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태연이

by 조  재  형

주위는 온통 절망뿐이었다.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절망뿐. 그래서 태연이는 살그머니 연습실을 빠져나와 숙소의 방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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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

룸메이트 티파니는 방에 없었다. 그 아이는 연습실에 있을 테니까. 언제나 열심히 하는 연습벌레니까.  지금 이 시간에 숙소에 없는 건 당연했다.

'그래, 나랑은 다른 아이지. 나는 노력이라는 말에 지쳤어.'

태연이한테도 연습, 연습, 연습의 연속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전라도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SM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으로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다. 꿈을 이루려고, 가수가 되려고, 열심히 노래와 춤을 연습하는 일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태연이의 마음 속에서 희망은 점점 시들어가고 절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SM 엔터테인먼트에는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이 있었는데, 티파니 같이 미국에서 온 아이는 흔할 지경이었고, 심지어는 장리인처럼 진짜 중국 사람도 있었다. 그 수많은 연습생 모두가 저마다 연예인이 되기 위한 끼와 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쟁쟁한 연습생들과 겨뤄서 나 같은 애가 정식으로 가수 데뷔할 수가 있을까? 내 작은 키만 봐도 우울해. 저렇게 키 큰 애들 틈 속에 가려 나는 보이지도 않을걸. 그렇게 가려진 나를, 나 같은 꼬꼬마를 누가 눈여겨 봐주겠어? 이제껏 연습생으로 생활한 건 그저 나의 허영심 때문이었던 거야. 잘난 연습생들은 나 같은 꼬꼬마를 보면서 속으론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렇게도 매력을 느꼈던 춤과 노래 연습이 반복적이고 지루한 노동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트레이너들의 지적을 받는 횟수도 늘어갔지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 대신 막연한 반항심만 불타올랐다. 급기야 몇 년동안 같은 방을 써온 연습생인 티파니한테까지 질투를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숙소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태연이는 티파니를 생각했다.

'티파니, 그 동안 미안했어. 다행스럽게도 이젠 내가 미안한 일 만들 일도 없을 거야. 난 여기를 떠날  거니까.'

태연이는 옷장을 열고 바퀴 달린 커다란 여행가방을 꺼냈다. 옷이며 화장품이며 온갖 개인 물건들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동안 숙소에 남겨놓았던 자신의 흔적들을 모두 다 지우는 중이었다.

의외로 빠른 시간 안에 짐꾸리기가 끝났다. 태연이는 가방 안에 있는 마지막 연양갱 두 개 중 하나를 티파니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연양갱은 태연이가 무척 좋아하는 군것질거리였는데, 친한 친구들한테 자주 나눠주곤 했었다.

'티파니, 이게 너한테 주는 마지막 연양갱이 되겠구나.'

연양갱 옆에는 어젯밤에 적어놓았던 쪽지를 놔두었다.

이제 숙소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 연습생 시절이여 안-녀엉! 나는 고향으로 내려갈 거다!

여행가방을 끌고 숙소 현관을 나서자마자 태연이는 써니랑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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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태연아! 그 가방은 뭐야? 어디 가는 길이니?" 써니는 항상 싱글벙글이다.

"어... 이거..." 태연이는 잠시 변명거리를 생각해보았다. "엄마가 불러서 잠깐 집에 들르려고. 계절도 바뀌고 하니까 집에서 새옷 가져오려고 숙소에 있던 옷들을 이 가방 안에 넣었어."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가니?"

"어, 엄마가 주말엔 바, 바쁘다고 해서."

"옷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큰 가방을 끌고 가. 누가 보면 이사라도 가는 줄 알겠다."

속이 뜨끔해진 태연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참, 태연아,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거 안 잊었지? 힙합계에 다이나믹 듀오가 있다면 우리 아이돌계에는 단신 듀오, '단듀'가 있는 거야. 우리 둘이 '단듀'를 결성해서 다음 번 실력 평가회 때 나가보자. 응? 어때? 아잉~ 자기야~"

태연만큼이나 키가 아담하지만 써니가 애교가 많아서 인기가 좋다. '하지만 나는 애교 마저도 없어. 정말로 나는 그런 것 조차 없다고.' 태연이는 '단듀'에 관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는 써니와 헤어졌다.

