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켈레톤 크루 / Skeleton Crew

작품 감상문 2007. 5. 12. 22:18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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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leton Crew

(1985년 단편집)

스티븐 킹의 단편집 <Skeleton Crew> 서문에서는 단편소설의 경제적인 약점을 소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단편을 완성하느라 들인 시간과 노력을 따져보면 장편소설에 비해 작가가 받는 돈이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단편을 쓰는 이유는?

킹은 자꾸만 머릿 속을 맴도는 단편의 소재를 작가가 글로 풀어놓았을 때의 행복감을 말한다. 쓰고 싶은 글을 실제로 써냈을 때의 그 느낌. 오렌지를 쥐어짰을 때 나오는 그 노란 국물 속에 담긴 우주 삼라만상의 오묘한 진리가 독수리 오형제의 끝말 잇기 놀이가 나트륨에서 중단될 때의 그 나른함과 어울려 아름다운 미녀의 입술이 구청에서 예산이 남아돌아 멀쩡한 걸 들어내고 금방 깔아놓은 새 보도 블록에 스칠 때의 그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한 데 어우러진 바로 그 느낌. 한 마디로 말해서 기분 최고라는 얘기다.

어떤 이들은 단편소설 쓰기를 그저 장편소설 쓰기에 도전하기 전에 의례히 치러야 하는 연습 정도로 취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단편집은 시시해서 안 읽고 장편소설이 읽는 데는 최고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라톤 선수가 100미터 달리기 선수 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마라톤은 마라톤이고 100미터 달리기는 100미터 달리기고 단편소설은 단편소설이고 장편소설은 장편소설이고 핑클은 결국 핑클인 것이다. 그 어느 것도 한 쪽의 노예가 아니라 각자가 고유의 영역을 가지면서 각자의 멋과 맛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Skeleton Crew>는 <스티븐 킹 단편집(Night Shift)>에 이은 킹의 두 번째 단편집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22편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스티븐 킹이 단편을 쓰며 느꼈을 그 기쁨을 어느 정도는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단편을 절대 깔보지 않는 착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을 굳게 다짐하게 될 것이다.

<Skeleton Crew>는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스켈레톤 크루>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했다.


1. The Mist

엄청난 폭풍이 밤새 마을을 강타한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부서지고 난장판이다. 호숫가에 사는 데이빗은 아내를 집에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마을에 있는 슈퍼마켓에 당장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간다. 밤새 폭풍을 겪은 마을 사람들이 물건을 사느라 슈퍼마켓은 분주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호수 저편에서 보이던 이상하리만치 하얀 안개가 어느새 마을을 덮친다. 슈퍼마켓 안의 사람들은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가면 하얀 안개 속에서 죽는다. 어쩌나. 사람들은 동요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하는데, 급기야 안개는 슈퍼마켓을 점점 더 조여오고, 우리의 주인공은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다.

아아, 너무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상한 안개가 몰고온 죽음의 공포를 너무도 음산하게 그려냈다. 사실 안개 속의 공포란 것이 다분히 만화적인 모양새를 띄고 있는데, 그것을 상황과 맞물려서 긴박감 넘치게 진행시키는 킹의 필력이 멋지다. 주인공 남성이 슈퍼마켓 속에 고립되어 있으며 겪는 막막한 심정이 내 가슴 속에도 전해지는 듯 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이라면 주인공 일행과 심술궂은 할머니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전까지 온갖 야리꾸리한 언변으로 상황을 이상하게 몰고 갔던 할머니와 맞서는 주인공 일행의 활약상에 난 박수를 치고 말았다. 답답했던 슈퍼마켓 속의 상황을 시원하게 깨부수는 멋진 장면이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자연스레 주인공의 앞날을 상상해보게 되는 결말의 여운도 상당히 좋다. 이 소설은 단편집 <Skeleton Crew> 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작품인데, 그러면서도 "고립"이라는 설정을 이렇게까지 처절하고 스릴있게 이끌어간 킹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이 멋진 소설은 킹 원작영화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의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는 "미스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2. Here There Be Tygers

초등학교 3학년 수업시간. 우리의 주인공 소년 찰스는 죽을 지경이다. 오줌이 마려워서. 아아...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쪽팔리는 것도 감수하고, 무서운 여선생님의 꾸중도 감수하면서, 찰스는 수업시간 중에 화장실에 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곳에서 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를 만나게 된다.

