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워크 / Roadwork

작품 감상문 2022. 1. 23. 20:50 posted by 조재형

R o a d w o r k

(1981년 리처드 바크먼 소설)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이코로 돌변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인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가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과거에 작은 마음의 상처들을 입었지만 현재까지는 그럭저럭 별 탈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일에 시달리게 된다. 그 일은 대부분 제한된 시일까지 끝마쳐야 하는 일인데, 그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우왕좌왕 헛걸음만 하거나 급기야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자포자기의 상태로까지 전락한다. 게다가 과거의 상처들이 되살아나 그 사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든다. 결국 운명의 시간은 닥쳐오고, 얼마전까지 멀쩡하던 한 사람의 정신은 완전붕괴되어, 그렇잖아도 험악하게 돌아가는 스티븐 킹의 세계에 또 한명의 사이코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결과적으로는 망나니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이코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지금 소개하는 "Roadwork"는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세번째 소설로서, 위에서 말한 사이코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절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2021년에 황금가지출판사에서 "로드워크"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했다.)

바트 도즈는 세탁공장을 관리하며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40살의 정상적인 시민이다. (도즈가 관리하는 블루 리본 세탁공장은 킹의 데뷔작 "캐리 Carrie"에서 캐리의 엄마가 근무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도즈가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던 지역에 고속도로 공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시 당국이 제시한 철거 보상금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야만 한다. 이전대상에는 도즈의 집은 물론이고 세탁공장까지 포함돼있다. 그는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하러, 새로 이전할 공장부지를 구하러 바쁘게 돌아다니...는 척만  열심히 한다. 그 결과 이사계획은 엉망진창이 돼버린다. 도즈는 20년동안 정붙이며 살아온 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 그를 이해못하는 주위 사람들은 -심지어 아내까지도- 등을 돌리게 되고, 그는 혼자 남겨진다. 시에서는 철거예정일까지 집을 비우라고 독촉하는데, 도즈는 충동적으로 엉뚱한 짓을 벌이고 다닌다. 한방이면 사람 머리를 날려 버린다는 더티 해리의 매그넘 권총과 한방이면 코끼리도 죽일 수 있다는 웨더비 라이플을 구입하는 것도 모자라 다이너마이트의 60배 위력을 가졌다는 폭약까지 구입한다. 그리고는 대책없이 빈둥거리기만 한다. 결국 운명의 철거일은 다가오고야 만다.

"Roadwork"에서는 도즈가 자신이 사는 곳에 광적인 애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TV가 귀하던 시절, 집에 TV를 들여놓기 위해 그와 아내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모았는지, 잡일하는 직원으로 입사해서 지금의 관리직에 오르기까지 회사에서 얼마나 애환을 겪었는지 등등 그는 한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쌓아온 뿌듯한 추억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시 당국에서는 고속도로 건설예정지로 지정되어 곧 철거예정이니 썩 물러가란다. 정든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란다. 시 당국의 명령이므로 그래야한단다. 평범한 시민이여, 보상금이나 먹고 떨어져라! 분노할 수 밖에 없는 도즈.

이 소설은 도즈의 집 철거예정일을 석달 앞 둔 시점부터 하루하루 도즈의 일과를 마치 일기처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도즈는 자신조차도 자기가 벌이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하여튼 차근차근 파멸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고의로 이사를 외면해버림으로써 남들은 보상금을 받아 다 이사가버렸는데도 불구하고 텅 빈 동네의 텅 빈 집에 혼자 남아서 술마시고 TV나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도즈의 표현대로 무덤에서 사는 인생인 것이다.

이렇게 폐인이 되어가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라스베가스에 가는 길이라는 여대생에게는 자신에게도 어울릴듯한 훈계를 늘어놓는다. 약물중독을 끊어라,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한다, 세상은 네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하지 않아... 이렇게 남에게는 옳은 말도 잘 하면서 왜 자신의 삶은 파괴시키는 걸까? 정말 단순히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떠나기 싫어서인가?

도즈에게는 찰리라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오래전에 뇌종양으로 죽었다. 뇌종양이 너무 심했던 탓에 수술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었다. 끔찍히도 사랑했던 아들이기에 아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것에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시 당국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집까지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 이번만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다. 사랑하는 찰리는 무기력하게 떠나보내고야 말았지만, 사랑하는 내 집은 무기력하게 떠나보내지 않겠다.

"Roadwork"는 철거 당일에 벌어지는 도즈와 경찰간의 격렬한 총격전이 압도적으로 묘사된다. 그전까지 조용히 진행되던 소설이 마지막에 가서 극악으로 치닫는 것이다. 그 순간까지도 도즈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지만, 이제까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충동적으로 벌여놓은 일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총격전의 한복판으로 몰고가 버린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더더욱 우울하다. 도즈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는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시 당국에 저항했다- 언론에 의해 시 당국이 벌인 도로공사의 치부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뿐이다. 사건은 금새 잊혀지고 사람들은 이제껏 그래왔듯이 일상에 파묻혀 버린다. 언론은 가끔씩 사회의 어두운 진실을 캐내지만 일회용일 뿐이다. 사람들은 언론이 보여주는 일회용 진실에 흥분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흥분도 일회용일 뿐이다. 언론도 사람들도 그 진실을 쉽게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 이른바 냄비근성.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사람사는 데 돌아가는 사정은 다 거기서 거기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TV에서 자신이 속한 조직의 비리를 고발했던 공무원을 보았다. 그는 즉시 공무원사회에서 쫓겨났고 생계를 위해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칫솔 파는 일을 했다. 나는 그 때 진실을 밝힌 용기있는 행동이 무시당하는 우리 사회에 분노했었다. 나중에 그는 복직을 청원하는 소송을 제기했다는데, 그 이후 소식은 모르겠다. 사실 요즘은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TV도 나도 별 관심없다. 하하하! 우리나라 월드컵 16강 들어야 하는데. 하하하! 요즘은 왜 고소영이 드라마에 안나오는거지? 하하하! 하하하!)

도로공사에 대항해 벌이는 도즈의 투쟁과 언론과 사람들의 무성의가 맞물리면서 "Roadwork"는 정말 우울하고 슬프게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대단히 느리게 진행되는 심리소설이다. 한 사람의 무기력한 폐인이 살아가는 일상을 계속해서 보여주니 지루한 구석이 꽤 많다. 이 소설은 전형적인 공포소설이 절대 아니다. 마지막의 격렬한 총격전과 후반부에 나오는 화염병 사건을 제외하면 변변한 액션장면도 없다. 사실 나도 가끔씩 책을 읽다가 졸았다.(나이 탓인가? -_-a;;;)

게다가 이 소설을 창조한 스티븐 킹 마저도 개인적인 이유로 이 소설을 좋게 평가하지 않고 있다. "공포소설을 쓰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진지한 소설을 쓸 때가 됐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쩔쩔매던 시절에 쓴 작품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지 고민하며 쓴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Roadwork"는 심각한 주제의식을 가진 진지한 소설을 만들기 위해 의도된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Roadwork"가 아주 좋았다. 확실히 이 소설은 재미있는 "공포소설"은 아니지만,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느꼈던 그 무거운 침묵은 간간이 지루하기도 했던 이 소설을 꾹 참고 읽었던 나 자신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소설이건 만화건 영화건 드라마건 3페이지/3분마다 한번씩 개그나 액션, 에로가 나와줘야 읽을 맛/보는 맛 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지만, 가벼운 일상에 길들여진 자신에게 묵직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분들에게는 추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