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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zard and Glass

The Dark Tower 4

(1997년 소설)

1991년 다크 타워 3탄 <황무지(The Waste Lands)>를 발표하고 나서 스티븐 킹은 다크 타워 팬들의 한숨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롤랜드 일행과 미치광이 기관차 블레인이 대결하는 긴박한 장면에서 3탄이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 것이다. 그 대결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던 팬들은 어서 다크 타워 4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킹은 다작을 하는 작가니까 4탄이 금방 나오겠거니하고.

하지만 킹은 또다시 다크 타워 팬들의 한숨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도무지 다크 타워 4탄이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3탄을 그렇게 애간장 태우게 끝내놓고 왜 4탄이 나오지 않는 것이야! 그런데 다크 타워 팬들이 기다림에 지쳐 홧김에 다단계 판매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그러니까 정확히 1997년에, 드디어 다크 타워 4탄 <Wizard and Glass>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만사 제쳐놓고 서점에 달려가 <Wizard and Glass>를 사서 책을 펼친 순간, 그들이 본 것은...

...롤랜드 일행과 미치광이 기관차 블레인의 결투였다. 롤랜드 군단(롤랜드, 에디, 수잔나, 제이크, 오이)이 다크 타워 3탄에서 미처 못 끝냈던 기관차 블레인과의 결투를 숨가쁘게 진행하고 있었다. 결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그런데 제한시간은 자꾸만 다가오고, 결투는 잘 풀리지 않는다.

나도 다크 타워 3탄 <황무지>를 끝까지 보고 그 대결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몸이 달았던 사람 중 한 명이다. 4탄 <Wizard and Glass>에서 그 대결을 마저 지켜볼 수 있어 재밌었다. 롤랜드 일행이 차례로 나서서 블레인과 대결을 벌이는 부분이 쉴새없이 펼쳐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겨운 만담의 향연이랄까. 엄청난 대사들이 영어로 된 수수께끼 문장들을 마구 토해내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중에 한국말로 번역하게 될 사람은 상당히 머리가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블레인과의 대결장면은 번역가의 센스를 고통스럽게 시험하게 될 것이다.

근데 사실 따지고 들자면 롤랜드 일행이 대결을 마무리 짓는 방식은 블레인과 맺었던 암묵적인 규정을 치사하게 위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시간은 다가오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주 작은 틈이 보인 것이다. 그냥 포기하고 앉아서 죽느니 불확실한 가능성에라도 매달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롤랜드 일행은 도박을 걸었다. 그 도박이 도리어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지만, 어쩌겠는가? 어설프게나마 방법은 그것뿐인데. 그들의 시도는 무모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스티븐 킹의 의지가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아~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블레인과의 대결을 마무리 짓고서 롤랜드 일행은 또다시 다크 타워를 향한 끝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그런데 길을 걷는 동안 계속해서 신경을 긁어대는 기기묘묘한 소음이 들려온다. 다들 괴로워하는데 롤랜드만이 자기는 예전에 이미 겪어본 것이라며 여유를 보인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들은 그 옛날 얘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는데, 롤랜드는 괜히 딴청을 부린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두들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롤랜드는 그 기기묘묘한 소음과 관련된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놀랍게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롤랜드의 첫사랑 이야기였다~♥

슬픈 가정사로 인해 14살에 총잡이가 된 롤랜드. 북서쪽에서 일어난 전쟁의 불길을 피해, 아버지의 지시로 롤랜드는 절친한 친구인 커스버트와 앨라인과 함께 남동쪽의 작은 마을로 파견된다. 그 마을은 정말로 순박한 시골 인심이 살아숨쉬는 곳인 것만 같았다. 가는 곳마다 중앙도시에서 온 롤랜드 일행을 환대한다. 그러나 사실 그 곳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맞먹는 음흉한 음모가 도사린 도시였다. 늙었지만 정력은 살아숨쉬는 시장, 권력 지향의 보좌관, 눈웃음 살살 치는 보안관, 시장의 사설 경호원으로 고용된 큰 관 사냥꾼 3인조,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목장 조합 임원들, 언덕 위에 사는 마녀, 그리고 신비로운 존재 "마법사의 무지개"가 얽히고 설켜서 고약한 음모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롤랜드와 그의 친구들은 어떡해든 좋은 해결방법을 모색해 보려 하는데, 그만 예상못한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롤랜드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 것이다. 그의 상대는 그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수잔이라는 쭉쭉빵빵 소녀. 롤랜드는 자신도 주체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 게 되는데,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에겐 가슴 아픈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축제의 날 밤에 늙었지만 정력은 살아숨쉬는 시장에게 씨받이로 팔려가야 하는 몸이었다. 롤랜드, 어쩔 것이냐. 너의 14살 첫사랑을 그냥 떠나보낼 것이냐?