짧으면서도 상당히 귀여운 단편이다. 다 읽고나면 찰스의 행동이 귀여워서 빙긋 웃음을 짓게 된다.

어린 나이에 화장실에서 상당히 괴상망칙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면서도, 생리현상에 충실한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찰스의 앞날이 기대되는 바이다. 화장실과의 인연이 그의 장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길 기대해 본다.


3. The Monkey

할은 다 큰 성인으로서 아내와 아들 둘을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인데,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의 상처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죽음을 부르는 원숭이 장난감이 과거로부터 돌아온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죽음을 부르는 원숭이 장난감은 나도 어릴 때 가지고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원숭이가 손에 든 심벌즈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쳐대는 것이다. 땀을 흘리진 않았던가? 하두 오래 전 일이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여튼 나는 그 원숭이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킹은 그 장난감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보았다니 역시 이것은 평범남과 천재의 차이겠지?

사실 어른이 조그만 장난감 하나 갖고 식은 땀을 흘리고 무서워하는 것은 참 우스운 모습이지만, 스티븐 킹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이것이 당당하게 생과 사를 가르는 중대사가 된다. 어린 시절의 비극을 현재의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원숭이 장난감 때문에 방황하는 중년남성의 고뇌. 캬~~ 이거 정말 계란말이에 소주 안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상당히 가슴 아픈 인생사다.

할이 과거의 악몽을 물리치는 과정이 잔잔하게 그러다 아슬아슬하게 그러다 격렬하게 펼쳐진다. 원숭이를 정글로 돌려보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할의 그 후가 궁금해진다. 소설 속에서는 무능력한 가장으로서 큰 아들과 상당히 마찰이 있었고, 그 부분이 소설의 전반부를 암울하게 장식한다. 소설이 끝난 후로 할의 가정은 화목해졌을까? 원숭이 장난감의 안부 만큼이나 궁금하다.


4. Cain Rose Up

방학을 맞아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짐을 싸서 집에 가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학교생활이 파탄난 개리쉬는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는 기숙사 방문을 걸어잠그고 자신의 감정을 과격한 행위예술로 승화시키느라 바빠진다.

스티븐 킹의 건조한 묘사가 죽 이어지는 소설이다. 개리쉬가 친구들과 마주치며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소설 막판에 드디어 그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폭발시키는 맛이 달콤쌉싸름하다. 이걸 보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다간 지렁이들이 기분 나빠하겠지? 일단은 지렁이 대신 쥐며느리로 해두자.


5. Mrs. Todd's Shortcut

캐슬록 마을의 호머는 토드 부부의 여름 별장 관리인이다. 여름이면 경치 좋은 캐슬록 마을로 놀러오는 토드 부부를 위해 오늘도 호머는 별장 관리에 여념이 없는데, 토드 부인의 별난 취미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녀의 취미는 자동차로 지름길 찾아가기. 그녀는 자기가 지름길을 찾아냈다며, 말도 안되는 엄청난 짧은 시간 안에 읍내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정상적인 주행으로는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없다고 호머가 믿지 않으려 하자 토드 부인은 오기가 생긴다. "좋아요, 호머. 우리 내기합시다." 끈질긴 사모님의 유혹 앞에 호머는 무너지고 드디어 그는 토드 부인의 차에 올라탄다. 어디 정말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지 볼까? 토드 부인의 차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호머에게는 놀라움이 끊이질 않는다.

토드 부인의 스피드를 향한 집념이 종횡무진하는 멋진 소설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호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 그녀의 이상하리만치 놀라운 운전실력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녀가 큰소리치는 운전실력의 비밀을 옆에서 보는 호머 만큼이나 나도 놀라고 말았다. 운전의 비밀이 하나하나 벗겨지면서 도리어 토드 부인의 아름다움의 비밀은 하나하나 늘어만가니, 난 그녀가 너무 멋져 침을 흘릴 지경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 편의 멋진 영화를 보는 듯 했다. 특히 맨마지막 장면이 끝내준다. 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이제까지의 이야기 전개를 놀라운 모습으로 마무리짓는 환상적인 결말이 깊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아아~ 그 장면이 눈 앞에 선하구나.

