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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Past Midnight

(1990년 중편소설 모음집)

Four Past Midnight은 아주 멋진 4편의 중편소설이 모여있는 작품집이다. 스티븐 킹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다 읽고난 뒤에는 분명히 반드시 필연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킹의 팬이 돼버릴 것이다. 스티븐 킹의 또다른 중편모음집 Different Seasons가 다분히 감성적이고 정적이었다면, Four Past Midnight은 그와 반대로 정통호러에 딱 맞아떨어지는 기괴하고 역동적인 공포를 선사하고 있다. 이런 대단한 이야기꾼이 미국에 있다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말 배아프다. 대한민국 소설가들 정말 분발해야 합니다.

이 소설집은 고려원출판사에서 "스티븐 킹, 미스터리 환상특급"이란 2권짜리 책으로 출간되었다. 표지디자인은 정말 맘에 안들지만, 어쨌든 책내용은 정말 끝내준다. 책 속에 담긴 4편의 소설 중 베스트를 하나 꼽으라면 난 도저히 못하겠다. 왜냐면 전부 다 좋으니까.

("스티븐 킹, 미스터리 환상특급"이 절판된 후 2018년에 "자정 4분 뒤"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자, 그럼 이제 Four Past Midnight에 등장하는 4편의 소설을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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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을 훔친 남자 Secret Window, Secret Garden>

유명한 소설가 모튼 레이니. 부인이 바람피워서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본가에서 나와 여름별장에 와있다. 사랑하는 부인의 외도에 마음이 심란해서 글은 잘 안써지고 자꾸만 무기력해지는데, 어느날 누군가 별장 문을 두드린다. 밖을 나가보니 챙넓은 모자를 쓴 큰 덩치의 시골농부가 서있다. 자신을 존 슈터라고 밝힌 이 남자는 밤마다 소설을 쓰는 작가지망생이다. 그는 레이니의 오래전 단편소설 하나가 자신의 소설을 표절했다며 화를 낸다. 레이니는 슈터의 터무니없는 우격다짐에 자신의 단편이 최초로 실렸던 잡지 원본이 본가에 보관돼 있다며 며칠후에 오면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친다. 존 슈터는 거짓말이면 각오하라며 돌아가지만, 그는 레이니의 마음 속에 커다란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레이니는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잡지를 보내달라 부탁하려고 전화를 거는데,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 후 한참만에 부인이 레이니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부인이 울먹이면서 하는 말, "여보, 전 후회하고 있어요. 어쩌다가 우리가 스티븐 킹 소설의 주인공이 됐을까요? 덕분에 우린 파멸로 치닫고 있다구요!" 레이니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묻는다. "아니 왜 그러는 거야? 우리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그렇습니다. 생겼습니다. 이후 레이니에게는 믿겨지지 않는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운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잇달아 터진다. 레이니의 기억 속에는 정말 슈터의 소설을 표절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점점 상황은 자신의 결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쪽으로 변해가는데,,, 그러는 와중에 레이니는 되돌릴 수 없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그러면서 후회한다. "어쩌다가 내가 스티븐 킹의 소설 주인공이 됐을까? 이렇게 미치고 환장할 줄은 정말 몰랐어!"

Secret Window, Secret Garden은 스티븐 킹의 장기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 광인(속된 말로, 미친X)이 되어버렸을까라는 이야기를 심리적으로 집요하게 추적한 소설이다. 킹이 묘사한 레이니의 심리변화는 너무나 정교하고 섬세해서 마치 독자 자신이 레이니의 마음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소설을 다 읽은 뒤에 나는 레이니가 존 슈터의 정체를 충분히 알아차릴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레이니는 급격한 상황변화에 당황해서 점점 미쳐가고 있는 중이었으니 미처 그런데까진 생각못했던 것 같다. 하긴 나도 제정신이 아닐땐 정말 바보같은 짓을 하곤 하니까. (언젠가 글쎄 아무생각없이 보행자신호등이 빨간불인데 횡단보도를 건넜다. 파란불인 줄 알고서. 차들이 막 빵빵거리면서 쌩쌩 지나가는데도 난 도리어 그 차들을 욕했다. 뭐야 파란불인데 왜 차들이 안서는거야!)

이 소설은 조니 뎁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 졌다. <시크릿 윈도우(Seret Window)>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DVD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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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멈춰버린 시간 The Langoliers>

보스턴으로 비행하던 비행기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다. 잠자고 있던 승객들이 일어나보니 비행기 안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좌석은 텅텅 비었고, 스튜어디스누나도 안보이고, 심지어 조종사도 없이 비행기는 날아가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이 심상치 않은 사태에 관해 온갖 추측을 해댄다. 그때 미스테리 소설가인 승객이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 정답을 말한다.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틀림없이 우리가 그만 스티븐 킹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스티븐 킹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하니까요. 그 인간이 재밌는 소설을 쓰기 위해 일부러 우리를 이런 위기상황에 빠뜨린 것입니다."

다행히도 승객 중에는 비행기조종사가 끼어 있어서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연료 등등의 문제로 차마 원래의 보스턴으로 가지 못하고, 스티븐 킹이 살고 있는 동네인 메인주 뱅고어공항에 불시착할 수 밖에 없었다. (미스테리 소설가의 외침. "거봐 이게 다 스티븐 킹의 각본대로라니까!) 공항에 착륙해서 또 놀랄 일이 있었다. 공항도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던 것이다. 외부와 전혀 연락이 안되는 상황 속에서 승객들은 멀리서 뭔가가 갉아먹는 듯한 작은 소리들을 듣게 된다.

