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티튜트 / The Institute

작품 감상문 2019. 12. 1. 22:23 posted by 조재형

The Institute

(2019년 장편소설)


스티븐 킹은 굉~장히 많은 소설을 썼다. 당연히 그 수많은 각각의 소설마다 각각의 결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스티븐 킹 작품 중 가장 독특한 결말을 가진 소설은 무엇일까?

독자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결말이 가장 독특한 스티븐 킹 소설은 1980년 장편소설 "저주받은 천사(Firestarter)"다.

초능력 소녀가 비밀조직에 납치되어 비밀시설에 감금당하는 내용이 나오는 이 소설은 스릴 넘치는 이야기 전개를 마무리지으며, 주인공의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결말을 제시한다.

요즘도 나는 "저주받은 천사"를 떠올릴 때면, 스티븐 킹이 이 소설의 결말을 21세기 버전으로 다시 쓸 경우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진다.

"저주받은 천사"의 결말이 독특하게 나온 배경에는 한 개인이 비밀조직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 같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비밀조직원들을 물리쳐봤자, 비밀조직의 잔당들이 끈질기게 주인공을 추적해 보복을 가하려 할 것이고, 주인공은 평생 이런 위협을 피해다니느라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살다 결국 살해당할 것이다.)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이런 운명을 어린이가 혼자서 감당해야한다면?

"저주받은 천사"에서 주인공 소녀의 아버지가 소녀의 장래를 걱정하듯, 스티븐 킹도 주인공 소녀의 장래를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했을 것이고, 그런 고민의 결과가 소설의 독특한 결말로 이어졌을 것 같다.

그래서 스티븐 킹이 초능력 소년이 비밀조직에 납치되어 비밀시설에 감금당하는 소설 "The Institute"를 2019년에 발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저주받은 천사"를 떠올리며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감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출간된 "The Institute"를 구입해서 읽었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천재 소년 루크 엘리스.

부모가 얘를 어떻게 잘 키워야할지 고민을 할 정도로 학업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는 루크한테는 초능력까지 있다.

어벤저스나 저스티스 리그의 최연소 회원이 될만한 대단한 초능력이 아니라 사소한 초능력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소한 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루크는 괴한들한테 납치를 당하고 '인스티투트'라는 비밀시설에 감금당한다.

인스티투트에는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초능력자 아이들이 루크와 같이 수용되어 있었고, 루크는 이 곳에서 시설을 운영하는 비밀조직원들이 폭력까지 동원하며 자행하는 온갖 이상한 실험에 어쩔 수 없이 응해야하는 처지가 된다.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같이 수용된 초능력 아이들과 친해진 루크는 인스티투트 시설의 운영방식을 알게 된다.

루크는 시설의 앞 동 건물에 수용된 것이며, 앞 동에서 실험이 종료된 아이들은 시설의 뒷 동 건물로 옮겨지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뒷 동에서 앞 동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불법 비밀시설의 뒷 동에서 행복이 꽃을 피울 리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뒷 동 건물로 끌려가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야할지 피해갈 방안을 마련해야할지 루크의 고민은 깊어만간다.

루크가 인스티투트에서 매일 어른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일들을 계속 묘사하는 전개를 답답해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스티븐 킹은 조용히 꾸준히 독자 곁에 폭죽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놓는다.
(요즘 같이 인터넷과 휴대폰이 발달한 세상에서 비밀시설을 운영하는 어려움에 대한 애환도 묘사해준다.)

그러다 소설의 3분의 2 지점에서 스티븐 킹은 폭죽이 거대하게 쌓아올려진 이야기 폭탄에 불을 질러버린다. 수많은 불티가 강렬하게 터져나오고 그 강력한 화력은 이야기 끝까지 지속된다.

루크가 쇼생크 탈출을 감행하고 인스티투트 조직원들의 추격이 시작되면서, 루크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안절부절의 연속이었다.

이곳 저곳에서 팽팽한 긴장과 서스펜스가 노래를 부르고, 액션과 갈등이 춤을 춘다.

그러다 맞이하게 되는 "The Institute" 소설의 결말은 "저주받은 천사" 소설의 결말만큼 독특하지는 않지만, 여러 등장인물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 흥미로웠다.

서로 차분한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다 가시 돋친 설전이 이어지면서 얼굴을 붉히는 대화의 흐름이 소설 끝까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항상 느끼지만 스티븐 킹은 인물들간의 대화장면도 멋지게 잘 쓴다!)

"The Institute" 결말을 읽고 나니 재미있게 잘 읽었다는 감상과 함께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소설 내내 루크가 천재다, 똑똑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지만, 사건 해결 과정에서는 그 천재성이 잘 발휘되지 않는다. 수학문제를 푼다거나 인터넷 검색을 잘 한다는 것만으로는 독자가 주인공의 천재성을 실감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루크가 인스티투트와 맞서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성 덕분이 아니라 그의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던 것이다.

삼국지 소설에서 화살 10만 개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은 제갈량이 며칠 만에 화살 10만 개를 뚝딱 확보하는 장면을 읽으면 독자는 "우와우와~ 역시 제갈량이다,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가 초빙할 정도도 능력자였네"라면서 제갈량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는데, "The Institute" 소설의 루크한테는 이런 장면이 부족하다.

그래서 소설 후반에 루크가 "인스티투트에 있는 전문가들보다 내가 더 낫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그럼 그럼 그렇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엥? 정말 그런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다른 등장인물이 루크한테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지적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The Institute" 소설의 결말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추가적인 설정들이 언급되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속편의 내용을 그려보게 된다.

속편에서는 이런 저런 일이 발생해서 인물들이 어디를 향하게 되고 비밀조직의 어떤 시설이 등장해서 갈등을 유발하겠구나...

스티븐 킹이 이 소설의 속편을 쓴다고 한 적은 없지만, 만약 속편이 나오게 되면 나는 기꺼이 책 구입에 내 돈을 바칠 것이다!!!

초능력을 가진 소년들과 소녀들이 나와서 서로 우정을 쌓아가며 악의 무리와 맞서싸우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한테 "The Institute" 소설을 추천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작가 후기에는 스티븐 킹의 창작활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소개되고 있어 재미를 안겨준다.
(스티븐 킹 소설 "언더 더 돔"의 주요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스포일러에 민감한 독자라면 작가 후기를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국의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눈이 커지면서 ㅋㅋㅋ거리게 되는 문장도 등장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이 어떤 기준으로 작성되었는지 스티븐 킹 아저씨한테 참 궁금해진다. ㅋㅋㅋ

p.s. 2020년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인스티튜트"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의 한국어판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