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 Christine

작품 감상문 2007. 5. 12. 01:37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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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ne

(1983년 소설)

스티븐 킹 소설 "Christine"의 첫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소설과 사랑에 빠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삼각관계에 빠진 사랑이야기다.]

삼각관계! 이 얼마나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무시무시한 단어인가! 대중문화 속에서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는 소재이면서도, 언제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는 효과만점의 소재다. 그런데 삼각관계의 한 축을 이루는 쪽이 인간이 아니라면? 괴물 자동차라면? 궁금하다면 스티븐 킹의 소설 "Christine"을 읽어보면 된다.

자동차는 흔히 여성적인 존재로 취급되곤 한다. 자동차 뒷부분을 보며 "엉덩이 예쁜데!"라고 한다거나, 멋진 곡선의 차체를 보며 "몸매 잘 빠졌네!"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차 발표회를 보면 차 옆에는 거의 항상 예쁜 누나들이 요염한 포즈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레이싱 경기장에 가보면 수영하다 달려왔는지 수영복만 입은 누나들이 자동차 사이를 설치고 다니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동차는 여성, 특히 섹시한 여성의 화신인 것처럼 남성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고는해도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을 연상시키는 멋진 자동차보다는 실제 여성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여자보다 자동차가 더 좋다고 열변을 토하는 고등학생이 한명 있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아니는 전형적인 왕따이다. 남학생들로부터도 여학생들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인 데니스가 항상 옆에서 챙겨주는 관계로 그럭저럭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날 아니는 데니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 길 옆에 세워져 있던 크리스틴이라는 자동차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 버린다. 아니는 크리스틴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크리스틴은 완전히 고물이었고, 그 차의 주인인 리베이라는 기분나쁜 노인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지만 크리스틴이 너무나 맘에 든 아니는 돈을 꿔가면서까지 크리스틴을 사고야만다. 데니스도 아니의 부모도 여러가지 이유로 아니가 자동차 사는 것을 만류하지만, 이제까지 착하게 순응하며 살아왔던 아니는 격렬하게 화를 내며 그들의 의견을 완강하게 묵살해 버린다. 아니는 그때부터 크리스틴에게 달라붙어 수리하는데 온 정성을 쏟아붓는다. 그리고는 고물덩어리였던 크리스틴을 전문가도 놀랄만한 솜씨로 완전히 새 자동차인 것처럼 복원시킨다. 아니는 크리스틴을 통해 삶의 힘을 얻는다.

그러는 동안 학교에는 레이라는 매력적인 여학생이 전학온다. 그전같으면 제풀에 포기했겠지만, 아니는 크리스틴을 만난 이후로 여드름도 싹 없어지고 활력이 넘쳤기 때문에 과감하게 대쉬해서 레이와 사귀는데 성공한다. 그렇치만 레이는 아니를 따라 크리스틴을 타보는 순간 깨닫는다. 크리스틴은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라는 것을. 끔찍한 괴물이라는 것을. 크리스틴에게서 몇차례 기분나쁜 경험을 하게 되고 아니의 성격도 자동차때문에 다혈질로 변해가자 레이는 아니에게 말한다. "나와 크리스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 하나만 선택해서 나머지 다른 쪽은 잊어버려." 그러자 괴물 자동차인 크리스틴은 레이를 없애버릴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삼각관계. 아니와 레이와 크리스틴을 잇는 공포의 삼각형이다.

그뿐이 아니다. 아니 곁에 크리스틴이 생긴 순간부터 별의별 일들이 벌어진다. 학교 깡패들이 아니가 고생해서 수리한 크리스틴을 다 때려부수고, 아니는 주차장 주인의 심부름으로 밀수에 가담하게 되고, 잇달아 발생하는 자동차 살인사건에 의심을 품은 형사가 아니를 찾아오고, 게다가 단짝친구인 데니스는 아니를 배신하기까지 한다. 아니와 크리스틴은 분노에 치를 떤다. "X새끼들아!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다 죽여버릴거야!" 그래서 정말로 죽음의 파티가 벌어지게 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 "Christine"은 스스로 움직이는 괴물 자동차라는 소재를 가지고 숨막히게 격렬한 스토리를 만들어낸 걸작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엔 그저 막연히 "괴물 자동차 소설이면 좀 유치하겠는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읽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가 크리스틴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것처럼, 나도 소설 "Christine"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첫눈에 반해 버렸다. 마치 나와 스티븐 킹과 크리스틴과의 삼각관계랄까.

이 소설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부분은 데니스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두번째 부분은 다양한 사람들의 시점, 특히 아니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마지막 부분은 다시 데니스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3부분으로 나뉜 소설은 또다시 각각의 소제목을 달고 있는 51개의 작은 단락들로 쪼개져 있다. 소제목 밑에는 항상 자동차를 주제로 한 팝송가사를 붙여 놓았는데, 그렇게까지 자동차를 주제로 한 노래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인용된 팝송 중에는 밥 딜런의 노래 "From a Buick 6"도 있어서 흥미로웠다. (2002년 9월에는 "Christine"과 맞먹는 스티븐 킹의 또다른 괴물 자동차 소설 "From a Buick 8"이 발표될 예정이다.)

