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레드 / Rose Red

작품 감상문 2007. 5. 12. 01:49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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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 Red

(2002년 TV 미니시리즈)

1981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는 유령의 집 영화에 스티븐 킹이 각본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킹의 각본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결국 킹은 영화에서 손을 뗐다. 스필버그는 다른 작가의 각본으로 영화를 완성시켰으니, 그 영화가 바로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다.

1996년이 되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스필버그가 또다시 스티븐 킹에게 연락을 해서 또다시 유령의 집 영화를 만들려는데 각본을 쓰지 않겠느냐고 유혹한다. 킹은 유혹에 넘어갔다. 스필버그의 계획은 전설적인 여류 공포소설가 셜리 잭슨의 소설 <The Haunting of Hill House>를 토대로 만든 1963년도 흑백영화 <The Haunting>을 리메이크하자는 것이었다. 스티븐 킹도 인정하는 바대로 스필버그는 굉장히 훌륭한 아이디어맨이다. 스필버그는 원작영화에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첨가해서 각본을 써달라고 킹에게 부탁했다. 킹은 각본을 써서 스필버그에게 가져다 줬는데, 각본을 본 스필버그는 "좋기는 한 데 말이지, 좀 활력이 부족한 거 같애. 여기다 내가 이번에 또 생각해낸 아이디어들을 더 집어넣으면 좋겠는데..." 킹은 스필버그의 의견에 따라 그 후로 각본을 2번이나 고쳤지만, 스필버그는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필버그는 유령의 집에서 벌어지는 모험이야기를 원했던 반면, 킹은 유령의 집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이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폴터가이스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킹은 영화에서 두손 두발 다 뗐고, 스필버그는 다른 작가의 각본으로 영화를 완성시켰으니, 그 영화가 바로 캐서린 제타 존스가 주연한 <혼팅(The Haunting)>이다.

마음 속으로 유령의 집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망을 꾹 참고 있던 킹은 드디어 2002년 직접 각본을 쓰고 제작에도 참여해서 3부작 TV미니시리즈 <Rose Red>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로즈 레드>라는 제목으로 DVD가 출시되었다.(워너코리아)

심리학 교수인 조이스 리어돈은 "로즈 레드"라는 저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초에 지어진 이 집은 악령의 저주가 씌였다고 하여 유명한 곳인데, 수십년간 20명도 넘는 사람들이 그 집에서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최근엔 로즈 레드가 심령현상을 멈추고 있고, 안타깝게도 이 저택은 얼마 안있으면 헐릴 예정이다. 그래서 조이스 리어돈은 전국 각지에서 초능력자들을 불러모아 로즈 레드에서 함께 주말을 보내기로 계획한다. 초능력자들의 힘이 잠들어있는 유령의 집을 깨워 심령현상을 일으키게 만들면 그걸 과학적으로 기록해서 공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 것이다. 조이스 박사의 뜻대로 총 9명의 탐험대는 오랫동안 닫혀 있던 로즈 레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박사의 뜻에 호응에서 로즈 레드는 오랜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탐험대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탐험대는 너무 무서워서 괜히 들어왔다고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위에 말한 대로 미니시리즈 <로즈 레드>는 스티븐 킹이 들려주는 유령의 집에 관한 이야기다. 언젠가 스티븐 킹은 유령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미친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연 <로즈 레드>에서는 미친 집이 어떻게 활동하고 생활하는지 부지런히 보여준다.

그렇다고해서 이 미니시리즈가 적나라하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폭력에 열광하는 사람한테는 <로즈 레드>가 한없이 심심한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포르노가 허용된다고 해서 미국이란 나라가 무한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엄연히 미국에서는 영화, 음악, 게임 등의 문화상품에 등급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제작자는 표현수위를 낮춰가면서 청소년층까지 맘놓고 접근할 수 있는 등급을 받으려 애를 쓴다.

TV도 등급제를 실시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모든 프로그램은 방송국 윤리규정에 따라야 한다. 스티븐 킹은 자신이 각본을 담당한 미니시리즈 <센트리 스톰(Storm of the Century)> 시나리오집에서 방송국 측의 윤리규정에 따라 이야기를 극장영화와 같이 직접적으로 거칠게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킹은 그런 점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영화에서처럼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미니시리즈를 만들 때는 어떻게 하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면서 영화같은 충격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그 때문에 영화를 만들 때보다 더욱더 창의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킹의 작품들은 대부분 분량이 많고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극장영화보다는 미니시리즈 형식에 더 적합하다고 킹은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소설 <미래의 묵시록(The Stand)>과 <샤이닝(The Shining)>을 미니시리즈로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한국판 <로즈 레드> DVD 표지를 보라. "12세 관람가"라고 붙어있는 파란 딱지가 있을 것이다. 그 정도니 이 작품에서 잔인한 장면을 기대하는 것은 오이를 바라보며 바나나 맛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이 작품이 주는 재미는 폭력이 아니라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알콩달콩 인간드라마다.

