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63

작품 감상문 2012. 6. 6. 23:31 posted by 조재형

11/22/63

(2011년 장편소설)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11/22/63"은 고등학교 교사 제이크 에핑이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가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막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난 무척 기대감에 벅차 올랐다.

스티븐 킹은 젊은 시절에 이 소설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나 아이디어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포기하고 말았는데, 연륜있는 작가가 된 지금 그 거대한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결과물로 완성시켰기에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에 포기했다 다시 시도해서 나온 또 다른 작품 "언더 더 돔"에 만족한 경험이 있기에 "11/22/63"도 어떤 결과물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게다가 이 작품의 미국 출간 후 해외 언론과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았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을 다룬 작품이라 1950년대, 1960년대를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 킹은 자료조사를 열심히 했고 케네디 암살현장에 직접 답사를 가서 암살범 리 하비 오스월드가 살던 아파트를 살펴보는 등 꼼꼼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작품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도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시간여행과 대통령 암살과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잘 버무렸기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지 직접 책을 읽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교보문고 외서코너에 "11/22/63" 양장본이 있는 것을 보고 냉큼 구입해서 열심히 읽었다.

"11/22/63"의 주인공 제이크 에핑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고교교사이자 외로운 중년남성으로서 일상생활을 덤덤하게 살아가던 중 특별한 계기를 통해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을 하게 되고, 지인의 권유(!)로 1963년에 일어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막기 위한 개인적인 임무에 돌입한다.

이 작품을 홍보하는 주요 포인트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저지를 위한 현대 남성의 고군분투이기에 독자는 제이크 에핑이 시간여행 하자마자 그 유명한 케네디 암살사건의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겠지만 "11/22/63" 소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시간여행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자기 입맛대로 가고 싶은 과거를 골라서 가는 것이 가능하다.

공룡 나오는 원시시대로 가자 뿅~ 2차 세계대전 중  한창 바쁘게 일하는 히틀러 콧수염 구경하러 가자 뿅~ 조선시대로 가서 세종대왕 한글 만드는 거 보고 직찍사진 찍어오자 뿅~

하지만 제이크 에핑이 경험하는 시간여행은 고정된 시간여행이어서 "항상" 1958년이라는 특정한 과거 날짜의 특정한 과거 시간에만 갈 수 있다. 그래서 1963년 케네디 암살사건까지는 시간여행 후 몇 년을 기다려야만 한다.

스티븐 킹은 제이크의 여정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시킨다.

난생 처음으로 1958년 과거로 간 제이크의 설레임과 기쁨을 묘사한다. 굉장히 화사하고 행복감이 넘치는 분위기다. 1958년이면 시간여행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배경과 비슷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제이크가 최초의 과거여행에서 접하는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2011년의 현재에서는 우울하던 제이크가 1958년의 소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분위기에 감동하는 모습. 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시간여행자라는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이런 불안감은 "11/22/63" 소설의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제이크는 케네디 암살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이 과연 노력만큼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확인해보려고 어떤 마을을 방문하여 소박하게 과거를 바꾸어보는 실험을 하게 된다.

케네디 암살사건에 막바로 돌입하길 원했던 독자라면 이런 진행이 짜증날 수도 있겠지만, 스티븐 킹 소설 "그것"을 감명깊게 읽었던 독자라면 제이크의 실험이 반가울 것이다.

제이크가 찾아가는 마을이 소설 "그것"의 배경인 "데리" 마을인 것이다. 스티븐 킹은 "11/22/63"에서도 데리 마을의 음침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스케치한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으슥한 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과 살인이 일어날 것만 같은 "더러운" 느낌을 투척한다. 그 과정에서 "그것"에 나왔던 등장인물이 출연해서 제이크 에핑과 만나게 되는 독자서비스가 이루어진다.

데리 마을에서 제이크는 한 가정에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을 막아서 2011년 현재에서는 그 가정의 행복을 지켜주려고 하는데, 이 부분은 과거를 변경하는 것의 어려움을 독자들한테 처음으로 각인시켜준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과거가 시간여행자한테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과거는 변화를 원치 않는 고집불통쟁이다.