토드 부인 같은 여자를 만났다니 호머가 부럽다. 나도 토드 누나 처럼 야생마 같은 누나가 모는 차에 같이 타고 싶다. 정말 착한 남동생으로 잘 지낼 자신 있는데.


6. The Jaunt

아주 먼 미래, 뉴욕 터미널에서 마크 가족이 화성으로 이민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게 아니다. Jaunt라는 물체이동 방식으로 몸이 순식간에 뉴욕에서 화성으로 뿅하고 날아가는 것이다.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달랠 겸 마크는 아이들에게 1987년에 빅터라는 과학자가 Jaunt를 발명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다 드디어 마크 가족이 Jaunt할 차례가 오게 된다.

이 소설에 나오는 Jaunt라는 급속 이동방식은 아무래도 알프레드 베스터의 SF소설 <타이거! 타이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스티븐 킹은 이 단편에서 1987년에 정부의 쥐꼬리만한 지원을 받으며 물체이동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 빅터의 모습을 먼 미래의 뉴욕인 마크의 입을 빌어 보여준다. 정말이지 빅터의 연구과정은 무척 재미있다. 얼떨결에 실험에 성공하고 나자 그 결과를 다시 재현해 보려고 금붕어와 쥐를 이용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결론에 접근해가는 과정이 아기자기하다.

그렇게 Jaunt가 실용화되고 나서 그에 따른 암울한 부작용들을 나열하는 부분도 흥미롭기 그지 없다. 아, 이게 이렇게도 이상한 방식으로 오용될 수도 있구나하는 재미가 새록새록 느껴진다.

그러다 이렇게 신기술의 경연장으로 아름답게 끝맺음할 줄 알았던 이 단편소설이 결말에서는 생호러로 변한다는 것이 무척 맘에 들었다. 아, 역시 킹 아저씨가 짱이다.


7. The Wedding Gig

한 재즈 밴드가 조폭의 여동생 결혼식에서 피로연 연주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드디어 결혼식 날, 재드 밴드는 피로연 현장에 모여 연주 준비를 하게 되는데, 과연 순조로운 연주가 될 것인지는 스티븐 킹의 손에 달렸다.

이 단편소설은 밴드 연주자가 바라본 시각에서 부드럽게 흘러간다. 피로연 연주 제의를 받는 순간부터, 결혼식 당일 날의 현장, 그리고 그 뒤의 후일담까지 담담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해 준다. 밴드가 피로연 현장에서 겪게 되는 당혹스런 일도 지나고 나면 다 추억으로 남는 법. 아무렴.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잡탕찌개가 되어 버리는 법이지.

이 단편소설을 통해 킹은 아웅다웅하는 우리네 인생이 결국엔 재즈와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글세, 난 인생이 핑클의 발라드 음악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8. Paranoid: A Chant

이것은 스티븐 킹이 쓴 시다. 자신이 정부 조직에 감시당하고 있으며, 방심하는 순간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한 인물의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시다.

이 시를 읽고 난 다음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보면 인생에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것은 없다.


9. The Raft

두 쌍의 남녀 대학생들이 인적 없는 호숫가로 놀러간다. 놀러간 것 까지는 좋은데, 호수 위에 떠있는 뗏목까지 헤엄쳐갔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은 그 뗏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뗏목 밖에서는 시커먼 죽음의 그림자가 그 철없는 대학생들을 노리고 있다.

정말 재밌는 소설이다. 좁은 공간에 고립되어 징징 대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4명 사이의 미묘한 애정관계가 죽음의 뗏목 위에서 주인공에게 바람직한 방식으로 정착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역시 주인공이 최고인 것이다.

이 소설에는 호수의 축축하고 음산한 적막감이 절묘하게 등장인물들을 압박하고 있다. 죽게 생겼는데 어디다 하소연할 데는 없고, 미치고 환장하는 설정인 것이다. 이 소설을 지하철역 같이 사람이 마구 붐비는 장소에서 읽으면 오히려 더 재밌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소설의 뒷부분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인간의 생리적 욕구가 무척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로서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것이 남자의 숙명인가. 여자의 불행인가. 분명한 것은 허리가 강해야 좋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원래 <The Float>이었다. 이 작품과 관련된 일화를 킹 자신이 직접 잡지 뉴요커 2002년 4월호에 기고했었다.