그런데 승객 중에 크레이그 투미라는 사내가 있는데, 그는 반드시 보스턴으로 가야만 했다. 평생 참을 수 없는 압력에 시달려 왔던 그는 반드시 보스턴으로 가서 압력을 터뜨려야만 했다. 그런데 승객들이 멋대로 킹의 각본대로 뱅고어에 착륙시키자 화가 난 그는 사이코로 돌변해 버린다. 그는 갉아먹는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빠가 들려주던 얘기 속의 주인공. 얘야 게으른 사람들을 혼내주러 랭골리어들이 쫓아온단다. 크레이그는 랭골리어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승객들을 위협해 비행기를 이륙시키려 한다. 하지만...

정말 멋진 소설이다. 낯선 상황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박력있게 전개된다. 특히나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많은 데도 불구하고,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소설을 전개하는 작가의 노련한 솜씨가 돋보였다. 그리고 비행기와 공항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글 속에 녹아있어서 비현실적인 소설을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난 읽는동안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말았다. 이런 굉장한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노벨문학상감이다!

The Langoliers는 TV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다. AFKN에서도 방였했었고, KBS1에서도 했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방송에서 미처 못본 사람들을 위해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출시제목은 "스티븐 킹의 랭골리얼". (좀 유머러스한 제목이죠?) 데이빗 모스가 비행기 조종사로 출연해서 중후한 연기를 펼친다.(그는 "그린마일"에서 간수역으로 출연했고, 현재 또다른 스티븐킹 원작영화 "Hearts in Atlantis"에도 출연중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영화 속에서 돋보이는  사람은 크레이그 투미역을 연기한 배우같다. 특유의 종이찢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표정연기는 "뽕을 맞지 않고서야 맨정신으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하고 오묘하다.

일부 의견들을 들어보면 영화후반부의 랭골리어들 모습이 패크맨같이 생긴 것이 너무 조잡해서 영화를 삼류로 전락시켰다는 얘기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난 그런 모습이 좋았다. 마치 천안 호도과자에 이빨을 달아놓은 것 같은 모습이 한국적으로 보여서 더욱 정감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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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라진 도서관 The Library Policeman>

샘 피블스는 급한 사정이 생겨서 도서관에서 책 두권을 빌리게 된다. 도서관장인 아델리아라는 여자는 기분나쁜 태도로 만약 반납일을 어기면 도서관경찰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일이 꼬이기 시작해서 샘은 책을 잃어버리게 되고 반납일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자 농담인 줄로만 알았던 무서운 도서관 경찰이 샘의 집에 들이닥친다. 도서관 경찰은 오늘밤 12시까지 반납하지 않으면 벌을 내리겠다고 협박한다. 이제 샘은 정신없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책을 반납할 방법을 짜내기 시작한다. 그러는 중에 도서관장 아델리아라는 인물은 정상대로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 무서워진 샘은 미친듯이 반납을 위해 광분하기 시작한다.

The Library Policeman은 줄곧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소설이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태연히 일어나는 현실에 주인공도 당황하게 되고, 읽고 있는 독자도 당황하게 된다(전문용어로 더블당황).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인터넷에 올라온 감상문 중엔 아델리아라는 여자가 남의 악몽을 현실로 구체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킹의 소설 "It"에 나오는 삐에로 페니와이즈와 부부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The Library Policeman에서는 킹 소설 특유의 마음 속에 상처를 안고 사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오싹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킹의 상처가 얼핏 들여다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순전히 내 개인의 느낌. 킹이 아기였을때 아버지는 가출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데이브라는 간판업자가 아델리아의 요청에 의해 도서관포스터를 그리게 된다. 포스터의 그림은 증기롤러차에 깔려 죽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데이브가 그때를 회상한다.

"난 주정뱅이가 가장 잘하는 짓을 했지. 그 술을 쭉 들이켠 뒤 시키는 대로 하는 거. 난 일종의... 열병 같은 것에 사로잡혔어. 난 싸구려 물감으로 두시간 가까이 그림을 그렸어. 그 여자의 책상 여기저기에 물과 물감을 흘리면서. 그런 것에는 털끝만치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 그렇게 해서 그려낸 그 그림은 나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였어... 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 그건 신발을 신은 채 랠폴 가에서 쭉 뻗은, 그리고 머리가 햇빛에 녹은 버터조각처럼 납작하게 눌려진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어. 증기 롤러차를 몰고 있는 사내는 실루엣만 보이도록 처리했는데 그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어. 이빨을 드러낸채 히쭉 웃으며. 그 녀석의 모습은 그 뒤로도 내가 그 여자를 위해 그려준 포스터들에 번번이 나타나곤 했지. 그놈은 샘 당신이 말한 그 포스터, 그러니까 낯선 사람의 차는 타지 말라는 그 포스터에도 나와요. 운전을 하는 녀석.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일년쯤 되었을 때 우리 어머니 곁을 떠났어. 땡전 한푼 안 남겨 준 채. 지금에서야 생각이 나는데 내가 그 포스터들 속에서 그리려 했던 사람은 바로 우리 아버지였어. 난 그를 음흉한 사내라고 부르곤 했지. 난 아델리아가 알 수 없는 어떤 방법을 통해 나를 자극해서 그 사람의 이미지를 환기시키게 하지 않았나 싶어. 내가 두번째로 그린 포스터를 가져 갔을 때 그 여자는 여간 좋아하지 않았어. 그 여자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하더군..."

