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저리 / Misery

작품 감상문 2007. 5. 12. 01:4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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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ery

(1987년 소설)

[나는 미치광이 살인마 여자가 어슬렁거리는 허름한 집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내가 소설작업을 하고 있는 곳은 3층에 있는 후덥지근한 방 안이다. 방 끝에 달려 있는 문은 다락방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여자가 다락방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내가 치는 타자기 소리에 이끌려 그 여자가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어쩌면 그 여자의 정체는 타임스 북리뷰 Times Book Review에서 일하는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결국 그 여자는 아이들의 장난감 상자에서 툭 튀어나오는 무시무시한 스프링 인형처럼 방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온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미치광이의 눈을 마구 부라리는 그 여자는 소리를 질러대며 고기 써는 식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면 나는 도망치기 시작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집이 바깥으로 폭발해 버리고 -집이 점점 더 팽창해서 거대해진다- 그 속에서 나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만다. 이런 악몽에서 깨어나고 나면, 나는 허둥지둥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꽉 껴앉는다.]

위의 글은  스티븐 킹의 공포문화 비평서 "Danse Macabre"에 나오는 글인데, 킹이 10년 동안이나 자신을 수차례 괴롭혀온 악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설가가 이렇게 강렬한 충격을 남기는 꿈을 자꾸만 꾸게 되면 언젠가는 그 꿈을 소재로 소설이 나오게 되진 않을까? 바로 그런 악몽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발표되었으니, "Misery"다. 우리나라에는 "미저리"(황금가지 출판사), "미져리"(성정출판사)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킹의 글쓰기 지침서 "유혹하는 글쓰기 On Writing"에서는 "미저리"가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1980년대 초, 아내와 함께 영국여행가던 비행기 안에서 꿨던 꿈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슈퍼울트라하이클래스프리미엄스페셜 베스트셀러 소설가 폴 셀던은 로맨스소설 미저리시리즈로 인해 유명한 사람이다. 미저리시리즈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무시당하는 것이 분하고 원통해서 미저리시리즈를 완결시켜 버리고 중후한 주제에 웅장한 문체, 선명한 상징체계를 가진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새로운 소설을 완성하고야 만다. 폴은 소설완성이 너무 기뻐 차를 몰고 밖에 나갔다가 외딴 시골마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는다.

폴은 다리부상을 당해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는다. 그는 낯선 방 안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침대 옆에서는 거구의 여자가 폴의 책을 손에 든 채 앉아있다. 그는 묻는다. "여기는 어디죠?"

"콜로라도의 사이드와인더." 그녀가 대답한다. "그리고 내 이름은 애니 윌크스에요. 나는-"

"알겠어요." 폴이 말한다. "당신은 나의 넘버원 팬이로군요."

"네, 맞아요." 애니가 웃으며 말한다. "그게 바로 저에요."