Cone Head -- 스티븐 킹


1970년 봄, 내 나이 22살 때, 나는 메인주 오로노의 경찰에 체포되었다. 차를 몰고 가다 신호등에 걸려 정지하고 있을 때, 고무로 만들어진 삼각뿔 모양의 도로 표시물을 서른 개도 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각된 것이다. 유니버시티 모텔에서 밤새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칵테일을 엄청나게 마셔대다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문제의 삼각뿔 표시물 중 하나가 내 차에 부딪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 놈의 삼각뿔이 내 고물 포드 스테이션 왜건 자가용 밑으로 튀어들어가 자동차 밑바닥의 소음기를 긁어 놓았던 것이다. 그 날 낮에 오로노 시청 인부들이 도로에다 페인트로 횡단보도 그리는 것을 목격했었기 때문에, 그 이후 인부들이 도로에다 삼각뿔 표시물을 놔두고 갔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술주정뱅이의 논리적인 심사숙고의 결과로, 나는 마을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천천히, 안전하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도로에 있는 모든 삼각뿔 표시물을 수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 개도 빠짐없이 전부 다. 날이 밝으면 시청에 가서 수거한 삼각뿔들과 내 고장난 소음기를 보여주며 시민의 정당한 분노를 표시할 생각이었다.


예전부터 나를 싫어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던 오로노 경찰은 -나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악질 "히피"였으니까- 나를 체포한 것 때문에 얼씨구나하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러댔다. 내 스테이션 왜건에서 경찰이 찾아낸 삼각뿔들은 절도죄로 옭아매기에 충분한 수량이었다. 체포 당시 나는 첫 번째 장소에서의 삼각뿔 수거를 끝내고 두 번째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삼각뿔 백 개 정도를 가지고 있었거나 내 아파트에 삼각뿔을 은닉하고 있었다면, 지금 이 글은 특수절도죄를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수 개월이 지났다. 나는 메인대학을 졸업했다. 재판에서 절도죄를 선고받을까봐 불안해하면서, 그 와중에 교사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하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고, 교사 대신 브루어타운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일을 했다. 주유소 사장은 여자였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엘렌이라고 불렀다. 엘렌은 멀지않은 미래에 절도죄를 따지는 재판에 내가 출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급료는 쥐꼬리만큼만 주면서(시간당 1달러 60센트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한창 가격파괴 바람이 불어닥쳐서, 내가 일하던 95번 도로 주유소에서는 휘발유 1갤런을 29센트에 팔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분, 가격파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름을 만땅 채워넣은 손님은 사은품으로 유리컵(볼품없지만 탄탄한 식당 물컵)이나 빵(특별히 길쭉한 카스테라 빵)을 골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주유소 직원이 "손님, 오일 체크해 드릴까요"라고 말하는 것을 깜빡 잊으면, 기름값 마저도 공짜였다. 만약 주유소 직원이 "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깜빡 잊어도, 기름값은 공짜였다. 그렇다면 이렇게해서 발생하는 공짜기름에 따른 손실은 과연 누가 책임지게 되었을까? 그렇다. 나처럼 툭하면 깜빡하는 주유원이 불쌍하게도 금전적인 책임을 뒤덮어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는 너무 쪼들린 나머지 가끔씩 저녁식사로 술 한잔에 콘플레이크 과자를 말아먹고는 했다.


그 시절에 나는 올드타운 출신의 태비사 스프루스라는 여성을 만나고 있었고, 결혼하자고 청혼을 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청혼은 받아들였지만, 저질 휘발유를 주유하는 일보다 좀 더 나은 직업을 찾아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손님들한테 "유리컵으로 하실래요 아니면 빵으로 하실래요"하고 묻는 것이 지상최대의 임무인 남자랑 결혼하고 싶겠는가?


