 닭 알레르기가 있어서..." 박사2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같은 늙은이가 뭘 하겠어? 닭파가 몰려오는데 힘없는 내가 뭘 어떡해 하지? 가뜩이나 요즘 불면증 때문에 잠을 통 못자서 죽겠는데."

"바로 그겁니다. 불! 면! 쯩! 김노인 당신은 그 불면증으로 인해 다른 인간들에겐 없는 초능력이 생겼습니다."

"내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니오. 벌써 당신은 초능력자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다른 인간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뭐? 그러고 보니 조금 전의 꼬마는 박사3이 커다란 가위를 들고 다가오는데도 보지 못했어. 멀리 떨어진 나도 보았는데..."

그때 갑자기 축구공 하나가 총알같이 날아와서는 박사2의 안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박사2는 갑작스런 충격에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어찌나 심하게 공에 맞았던지 얼굴 전체가 찌그러진 주전자처럼 움푹 주저앉았다.

축구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김노인쪽으로 뛰어왔다. "할아버지 안다치셨어요?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월드컵 꿈나무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예선전을 앞두고 슈팅연습을 하다 시속 300km짜리 울트라메가톤급 폭탄슛을 날렸는데, 그만 이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네요. 정말 괜찮으신거죠?" 김노인이 괜찮다고 하자 월드컵 꿈나무 청년은 축구공을 들고 가버렸다. 가면서 쓰러져 있는 박사2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서 박사2가 숨넘어가는 비명소리를 질렀지만, 월드컵 꿈나무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나의 베스트 프랜드가!" 박사1이 잔뜩 슬픈 표정을 지으며 박사2에게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스쿠터를 탄 중국집 배달원이 박사1의 몸을 들이받았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스쿠터에 부딪힌 박사1은 공중으로 날아갔다가 한참만에 땅에 떨어졌다. 어찌나 충격이 심했던지 눈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배달원이 스쿠터에서 내려 김노인에게 뛰어왔다. "할아버지 안다치셨어요?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요 밑에 신장개업한 중화요리집 '광란의 짱깨반점' 수석 배달원입니다. 지금 당장 맛있는 짜장을 먹지 못하면 자살하겠다는 성질 급한 손님의 주문을 받고서 조급한 마음에 과속을 하다 그만 이렇게 부딪히게된 것입니다. 정말 괜찮으신거죠?" 김노인이 괜찮다고 하자 중국집 수석 배달원은 스쿠터를 몰고 가버렸다. 스쿠터가 굴러가면서 쓰러져 있는 박사1의 몸통을 밟고 지나가서 박사1이 처절한 비명소리를 질렀지만, 수석 배달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내 눈에만 저 대머리박사들이 보이는구나. 지긋지긋하던 불면증 때문에 이런 희안한 능력이 생기다니' 김노인은 박사들이 걱정되었다. "이봐들, 괜찮아? 병원에 안가도 괜찮겠어? 충격이 심한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저희는 연약한 인간이 아니니까요.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박사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박사1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다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박사2는 축구공에 맞은 코가 깨져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우린 강합니다. 마징가제트보다 더" 박사2가 움푹 패인 얼굴로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벌린 입안에는 이빨이 왕창 부러져 버렸고 없어진 이빨 틈으로 피가 물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박사1은 일어서다가 털썩 쓰러졌다. 박사2가 부축해주어서 겨우 일어섰다. 김노인은 박사1이 박사2에게 조심스레 귓속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 갈비뼈가 다 부러진 것 같아. 부서진 뼈들이 폐를 찌르네. 숨쉬기가 곤란해. 이거 업무중 사고로 인한 산재처리 될까?"

"인샬라관세음보살오마이갓!" 박사2는 조금전처럼 두팔을 쫙 벌리고 외치려다 관두고 턱을 잡고 눈물을 한방울 흘렸다. 아무래도 턱이 산산조각난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니까 난 잘 모르겠어. 나도 얼굴뼈가 왕창 무너져 내렸어. 성형수술 해야될텐데 큰일이다. 성형수술은 산재처리 힘들다던데."

"하여간에 얘기하던 거나 끝내자구. 내가 당신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치고. 그런데 겨우 이런 능력가지고 어떻게 닭파를 막아내나?" 김노인이 비실거리며 정신못차리는  박사들을 재촉했다.

박사1이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불! 면! 쯩! 그것 때문에 다른 초능력들이 억수로 많이 생겼습니다. 그 능력들을 잘 발휘하면 닭파쯤 막아내는 건 일도 아닙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등을 비롯해 합계 38가지 초능력을 이미 지녔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부터."

"글쎄. 내가 다른 사람들 생각도 읽을 수 있다고? 난 못 느끼겠는데."