바퀴 달린 가방을 끌면서 터벅터벅 걷다보니 야구 연습장에 이르렀다. 이제 막 한 게임을 마치고 철망 타석에서 나오던 유리의 손에 천 원짜리 지폐가 들려있다. 아마 한 게임 더 하려는 모양이다. 유리가 태연이를 발견하고는 까불거리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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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태연아, 반갑, 반갑, 반갑구나! 그 가방은 뭐니?"

태연이는 써니한테 했던 변명을 리바이벌했다.

"그래 잘 갔다 와, 태연아. 그 동안 서울은 내가 지키마. 그런데 내가 저번에 했던 말, 어떡할래? 나랑 같이 점프 연습하는 거 말야. 할래? 정말이지 무대 위에서 펄쩍펄쩍 점프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가 있다고. 마치 하얀 도화지 한가운데 까만 점을 찍는 것처럼 말야. 이런 건 필수적으로 연습해줘야 한단 말야."

유리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점프하며 까불거렸다. 유리는 무대 위에서 어떤 퍼포먼스가 필요할지 모른다며 발차기 연습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활력 넘치는 아이였다. (비록 태연이는 발차기의 필요성에 공감하진 못했지만. 무대 위에서 발차기라니. 여자 아이돌한텐 어울리지 않아!) 운동신경이 너무나 뛰어난 아이. 태연은 유리한테 SM 엔터테인먼트보다는 태능 선수촌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태연이는 점프 연습을 고려해보겠다고 말하고는 유리와 헤어졌다.

거리를 지나다보니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걸어오는 윤아와 마주쳤다. 윤아가 서둘러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태연한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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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에헤헤헤헤~ 태연 언니! 그 가방은 정녕 무엇이던가요?"

태연이는 써니와 유리한테 했던 변명을 리바이벌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언니, 저번에 했던 약속 언제 지킬 거에요. 서울대공원에 꽃사슴 보러가기로 했잖아요. 수영이 언니랑은 벌써 녹용즙까지 같이 먹었단 말이에요."

태연이는 나중에 꼭 꽃사슴 보러가자고 약속하고는 윤아와 헤어졌다.

'앗, 그런데 요즘 가끔씩 윤아가 티파니한테 짓궂게 장난치면서 즐거워하는 거 같던데.' 하지마아~ 하지마아~라고 칭얼거리며 울상 짓던 티파니의 표정이 떠올랐다. '알게 뭐람. 나는 이제 연습생도 아닌 걸. 난 그저 평범한 시민일 뿐이라고.'

천천히 길을 걷다보니 이불가게 앞에 서있는 제시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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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오 태연, 헬로우. 그 빽은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태연은 써니와 유리와 윤아한테 했던 변명을 리바이벌했다.

"오 그랬군 그랬군. 나 지금 이불가게 들어가서 새 베개 하나 사려고 하는데 같이 물건 골라줄래?"

"너 베개 많잖아. 뭘 또 사니?"

"무슨 소리! 인간의 하루 생활 중 3분의 1은 잠이라고. 숙면을 취하는데 베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 모름지기 훌륭한 베개는 아무리 많더라도 지나치지가 않는 법이야. 어떡할래. 나랑 같이 이불가게 들어갈래? 나는 지금 바로 당장 새 베게를 원한단 말야. 롸익 나우! 엔, 오, 더블유! NOW! 나우, 나우!"

태연이는 제시카와 함께 가게로 들어가 베개 고르는 걸 도와주었다. 원앙새 한 쌍이 수놓아진 신혼 베개를 사는데 돈이 모자르다고 해서 태연이는 3,000원을 꿔주기까지 했다. 나중에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말한 제시카는 베개를 품에 안은 채 행복한 얼굴로 태연이와 헤어졌다.

태연이가 지친 표정으로 길을 걷다보니 노점 가판대에서 오뎅을 사먹고 있는 수영이를 만났다. 수영이가 오뎅 꼬치를 흔들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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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태연이구나. 그런데 어디 가니? 그 가방은 뭐야? 혹시 먹는 거 들었냐?"

