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록의 비밀 / Needful Things

작품 감상문 2007. 5. 12. 22:14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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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edful Things

(1991년 소설)

스티븐 킹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캐슬록이라고 하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금 소개하는 소설 <Needful Things>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며, "마지막 캐슬록 스토리"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소설답게 캐슬록을 직접적인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중 마지막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서출판 대성을 통해 <캐슬록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일상이 무료한 작은 마을 캐슬록에 "Needful Things"라는 새로운 가게가 문을 연다. 이 가게는 골동품 가게인데, 손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춰놓고 있다고 큰소리 뻥뻥치는 자신만만한 가게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출입을 주저하던 캐슬록 마을 주민들은 가게 안에 들어갔다 가게 주인의 매력에 푹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Needful Things"의 주인은 르랜드 건트라는 노신사다. 황홀한 눈빛, 단정한 옷매무새, 매혹적인 말솜씨. 그와 마주친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의 팬이 되어 버린다. 그 결과 "Needful Things"는 캐슬록 주민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르랜드 건트는 가게를 찾아온 주민들을 한 사람씩 일대일로 만나 개인별 맞춤상담하는 것을 은근슬쩍 동네 고양이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추진한다. "Needful Things"의 고요한 실내 속에서 건트는 일대일로 마주한 손님을 엄청나게 화려한 매력으로 압도한다. 그 매력에 정신 못차리고 횡설수설하는 손님에게 건트는 슬쩍 물건을 내민다(이것은 어설픈 다단계 판매원의 물건 떠넘기기 수법과는 격이 다른 아방가르드하고 판~타스틱한 판매 마케팅 기법이다). 그 물건을 본 손님은 화들짝 놀라서 콩딱콩딱 뛰는 심장을 꾸짖지도 못하고 방치할 수 밖에 없다. 왜? 손님이 마음 속으로 가지고 싶다고 열망하던 귀한 물건이 바로 눈 앞에 있으니까. "Needful Things"의 주인 르랜드 건트는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원하는 물건을 알아서 대령하는 놀라운 장사꾼이니까. 손님은 자기가 원하던 물건이 눈 앞에 있지만, 비쌀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뛰어난 장사꾼 건트는 돈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 모든 물건은 거래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진 혁신적인 사고의 소유자다.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손님을 안심시킨 건트는 우아하게 묻는다.

"저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갖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손님은 물건을 받아들고 기꺼이 거래에 응한다. 물건을 소유하는 대가로 손님은 건트가 제시하는 사소한 소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해서 수많은 캐슬록 주민들이 "Needful Things"를 들락날락거리면서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귀한 물건들을 가질 수 있었고, 건트가 제시하는 사소한 소원들을 야무지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캐슬록에 "Needful Things"가 생긴 이후로 마을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으나, 마을 주민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건트가 구해다 준 주옥같은 귀중한 물건들에 넋을 잃고 있었으니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우리나라 옛말이 바야흐로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서 완벽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캐슬록의 비밀>에서는 첫부분에 캐슬록 마을 주민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소상히 알려주고 시작한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그렇듯 캐슬록도 주민들간에 안 좋은 감정들이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이 주먹질과 같은 직접적인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고 수 년간 쌓여왔는데, 캐슬록에 가게를 개업한 르랜드 건트는 인간을 능가하는 막강한 능력을 이용해 주민들 사이에 가로놓인 보이지 않는 감정의 지뢰밭을 들쑤셔 놓는 것이다.

이건 마치 도미노를 세워놓는 것과 같다. 도미노 막대기들을 바닥에 세워놓는 것은 상당히 지루하고 귀찮은 일이다. 각각의 도미노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수많은 도미노들을 일일이 손으로 세워놓는 고단하고 반복적인 작업. 하지만 그 수많은 도미노들을 다 세워놓고 보면 뿌듯한 것이다. 게다가 드디어 첫 도미노를 쓰러뜨리자마자 그 뒤를 이어 연쇄적으로 도미노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의 쾌감은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나는 자연인이다아아아아~~~"를 외치는 기분과 맞먹고 자시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힘들게 도미노 세워놓고 허무하게 죄다 쓰러뜨리다니 이게 뭔 쓸데없는 짓이냐고? 모르시는 말씀. 더욱더 힘들게 세워진 것일 수록 그 모든 도미노들을 엎을 때의 쾌감도 더욱 배가된다. 그 힘든 노력의 결과물을 단 한 방에 쾅! 이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파괴의 미학이라고도 부른다지. 더욱이 르랜드 건트처럼 캐슬록같은 거대한 마을을 놀이판 삼아 벌이는 공포의 도미노 놀이라면 그 쾌감은 나같이 순박하고 착한 청년의 상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짜릿짜릿할 것이 분명하다.