1970년 8월이 왔고, 삼각뿔 절도를 심리하는 재판날짜도 왔다. 나는 엘렌에게 그 날 오후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 피앙새의 친척이 죽어서 피앙새를 장례식에 데려다줘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여자친구"보다는 "피앙새"라는 말이 좀 더 신뢰감있게 들린다). 엘렌은 내 핑계를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장례식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피앙새 친척의 장례식이 아니라 나의 장례식이었지만. 나는 뱅고어 지방법원에 출석해서 열심히 내 자신을 변호했지만, 바보같이 칭얼대기만 했다. 나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백 달러 벌금형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감방에서 6개월동안 놀고 먹을 기회를 얻을뻔 했으니까.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여자들이 벗고 나오는 'Adam'이라는 잡지에 "The Float"이란 제목의 공포소설을 팔았는데, 수표가 내가 벌금을 내야하는 날짜에 딱 맞춰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재형이의 해설: "The Float"은 나중에 "The Raft"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킹의 단편집 "Skeleton Crew"에 수록되었다.]


재판 다음날 주유소에 일하러 갔더니, 엘렌이 웃으면서 나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뱅고어 지방법원에서 하는 장례식도 있냐며 빈정댔다. 내 재판 바로 뒤에 열리는 재판때문에 엘렌의 친척 -사촌이던가, 조카던가, 아무튼 그 비슷한 것- 이 법원에 와있었던 것이다. 이 무슨 애꿎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모든 것이 다 잘 풀렸다고 생각한 순간 환상적인 불행폭탄이 날아든 것이다. 전에 주유소에서 나를 봐서 알고 있던 이 친척이라는 나쁜 인간이 법원에서 날 봤다고 여사장에게 말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해서 나는 23번째 생일을 한달 남겨두고서 백수가 되는 것과 동시에 전과기록도 갖게 되었다. 나는 내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누군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그럴듯하게 생각을 꾸며대기까지 했다. 아마도 삼각뿔 절도는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맛 본 첫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나는 인생이라는 쇼에서 우리 모두가 스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의 해피엔딩이라는 것은 -심지어는 중간시절을 해피하게 지내는 것 조차도- 절대로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10. Word Processor of the Gods

교사일을 하면서 집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는 리처드는 가정적으로는 불운한 사람이다. 아내와 아들은 그에게 인생의 기쁨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는 죽은 조카한테서 워드 프로세서를 선물 받는다. 그리고 그 워드 프로세서와 함께 리처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들을 위한 동화이다. 너무나도 달콤한 동화. 스티븐 킹은 정말로 이런 워드 프로세서를 지하실에 감춰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루에 두 번씩 군만두를 먹이면서.

실제 작가에게 정말로 이 소설과 같은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글을 쓸까? 유명작가들을 불러다 놓고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보고 싶다. 나라면 이런 글을 쓸 것이다. "나는 핑클의 남편이다."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11. The Man Who Would Not Shake Hands

사람들이 모여 포커를 치고 있는데, 한 신사가 찾아온다. 자기도 포커판에 끼워 달란다. 사람들은 포커판에 그를 끼워주는데, 그 신사는 한 가지 부탁의 말을 한다. 무례하게 들리겠지만 자기는 절대로 악수를 안 하는 성격이니, 제발 악수를 청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래? 알았수다. 포커판은 돌아가는데, 그러는 와중에 그만 악수가 발생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포커판의 사람들은 악수가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깨닫게 된다.

스티븐 킹의 단편집 <Different Seasons>의 겨울 이야기 <호흡법(The Breathing Method)>을 보면 다 큰 어른들이 모여 돌아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어머, 얘~ 그 얘기 너무 무섭다, 얘."하며 수다를 떠는 모임이 나온다. 이 모임은 킹이 소설을 공동집필하기도 한 공포소설가 피터 스트라우브의 소설 <고스트 스토리(Ghost Story)>를 읽고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 모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것이다.

이 단편소설은 바로 그 <호흡법>에 등장했던 이야기 모임이 다시 나오는 작품이다. 그 모임의 멤버들이 다시 모이고 한 멤버가 자신이 젊은 시절 겪었던 무서운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악수를 하지 않으려하는 이상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이 소설은 고전적인 서양 공포소설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신비로운 이국적인 풍경, 그 곳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저주, 그 저주가 문명사회 속에서 벌이는 공포. 그런 내용들이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읽는 이를 끌어당긴다.