태연은 써니와 유리와 윤아와 제시카한테 했던 변명을 리바이벌했다.

"오 그랬던 것이로구나. 야, 양갱 남는 거 없냐?"

수영이는 태연이가 주는 연양갱을 무지 좋아했다. 하긴 그 어떤 것인들 마다하겠는가. 수영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식신이었으니까. 태연은 가방의 작은 주머니에서 연양갱을 꺼내 수영이한테 주었다.

양갱을 손에 쥐고서 한층 표정이 밝아진 수영이 말했다. "있잖아, 내가 기막히게 끝내주는 돼지 두루치기 식당을 하나 발견했거든. 우리 언제 위장 리뉴얼하는 셈 치고 거기 가보자!"

태연은 알았다고 말하고는 수영이와 헤어졌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노점에서 오뎅 먹는데 심취한 수영이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렇게 열심히 먹는데도 늘씬한 롱다리라니. 쟤는 언젠간 꼭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봐야 돼. 햄버거나 소시지 같은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울걸. 아아... 수영이와 함께 성장판의 열림과 닫힘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일 일도 이제는 없겠구나.'

울적한 마음에 길을 걷던 태연이는 마지막 연양갱을 수영이한테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그것은 전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먹으려고 했던 건데.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잠깐 망설인 끝에 눈 앞에 바로 보이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분식집 안에 아는 사람이 앉아있어서 또 여행가방에 대한 변명을 해야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태연은 떡볶이 2인분을 시켜서 열심히 먹었다. 서울에서 먹는 마지막 떡볶이라는 생각에 슬픔이 파도를 쳤다.

그 때 분식집 벽면의 선반에 놓인 TV에서는 뮤직 페스티벌 영상을 재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선배 가수 보아가 댄서들과 어우러져 격렬한 춤을 추는 중이었다. 한동안 무대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던 보아가 무대 뒤편의 가림막 안으로 사라졌고,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러자 단 하나의 조명이 가림막을 비추었고, 그 가림막 속에서 보아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실루엣이 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태연은 TV를 보고 빙긋 미소 지었다. 저것은 보아가 아니라 사실은 효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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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연

잠시 뒤 객석까지 이어진 중앙 통로의 무대에서 공연을 펼칠 보아에게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가림막 실루엣을 이용한 대역의 공연이 행해진 것이었고, 보아의 대역으로 효연이가 활약한 것이었다. 그런 역할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었다.

분식집 TV를 보며 태연은 효연이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태연아, 내가 웨이브 가르쳐줄 테니까 배워볼래? 너한테 꼭 맞는 맞춤식 문어발 웨이브가 떠올랐거든. 생각 있으면 언제든 콜해. 내가 너를 팝핀 태연'으로 만들어주마."

춤짱 효연이. 시간에 쫓겨 어젯밤에 급하게 한두 번만 맞춰본 춤이라면서 실력 평가회에서 엄청 뛰어난 춤을 선보이던 효연이. 자신의 '작은' 소망은 중국 진출이라며 씨익 웃던 효연이.

'효연이 너는 한 발 한 발 전진하고 있구나. 어떤 꼬꼬마 여자애랑은 다르구나.' TV를 보던 태연의 눈 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주르륵. 냅킨으로 서둘러 눈물을 닦고 분식집을 나왔다.

터벅터벅 길을 가던 태연은 책가방을 등에 맨 서현이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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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태연이 언니, 안녕 안녕. 그 커다란 가방 들고 어디 가요?"

할 수 없이 태연은 써니와 유리와 윤아와 제시카와 수영이한테 했던 변명을 또 다시 리바이벌했다.

"음, 그러시구나."

"서현아, 오늘 중간고사라더니 시험 잘 봤어?"

"그게... 아앙- 망했어요, 완전 망했어요. 으앵- 앵-"

서현이는 노래와 춤 연습 외에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조용한 태도 속에 다재다능한 끼를 품고 있는 아이. 항상 보살 같이 온화한 미소로 연습생 언니들을 매혹시키던 아이.

"근데 언니, 스티커는요?"