<캐슬록의 비밀>은 이렇게 건트가 상거래를 위장해 벌이는 음흉한 사기극을 독자들이 소설 내내 지켜보도록 하고 있다. 캐슬록 주민들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도사린 추한 욕망들이 농락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인간 도미노가 되어 조용하던 캐슬록을 어수선한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야 마는 모습은 한 편의 코미디로까지 보인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과 결과들을 지켜보며 안 좋은 기분을 느끼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인간행동과학에 평소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더욱. "인간이 행동을 결정하는 방식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그런 수많은 변수들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도 없이 <캐슬록의 비밀>에서는 캐슬록 주민들이 완벽하게 건트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이건 그저 작가 스티븐 킹이 주도하는 작위적인 전개방식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행동패턴이 나올 수가 없지롱. 이건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기계적으로 짜맞춘 것에 불과하단 말이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슬록의 비밀>에서는 르랜드 건트같은 초인적인 존재가 있지 않은가?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끈질긴 존재인지는 소설 속에서 줄기차게 묘사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꿈에도 염원하던 물건을 구해다주는 대가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강요한다. 잘 안 들어준다 싶으면 끈질기게 사람을 졸라댄다. 심지어는 사람의 꿈 속에서도 나타나 강요하고, 깨어있는 사람의 머릿 속에도 들어가서 커다란 목소리로 물건을 사 간 대가를 치르라고 강요하고야 마는 것이다. "내 물건 떼먹고 니가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냐?" 이렇게 초현실적인 존재가 소설 속에 등장하니 초현실적인 결과가 소설 속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뭐 소설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어허, 장사 하루 이틀 하나?

게다가 나는 스티븐 킹의 팬이 아니던가? 킹이 정성껏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는데, 뒤돌아서서 궁시렁대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스티븐 킹이 차려낸 <캐슬록의 비밀>을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부스러기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또 먹고 싶다. 스티븐 킹 선생, <캐슬록의 비밀> 속편을 만들어 주시오~~.

내가 <캐슬록의 비밀>을 읽고 느낀 것은 착각의 위대함이다. 사람은 누구나 착각을 하며 산다. 어떤 생각 많은 사람은 인간을 착각의 동물이라고까지 말해서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착각이 지나치면 믿음이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지나치면 "힘"을 발휘한다.

착각믿음

이러한 3단계 연결방식을 사업으로 연결시킨 이가 바로 르랜드 건트인 것이다. 착각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감정에 미끼를 던져주어 믿음으로 발전시키고 그러한 잘못된 믿음들을 응집시켜 결국엔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만든 것이다. 착각의 늪에 빠진 캐슬록 주민들은 자신들이 헛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느꼈다. 이렇듯 착각은 사소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강력한 잠재력이 숨어있었다. 이러한 착각의 위대함은 소설 마지막의 클라이막스에서 상황을 역전시키는 아이러니한 계기로까지 발전되어 이 소설을 감칠맛나게 하고 있다. 아아, 그 역전하는 순간의 뭉클하는 기분은 정말 멋졌다. 역시 착각은 위대해!

아무튼 착각은 자유지만, 그것이 잘못된 믿음으로까지 발전해서 잘못된 힘을 행사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나부터도 조심해야 겠다.

나는 언젠가는 어쩌면 이효리 누나랑 결혼할 수도 있을 것 같다라는 착각 → 매일 3번씩 효리 누나 브로마이드 사진을 바라보며 내가 진정으로 효리 누나를 사랑하면 그 누나도 나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 → 착각이 결국 을 발휘해 나는 본격적으로 효리 누나를 스토킹하기 시작 → 마침내 연예정보 프로그램 생방송 섹션TV에 내가 나옴("이효리 씨 집에 침입해 냉장고를 뒤져 이효리 씨가 평소 즐겨먹던 명란젓을 훔쳐가려던 스토커가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 <캐슬록의 비밀>을 통해 느낀 대로 나는 결국 이효리 누나를 포기해야 하나? 왠지 아쉬운데...

물고 물리는 인간관계를 이용해 한 편의 신나는 마당극을 펼친 <캐슬록의 비밀>을 무료한 일상에 지친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무료한 인생 속에 도사린 착각의 위대함이 절절하게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앞서 도서출판 대성을 통해 국내에 번역판이 나왔다고 했는데, 나는 영문판으로만 읽어서 번역판의 상태가 어떤지 잘은 모른다. 그런데 예전에 서점에 갔다가 번역판을 훑어본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번역자 후기를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원문에서 4페이지 가량을 삭제했다는 고백이 실려 있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글이라서 삭제 이유가 분명하게 나와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삭제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내 번역판을 읽게 될 독자들은 이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물론 번역판이 한 종류 뿐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소설 <캐슬록의 비밀>은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 <욕망을 파는 집>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 되었다. 명배우 막스 폰 시도우가 르랜드 건트 역을 맡아서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고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동네 비디오가게로 달려가서 뒤져보면 된다. 혹시라도 동네 비디오가게 사장님이 <욕망을 파는 집> 비디오 테이프를 건네주며, "나와 거래를 할래? 이 세상 모든 물건은 거래가 가능하니까. 테이프를 넘기는 대가로 내 요구를 들어주렴."과 같은 쓸데없는 소리를 말하거들랑, 그저 아무일 아니라는 듯이 전국비디오대여점연합회에서 책정한 공식대여료만 지불하고 테이프를 들고 나오도록 하자. 아, 그리고 반드시 테이프 반납기일을 엄수하도록. 안 그러면 너무도 무서운 사업가의 독촉에 시달릴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괜히 캐슬록 주민들이 미쳐버린 것이 아니다. 

p.s. 소설 "Needful Things"는 "캐슬록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왔다가 절판되었는데, 2020년 엘릭시르 출판사에서 "욕망을 파는 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