가정사에 개입하려다 제이크는 온갖 이상한 현상과 마주치면서 괴로움을 겪게 되는데, 평범한 가정의 과거를 변경시키는 일조차 이렇게 힘든데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최고권력자의 생사를 변경시키는 일은 과연 얼마나 괴롭고 힘들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미 발생한 과거를 변경시키는데 따른 윤리적인 문제의 발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제이크는 고민하게 되고, 이런 고민은 나중에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막기 위해 암살범 리 하비 오스월드와 접촉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진다.

아무튼 데리 마을에서 펼쳐지는 제이크 에핑의 모험은 아슬아슬하게 독자의 마음을 조여오는데 그는 평범한 일반인이기 때문에 과거에 개입하려다 오히려 죽음의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예상대로 제이크는 그런 위기를 겪게 된다.

위에 언급했듯 과거는 변화를 원치 않고 제이크의 앞길을 요상한 방식으로 자꾸 방해한다.

그리고 데리 마을에서 용무를 마친 제이크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케네디 암살을 막기 위해 이동한다.

암살이 일어났던 달라스로 가는 것은 아니다.
1963년까지는 몇 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우선 조디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아,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소설 "11/22/63"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이고, 이 작품을 읽다보면 마치 비밀첩보원의 업무일지를 읽는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늘 낮에는 마을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친분을 쌓았다. 내 정체를 의심받을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고 나름 재미있었다. 밤에는 목표 대상의 행동을 관찰했는데 이 놈 여친이 상당히 미인인 것이 부러웠다. 나는 왜 솔로인 걸까?"

뭐 대충 이런 느낌이랄까? -_-;;

2011년의 제이크 에핑은 과거의 조디 마을에서 조지 앰버슨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며 지역사회에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언행을 조심하며 지내지만 그는 과거에 잘 적응하여 주위 사람들한테 좋은 평판을 얻게 되고... 운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는 키가 커야 연애에 유리하다는 법칙이 스티븐 킹의 빵빵한 필력을 통하여 소개된다;;;;

제이크 에핑(=조지 앰버슨)이 조디 마을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어떤 독자한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들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충분히 재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이 소설의 후반부에 감동이라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더우기 스티븐 킹은 제이크가 과거로 간 생활에서 행복한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순간마다 앞으로 불행과 고난이 닥칠 것이라는 암시를 꾸준히 떡밥으로 던져준다. 이건 정말 스티븐 킹의 특기다.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 제이크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낀 게, 조디 마을에서 연애도 하고 주민들한테 좋은 평판도 얻었는데 케네디 암살을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미 데리 마을에서 행한 실험에서 과거를 변경시키려면  온갖 기묘한 방해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체험했으면서도 마치 꽉 짜인 시간표대로 착착 생활하는 수험생 마냥 케네디를 지키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조디 마을에서 쌓은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아 맞다. 제이크가 조디 마을에서의 생활에 안주해서 케네디의 안부 따위 내팽개쳐버린다면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거였군. 아무튼 제이크씨는 대단한 사람이다. ^^;;

필연적으로 제이크는 대통령 암살범 리 하비 오스월드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오스월드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 "8마일"에 나온 에미넴이 떠오른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오스월드라는 사람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정치적인 이상은 높아서 현실에서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되는 것은 없고 가족부양하느라 나름 고생하는데도 미국 사회의 하층민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고 억눌린 감정을 어디다 해소할 길 없어 애꿎은 부인을 폭행하기나 하고...

오스월드가 21세기에 살았다면 에미넴처럼 래퍼가 되어 "자본주의 X까~!"를 랩으로 읊조리며 떼돈을 벌어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고 이런 부분들이 제이크의 시선을 통하여 독자들한테 고스란히 전달된다.