이야기 모임이 벌어지는 클럽의 집사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 아주 수상한 인물이다. 나는 이야기 클럽의 멤버들이 집사의 비밀을 캐는 내용의 공포소설을 스티븐 킹이 써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오늘 밤에도 그런 소망을 담아 텔레파시를 미국으로 보내봐야겠다.


12. Beachworld

우주선 한 대가 모래 행성으로 불시착한다. 끝도 없이 모래로만 가득해서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 같이 느껴지는 곳. 이 곳을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던가, 아니면 옛날 환경으로 돌아가려 애를 쓰던가.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은 모래 행성의 탈출을 꿈꾸지만, 안드로이드는 적응을 꿈꾼다. 왜일까? 인간보다는 안드로이드가 모래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는 탓일까?

이런 얼토당토 않은 개인적 잡담을 뒤로 한 채 이 소설은 사막의 모래바람 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 모래는 움직이는 거야.


13. The Reaper's Image

너무 위험한 물건이라 박물관에서 치워놓은 골동품 거울이 있다. 그런데 그 거울을 조사하러 한 남자가 온다. 박물관 직원이 제발 보지 말라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간이 부은 게 분명하다고 말리지만, 조사하러 온 남자는 자기는 지방간이 아니라며 기어이 그 문제의 거울을 보려 한다. 정말로 보면 안 되는데.

이 소설은 킹이 18살 때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18살 때 킹의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엉뚱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꿈틀대고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는 킹이 매우 다작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18살 때 품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풀어놓은 것일까? 내가 킹 아저씨한테 당신의 18살 때 머리 속으로 함께 여행해 봅시다!라고 제안한다면 킹 아저씨도 참 좋아하겠지?


14. Nona

한겨울에 홀로 길을 걸어가야 하는 남자가 있다. 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몸을 녹이다 "노나"라는 이름의 신비로운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캐슬록 마을로 향한다. 그들이 가는 길마다 공포가 함께 따라 다닌다. 이른 바 공포의 스토킹.

짧은 분량 안에 대단히 자극적인 폭력들을 함축시킨 소설이다. 노나와 동행하는 주인공 남자도 흥분하지만, 소설을 읽는 나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그 폭력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분명 좋은 곳은 아닐테지?

우연히 노나를 만난 남자의 본능적인 일탈이 폭력과 맞물려서 읽는 이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역시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잘"이라는 말 속에는 언제나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문제다.


15. For Owen

킹이 막내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며 함께 나눈 대화를 감동적으로 풀어낸 시다.

이 시에서 두 부자는 과일들이 다니는 학교에 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눈다. 이런 학교에서 "맥주 안주에는 과일 샐러드가 최고지."라는 말을 하게 되면 수업 분위기가 매우 나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16. Survivor Type

외과의사가 마약 운반을 하다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무인도에 떠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터득한다.

줄거리 요약을 너무 압축시켜서 왠지 어설픈 작품 같지만, 이 소설 상당히 매력적이다.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의사의 일상을 생존과 결부지어 매우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으며, 그 속에서 느끼는 의사의 분노와 무기력함이 히로뽕과 코카인의 가슴 떨리는 첫날밤을 보는 듯한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로 무인도에 표류한 주인공이 되는 양 흥분하면서 읽었다. 배고파도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해! 넌 죽어선 안 돼!

먹을 게 별로 없는 무인도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며 갖은 고초를 겪는 의사가 잠깐잠깐씩 하는 딴 생각들이 무척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심각한 주인공이 불쑥불쑥 딴 생각을 해대는 그 리듬이 절묘하게 반복되면서 이 소설의 읽는 맛을 더욱 깔끔하게 해주었다.

점점 사태가 악화되면서 의사가 매번 자신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커다란 재미를 느낀다. 아, 얄궃은 독자의 운명이여! 주인공의 불행을 뜯어 먹고 사는 구나!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으면 허기질 걱정은 안해도 된다.


