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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um Overdrive

(1986년 스티븐 킹 감독-각본-출연 영화)

예전에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슬립워커스"라는 영화를 빌려다 본 적이 있다. 스티븐 킹이 최초로 오리지널 영화시나리오에 도전한 작품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봤다가 슬픔을 맛보았다. 이상하게 지루했던 그 영화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엄마 슬립워커스로 열연한 여배우의 도발적 매력과 슬립워커스의 유혹을 받는 여학생으로 열연한 여배우의 건강한 에로틱이었다. 그 뿐. 그 영화는 두여성을 빼면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 중간쯤에 난 두번 놀라고 말았다.

첫번째 놀란건 스티븐 킹이 어벙한 묘지관리인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때는 킹이 영화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을 취미로 즐긴다는 사실을 몰랐던 때여서 너무 놀랐다. 킹은 영화속에서 묘지에서 일어난 사건에 놀라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에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때 경찰로 출연한 사람들은 영화감독들이다. 존 랜디스(런던의 늑대인간), 클라이브 바커(헬레이져), 토브 후퍼(텍사스 전기톱살인사건), 조 단테(그렘린). 하여간에 킹의 모습을 책표지의 고정된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으로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기뻤다.

두번째로 놀란 건 킹의 연기력이 굉장히 뛰어났다는 것이다. 어리둥절해서 횡설수설하는 묘지관리인의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리얼하게 연기하는 것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는 배우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슬립워커스가 비록 지루한 영화였지만 킹의 열연을 본 것만으로도 돈내고 비디오테이프 빌려온 본전은 뽑았다는 생각이 들어 보람있었다. (그후로 내가 본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작품으로는 Langoliers를 꼽고 싶다) 혹시나 조바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영화속 킹의 분위기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브래드 피트로 상상하는 우를 범하지 말도록 당부하고 싶다.

그후 시간이 흘러 나는 바로 지금 소개할 Maximum Overdrive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 영화는 킹의 단편집 Night Shift 중 Trucks라는 단편을 각색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Maximum Overdrive는 스티븐 킹이 시나리오를 썼을 뿐 아니라 직접 감독도 하고 출연도 했다는 사실이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춤까지 췄다. 킹의 팬이라면 정말 기대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난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주저했다. 슬립워커스의 지루한 악몽이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이 영화가 미국개봉 당시 감독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별로 성공하지 못해서 "한눈팔지 말고 소설이나 써라!"라는 고마운 충고까지 울려 퍼졌던 문제작이라는 것이 맘에 걸렸다. 이 영화가 졸작이라는데 반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랜시간을 방황했는데, 결국 이 영화를 빌려보기로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영화가 아무리 재미없더라도 슬립워커스처럼 흐뭇한 누나들이 출연할 것만 같았고, 아무리 엉망일지라도 킹의 감독실력을 확인하고 싶었으며, 감동적인 킹의 연기를 다시 한번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 비디오가게로 달려 갔는데, 그런 영화는 없다는 주인아저씨의 말씀! 왜 이렇게 우리 동네는 문화의 불모지인지 가슴아팠다. 어쩔수 없이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을 방황하다 2001년에 들어서야 겨우 테이프를 구해서 볼 수 있었다.

국내출시명은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다. 위에 보이는 그림이 바로 국내출시 테이프표지다. 주인공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스가 우리를 향해 강력한 눈초리로 말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 영화를 꼭 보세요. 한마디로 죽음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망가지면서 찍은 영화는 이 영화가 처음입니다." 특이한 것은 테이프케이스에는 감독이 존 카펜터라고 나와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카펜터의 명성을 판매량과 연결시키기 위한 업체측의 잔머리인것 같은데, 킹의 팬으로서 정말 화나는 일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친절하게도 한글자막으로 "스테핀 킹 감독"이라고 유머러스하게 진실을 말해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Maximum Overdrive를 보기 시작했다. 오프닝에 "스티븐 킹 영화 a film by Stephen King"이라는 자막이 떠오를때 얼마나 흥분되던지. 오냐 얼마나 졸작인지 내가 당당하게 평가해주마! 이 영화의 줄거리는 테이프케이스 뒷면에 자세히 나와있다.