처음에 탐험대가 로즈 레드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스스로 내부구조를 맘대로 변형시키는 거대한 유령의 집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 다음부터는 장르의 공식대로 탐험대 구성원 한명 한명이 차례로 유령의 집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여기서부터 킹의 장기가 나타난다. 위험에 반응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거기에 연결되어 나타나는 인물들간의 갈등구조. 처음엔 가볍게 소풍 나오듯이 저택으로 왔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벌벌 떨며 삶을 향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는 등장인물들이 빚어내는 밀고 당기는 팽팽한 인간드라마를 지켜보며 나는 이 미니시리즈에서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로즈 레드> 속에서는 얼굴만 보면 딱 이름을 알만한 유명배우는 나오지 않지만 <로즈 레드> 출연진은 모두들 작품내용에 딱 맞는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미니시리즈가 끝난 뒤에도 캐릭터들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자꾸만 그리워질 정도였다. <로즈 레드>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에 스티븐 킹의 멋진 각본이 100배는 더 빛날 수 있었다. 사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내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외모다. <로즈 레드>에서는 나의 가슴을 적시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 나와서 정말 감동했다(이것이 바로 내가 미니시리즈 끝날 때가지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다). 성인 여배우들뿐만 아니라 자폐증 소녀를 연기한 아역배우까지도 나의 가슴을 적셔서, 그녀와는 10년 후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계란 노른자를 둥둥 띄운 쌍화차를 딱 한 잔만 시켜놓고 서로 나눠마시며 성인들의 외로운 인생에 관해 토론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마저 들게 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는 스티븐 킹의 미니시리즈가 계속 이런 훌륭한 수준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공포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로즈 레드>를 보라고 적극 권하고 싶다. 특히 미니시리즈의 마지막 결말이 3부작이라는 시간동안 끌어왔던 긴장감을 일시에 날려버릴만큼 효과적이게 화끈하고 현란한데, 꼭 DVD를 구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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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자신이 참여한 영화에 카메오 출연하는 것을 즐기는 체질을 타고 났는데, <로즈 레드>에서도 그런 성격을 대담하게 드러냈다. 피자배달원으로 출연한 것이다. 킹의 호언장담대로 피자배달원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내면의 슬픔을 감동적으로 연기하고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가 왜 공포의 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무서운 연기력이다.

스티븐 킹, 당신을 골든 글로브상 남우 카메오부문 후보로 추천합니다~.

<로즈 레드> DVD 속에는 주목할 만한 2가지 스페셜 피처가 들어있는데, 내용도 좋지만 한글자막이 들어있어서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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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Bad House: The Making of Rose Red>라는 제목의 제작 다큐멘터리다.

스티븐 킹을 비롯한 제작진, 배우들이 등장해서 <로즈 레드>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들이 자신의 배역에 관해 설명을 하고, 제작자가 작품제작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스탭들이 각자 맡은 분야의 작업을 보여주는 데다가, 작품 속에 사용된 여러 소품들, 특수분장, 기계조작 인형, 저택 미니어처, 위험한 장면의 스턴트, 특수효과 실제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미니시리즈가 얼렁뚱땅 대충대충 설렁설렁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티븐 킹의 이름에 걸맞게 무척 정성을 들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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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Unlocking Rose Red: The Diary of Ellen Rimbauer>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다.

이것은 미국에서 미니시리즈가 ABC방송을 통해 방영되기 앞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방송에 내보냈던 다큐멘터리다. 본편 미니시리즈를 보기에 앞서 이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면 더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실제인물들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로즈 레드는 진짜 있다니까요!", "정말 있었던 일이에요!", "꼭 로즈 레드의 비밀을 파헤치고 말거에요!"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너무너무 재밌다. 설상가상으로 스티븐 킹이 등장해서 "이렇게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진짜 있는 실화를 발굴해서 여러분 앞에 공개하게 되서 가슴이... 가슴이... 설렌다"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니, 정말 소설가는 얼굴이 두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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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로즈 레드> 방영에 때맞춰 미국 서점에는 <The Diary of Ellen Rimbauer: My Life at Rose Red>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세기 초 로즈 레드 저택에 살던 안주인 엘렌 림바우어가 쓴 일기장인데, 미니시리즈에 등장하는 조이스 리어돈 교수가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의 연구성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편집해서 책으로 펴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실제로 책에는 저자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고, 조이스 리어돈 편집이라고만 나와있다.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저자를 절대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스티븐 킹이 썼다, 킹의 아내 태비사가 썼다, 웃기네 킹의 아들 오웬이 쓴거라네, 호박에 줄긋지 마라 다른 전업작가가 쓴 것이다. 하지만 미니시리즈 각본을 스티븐 킹이 썼고, 킹은 예전에도 리처드 바크먼이란 가명으로 책을 내서 사람들을 속인 적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시나 하면서도 이 책을 스티븐 킹이 썼을 거라 믿고 구입했다. 덕분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년 뒤 출판사에서는 실제 저자를 공개했는데...

이 책에서는 엘렌 림바우어가 일기를 통해 로즈 레드 저택이 만들어지는 불길한 과정, 완공된 뒤에 벌어지는 기분 나쁜 일들, 이유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내부구조가 자꾸만 변하는 로즈 레드의 모습 등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미니시리즈 이전의 과거에 로즈 레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자세히 소개한 것이다. 미니시리즈 <로즈 레드>가 만족할만한 시청률을 올렸기 때문에, 이 책도 스티븐 킹이 제작에 참여한 가운데 -각본은 쓰지 않았다-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