롤랜드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참 흥미로웠다. 시골 마을의 음모를 분쇄하는 이야기와 롤랜드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초반과 중반의 이야기 전개는 여유롭다. 음모도 사랑도 느긋하게 진행된다. 여러 가지 자잘한 사건과 사고들이 느슨하게 이어지다 후반부로 갈수록, 수잔이 롤랜드와 이별할 수밖에 없는 축제의 날로 갈수록 마을의 음모도 롤랜드의 사랑도 정신없이 현란하게 휘몰아친다. 특히 축제가 가까워질수록 마을이 스산하게 변모하는 장면과 갑자기 피가 낭자하게 흩날리는 잔인한 장면들을 묘사하는 킹의 필력이 멋지다.

후반부는 정말이지 폭력과 사랑이 교차하며 폭발하는 숨막히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롤랜드가 정신에 붕괴를 일으키며 겪는 체험들은 그가 다크 타워를 향한 인연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의 미래를 보여주는 장면임과 동시에 다크 타워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흥미진진했다.

이렇게 롤랜드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자 일행들은 그의 안타까운 사연에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다크 타워를 향한 여행을 계속하는데, 길 앞을 녹색 궁전이 가로 막고 있다. 그리로 들어간 롤랜드 일행은 신비롭고도 고통스럽고도 슬픈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롤랜드 일행들이 녹색 궁전을 목격하고 그 곳 안으로 들어가서 겪는 체험들이 긴장감있고 신비롭게 펼쳐진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가슴을 졸이며 읽었는데, 바로 전에 롤랜드가 들려줬던 옛날 이야기와 겹쳐지면서 위기가 닥쳐오는 장면이 짜릿했다.

녹색 궁전의 모험을 마친 롤랜드 일행은 다크 타워를 향한 여행을 또다시 이어간다.

다크 타워 4탄인 <Wizard and Glass>는 전작인 3탄 이후로 후속편을 기다려왔던 내게 굉장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4탄은 크게 "블레인과의 결투", "수잔과의 첫사랑", "녹색 궁전의 모험"으로 이어지는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고 가장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부분은 역시 롤랜드와 수잔의 첫사랑이 그려지는 부분이다. 롤랜드가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겪는 사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서부영화를 연상시킬 만큼 경쾌하고 발랄한 총격전을 보여 주었다. 악역으로 나오는 큰 관 사냥꾼 3인조의 리더 요나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고 그에 맞서는 나이 어린 롤랜드와 친구들의 박력도 만만치 않았다.

롤랜드와 수잔의 사랑과 관련해서는 이 책의 첫부분에 인용된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습처럼 허락받지 못할 사랑에 괴로워하는 연인의 모습을 절절하게, 그러면서도 격렬하게 보여주었다. 역시 팔팔한 아이들의 사랑이어서 그런지 정열적이었다. 스티븐 킹은 <Wizard and Glass> 후기에서 나이 들어 어린 나이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쓰려니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했는데, 내가 읽은 롤랜드와 수잔의 사랑은 킹의 고백이 농담이라고 여겨질 만큼 화려하고 뜨겁고 멋졌다.

<Wizard and Glass>에서는 그간 별로 속내를 알 수 없던 롤랜드의 과거가 대단히 많이 보여져서 읽는 이를 만족시킨다. 비록 그 과거가 무척 가슴 아픈 일들의 연속이라서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만. 거기다가 <Wizard and Glass>에서는 킹의 소설 <스탠드(The Stand)>와 관련된 얘기들이 틈틈이 나온다. <스탠드>를 읽은 독자들은 그 장면에서 무한한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크 타워 시리즈를 죽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Wizard and Glass>에서도 자꾸만 롤랜드 일행의 다크 타워를 향한 여행에 불행한 결말이 벌어질 듯한 암시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궁금하다. 과연 이 다크 타워 시리즈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난 다크 타워 5탄으로 달려가고야 말 것이다. 으으~ 빨랑 읽고 싶어 미치겠다. 역시 난 다크 타워 시리즈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다.

p.s. 2013년 황금가지출판사에서 "Wizard and Glass"를 "마법사와 수정 구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