애니는 부서진  차 안에서 의식을 잃고 있던 폴을 발견하고는 자기 집까지 데려와서 정성으로 간호했던 것이다. 폴은 처음엔 생명의 은인인 그녀를 감사하게 생각할 뻔도 했지만, 곧 그녀를 무서워하게 된다. 그녀는 폴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자기 집에다 감금해 놓는다. 그리고는 장난감 다루듯 폴을 막 갖고 논다. 상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미저리였다. 애니는 시골에 사는 관계로 미저리시리즈의 최신작을 페이버백으로 뒤늦게 구입해서 읽게 되었는데, 폴이 미저리시리즈를 완결지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터뜨리고는 미저리시리즈의 새로운 작품 "Misery's Return"을 쓰도록 강요한다. 안쓰면 애니의 손에 죽는다. 폴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는 애니가 준 고물타자기로 "Misery's Return"을 집필하는 한편 어떻게 하면 애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애니의 감금, 협박, 고문, 성희롱, 폭행, 말장난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은 "미저리"를 쓴 스티븐 킹의 결정에 달린 것이고, 나같은 독자들은 킹의 결정을 가슴 졸이며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 "미저리"를 읽는 동안 나는 폴의 고통을 함께 하며 정말 안타까운 심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다리부상으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있어야 하는데, 애니는 그런 약점을 이용해 별의별 행패를 다 부린다. 자칭 팬이라는 사람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폴은 인간적인 자존심같은 것은 벗어던지고 오직 살기위해 눈물겨운 행동들을 벌이게 된다. 오죽 안타까웠으면 나는 도끼를 들고 애니의 집을 찾아가 폴을 구출해 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애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독자는 책을 통해 작가가 던져주는 내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말같은 것에 불만이 있더라도 그걸로 끝이다. 이미 나온 책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일부 독자들은 작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해서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지만 그런 짓을 한다고 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미 출간된 작품은 고정불변. 그런데 작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면, 그리고 작가에게 자신의 결말을 강요해서 작품을 쓰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참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된다고나 할까.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아마 나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킹을 닥달했을 것 같다-"이봐요, 스티븐 킹. 나는 당신의 넘버원 팬이랍니다. 그런데 당신 작품 다 좋은데 왜 좀 더 에로틱하게 쓰지 않는 거요? 난 야한 게 좋단말야! 베드신하구 러브신을 왕창 많이 듬뿍 넣어서 작품을 써달란 말이야! 제목은 <애마부인의 공포>나 <저주받은 젖소부인> 혹은 <변강쇠가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떡을 치는 까닭은> 정도가 좋겠어."

폴에게 갖은 폭행과 망언을 퍼붓는 애니지만, 단순히 사이코로만 나오지는 않는다. 그녀가 폴이 쓴 "Misery's Return" 초고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폴 셀던 조차도 그녀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애니의 성격은 꼼꼼하고 치밀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좋은 점은 거기까지다. 그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 폴을 학대하는 좋은 구실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돌변해서는 냉정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위험한 사람인 것이다. 소설 중반쯤에 폴이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통해 애니의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를 알게 되는 장면에 이르면 애니의 광기어린 카리스마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몰래몰래 잔머리를 굴리던 폴의 계획들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갑작스럽게 신체훼손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접하게 되면 애니 윌크스가 뿜어대는 그 엄청난 에너지의 충격과 전율때문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가 된다.

스티븐 킹은 소설을 쓸 때 미리 고정된 스토리를 정해 놓는 것보다는 흥미로운 상황을 정해놓고 그 속에서 캐릭터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풀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런 좋은 예가 소설 "미저리"일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공간적 배경으로는 애니의 집 안이 거의 유일한 곳이고, 나오는 인물이라고는 폴과 애니 두 사람이 거의 전부다. 강제로 갇혀있는 소설가는 어떻게 될까라는 단순한 상황설정이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폴과 애니의 심리적인 투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해서 손에 땀을 쥐고 기대를 하게 된다. 독자의 예상을 한발 앞서 꺽어버리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길고긴 소설 안에서 일관되게 유지한 스티븐 킹의 능력이 인상깊었다. 이 소설을 다 읽고나서는 공간적 배경과 등장인물의 수가 단순한 까닭에 연극으로 만들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꽤 훌륭한 심리극이 될 것 같다.

폴 셀던이 "Misery's Return"을 집필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한편의 소설이 탄생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단순한 착상이 소설로 만들어지는 과정, 원고용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생한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마법의 구멍을 탐색하는 모습, 진행되던 소설의 전개가 꽉 막혀버렸을 때의 고통, 순식간에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기쁨, 작품을 완성하고 난 후의 안도감 등등이 마치 스티븐 킹의 일상을 엿보는 것 같다.