"으, 으응? 아, 아직..."

"너무해-. 케로로 빵 사서 케로로 스티커 모아주겠다고 약속한 게 언젠데. 언니 혹시 양갱 먹느라 케로로 빵은 '아웃 오브 안중'한 거 아니에요?"

태연이는 나중에 꼭 케로로 스티커를 모아주겠다고 말하고는 서현이와 헤어졌다.

그러고서 한 동안 가방 끌고 걷기를 계속하던 태연은 커다란 의문에 빠져서 길가에 멈춰섰다.

여행가방을 들고 숙소에서 나온 뒤로 왜 이렇게 많은 연습생들과 자꾸 마주친 것일까?

그것은 당연했다. 이제껏 SM 연습실과 숙소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집에 내려가려 했다면 숙소를 빠져나온 순간 택시든 버스든 뭐든 잡아타고서 고속버스 터미널로 직행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까지 우물쭈물거렸던 것이다. 햇볕이 쨍쨍하던 낮에 숙소에서 나왔는데 이제는 어느덧 날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마음은 연습생 생활을 청산했다고 여겼는데 몸은 아직 그러지 못했던 것일까? 몇 년동안 연습실과 숙소를 왔다갔다하던 몸만은 아직 아이돌 가수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캄캄한 저녁 하늘 밑에 휘황찬란한 조명을 뽐내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 속에, 저 멀리 앞에 SM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보였다.

꿈을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태연이는 아직 자신의 꿈에서 그리 멀리 도망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여기서 발길을 돌려 SM으로 돌아간다면... 끊어졌던 꿈은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꿈이란 것이 실현 가능성은 막연하기만 할 지라도.

'SM으로, 숙소로 돌아간다면, 나는 계속 연습생으로 생활할 수 있겠지. 써니와 단듀를 결성할 수도 있고, 유리와 점프 연습을 할 수도 있고, 윤아와 서울대공원으로 꽃사슴 구경 갈 수도 있고, 제시카한테서 베개 값 3,000원을 돌려받을 수도 있고, 수영이와 돼지 두루치기를 먹으러 다닐 수도 있고, 효연이한테서 문어발 웨이브를 배울 수도 있고, 서현이한테 케로로 스티커를 줄 수도 있겠지. 내가... 다시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연습에 힘을 쏟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아이돌 가수로 발탁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잘만 된다면, 운이 따라와준다면 꿈이 현실이 될 지도 몰라. 어쩌면 연습생 아이들과 그룹을 이루어서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 오빠들처럼 대단하게 될 지도 모르고...'

그것은 현재로서는 너무도 거창한 꿈이라서 태연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조그만 자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꿈일 지도 모르지만... 만약에... 만약에...

태연이는 가방을 꼭 쥐고 생각했다. '과연 나는 어떨까?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태연이는 룸메이트 티파니가 거의 습관처럼 읊어대던 어떤 말을 떠올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연습실에 맨마지막까지 남아 연습에 몰두하던 티파니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조명등을 다 끄고 나왔다. 그 동안 불 끄는 걸 깜빡하고 연습실을 나온 적이 몇 번 있는 지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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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

연습실이 있는 SM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티파니가 숙소 방의 전등 스위치를 켰을 때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방의 반쪽이 증발해버린 듯한 느낌. 몇 년동안 티파니의 물건들과 뒤섞여 널려있던 태연이의 물건들이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티파니는 방을 돌아다니며 별안간 텅 비어버린 공간들을 손으로 훑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역시나 태연이의 옷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 속이 답답해져 멍하니 있던 티파니의 눈에 자신의 침대 위에 놓인 연양갱과 쪽지가 보였다.

쪽지를 펴보았다.

