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a Teenage Grave Robber

작품 감상문 2007. 5. 12. 00:03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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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a Teenage Grave Robber

(1965년 단편소설)

 스티븐 킹의 논픽션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 속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킹이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해서 LA의 한 서점에서 사인회를 하고 있을때, 어떤 아저씨가 종이원고를 들고서 킹 앞에 섰다. 킹은 그 아저씨의 정체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1960년 14살이 되던 해, 킹은 Spacemen이란 SF잡지에 소설을 투고했었다. 킹이 기억하기로는 원고를 투고한 건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러나 보냈던 원고는 잡지에 실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투고해서 퇴짜맞은 것도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다.

유명작가가 된 킹의 사인회에 나타난 아저씨는 바로 그 옛날 Spacemen 잡지의 편집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뭉치는 그 옛날 킹이 난생 처음으로 투고했었던 소설원고였다. 11살때 엄마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타자기로 완성시킨 원고. 잡지 편집인은 얼굴도 모르는 한 소년이 보냈던 퇴짜원고를 20년이 넘도록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스티븐 킹에게 원고에 사인해 달라고 말했다. 킹은 당황스런 마음으로 원고에 사인해 주었다. (편집인의 집 얘기가 나오는 걸로 봐서, 그 후 킹은 편집인의 집을 방문했던 것 같다.)

인기작가가 되어서 20년전 어릴 때 썼던 자신의 소설을 만나본 기분은 어떤 것일까? 글쎄... 내가 인기작가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기작가가 어릴 때 썼던 소설을 접하게 된 팬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건 내가 경험해 보았으니 말해줄 수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우주 끝까지 달려가 하나님과 점심을 같이 먹고 다시 지구에 돌아와 핑클 콘서트에 참석해서 "핑클짱!"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느낌이었다고...

지금 소개할 단편소설 "I Was a Teenage Grave Robber"는 1965년 킹이 19살 때 Comics Review 잡지에 발표했던 소설이다. 잡지에 실리는데 성공한 최초의 스티븐 킹 소설이다. 그전까지는 잡지사로부터 퇴짜맞았다는 통지서만 잔뜩 받았었다. 이만하면 꽤 의미깊은 작품 아닌가? 그런데 Comics Review에 실렸던 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의미가 없었나보다. "On Writing"에서 킹은 이 소설이 66년 Stories of Suspense 잡지에 실렸던 것을 최초의 잡지출판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읽은 원고도 66년도 원고다. 이 잡지에 실렸다고 킹이 직접적인 원고료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잡지는 공포장르의 팬들이 모여 만든 팬잡지였기 때문이다.(요즘 만화동아리에서 펴내는 동인지 정도의 개념이다.) Stories of Suspense에 실리면서 편집인이 이 소설의 제목을 "In A Half World Of Terror" 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도 킹은 처음 자기가 붙인 제목이 더 맘에 든다고 한다. 나도 처음 제목이 더 맘에 든다. "I Was a Teenage Grave Robber". 우리말로 하면 "나는 무덤파는 청년이었다" 정도? 왠지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듯한 직설적인 멋진 제목 아닌가?

위에 보이는 그림은 66년 발표될 당시 소설에 붙어있던 삽화이다. 초췌한 모습의 남자가 해골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고, 그 옆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원피스를 걸친 섹쉬한 여자가 불편한 자세로 해골을 쳐다보고 있다. 그 두사람 주위에는 정체불명의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있으며, 삽화 밑에는 편집인이 지어 붙였다는 제목 "In A Half World Of Terror"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대니는 무척 불행한 청년이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서 어렵게 생활하다 사기까지 당해서 힘들게 들어간 대학을 어쩔 수 없이 휴학하게 된다. 앞길이 막막한 그는 비밀스러운 연구를 하고 있는 와인바움 박사로부터 아르바이트 제의를 받는다. 보수는 좋았지만, 그 아르바이트란 밤중에 몰래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을 파고 시체를 빼내오는 일이었다. (이 대목에서 박사는 대니에게 자신의 일을 합리화시킨다. "연구소같은 데서 일하는 과학자들은 시체를 기증받는다든지 해서 여러가지 합법적인 경로로 실험재료를 맘껏 얻을 수 있지만, 나같이 고독하게 홀로 연구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혜택이 없으니 내가 직접 실험재료를 구할 수 밖에 없지.") 그놈의 돈때문에 대니는 무덤을 파고 시체를 박사에게 전해주게 되고, 두둑한 보수와 함께 다음에 또 도와달라는 말을 듣는다.