그러고보니 간판업자의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스티븐 킹의 형 이름이 데이브니까. 음... 꼬투리를 잡으려니까 끝이 없구나. 이제 그만. 아무튼 도서관경찰이란 아이디어를 한국의 수많은 비디오가게에서도 이용하면 어떨까? 연체손님때문에 동네 비디오가게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데. "손님 대여기일을 어기시면 비디오경찰을 보낼겁니다 그러니 제때제때 반납하세요 빌려가놓고 이사를 가버린다던가 따위의 허튼 수작을 부리시면 비디오경찰이 찾아가서 벌금을 받아낼 겁니다 비디오경찰이 받는 벌금은 돈이 아니에요 당신의 가장 무서웠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한번 끄집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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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환상카메라660 The Sun Dog>

케빈은 15살 생일선물로 폴라로이드카메라를 선물받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찍을때마다 계속 이상한 사진만 토해낸다. 벌판에 개 한마리가 서있는 사진. 고장이라고 생각한 캐빈은 팝 메릴이라는 음흉한 노인이 운영하는 수리점에 카메라를 가져간다. 그리고 팝은 계속 똑같은 사진들 속에서 무서운 진실을 밝혀낸다. 사진 속의 개가 카메라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계속 사진을 찍는다면 결국엔? 팝은 마음 속으로 캐빈 몰래 음흉한 속임수를 계획한다.

예전에는 The Sun Dog에 대해 참 단순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뭐야 계속 사진찍는 얘기뿐이잖아!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번 읽어봤더니 너무 놀라운 소설이었다. 계속 사진찍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이 굉장히 디테일하면서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너무 디테일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각 인물들의 심리가 빚어내는 사건의 전개가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싹한 전율을 느끼게 해주었다. 후반부에 팝이 벌이는 무의식적인 행동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것이었다. 무서워서 멀리 하려는 카메라를 뻐꾸기시계라고 생각하고 막 만지작거린다. 그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카메라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넋이 나간다는 사실은 정말 두려운 것이겠지.(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TV에서 처음으로 고소영을 보았을 때, 핑클 봤을때, 김희선 봤을때, 소유진 봤을때, 박지윤 봤을때... 이런! 따져보니까 그런 경험이 너무 많으네.)

The Sun Dog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은 마지막 결말부분이다. 팝의 수선가게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한 부분인데, 새삼 스티븐 킹의 묘사력에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같으면 그런 장면을 써봐야 한 여섯줄이나 일곱줄 정도면 더이상 쓸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스티븐 킹은 몇페이지에 걸쳐서 처절하게 글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말 일급 소설가는 아무나되는 것이 아닌것 같다. 그 결말부분은 정말 강추천이다. 글로써 생생한 이미지를 표현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The Sun Dog을 읽으면서 사진 속에 나오는 개가 언급될 때마다 난 킹의 소설 "Cujo"가 생각났다. 광견병에 걸려서 몸부림치다 파멸을 맞이한 불쌍한 개, 쿠조. 아니나다를까 The Sun Dog에서도 쿠조가 여러차례 언급된다. 그렇구나! The Sun Dog의 개는  쿠조가 죽어서 다시 살아난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사진 속의 벌판은 저승세계? 사차원의 세계? 안드로메다성운 시리우스별 옆의 제3위성 따르빠따카쁘루띠야? 어찌됐든 난 쿠조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뻤다. 그래서 난 주인공 캐빈보다 돌아온 쿠조를 더 응원하고 있었다. 물론 결말이야 누구나 짐작이 가겠지만.

The Sun Dog은 결말에서 아직 캐빈이 사진 속의 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쿠조가 "I'll be back!"을 노리고 있다는 뜻인데, 나는 스티븐 킹이 반드시 The Sun Dog의 뒷이야기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쿠조를 다시 만나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킹은 너무 오래전 소설이라서 자기가 이 소설의 끝부분에 속편을 암시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편지라도 써서 부탁해 볼까?

늑대인간 / Cycle of the Werewolf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4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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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cle of the Werewolf

(1983년 소설)

'남자는 늑대, 여자는 여우'라는 말이 있다. 거친 늑대와 꾀많은 여우를 남녀에 비유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난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동물적 특성을 확대해석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여우같은 여자를 구미호로 만들어 버리고, 서양에서는 늑대같은 남자를 늑대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늑대인간! 보름달만 되면 홀연히 나타나 낮게 깔리는 으르렁거림과 함께 억센 발톱과 강한 이빨로 애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저세상으로 보내버리는 막가파 괴물. 은으로 만든 총알로만 처치할 수가 있다는 예민한 체질의 소유자. 늑대도 아닌 것이 인간도 아닌 것이 늑대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온세상을 터프하게 피바다로 만들고 다닌다. 드라큘라가 괴물계의 신사같은 존재라면, 늑대인간은 괴물계의 터프가이라 할만하다.