티파니!
몇 년간 같은 방을 쓰면서 너를 우리 집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젠 그럴 일이 없게 됐어.
나 집에 내려가. 가수의 꿈을 접기로 했거든.
너한테 미리 작별인사 하는 게 왠지 힘들어서 그냥 이렇게 쪽지로 인사를 대신하는 거 이해해줘. 나중에... 정신 좀 차리고나서 다시 연락할께.
티파니! 나 대신 꼭 가수의 꿈을 이루어줘. 너는 강한 아이니까 할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유명가수 돼서 나 모른 척하지마. 나 무시하면 인터넷에 막 악플 달껴! ㅋㅋ
우리 집사람 티파니, 안녕
--태연이가

'어쩌지?' 티파니는 침대에 주저앉아 조급한 손길로 태연이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음성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미국에서 와 한국말이 서툰 티파니를 많이 도와준 사람이 태연이였는데... 의욕만 앞서서 엉뚱한 말을 쏟아내곤 하던 티파니한테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하라며 지적해주던 사람도 태연이였는데... 밤에 출출하다고 하면 굉장한 볶음밥을 만들어주던 사람도 태연이였는데... 오랫동안 룸메이트로서 많은 추억을 만들어온 사람도 태연이였는데...

앞으로도 태연이를 만날 기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연습생 신분으로 만나던 때와는 기분이 좀 다를 터였다.

티파니는 한숨을 쉬며 태연이가 남기고 간 연양갱을 집어들었다. 그 동안 태연이한테 수많은 연양갱을 받았지만 사실 티파니는 하나도 먹지 않았다. 태연이 몰래 식신 수영이한테 다 떠넘겼던 것이다. 젤리와 초코바의 중간쯤 정도 되는 연양갱의 모양이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아무리 태연이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라한들 싫은 건 싫은 거였다.

하지만 태연이가 마지막으로 준 연양갱 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장지를 벗겨내고 연양갱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먹었다. 예상보다는 먹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입 먹었다. 태연이는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입 먹었다. 무언가 생각을 하려는 순간-

방 문이 열렸다. 태연이가 들어왔다. 실내에 가득한 정적 속에서 커다란 여행가방의 바퀴가 돌돌돌돌 굴러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마치 티파니가 투명인간이기라도 한듯 태연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서 여행가방 속에 든 짐을 풀었다. 티파니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서 연양갱을 오물오물 먹었다. 그것을 다 먹었을 때쯤이 돼서야 태연의 짐풀기가 끝났다.

텅 빈 여행가방을 옷장 구석에 놓아두고 돌아선 태연이. 천천히 티파니를 바라보았다. 입 안에 든 마지막 연양갱 덩어리를 우물거리고 있는 티파니의 눈과 바로 마주쳤다.

둘 다 서로 짐짓 무표정한 얼굴.

짧지만 왠지 길게 느껴지던 그 어색한 순간이 지나자 티파니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태연이 앞에 섰다. 키 차이 때문에 티파니는 태연이를 내려다보았고 태연이는 티파니를 올려다보았다.

"잘 돌아왔다." 티파니가 태연이를 꼬옥 안았다.

조심스런 손길로 티파니를 마주 안은 태연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임마!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날 놀라게 한 벌로 2분동안 네 발을 땅에 닿지 않게 해주겠다! 유감이네여!"

티파니가 태연이의 허리를 두 팔로 잡아 번쩍 들어올리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허공에 뜬 태연의 두 발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너무 조급해하지마, 태연아." 태연의 몸을 꼬옥 안아올린 채 티파니가 말했다. "열심히만 하면 돼."

"나... 네가 방금 한 말 생각했어."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 짓는 태연. "여기로 돌아올까말까 망설일 때 너의 그 말을 생각했어... 네가 맨날 하던 말이었잖아."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말? 내가 맨날 한국말을 어설프게 한다고, 말을 하기 전에 생각 좀 하고 살라고 혼내더니만, 그래도 내가 하는 말 중에 영양가 있는 말도 있었나보네."

태연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동안 웅얼거렸다.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티파니는 무슨 뜻일지 짐작할 순 있었다. 태연이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이윽고 태연의 말이 잦아들었다.

"그래 그래, 열심히만 하면 돼. 우리 열심히 하자, 태연아. 너도 나도 집을 떠나와서 힘들게 노력하고 있잖아. 우리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꼭 꿈을 이루어서 함께 웃자. 비록 지금은 울더라도 말이야."

태연의 눈물은 쉽게 끊이지 않을 듯 했다. 태연이가 티파니의 어깨에 기댄 얼굴을 들고 말했다. "이제 나 땅에 내려줘. 2분 지난 거 같아."