시체를 건드렸다는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던 대니는 난폭한 친척 아저씨한테 끌려가던 아름다운 아가씨 비키를 구해주게 된다. 대니는 비키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데이트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도중, 와인바움 박사의 조수가 대니를 찾아 극장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대니가 전화를 받자-

"극장에서 빨리 나와! 우리를 살려-"

갑자기 조수가 말을 않더니 비명소리만이 들린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진다. 위급상황임을 직감한 대니는 차를 몰고서 비키와 함께 와인바움 박사의 집 겸 연구소에 도착한다. (이때 감탄스럽게도 비키가 박사의 집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 이 집 알아요! 예전에 친척아저씨가 이 집에서 박사를 도와 일했어요. 아저씨가 점심 도시락을 놓고 가서 여기로 내가 직접 도시락을 갖고 왔었죠. 아저씨는 이런 데 함부로 오면 안된다고 막 화를 냈지만요.") 어쨌거나 대니와 비키는 으스스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와인바움 박사의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말 겁도 없는 애들이죠?

나는 이 단편소설을 읽느라고 정말 눈이 아팠다. 이 소설이 실렸던 Stories of Suspense가 몇 십년 전에 나온 팬잡지니까 요즘 잡지같은 깔끔한 모습은 전혀 없다. 위의 삽화를 보면 알겠지만 펜으로 쭉쭉 그린 그림이고, 킹의 소설은 타자기로 친 원고가 그대로 실려 있다. 게다가 내가 읽은 원고는 그 잡지를 복사해 놓은 것이어서 어느 페이지는 너무 흐려서 글씨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또 어느 페이지는 너무 진해서 뒷페이지 글씨랑 겹쳐서 복사되어 혼란스러웠다. 너무 흐리거나 너무 진해서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은 추리해 가면서 짐작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고단한 작업이었다. 나는 이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려고 몸부림치던 나폴레옹시대 프랑스 고고학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힘들게 읽었지만, 내용은 내가 좋아하는 B급 공포소설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내용이어서 즐거웠다. 결말에 가면 대니는 사건현장에서 박사의 일기장을 발견하고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다. 박사가 실험을 위해 시체들에 방사능을 투사하자 시체에 우글거리던 조그만 구더기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커지고 엉겨 붙더니 거대한 구더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쉽게 말해 구더기들이 변신합체해서 왕구더기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시체 3구에서 나온 구더기들이 왕구더기 3마리로 변했던 것이다. 왕구더기들은 시체가 있던 유리관을 부수고 나와서는 박사와 조수를 꿀꺽!

결국 대니와 비키는 구더기들을 처치하게 되는데, 내 생각엔 왕구더기들을 그대로 놔뒀더라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다. 왕구더기가 자라서 괴물 왕파리가 되는 것이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인간이 있으면 급강하하여 형편없이 울퉁불퉁한 송곳니들로 사람머리를 어그적 어그적~. 인간과 괴물 왕파리의 목숨을 건 한판승. 무승부는 전혀 없는 그 처절한 대결이 흥미롭지 아니한가? 패배는 죽음뿐이닷! 왕파리는 패배한 인간의 몸에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또다시 왕구더기가 나오고 그 구더기가 또다시 왕파리가 되고... 돌고 돌고 돌고... 이거 완전히 에일리언 곤충버전이군.

사람이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에 향수를 느끼게 되고 어린 시절의 행동을 하게 된다. 요즘 킹의 작품을 보면 초자연적인 공포보다는 인간 존재의 어두운 면에 치중해서 무겁고 진지한 감이 있는데, 가끔씩은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에 썼던 것 같이 단순하고 발랄한 B급 공포소설도 발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엔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안될까? 그래도 최소한 왕파리가 나오는 소설은 꼭 써줬으면 좋겠다. 난 B급을 사랑하니까. I Was a Teenage Grave Robber 같은 멋지고 발랄한 소설을 읽으면 너무 좋아서 막 환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