폴 셀던은 강요된 소설을 쓰는 내내 자신을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세헤라자데라는 여성과 동일시한다. 아라비아의 왕은 자신의 아내가 바람피는 것에 충격을 받아 여성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꾸만 새로운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다음날이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한다. 그런데 세헤라자데라는 여성은 왕과 하룻밤을 보냈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계속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매일밤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재미있을만하면 날이 밝아서 그 뒷얘기가 궁금한 왕은 세헤라자데를 살려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천일동안 계속된 그녀의 얘기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폴은 "Misery's Return"을 애니의 취향에 맞게 쓰지 않으면 자신이 애니에게 살해된다는 것을 한탄하며 매일매일을 집필에 매달린다. 그 집필과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더 처절하게 변한다. 폴은 자기가 애니 윌크스라는 여신에게 봉사하는 세헤라자데라고 생각하며 슬픔에 젖는데, 나중에는 예전부터 자신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세헤라자데 근성을 깨닫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좀 더 기발한 공포소설을 요구하는 팬들과 문학작품을 요구하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심하게 마음고생하던 시절의 킹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스토리만을 쫓아가던 독자에게는 좀 지루한 장면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소설가의 내면이 궁금햇던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장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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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보이는 그림은 소설 "미저리" 페이퍼백에 실렸던 속표지의 그림인데, 소설 속에서 폴 셀던이 집필했다는 "Misery's Return" 표지를 가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폴 셀던의 미저리시리즈는 여주인공 미저리가 겪는 모험과 사랑과 우정을 그려나가는 로맨스소설로 설정되어 있다.

소설 "미저리" 본문 속에는 폴이 집필하는 "Misery's Return" 원고 중 일부가 여러차례 삽입되어 있다. 여주인공 미저리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사랑하는 두남자가 목숨을 건 모험을 펼치는 내용인데, 폴 셀던과 애니 윌크스의 처절한 투쟁 못지 않게 매력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스티븐 킹이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정말로 "Misery's Return"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아~, 스티븐 킹, 긴장하지 마요. 난 애니 윌크스처럼 강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나저나 "Misery's Return" 표지에 보이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은 영락없는 스티븐 킹. 이것이야말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특권이란 말인가? 여주인공 미저리의 다리를 움켜쥔 스티븐 킹의 손이 무척이나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소설 "미저리"에는 공포소설 특유의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인간 자체가 괴물이다. 인간 심리가 부딪치며 벌이는 처절한 공포를 좋아하는 스릴러 팬에게 적극추천한다. 단순한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복잡미묘한 거침없는 전개에 감격의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도와주세요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러다가 정말로 제명에 죽지 못할것 같아요

내가 어디있든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나의 여자 친구는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나타나


보고 싶어 그랬어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런 적이 없잖아

위의 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순수발랄한 천재적인 음악그룹 쿨의 노래 "미절(Misery)"의 가사 중 일부이다. 가요에도 쓰여질만큼 "미저리"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악녀의 대명사하면 미저리라고 굳어져서, 조금만 무서운 행동을 하는 여자가 있으면 "미저리냐?"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이렇게 국내에서도 미저리가 유명해진 것이 스티븐 킹의 소설보다는 영화 "미저리"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 "미저리"는 로브 라이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서 애니 윌크스를 실감나게 연기한 캐시 베이츠는 그 덕분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그 여세를 몰아 또다른 스티븐 킹 원작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서도 주인공을 연기했다. "미저리"는 유명한 영화라서 동네 비디오가게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없다면 그 동네 비디오가게는 영화의 기본이 부실한 가게, 주인의 영화적 역량이 부실한 가게로 불러도 손색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게주인 앞에서 그렇게 불렀다가는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자.) 영화는 원작소설에 비해 과격한 부분들이 상당부분 순화되었지만, 애니와 폴 사이에 펼쳐지는 긴장의 순간들을 멋지게 재현했으니 꼭 보도록 하자. 후회는 없을 것이다.

(이 감상문은 사라락님이 기증해주신 책을 읽고 쓰게 되었습니다. 사라락님, 귀한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