Cycle of the Werewolf는 스티븐 킹이 늑대인간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우선 이 소설은 매우 짧은 소설이다. 미국판 버전 중에는 128페이지짜리도 있다고 하는데, 한국판도 단지 179페이지 정도이다. 본문 중의 글씨도 큼직큼직하고 중간중간 삽화가 들어 있는데도 길이는 매우 짧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그만큼 소설이 압축되어 있어서 속도감있게 전개된다. 인물 심리묘사, 배경묘사, 등장인물들의 대화같은 요소들이 꼭 필요한 정도만 남기고 생략되어 있어서 장면전환이 신속하고, 소설 속 사건들이 "내가 먼저 전개할꺼야 내가 먼저 전개할꺼야"하고 서로 다투는 듯이 사건들의 전개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도 책을 잡고서 여유있게 단 2시간만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난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짧다고 뭔가가 빠진 듯한 허전한 기분은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다.

이 소설은 1년 열두달을 소제목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의 목차가 1월로 시작해서 12월로 끝나고 있다. 소설 속 배경은 타커즈 밀스라는 작은 마을. 1월의 눈보라치는 어느날 으슥한 농장 창고에서 한 남자가 늑대인간의 습격을 받아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시작으로 12월까지 늑대인간의 희노애락을 그려내고 있다. Cycle of the Werewolf의 주인공은 늑대인간과 더불어 그에 맞서는 마티 코즐로프라는 인물이다. 1월부터 6월까지는 늑대인간에게 희생되어가는 인간 및 동물들(돼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가, 7월이 되어서야 마티 코즐로프가 등장한다. 그는 10살짜리 소년으로서 하반신마비 장애인이어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1월부터 시작된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에 불안을 느낀 마을이 7월 독립기념일 밤의 불꽃놀이를 취소한데 낙담한 마티는 밤에 혼자나가서 불꽃놀이를 하다가 늑대인간과 마주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둘 사이에 진한 우정이 꽃피고...는 절대! 아니고, 늑대인간은 휠체어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있던 마티를 덮쳐 버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마티는 그후 할로윈데이(10월 31일)에 우연히 늑대인간의 정체를 알게되고, 놈에게 대담한 방법으로 시비를 걸어 버린다. 과연 이 겁없는 10살짜리 소년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애건 어른이건 닥치는대로 저세상으로 보내 버리는 늑대인간을 어떻게 저세상으로 보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정답은 이 소설의 12월에 밝혀진다.(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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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cle of the Werewolf는 짧지만 만만치 않은 재미를 선사하는 멋진 소설이다. 특히 마티가 7월의 사고를 단서로 늑대인간의 정체를 알게 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단순하지만 짜릿한 장면이다.) 시간적으로 열두달에 걸친 이야기인 만큼 각 달마다 타커즈 밀스 마을의 풍경묘사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짧지만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이 소설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각 달마다 나오는 일러스트이다.

Berni Wrightson이라는 사람의 일러스트인데, 흑백으로 그린 마을의 모습들과 컬러로 그린 소설 속 사건모습들이 읽는이의 기분을 한껏 고조시켜준다. 전형적인 미국풍의 그림들인데,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광기에 찬 늑대인간의 분위기를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9월에 나오는 그림이다. 늑대인간이 돼지우리를 습격하고 난 뒤의 아수라장을 간단하지만 효율적으로 엽기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상상이 가시죠? 늑대가 물어뜯고 난 돼지시체들이 널부러진...  (Berni Wrightson은 Creepshow와 The Stand 같은 킹의 작품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Cycle of the Werewolf는 각색작업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제목은 Silver Bullet이었다. 이 영화의 개봉과 함께 미국에서는 Silver Bullet 시나리오가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었다. Silver Bullet은 국내에 "악마의 분신"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와 DVD로 출시가 되어 있다.

난 Silver Bullet을 TV에서 봤다. 아주 오래전 아마 내가 초등학생인가 중학생때 KBS2에서 대낮에 방송됐었다. 사실 마티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장면과 그 밖의 몇장면만 부분적으로 기억나고, 그 영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만 하더라도 스티븐 킹이란 작가를 몰랐기 때문에 그 영화가 가지는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한채 TV에 집중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다말다 계속 딴짓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그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부에 한 섹시한 누나가 잠옷을 입고 잠자는 부분이다. 그러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늑대인간의 밥이 되고 만다. 놀라서 휘둥그레진 누님의 두눈, 난폭하게 덮치는 검은 늑대인간, 무참히 찢겨나가는 누님의 잠옷, 비명을 지르는 누님의 빨간 입술, 곧이어 클로즈업되는 기분나쁜 늑대인간의 눈동자. 그당시 내 나이에는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사실 내가 집중해서 본 것은 늑대인간이 아니라 누님이었다. 누니이이이이이임~!) 

영화에 대해 얘기하다 소설얘기를 하나 빼먹은 것 같다. Cycle of the Werewolf는 한국판이 출간되었다. 도서출판 혜민에서 "늑대인간"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제목으로 펴냈다. (작가이름이 "스테판 킹"으로 되어 있다.)

데스퍼레이션 / Desperation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34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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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peration

(1996년 소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수많은 스티븐 킹 팬사이트가 있다. 대부분 킹의 작품에 대한 자신들의 감상을 적어놓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스티븐 킹의 96년 소설 Desperation에 대해 과거 작품의 소재들이 한데 모인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Desperation에서는 초능력을 지닌 소년(The Shining과 Firestarter), 문학적 재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소설가(Misery와 The Dark Half), 사이코 경찰(The Dead Zone과 Rose Madder), 갑자기 난장판이 되버린 작은 마을('Salem's Lot과 It)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짬뽕같은 구조 속에서 나온 Desperation은 역시 과거 작품과 같은 분위기를 지닌 작품일까? 아닙니다. Desperation은 물론이고 요즘 발표되는 킹의 작품들은 과거 작품들이 지닌 단순명쾌함 대신 뭔가 심오한 주제와 상징을 담고 있다. 대중문학에 자리잡고 있다가 점점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중간쯤 정도 되는 자리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물론 문학을 대중문학이다 순수문학이다하고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짓이다) 아마도 그건 스티븐 킹이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감수성의 변화때문이 아닐까?