17. Uncle Otto's Truck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괴짜 큰아버지 오토가 있다. 오토는 원룸 집을 짓고 혼자 사는데, 길 건너편에는 수십 년째 고장나서 방치되어 있는 트럭이 주저앉아 있다. 주인공이 들를 때마다 오토는 저 망할 놈의 트럭이 자기를 죽이려고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보기에는 그저 고장나서 멈춰있는 고물 트럭일 뿐이다. 하지만 오토는 하루 종일 문에 서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트럭을 감시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묵직한 감정의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았다. 그 정도로 읽는이의 가슴을 아련하게 맛사지해주는 멋진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트럭은 오토의 젊은 시절과 관련해서 원한이 서린 물건이다. 그 원한이 생기게 된 사연이 재미있게 소개되고, 그 뒤로 세월이 흘러 트럭에 대한 공포스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늙은 오토의 심정이 비장하게 나온다. 조카는 고물 트럭이 움직이는 게 안 보이는데, 큰아버지는 그걸 왜 못보느냐며 안타까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트럭의 움직임을 시계의 시침에 비유하는 큰아버지의 비유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결말의 절정부분이 무척 환상적이어서 내 마음을 놀라게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아아~ 너무 멋진 장면이었고, 이런 소설을 쓰는 킹이 참 부러웠다.


18. Morning Deliveries (Milkman #1)

우유배달원 스파이크는 오늘도 열심히 우유를 배달하러 온동네를 휘젖고 다닌다.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이 단편은 스티븐 킹이 쓰다만 장편소설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그래서 이 단편은 이야기의 맥락이 제대로 설명이 되질 않고 애매하게 나온다. 그냥 우유배달원이 배달하는 장면만 나온다. 그 위험한 배달의 이유라든가 결말이라든가 하는 것은 나오질 않는다. 그러므로 이 단편은 우유배달원의 행적을 따라 즐겁게 동행하는 기분으로 읽으면 된다. 소설이 전개되는 리듬은 무척 경쾌하다. 그렇다고 춤을 추며 읽으라고 권유하지는 않겠다.


19. Big Wheels: A Tale of the Laundry Game (Milkman #2)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록키는 부하 직원을 데리고 술에 취해 음주음전을 하다가 자동차 검사기간을 넘기게 될까봐 늦은 시각에 정비소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 외잔 곳에 있는 한 정비소를 우연히 찾아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그 정비소 사장이 록키의 학교 동창인 거였다. 그래서 그들은 웃음꽃을 피운다. 하하하!

이 단편 역시도 킹이 예전에 쓰다만 똑같은 장편소설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그렇지만 <Morning Deliveries>보다는 이야기의 전개가 더 흥미롭다. 록키가 동창을 만나서 예전 시절을 회상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는 부분은 입가에 미소가 번질 정도로 상당히 재미있고 등장인물들의 엄청난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우유배달원 스파이크가 별안간 등장하는 장면부터는 뭐가 뭔지 모를 이야기 전개로 돌아가 버린다. 그렇다. 스파이크가 문제인 것이다. 해답은 스티븐 킹에게 물어보면 된다.


20. Gramma

11살 소년 죠지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숨이 오락가락하는 생명이 위태로운 할머니와 단 둘이 집에 남게 된다. 평소에도 무섭다고 생각한 할머니였지만, 단 둘이 있다보니 더 무서워지고, 그러다보니 무서운 일이 정말로 일어나 버린다.

이 단편을 읽으며 킹이 펼치는 소년의 심리묘사에 감탄했다. 나 같으면 소년의 심리에 대해 몇 줄 쓰면 별로 쓸 말도 없을 것 같은데, 킹은 정말 자세히도 치밀하게 술술 묘사해 나간다. 행여나 할머니가 숨이 끊어졌나 싶어 할머니 방을 기웃거리면서도 무서운 할머니에 대한 생각에 자꾸만 부엌에서 안절부절하는 소년의 심리가 정말이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계속 이어지는 소년의 안절부절 심리묘사를 읽다가 "그렇게 무서우면 속 편하게 집을 확 가출해 버려!"라고 소년을 충동질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죠지가 할머니를 무서워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난다. 그 내용이 정말 환상적이고 으스스한데,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소년의 걱정스런 마음을 더욱 공감가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의 그 격렬한 절정 부분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스릴과 서스펜스의 연속이었다. 어린 소년과 연약한 할머니의 애증관계에서 이런 멋진 움직임이 나오다니. 절정 부분에서 거칠게 휘몰아치는 압력 높은 단단한 묘사가 일품이다.