처음에는 데니스의 눈으로 소설이 전개되는 만큼 책을 읽는 독자는 아니와 크리스틴 사이에 벌어지는 은밀하고 무서운 일들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저 천천히 조금씩 뭔가 안좋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일들인지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소설이 꽤 진행되고 나서도 크리스틴은 그저 보통 자동차인 것처럼만 등장해서 읽는 사람을 안달나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 후로는 기분나쁜 노인 리베이와 크리스틴과의 과거, 착한 왕따소년에서 끝없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아니, 크리스틴과 아니를 의심하는 형사의 집요한 접근, 아니를 배신하게 된 데니스의 뜨거운 청춘, 괴물 크리스틴의 무자비한 살육행위가 숨돌릴 틈없이 벌어져서 한도끝도 없는 긴장과 스릴을 선사한다.

우연히 마주친 악마의 자동차 크리스틴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아니의 모습이 무섭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언뜻언뜻 자신의 변신을 후회하면서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음을 괴로워하는 아니의 모습에서 참 안됐다는 기분이 들었고, 이런 기분은 소설 끝에 가서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스티븐 킹은 여러 작품들 속에서 악의 힘에 굴복해서 괴물로 변해가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들의 인간적인 슬픔을 묘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동정적인 시선을 갖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이 킹의 작품을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한 요인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Christine" 후반부로 갈수록 눈에 띄는 것은 어릴적부터 붙어다니던 단짝친구인 아니를 배신하게 된 데니스의 마음이다. 소설 후반부는 데니스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배신으로 인해 죄인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데니스의 심정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로인해 벌어지는 데니스와 아니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박진감 넘친다. 특히 새해를 코 앞에 앞둔 12월 31일 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주고받는 대화 속에 묻어나오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은 크리스틴의 스피드와 파워가 빚어내는 피의 살인극 못지않게 책을 읽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속담이 실감나는 장면이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 소설 최고의 볼거리는 맨마지막에 등장한다. 계속되는 의문의 자동차 살인극을 끝내려는 인간과 크리스틴의 대결! 결전의 시간이 될때까지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며 느껴지는 두근두근 떨리는 기분. 그리고 마침내 인간과 괴물 자동차 크리스틴의 대격돌!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의 묘사가 일품이다. 자동차가 충돌하고 부서지고 깨지고 발악하는 격한 순간이 연약한 인간의 죽음을 무릅쓴 절박한 저항과 어우러져 속도감있게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 끝에는 짧은 에필로그가 있다. 크리스틴과의 한판 승부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적어놓은 것인데, 스티븐 킹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 우울한 분위기로 엔딩을 마무리하고 있다. 에필로그를 읽고나서 나는 이 소설이 전해준 깊은 여운에 흠뻑 젖어 잠시동안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를 멍한 상태에 빠져 있게 만든 또 한가지 이유는 킹이 에필로그 마지막에 "Chrisine" 2탄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Christine"을 너무나 인상깊게 흥미롭게 읽었다. 제발 킹이 2탄도 꼭 써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킹이 2탄을 써주길 바라는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작품들 2탄만 다 써도 킹은 평생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Christine"은 국내에 번역출간되었다. 인의출판사에서 "살아있는 크리스티나"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도서관이나 헌책방같은 데서 만나게 되면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책을 읽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소설 "Christine"에는 돈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출판계에는 선인세제도가 있다.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출판사측에서 작가에게 미리 일정액의 인세를 지급하는 것이다.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작가는 경제적으로 생활에 안정이 되어 집필에 전념할 수 있고, 출판사는 다른 출판사를 따돌리고 미리 작품의 출판권을 확보할 수 있어서 양쪽에 이익이 되는 제도이다. 선인세로 지급되는 액수는 작가의 유명세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스티븐 킹같은 거물작가의 경우 선인세로만 백만달러 이상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킹은 "Christine"을 집필하면서 선인세로 딱 1달러만 받았다. 그대신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받게 될 정식인세를 올려받는 것으로 출판사측과 계약을 맺었다.(그 정식인세가 몇 %였는지는 모르겠다.) 이 1달러 선인세 계약으로 인해 킹이 예전 작품들 출간때보다 더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 후로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선인세를 1달러만 받았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별로 재미를 못 본 것 같다.

"Christine"은 공포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국내에는 "크리스틴"이란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어 있다. 동네 비디오가게 주인이 영화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꼭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소설 "Christine"을 읽고 나서 영감을 얻어 멋진 이야기를 한편 만들어냈다. 제목은 "살아있는 홈페이지". 대강의 줄거리를 여러분께 소개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인 "나"는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하나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거의 매일같이 접속해서 홈페이지를 둘러보고, 게시판에 글도 올리고, 틈나는대로 업데이트도 성실히 하는 등 홈페이지 운영에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애인 돌보듯이. 그러던 중 "나"는 제1983회 세계 꽃미남 선발대회 참가상에 빛나는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수려한 외모로 인해, 국제적인 음악그룹 핑클의 리더 "효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핑클 팬클럽 남학생들의 눈물을 무시한 채 "나"와 "효리"는 한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의 전기난로보다 뜨거운 사랑을 만끽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홈페이지 관리에 소홀하게 되어, 홈페이지는 넓고넓은 정보의 바다 인터넷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남겨지게 된다. 홈페이지는 자신이 버림받은 것이 "효리"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마구마구 미워한다. "나"와 "효리" 그리고 홈페이지 사이에 사랑의 삼각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효리"만 없어지면 "나"의 사랑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홈페이지는 "효리"를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한 "효리". "나"는 "효리"와의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핑클멤버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채, 홈페이지와 목숨을 건 죽음의 대결을 펼치게 된다. 결국 "나"와 홈페이지의 결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