어떤 이는 이런 작품성향의 변화를 별로 안좋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난 옛날작품이나 현재작품 모두 그 나름대로 좋다. 변화하는 작품세계 속에서도 변치않는 것이 있으니까. 스티븐 킹의 기괴한 상상력과 지칠줄 모르는 창작열 말이다.(내 생각엔 엄청부자가 되어서도 계속 작품을 쏟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나같으면 맨날 놀러 다니겠다. PC방, 롯데월드, 만화가게, 백화점, 황토방사우나, 단란주점, 퇴폐이발소 등등)

네바다주에 데스퍼레이션이란 광산촌 마을이 있다. 광산에서 땅을 파내려 가다 오래전에 막혀 있던 우물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설레이며 외출을 기다리던 악마 탁Tak이 눈을 뜨게 된다. 그 결과 마을의 경찰 한명이 사이코로 돌변하여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지나가던 외부사람들을 하나둘씩 납치해서 경찰서에 가둬놓는다. 납치된 사람들은 탈출하려 몸부림치는데, 데스퍼레이션이란 마을은 온통 코요테(신지의 댄스그룹 코요테가 아니다), 거미, 전갈, 뱀, 대머리독수리 같은 것들이 포위하고 있다. 게다가 사이코경찰까지.

하지만 다행히도 탈출하는 사람들 속에 데이빗 카버라는 소년이 있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데이빗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자면 통화불능 지역에서도 핸드폰통화를 가능하게 한다. 놀랍지 않은가? 인간 기지국이라니!) 데이빗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탈출을 서두르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코요테(댄스그룹 아님), 거미, 전갈, 뱀, 대머리독수리, 사이코경찰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결국엔....

데이빗을 통해 스티븐 킹은 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 것 같다. 소설 Desperation 제4부 소제목은 "하나님은 잔인하다 God is cruel"이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행복만을 안겨다주는 존재일까? 소설 속의 악마 Tak이 생물체 특히 인간의 몸을 빌려서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듯이, 하나님도 인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욕망(맘에 안드는 악을 처단하는 것)을 채운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때론 하나님은 선택된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는 잔인한 존재라는 것이다.

흠... 하나님께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스티븐 킹이 제대로 된 사실을 적은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소설끝부분에는 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의 생명마저도 위협받았던 한 등장인물에게 하나님이 조퇴서를 내준다. "조퇴를 허가함"이라니. 어째서 수업이 다 끝나갈때 쯤 -절대자의 각본에 따라 한 인간의 인생이 비참함의 극을 달릴때 쯤- 에야 조퇴서를 내주는 것일까? 하나님(정확하게는 스티븐 킹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나처럼 썰렁하고 잔인한 블랙유머의 소유자인 것 같다. (어쨌거나 공포장르에 등장하는 악마들은 동물 대신 인간의 몸을 선호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많으니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다거나, 수업시간에 몰래 잠을 잔다거나, 발렌타인데이에 배추 다섯포기를 선물한다거나, 이웃집 불난데 구경가서 god노래를 부른다거나. 이런 것들을 개, 고양이, 얼룩말, 말미잘같은 동물들의 몸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악마라도 인간을 선호하겠다. 아~ 난 왜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걸까. 내가 미워어어어~)

Desperation의 등장인물들 중 인상깊었던 사람은 조니 마린빌이라는 작가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들 속에서 작가라는 직업이 꽤 많이 등장하지만 조니 마린빌처럼 인상적인 인물은 처음이었다. 난 Desperation을 꽤 오래전에 읽었는데도, 아직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까. 소설 속에서 그는 아주 무기력한 속물작가로 묘사되는데, 나중에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인상깊었던 것은 조니의 마지막 대사이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소서. 전 비평가들이 정말 싫어요!" 이제까지 소설 전개와 상관없이 뜬금없는 그런 대사가 튀어 나와서 난 어리둥절했었다. 아마도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스티븐 킹은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고 싶었나보다. 얼마나 비평가들에게 시달렸으면.(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작가라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지 최고의 공포소설가는 아닐 것이다. 비평가들의 기준은 문학적이고 예의바른 고상함이니까.) 하지만 스티븐 킹 힘을 내시길. 나같이 멀고먼 코리아라는 나라의 불량청년까지도 당신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으니.

Desperation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등장하는데, 난 아직까지 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인물 중 하나는 지금 데스퍼레이션마을에서 탈출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팔팔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왜 죽은 사람들의 나라에 있는거지? 희망이 없는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상징적인 표현인가? 내가 좀 단순한 성격인 관계로 쫌만 복잡해도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이라 이 소설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도대체 왜 살아있는데도 그런 재미없는 나라에 미리 가서 살아야하는걸까? 으~~ 머리아프다. 빨리 넘어가자. 휘리릭~~~!

이제까지 잡담이 좀 길었지만, 어쨌든 Desperation은 재미있으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결말을 읽게 되면 누구나 깊은 여운에 푹 잠길 것이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믿음과 신뢰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무너져내리는가를 킹 특유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거친 상상력으로 풀어낸 멋진 작품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멀리 여행갔다가 작은 마을에서 사이코경찰에게 잡혀 고립될 수도 있으니(악을 무찌르라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그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인간의 삶이란 언제든 우스꽝스런 상황에 빠질수도 있으니까.