이 단편은 미국에서 1980년대에 리메이크로 제작된 TV시리즈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의 한 에피소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도 방송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스토리로 남아있다.


21. The Ballad of the Flexible Bullet

젊은 작가의 집에서 조촐한 저녁 파티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늙은 편집자가 파티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전에 겪었던 격렬한 체험을 이야기해 준다. 그 편집자가 탱탱한 피부를 유지하던 시절, 엄청난 인기를 끌다 두문불출하는 어느 작가가 쓴 단편소설 "The Ballad of the Flexible Bullet"을 입수하게 된다. 그 시점부터 편집자는 두문분출 작가에게 영향을 받으며 둘다 서서히 광기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편소설은 단편집 <Skeleton Crew> 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흥분과 감동으로 몰아넣었던 소설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차츰차츰 밝혀지는 두문불출 작가의 행동과 그에 따른 편집자의 심리 상태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동화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난 정말이지 이런 식의 이야기를 꾸며낸 스티븐 킹의 사고방식이 부러울 따름이다.

미친다는 것이 딱딱한 총알이 순식간에 팍하고 뇌를 관통하는 식이 아니라, 탄력 넘치는 총알이 서서히 뇌를 압박해오는 느린 과정이라고 항변하는 이 소설의 내용은 스티븐 킹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환상을 선사해 준다. 한 작가의 소설로 인해 점점 미쳐가는 편집자의 인생이 기구하게 펼쳐지는데, 또 그에 맞장구를 쳐서 친절하게도 자꾸만 광기 어린 사건들을 만들어주는 킹이 참으로 장난꾸러기다.

특히 압권은 초췌해진 편집자가 텅 빈 아파트에서 자신의 타자기와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난 정말이지 그런 식의 장면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과감하게 그런 식의 전개를 펼친 킹의 대담함에 놀라고 말았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무척 맘에 들었다. 이 장면을 쓰면서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을 것 같은 킹의 모습이 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상당히 유치한 설정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도 그 유치함을 묵직한 쾌감으로 승화시키는 이야기 전개의 용감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이 스토커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데, 이 단편소설은 유치함을 과감히 까발리는 용기로써 나의 마음을 차지해 버렸다. 핑클의 음악을 접한 이래로 이런 황홀한 기분 처음이다.

편집자가 광기에 집착하게 되는 시초가 되는 두문불출 작가의 단편 "The Ballad of the Flexible Bullet"은 소설 속에서 제목만 언급되고 정작 어떤 내용인지는 밝혀주지 않는다. 그래, 아마도 이 단편소설 자체가 바로 "The Ballad of the Flexible Bullet"이겠지. 그렇다면 이 단편은 스티븐 킹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광기의 초대장일 것이다. 이 단편을 읽고나서 미친 사람이 있다면 내게 연락주기 바란다. 킹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국제 변호사를 알아봐 주겠다.


22. The Reach

스텔라 할머니는 한 번도 육지에 나가본 적 없는 섬 주민이다. 옛날에 한 번 섬과 육지 사이의 해협이 엄청난 추위 때문에 얼어서 할머니 남편이 그 빙판을 걸어서 육지에 나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도 할머니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누군가가 왜 한 번도 육지에 나가려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그저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럴 필요성이 생기는 때는 언제란 말인가? 그러다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추위가 찾아와 두 번째로 해협이 얼어 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할머니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협으로 나서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떤 일이든 "때"라는 것이 있다. 또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어떴든지 간에 사람은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에게 버거운 결단을 내려야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을 피하려 요리조리 애쓰다 험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과감히 그것을 맞아들이는 담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소설은 때를 알고 그 때를 담담하게 맞아들여 반갑게 악수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단편소설은 1982년도에 월드 환타지 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을 보면 정말 상탈 만한 전형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단편집 <Skeleton Crew>의 맨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다운 아련한 여운을 독자들의 가슴 속에 남겨 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아~ 드디어 킹의 단편집 <Skeleton Crew>에 수록된 모든 작품들에 대한 감상을 끝마쳤다. 너무 힘들었다. 단편들을 소개하며 자세한 줄거리 까발리기를 피하기 위해 (불법적인 거 빼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힘든 노력의 연속이었지만, 너무도 재밌고 멋진 단편집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이젠 푹 자야겠다. 핑클의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