[1987년. 지구는 거대한 혜성 RHEA-M의 궤도를 스쳐 지나간다. 바로 그때, 지구의 모든 기계가 반란을 시작한다. 인간의 의지로 움직이던 기계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동작하면서 옛주인들을 습격한다. RHEA-M 혜성의 영향권 내에 속한 8일간 지구는 일대 살육의 현장으로 변한다. 인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기계의 굉음만이 요란한 한 마을에 일단의 젊은이들이 RHEA-M의 무시무시한 파워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바로 이것이다. 저절로 움직이는 기계들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처절한 투쟁! 기계라고 표현되었지만, 영화 속에서 주로 등장하는 것은 거대한 트럭들이다. 저절로 움직이며 사람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트럭들이 고속도로 휴게소를 포위하게 되는데, 휴게소 안에 갇히게 된 사람들이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에밀리오지만, 트럭쪽에서도 주인공격인 트럭이 나온다. 장난감회사 운송트럭인데, 트럭 앞에는 커다란 악마얼굴이 붙어있고 뒷쪽에는 기분나쁜 삐에로(It의 페니와이즈?)가 그려져 있다. 이 놈이 화날때는 악마의 눈에 불이 켜진다. 이 매력적인 트럭을 앞세운 폭주트럭들이 사람들을 차례로 깔아뭉개는 장면들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나운 트럭들의 공격(나중에는 건설장비들까지 달려온다) 앞에서 과연 에밀리오를 비롯한 사람들은 어떻게 몸부림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졸작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킹이 조롱받을 정도로 잘못을 저지른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슬립워커스보다는 10배정도 좋았다. 영화사이트 IMDB에 가보면 방문객들이 Maximum Overdrive에 점수를 준 결과가 나와있다. 1006명이 점수를 주었는데 평균을 내보니 10점 만점에 3.9점이다.(여러분도 지금 투표에 참가할 수가 있다. 나는 10점을 주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울면서 뛰쳐나왔다.) 이 영화가 졸작이라고 인정받고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킹의 소설 속에서 보이는 실감나는 압도적인 공포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는 엑소시트스나 오멘같은 영화에 비하면 코미디영화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전혀 무섭지 않다. 그리고 원작소설을 읽은 팬이 아니라면 영화가 축축 처지면서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킹은 최선을 다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를 열심히 만든 죄밖에 없다. 그는 B급영화의 열렬한 팬이다.

그가 집필한 호러비평서 Danse Macabre를 보면 킹이 얼마나 B급공포영화들에 애착을 가지고 성장했는지 잘 나와있다. 그는 극장에서 원숭이 털옷을 입고 어항을 머리에 뒤집어 쓴 괴물과 고무옷을 입고 기어가는 왕거머리 같은 괴물들이 나오는 B급 공포영화들을 관심있게 보며 소설가로 성장해 온 것이다. 그런 그가 생전 처음으로 만든 영화가 익숙한 B급 공포영화의 뒤를 따랐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듯 싶다. (Maximum Overdrive가 B급이라는 증거는 결정적으로 영화 맨뒤에 나오는 자막에 있다. 그 자막은 기계들의 반란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설명해주는데, 읽어보면 황당해서 웃음이 터진다. B급이 아니고서는 시도할 수 없는 대담한 내용이니, 여러분도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꼈던 기분을 함께 하시길.)

나도 B급 영화의 열렬한 팬이다. B급 액션영화(LA용팔이), B급 공포영화(월하의 공동묘지), B급 에로영화(애마부인), B급 멜로영화(내가 버린 여자)를 너무도 사랑한다. B급 영화는 지루하면서도 허술한 내용전개가 역설적이게도 매력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의 굳어버린 가녀린 감정선에 불을 땡긴다. 그런 점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나 자신은 당연히 스티븐 킹의 B급영화 Maximum Overdrive를 미워할 수가 없다. 당당히 만점 10점을 주고 싶다. 너무 재밌어서 오랜만에 막 웃을 수 있었던 공포영화였다.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Lee를 보고 박수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Maximum Overdrive를 보고도 감탄사가 튀어나올 것이다. "숨어있는 걸작"이라는 말과 함께.

Maximum Overdrive에는 여러 배우들이 나와 B급영화다운 연기를 펼치는데,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스티븐 킹이다. 영화 맨앞에 아주 짧게 등장하지만 확실하게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명연기를 보여준다. 킹이 다가선 현금지급기가 asshole이란 단어를 화면가득 쏟아내자 그는 화들짝 놀라는 연기를 펼치며 아내를 부른다. "여보, 얘가 나보고 asshole이라고 놀려!" 이 장면에서 킹의 아내 태비사가 출연했으면하고 바랬지만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서 영화 속에서는 에밀리오의 파트너로 거친 매력을 발산하는 누님 한분이 출연해 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전문용어로 이런 여성을 "야생녀"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 누님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배우는 막 결혼식을 올린 신부로 나온 여성이다. 성숙한 외모와는 달리 어쩌면 그렇게 예쁘고 앙증맞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너무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내 생각에는 이 영화를 밝은 분위기로 만드는데 단단히 한몫 한 것 같다. 여러분도 영화를 직접 보고 이 분의 목소리를 들을때 어떤 기분이 느껴지는지 체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이 분의 명랑한 목소리만으로도 이 영화를 강력추천!

Maximum Overdrive 영화음악은 유명한 락그룹 AC/DC가 맡아서 신나는 음악을 들려준다. 기계들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시체들이 즐비한 상황을 보여주는 끔찍한 장면에서 신나는 락음악이 울려퍼지는 것은 좀 이해가 안가지만, 상식을 뛰어넘는 느닷없는 부조화가 B급영화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어쨌든 음악은 신났다.

킹의 팬이라면 Maximum Overdrive를 볼 것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오래전에 출시된 영화라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찾으면 없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DVD로도 나와있으니 능력되시는 분들은 구해 보시길.(하지만 보고 나서 나를 비난하지는 말기 바란다. B급영화의 감수성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주시길 바란다.) 당장 구해다 볼 수 없다면 인터넷에서 예고편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짧은 예고편이므로 과도한 기대는 하지 말기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스티븐 킹은 Maximum Overdrive의 흥행실패를 거울삼아 다시한번 영화감독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현실로 이루어져 영화를 만든다면 이번에는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하다. B급도 좋지만, 이번엔 좀 무섭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B급으로 만들면 나는 좋지만, B급의 환상적인 심오한 세계를 낯설어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악몽으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