Desperation은 황금가지에서 "데스퍼레이션"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이 출간되어 있다.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Desperation과 쌍벽을 이루는 The Regulators라는 작품도 권하고 싶다. The Regulators에는 Desperation에 나왔던 인물들이 역할을 바꾸어서 다시 등장한다. 줄거리는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줄거리이다. 그래서 Desperation을 읽어봤다면 무척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랑스런 악마 Tak도 다시 등장한다.

유혹하는 글쓰기 / On Writing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3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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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Writing

(2000년 글쓰기 지침서)

2000년 10월 17일 교보문고에 갔다가 하드커버로 나온 On Writing을 보고야 말았다. 신문기사를 보고 On Writing이 출간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한국서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고 싶었지만 하드커버책이라서 가격이 비쌀 것이 비오는 날의 우산처럼 확실했다.(뭔 소리여?) 3분을 교보문고에서 방황하며 고뇌하다 결국 주머니를 톡톡 털어 구입하는 대담한 행동을 벌이고야 말았다. 덕분에 그후로 3주동안은 경제적인 궁핍함을 이유로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실화다!) 그래서 집에 있는 동안 On Writing을 읽기 시작했다.

On Writing은 스티븐 킹이 글쓰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자신의 집필비법을 공개한 글쓰기 지침서이다. 그러나 일반작문법 강의서같이 딱딱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이 아니다. 스티븐 킹이 누군가. 내노라하는 인기작가 아닌가. 글쓰기에 그다지 관심없는 사람이더라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알차게 꾸며졌다. 그리고 스티븐 킹의 팬이라면 더욱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앞부분에 킹은 글쓰기 지침서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물어보면서도, 자신과 같은 대중작가들에게는 그런 질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킹의 생각으로는 대중들에게 엄청나게 팔리는 통속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자기 나름대로 글쓰는 방법이 있으며, 그것을 알려주는 일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인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하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밝히려 한다는 것이다.

On Writing의 전반부는 글쓰기와 직접적인 관련없이 스티븐 킹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에피소드별로 소개하고 있다. 한편의 자서전같은 것이다. 킹 본인의 표현으로는 취업할 때 제출하는 자기소개서같은 내용이니 부담없이 읽어달라고 말하고 있다.(그래서 나도 팍팍 읽었다.)

정말 킹의 인생이 속도감있게 죽 나열된다. 혼자된 어머니 밑에서 여기저기 이사다닌 일, 괴짜였던 형때문에 소동에 휘말렸던 일, 몸이 아파 초등학교 1학년을 휴학하고 집에 있을 때 엄마의 권유로 난생처음 소설을 썼던 일(엄마한테 돈을 받고 팔았다!), 극장에서 본 공포영화를 소설로 써서 학교친구들한테 팔다 걸려서 교장선생님한테 불려갔던 일("스티븐, 왜 너같이 재능있는 아이가 이런 쓰레기같은 것을 쓰는 거니?"), 잡지사에 원고를 보냈다 받은 거절통지서가 날이 갈수록 수북히 쌓이던 일, 고등학교때 수학여행가서 난생처음 술을 먹고 맛이 가서 여학생들 자는 방에 들어가 술주정한 일, 대학 때 만난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종아리를 용기내서 슬쩍 만졌는데 화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가 미소를 지어주던 일(결국 그 여학생이 킹의 아내가 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생기고 돈이 없어 전화도 없이 트레일러하우스에서 살며 불안하게 작가의 꿈을 키우던 일, 첫 장편소설 "캐리Carrie"를 출판사에 넘기던 날 부부가 침대에 누워 과연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던 일, 형과 함께 침대옆에 앉아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좋아하시던 담배를 어머니 입에 물려드리던 일, 인기작가로 성공은 했지만 알콜중독과 마약중독에 빠져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 등등이 소개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엿본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하물며 그 누군가가 스티븐 킹이라면! On Writing의 전반부는 이렇게 킹의 인생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아무렇게나 나열한 것이 아니라 킹의 인생을 통해 과연 한사람의 프로소설가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를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여겨진다.

On Writing의 후반부는 책 본연의 목적에 맞게 본격적으로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티븐 킹같이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 설명을 위해 스티븐 킹은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수동태보다는 능동태표현을 써라, 부사를 남발하지 마라같은 기초문법에서 시작해 많이 읽고 많이 써보라, 글을 중단없이 꾸준히 써라,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 특징만을 효과적으로 잡아내는 묘사능력을 길러라, 평소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주의깊게 보라 등등의 조언이 이어진다. 그리고 주위에 자신이 쓴 글을 냉철하게 읽고 장단점을 정확히 판단해 줄 "이상적인 독자"(Ideal Reader)를 두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솜씨좋은 작가라도 자기만족에 빠져서 3류작품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그 예로서 자신이 직접 쓰고 영화감독까지 한 누구나 고개를 끄떡인다는 졸작 Maximum Overdrive가 언급된다. 아~ 나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킹은 글쓰는 작업이 매우 외로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누군가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마음의 안정도 되고 큰 힘이 된다고 한다. 자신의 경우에는 아내 태비사가 그런 역할에다 "이상적인 독자" 역할까지 해주어서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며, 아내를 마구 칭찬한다.(그렇다! 스티븐 킹은 공처가인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작품들은 대개 처음부터 완전한 줄거리를 생각해 놓고서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보통은 작품소재 속에 캐릭터들을 풀어 놓고서 그들이 자신들의 성격과 의지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 지 관찰하고 그 결과를 써나간다는 것이다. 킹 본인은 물론 독자들도 캐릭터들의 의외의 행동에 놀라면서 점점 흥미를 갖게 되고,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미리 짜여진 줄거리에 맞추다 보면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을 제한하게 되어 어색한 작품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줄거리 중심의 작품으로서 Insomnia나 Rose Madder 등은 부자연스런 작품이 되버렸다고 하면서, 줄거리 중심 작품이면서도 본인이 흡족해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The Dead Zone을 꼽았다.