"아줌마, 여기 3분 더 추가요-"

"티파니, 넌 정말 힘이 장사야."

둘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걸로 충분했다.


세월이 흘렀다.

'소녀시대'라는 아이돌 그룹이 생겨났다. 태연, 티파니, 수영, 유리, 제시카, 효연, 써니, 윤아, 서현. 9명으로 이루어진 이 신인 그룹의 리더는 키 작은 태연이었다.

쉴새없이 바쁜 공연활동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가요 프로그램 '뮤직뱅크' 스케줄이 있던 날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외부 행사에 참석하고 난 뒤 뮤직뱅크 생방송이 있는 KBS 건물로 가는 길은 교통체증으로 답답하기만 했다. 자칫하다간 생방송에 늦게 생겼다. 생방송을 펑크내면 방송국측으로부터 6개월 출연정지라는 징계를 당하기에 소녀시대가 탄 차량을 모는 매니저의 맘이 급했다. 급기야 백미러가 부서지는 충돌사고를 내기도 했다. 어찌어찌 사고를 수습해서 KBS가 있는 여의도까지 오긴 했어도 러시아워의 교통체증에 막혀 차량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뮤직뱅크 스태프는 자꾸만 독촉전화를 걸어왔다.

"뛰자!"

태연을 비롯한 소녀시대 멤버 모두가 차에서 내려 달렸다. 숨이 찼지만 생방송을 펑크낼 순 없기에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겨우 방송국에 도착해서 메이크업도 안된 어수선한 상태로 뮤직뱅크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객석에서는 희망의 여신이 소녀시대의 노래를 경청하고 있었다.

희망의 여신은 문득 절망의 여신을 떠올렸다. 원래 체질적으로 몸이 약한 희망의 여신은 하루 8시간만 세상에 희망을 전파했고, 절망의 여신은 24시간 쉬지 않고 탐욕스럽게 절망을 전파해왔다. 절망을 융단폭격하는 셈이었다. 처음부터 희망은 절망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진작에 세상은 절망의 차지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에 여전히 희망은 살아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의 여신이 활동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절망의 여신이 펼쳐낸 절망의 늪에 빠졌어도 끝내는 그 늪을 헤치고 나와 스스로 희망을 향해 걸어나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절망이 불치병은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희망의 힘을 홍보하는 전도사들이었다.

태연이가 바로 그 희망의 증거인 것이다.

절망의 여신이 연습생이던 태연을 어느 날 절망의 늪에 빠뜨렸을 때, 희망의 여신은 그 아이가 꿈을 포기할 것으로 예상했다. 절망으로 인해 파멸하는 일에 남녀노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린 소녀는 절망에 취약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태연은 절망의 여신을 보기 좋게 물 먹이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희망의 여신은 소녀시대 리더가 된 태연이가 얼마 전 방송에 나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꼬꼬마 리더 태연입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원래 높은 데 있는 물건을 잘 못 내려요. 팬분들이 깔창을 많이 선물해 주신답니다. 사실 오늘도 깔창 신고 나왔어요! 하하하!"

뮤직뱅크 출연 가수들의 노래가 다 끝나자 진행자들이 모든 출연자들을 불러보았다. 그러고서 진행자인 타블로가 외쳤다.

"이번 주 뮤직뱅크 영예의 1위는 소녀시대의 Kissing You입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였던 소녀시대 멤버들이 일제히 감격의 눈물을 터뜨렸다.

희망의 여신은 태연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태연이는 키 큰 소녀시대 멤버들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부둥켜 안고 서로 격려하는 멤버들 사이로 언뜻언뜻 태연이의 얼굴이 간신히 비쳤다.

태연이가 활짝 웃으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희망의 여신은 생각했다. '태연이는 작아. 하지만 지금의 저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큰 태연이의 모습일 거야. 축하한다, 태연아.'

1위 트로피와 꽃다발을 손에 든 소녀시대가 앵콜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객석에 있던 팬들이 다들 일어나 환호했다.

희망의 여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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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뱅크 1위할 당시의 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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