"지금은 바빠서 안되고 이따가 여기 공원에서 다시 만나서 자세한 초능력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강연회가 오후 8시에 열리니까 그 전에 오후 6시에 만나기로 하죠."

"아니 왜 지금 다 말해주지 않고."

"죄송합니다. 지금이 저희 점심시간이라서. 늦게 가면 식당 아줌마가 밥을 안 줍니다. 먹자고 사는 인생인데 끼니는 꼬박꼬박 챙겨야지요." 박사1이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말했다.

"그럼 이따봐요. 빠이빠이." 박사들은 공원잔디밭 쪽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스르르 사라져갔다.

김노인은 그들이 망가진 몸을 하고 점심을 제대로 먹을수나 있을지 궁금했지만, 이내 자신의 문제로 생각을 옮겼다. '내가 정말 초능력을 가졌단 말인가? 불면증 때문에? 저들 말마따나 대머리박사들을 볼 수 있고, 게다가 사람의 생각도 읽을 수 있다?"

그때 김노인 앞으로 근심에 젖은 얼굴을 한 중년남자가 지나갔다. 김노인은 순간적으로 중년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의 기는 어쩐 일인지 엉덩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김노인은 그 남자의 생각을 절절하게 느꼈다. "당신 치질있지!"

"아니 그걸 어떻게? 아까부터 근질거려서 죽겠는데." 중년남자는 은밀한 사적인 비밀이 탄로난 것이 부끄러운 듯 황급히 달아났다.

공원잔디밭 옆으로 아름다운 숙녀 한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역시 그녀도 근심에 젖은 얼굴을 하고서. 김노인은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번엔 조금전보다 더욱 자신있게 그녀를 향해 소리질렀다. "당신 노팬티지!"

"아니 그걸 어떻게? 아침부터 허전해서 찝찝했는데." 아름다운 숙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도망치듯이 달아났다.

정말이구나. 김노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니. 이젠 인터넷 성인사이트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초능력을 맘껏 이용해 큰일을 해내고 말테다!" 김노인은 공원 한가운데서 절규하듯 포효했다. 다른 초능력 따윈 필요없다. 이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세상이 온통 자신의 것이 된 듯 했다. 그는 서둘러 공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오후 6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공원에 대머리박사 1과 2가 나타났다. 박사1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박사2는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둘은 인류를 혼돈에서 구해줄 김노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김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올까?" 박사1이 깨진 가슴이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잠 자나?"

"그 사람 불면증인데?"

"그럼 밥먹고 있나?"

"그 얘기하니까 나도 배고파."

"배고플 땐 스트레스를 받아서 배꼽에 꽃이 핀다지? 배꽃이라고."

"너 아까 김노인의 썰렁유머에 강렬한 영향을 받았구나."

".......... 미안하다 친구야."

박사들은 한참을 기다렸으나 끝내 김노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시간 무렵, 어느 어두운 골목길. 가출했으나 돈이 떨어져 방황하고 있는 10대 소녀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소녀는 기겁을 했다. 노인은 몇 년동안 한숨도 못 잔 것처럼 매우 수척해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그가 소녀에게 10만원을 주었다.

"할아버지 이게 뭐에요?"

"네가 방금 마음 속으로 '아~ 10만원만 있으면 디립따 좋겠네. 돈버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텐데'하고 생각했잖니. 그래서 주는거야."

"아니 제 맘을 어떻게..."

"난 네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이제 네 생각을 실천에 옮겨라. 10만원만 벌 수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잖느냐. 이제 돈이 생겼으니 나랑 뭐든지 해야겠지?"

"네? 뭐라구요?"

다음날 조간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났다.

계란파의 대부 아리까리박사 강연회에 닭파 난입. 계란 후라이를 먹어치우는 난동을 부렸음. 일부 계란파에 동요가 있었음. 아리까리박사는 "세상이 말세"라며 신속한 수사를 요구했으나, 경찰과 검찰은 자칫 계란과 달걀의 법적 해석을 둘러싼 양계장 측과의 마찰을 우려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 한편 야당은 이런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청와대측의 입김이 작용했다며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그 강연회기사 밑으로 아주 작게 한 노인의 범죄기사가 실려 있었다.

변태영감 10대소녀에게 원조교제 유혹. 소녀의 신고로 쇠고랑. 본인은 자기가 초능력자라며 횡설수설. 한국초능력협회에서는 즉각 변태노인과의 관련을 부인했음. 한편 "네 마음을 보여줘"라는 저서로 유명한 심리학자 왕내숭 교수는 이번 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현실이다, 노친네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밤에 잠도 못자고 괴로워하다 저지경까지 되었겠느냐"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불면증에 걸린 노인의 힘으로 살아날 수도 있었던 인류는 조용히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