On Writing 후반부에 글쓰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과 빗대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작가지망생들에게 나도 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어!라는 격려를 퍼붓고 있다. "당신은 할 수 있고, 꼭 그래야만 합니다. 당신이 용기를 가지고 일단 시작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On Writing 끝부분에 가서는 99년에 킹이 겪은 교통사고에 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과정, 사고를 계기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것 같은 좌절감에 시달린 일, 그 좌절감을 극복한 일 등을 열거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지망생들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주려 했던 것 같다. 킹은 좌절감에 시달릴 때 아내가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하며 마구마구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그렇다! 스티븐 킹은 공처가인 것이다.)

책 맨끝에는 On Writing을 집필하는 동안 흥미있게 읽었던 책들의 목록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킹의 독서취향을 엿볼 수 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같은 고전에서부터,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속편 "한니발"이나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시리즈같은 최근작품들까지 다양하다. 눈에 띄는 건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아내 태비사의 작품이 두편이나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스티븐 킹은 공처가인 것이다.)

On Writing은 부담없이 글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멋진 책이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스티븐 킹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소한 일상까지도 엿볼 수 있는 재밌는 책이다.(집필작업은 주로 아침시간에만 한다던가, "2번째 원고 = 1번째 원고 - 10%"라는 공식을 지키고 있다던가, 주로 소설을 중심으로 일년에 70~8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던가 하는 것들)

우리나라에도 "On Writing"이 번역출간되었다. 김영사에서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읽어보고 스티븐 킹의 내면을 살짝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시길 추천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에는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스티븐 킹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었던 일화가 On Writing에 소개되어 있다. 그 부분을 아래에 소개한다.(나한테도 그런 기회가 빨리 왔으면...)

*          *          *          *          *          *

더블데이출판사 빌 톰슨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아파트에 혼자 있었다. 아내 태비는 애들을 데리고 처갓집에 가있었고, 나는 "뱀파이어가 우리 마을에"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앉아 있어요?" 빌이 물었다.

"아니오." 짧게 대답했다. 우리집 전화기는 부엌 벽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부엌과 거실 사이 문간에 서있었다. "그래야 되요?"

"꼭 그런건 아니구." 빌이 말했다. "캐리Carrie의 페이퍼백 출판권이 시그넷출판사로 40만달러에 넘어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엄마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애 입 좀 닥치게 할 수 없어? 스티븐이 입만 열었다하면 시끄러워 죽겠어." 어린 시절엔 정말 그랬지만, 빌이 전화를 건 그 날 1973년 5월의 어머니날에 나는 완전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받느라 문간에 서있는 것은 늘 그래왔던 것이었지만, 그때 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웃으면서 빌이 전화받다 어디갔냐고 물었다. 물론 그는 내가 전화를 꼭 붙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잘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이제는 정신차리고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 지금 당신이 말한 게 4만달러였죠?"

"40만달러에요." 빌이 대답했다. "통행규칙에 따라서 -내가 빌과 맺었던 계약을 의미한다- 당신 몫은 20만달러입니다. 축하해요, 스티브."

나는 계속 문간에 서있었다. 내 앞으로 나있는 거실을 통해 침실을 보았다. 내아들 죠가 잠잘 때 눕는 작은 침대가 보였다. 샌포드거리에 위치한 우리 아파트는 90달러짜리 월세였는데, 내가 딱 한번 얼굴을 마주했던 이 남자가 전화를 걸어서는 내가 행운의 복권에 콕 당첨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리에 힘이 없어졌다. 쓰러져 버리진 않았지만, 문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확실합니까?" 빌에게 물었다.

빌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에게 아주 천천히 아주 똑똑하게 다시 한번 금액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가 말해준 금액에는 '4'라는 숫자 뒤에 '0' 다섯 개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 뒤로 30분 더 대화를 나눴지만, 한마디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빌과 통화를 끝내고 태비를 찾아 장모님 댁에 전화했다. 처제 마르셀라가 아내는 벌써 집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끝내주는 뉴스가 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나는 아파트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몸이 막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난 신발을 신고 거리로 나갔다. 뱅고어 시내 번화가에서 문을 연 가게는 라베르디어 잡화점뿐이었다. 갑자기 태비에게 어머니날 선물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와일드하고 비싼 것으로. 하지만 사람사는 게 어디 맘대로 되던가. 라베르디어에 아주 와일드하고 비싼 물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난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아내 선물로 헤어드라이기를 샀다.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부엌에서 애기보따리를 풀면서 라디오 음악소리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헤어드라이기를 아내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는 헤어드라이기를 난생 처음 구경해보는 사람같이 보였다. "이게 뭐야?" 그녀가 물었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내에게 페이퍼백 출판권 얘기를 했다. 그녀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더 얘기해 주었다. 태비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어깨 너머로 비좁고 어수선한 방 4개짜리 우리 아파트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불면증 / Insomnia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25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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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omnia

(1994년 소설)

스티븐 킹의 "It"에서 살인마 삐에로가 설쳐대던 공포의 도시 데리에 또다시 피의 축제가 시작된다.

