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는 곳에 / If It Bleeds

작품 감상문 2020. 8. 31. 01:03 posted by 조재형

If It Bleeds

(2020년 중편집)

 

스티븐 킹은 "사계", "자정 4분 뒤" 같이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된 중편집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장편소설과 단편집을 아주 꾸준히 발표하는 바쁜 와중에...)

2020년 스티븐 킹이 중편집 "If It Bleeds"를 발표하자, 나는 쥐와 고양이를 앞세운 저 귀여운(?) 표지 뒤로 어떤 재미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중편집에 수록된 4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1. "Mr. Harrigan's Phone"

도시의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공을 거둔 해리건이라는 노인이 한적한 지역에 들어와 은퇴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지역의 소년 크레이그와 친한 사이가 된다. 그리하여 크레이그 소년이 노인과 아주 "찐한" 우정을 이어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의 초반에 주인공 소년이 전화기를 통하여 노인과 우정을 쌓아가는 장면이 재밌었다. 노인이 전화기 속에 담긴 현대기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반응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해서 이야기의 전개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설정상 해리건씨가 전화기를 계속 가지고 있어야했는데, 노인의 품을 떠났던 전화기를 다시 노인의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스티븐 킹이 사용하는 방식이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인공 소년을 그렇게 어색하게 활용했어야 했는지, 그렇게 어색한 방식으로 해리건씨한테 전화기를 떠넘긴 스티븐 킹의 의도가 궁금하다.

그리고 전화기로 인하여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주인공 크레이그가 사건들의 진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해리건씨와 전화기에 얽힌 비밀을 직접 대면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터진 후에 제3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사건에 대한 내용을 전해듣는 형식이어서, 주인공은 사건의 진실을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그 일은 A였을 것이다. 아니 B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A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지만..." 이런 식의 느낌이 이야기를 지배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주인공 크레이그가 자기 나름의 해결책을 보여주지만, 진실을 상상한 끝에 나온 자기 위로 같은 것이어서 크레이그에게 평화가 찾아왔을지언정 해리건씨에게도 평화가 찾아왔을 지는 의문이 든다.

 

2. "The Life of Chuck"

이번 중편집에 수록된 이야기 중에서 시작이 가장 강렬하다.

세상의 종말이 펼쳐지니까. 말 그대로 현대문명이 갑자기 연쇄적으로 붕괴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실존하는 야동 사이트도 언급되는데, 내가 그 야동 사이트 사장이라면 야동 사이트 메인페이지에 [스티븐 킹도 인정한 인터넷 "대표" 야동 사이트]라고 축하문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강렬하게 종말을 표현하지만 이 중편소설을 읽고 나면 이야기 제목 그대로 "척"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인생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을 통해서 사람의 인생은 항상 끝이 있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소소한 행복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든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

내가 스티븐 킹이 아니라서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에서 스티븐 킹이 나타내려 했던 인생의 가치에 대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이 효과적으로 잘 표현된 것 같지는 않다.

주인공 척이 행복을 느끼는 그 소재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 인생의 가치를 표현하려했던 것 같은 이 소설 속에서 조차도 주인공이 경험하는 소소한 행복에 비하여 인생의 끝이 주는 허무함이 거대한 존재감을 뽐낸다.

이야기의 순서를 거꾸로 보여준다고해도 그 거대한 허무함이 이야기 전체를 암흑으로 물들여버린다.

 

3. "If It Bleeds"

끔찍한 테러사건이 발생하고 스티븐 킹의 다른 소설 "빌 호지스 3부작"과 "아웃사이더"에도 나왔던 홀리 기브니가 테러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번 중편집에 수록된 이야기 중 기승전결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재미를 제일 뚜렷하게 보여준 이야기다. (중편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홀리 기브니가 범인을 파악해내는 모습, 범인과 직접 담판을 벌이는 모습, 범인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런데 홀리가 범인과의 대결에서 사용한 기술적인 방법이 정말 가능한 방법인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의 안전과 관련된 기술인데 일반인이 그렇게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

홀리 기브니 본인과 주변인들이 흥신소 일을 하기 때문에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들이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인터넷으로 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기술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작가 후기를 보면 기술자한테 자문을 얻어서 집필했다던데.

(미국이라서 가능한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게 가능하다면... 으으...)

그 기술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관련된 것인데도 홀리 기브니가 그 기술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과거부터 허용했었다는 것이 캐릭터 성격에 적합했던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위험성이 있는 기술에 그렇게 사적으로 접근해서 활용하는 것은 "미스터 메르세데스" 소설의 악당한테 더 어울릴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미국 장편 드라마의 크리스마스 특집 에피소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홀리 기브니의 과거와 개인사에 대하여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등장했던 과거의 스티븐 킹 소설들을 읽어보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이 중편소설을 읽으며 답답하고 적응이 잘 안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4. "Rat"

이번 중편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Rat"이다.

드루 라슨은 대학에서 소설 창작에 대하여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직접 장편소설을 집필하여 완성해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몇 번 집필하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심한 좌절감만 느끼고 장편소설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엄청난 장편소설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번에야말로 인생 마지막으로 집필 시도를 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시골 별장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열성적으로 집필을 시작하게 되고... 그러다가 쥐를 만나게 된다.

드루 라슨이 집필에 대한 압박감과 불안감 속에서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면서까지 집필을 강행하는 과정이 재미있게 묘사되고, 집필을 하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서 개고생하는 모습도 쭉쭉 묘사된다.

(수많은 장편소설을 집필해온 스티븐 킹이 장편소설 하나 집필하는데도 벌벌 떠는 드루 라슨의 마음을 절절하게 묘사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소설 하나를 완성하는데 개인의 역량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힘(뮤즈의 힘?)이 더해져야 완전한 100%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미지의 힘과 작가의 애증관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로 이 중편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드루 라슨과 쥐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결말이 원래 예정되었던 내용대로 진행되면서 끝나기 때문에 심심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쥐를 활용한 추가적인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중편집 "If It Bleeds"를 읽고 나면 항상 재미있는 작가 후기도 실려있어 독자를 재미있게 해준다.

그런데 중편집 "If It Bleeds"는 과거의 다른 중편집 "사계", "자정 4분 뒤" 같은 압도적인 재미를 주지는 못했다.

결말이 허전하게 느껴지거나 이야기가 더 진행될 여지가 있는 것 같은데 무심하게 결론을 내버린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 중편집을 읽는 동안 재미있었다. 다음 번 스티븐 킹의 신작소설을 또 두근두근 기대하며 기다리련다.

p.s.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If It Bleeds"를 "피가 흐르는 곳에"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번역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