늙으면 잠이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70살의 홀아비 랄프는 어느날 갑자기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별짓을 다해봐도 점점 더 잠드는 시간이 줄어들뿐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한 능력이 생겨버린다.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연기같은 오라(aura)를 볼 수 있게 된다. 오라의 모양과 색깔을 통해서 랄프는 남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또한 남의 기를 흡입할 수도 있게 되어 랄프의 외모가 젊음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한편, 데리시는 난장판이다. 낙태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 으르렁대면서 대치중인데다가, 코앞으로 다가온 낙태찬성파를 대표하는 여성운동가의 연설회 때문에 두 파가 여차하면 큰일낼 태세다. 랄프가 친하게 지내는 이웃사람 에드는 성격이 이상해지는가 싶더니 TV에 데리시 낙태반대파의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데리시를 뒤흔들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날 밤, 랄프는 잠이 안와서 뒤척이다가 창문으로 보이는 옆집 현관에서 작은 대머리박사 둘을 보게 된다. 음산하게 생긴 그들은 손에 커다란 가위를 들고 있다. 그들이 옆집으로 들어간다. 허걱, 괴물들이 옆집사람을 죽이려 하는구나. 랄프가 경찰에 신고하지만, 대머리 박사들은 사라지고, 그대신 옆집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제 불면증과 함께 랄프는 난생처음으로 겪어보는 위험하고 슬픈 모험에 빠져들게 된다.

Insomnia의 주인공은 70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얘기니 참 따분하겠다고? 사실 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엔 무척 졸았다. 왜 그렇게 졸리던지. 제목은 불면증인데 자꾸만 잠이 쏟아지니 이거원. 책에 집중하려 해도 꾸벅꾸벅...(스티븐 킹, 미안해요  -_-) 이 소설의 처음부분은 랄프라는 주인공, 주변 인물들, 데리시의 상황 등을 설명하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캐릭터의 성격을 부각시키는데는 효과적이겠지만, 그 결과로 처음부분은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좀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랄프라는 노인을 독자들이 더 잘 알게 되고, 나중 결말부분에 가서는 그를 무척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난 그랬다.)

처음부분을 지나면 소설은 무섭게 상승하기 시작한다. 랄프라는 70살 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격렬한 액션이 펼쳐지는 것이다. 낙태반대파의 살인폭력에 걸려들기도 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테러리스트와 맞서기도 하고, 격렬한 공중전도 치른다. (써놓고보니 무슨 007영화얘기 같다.) 이 모든 흥미진진한 모험을 뒤로한채 맞이하는 쓸쓸한 결말은 독자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실 것이다.(난 그랬다.)

Insomnia에는 작은 대머리박사들 세명이 나온다. 이름은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그 이름들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세여신 이름이다. 클로토는 실을 만들어낸다. 즉,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라케시스는 실의 길이를 결정한다. 즉, 인간의 수명을 결정한다. 아트로포스는 때가 되면 가지고 다니던 가위로 그 실을 잘라내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서 생명을 걷어가고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운명의 세여신을 작은 대머리박사들로 바꾸어 놓았다. 대머리박사들은 신화 속의 세여신처럼 인간의 죽음을 관리하며, 그들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위험에 랄프라는 70살 노인을 끌어들이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목적과 우연, 모순을 다루고 있다. 언젠가 이런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 낙태반대자가 낙태수술 의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뱃속에 들어있는 작은 태아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미 생명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을 살해하다니 아이러니 아니던가. Insomnia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노인들이 많으므로 소설 속에서 죽음을 맞게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린 나이면서도 죽음에 처한 아이도 있다. 저마다 다른 나이, 다른 계기로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사람들과 세명의 작은 대머리박사들과의 관계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이 마치 집구석에 걸린 거미줄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고 가늘어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손길 한번에 확 무너져내리기도 하는 가벼운 존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꽤 복잡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랄프가 겪게 되는 모험의 목적은 결국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 다크타워시리즈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밝혀진다. 위험에 처한 한 영웅을 구해냄으로써 전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고 다크타워의 운명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Insomnia는 다크타워시리즈를 읽어보았던 독자들이라면 더욱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크타워시리즈를 모르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중반쯤에 랄프가 아트로포스의 비밀기지로 쳐들어가는 장면이다. 아트로포스는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면서 기념으로 죽을 사람의 물건을 하나씩 수집하는 버릇이 있다.(변태요정?) 아트로포스의 비밀기지에는 그렇게 해서 모은 죽은이들의 물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불면증으로 인해 초능력을 얻게된 랄프는 수많은 유품들을 지나가면서 물건들의 주인이 아트로포스에 의해 어떻게 죽음을 당했는지를 속속들이 느끼게 된다. 랄프는 아트로포스가 미워진다. 나도 랄프를 따라 아트로포스가 미워졌다. 여러분도 책을 읽으며 나같은 감정을 느껴보시길 권한다.

Insomnia의 한국어판은 고려원에서 3권짜리로 출간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구해다가 읽어보고 중년의 스티븐 킹이 얼마나 원숙하게 소설을 이끌고 가는지를 확인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