하지만 이상을 추구하던 인간이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마냥 불쌍하게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오스월드의 안 좋은 면들이 충실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아 이런 위태로운 사람과 친구하면 정말 큰일이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일단 미녀 부인을 수시로 폭행하잖아? 나 같은 외로운 솔로는 전혀 이해할 수도 없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다. -_-;;)

이렇듯 제이크가 시간여행의 목적을 잊지 않고 암살 저지계획을 진행시킨 덕분에 소설 "11/22/63"의 후반부는 폭풍 같이 격렬한 전개를 보여준다.

드디어 대통령 암살을 막기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만 그 동안 과거에서 생활하면서 맺은 수많은 인연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제이크를 위험에 빠뜨린다.
앞서 언급했듯 과거는 변화를 결코 원치 않기 때문에, 이제는 데리 마을의 소박한 가정이 아닌 최고권력자의 과거를 변경시키는 더욱 큰 일이기 때문에 제이크의 혼을 쏙 빼놓는 여러가지 위험들이 택배 배달오듯 제이크의 앞으로 득달같이 돌진한다.

진짜 이 소설 후반부를 읽으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어가며 읽었다.
위험이 증가하면 할수록 제이크가 과거에서 영위한 일상생활과 연결된 인연까지도 덩달아 위태로워지는 안타까움에 제이크도 나도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케네디 암살을 막기 위한 제이크의 고군분투 후에 찾아오는 결과는 짜릿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케네디 암살 동영상에서 대통령의 머리가 말그대로 박살나는 장면을 목격했던 독자라면 제이크가 맞이하게 되는 결과에 짜릿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암살범 리 하비 오스월드가 암살 성공 후 실제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아는 독자라면 더 큰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1/22/63"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결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액션으로 가득한 소설이 아니고, 신속한 이야기 전개에 목매다는 소설이 아니다.

평범한 주인공 제이크가 낯선 과거에서 적응하면서 느끼는 불안과 행복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소설이고, 이런 인간적인 감정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때로는 케네디 암살을 막는 것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소설이다.

나처럼 이 소설의 결말에서 감동을 느끼는 독자라면, 케네디의 생사여부로 감동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과거의 인물과 주고받은 인간적인 감정이 쌓이며 폭발하는 희열에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요부분이 주인공이 과거에서 겪는 일상생활 묘사에 공을 들이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질 순 있어도 그것을 감수하고 책을 끝까지 읽는 독자라면 결말에서 감동의 도가니에 빠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모든 독자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취향이 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의 결말에서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책에 나오는 결말은 애초에 스티븐 킹이 의도한 결말이 아니었다.

스티븐 킹이 소설 원고를 완성하고 났을 때 작가로 활동 중인 큰아들 조 힐이 그 원고를 읽어보고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빠, 이 소설 정말 멋져요. 다만 결말이 좀... ^^;;;;"

아들의 말에 스티븐 킹은 격노하여 응징을... 가하지는 않았고... 그 대신 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말을 수정해서 책을 출간했다.

스티븐 킹이 원래 집필했던 결말이 스티븐 킹 공식사이트에 공개되어 있다.
http://www.stephenking.com/other/112263/112263.html

원래 의도했던 결말은 좀 매정하고 건조한 분위기가 난다.

"내가 맨날 야근하면서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이제 내가 퇴사하면 우리 회사 망하겠구나"하는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한달 뒤 회사를 찾아가보니 회사는 아무 일 없이 쌩쌩 잘 돌아가고 회사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때의 왠지 모를 섭섭함이 느껴지는 듯한 결말이다.

반면에 아들의 의견을 참고로 수정하여 책에 수록된 결말은 과거의 인연을 현재와 연결시키면서 좀 더 감정적인 부분들이 풍부하게 발휘될 수 있도록 배려하여 긴 분량의 소설을 읽어낸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어떤 이는 무난한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한테 충분히 감정이입했던 독자라면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난 뭉클했다고~! 물론 눈물 없는 제이크 에핑(=조지 앰버슨)과 달리 나는 눈물 많은 남자여서 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ㅜ_ㅜ 뭉클뭉클 열매를 먹은듯~

나는 "11/22/63" 소설을 참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읽어서 해외 언론과 독자들의 호평이 하나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난 또 한 번 내 인생의 진리를 느꼈다.

"역시 스티븐 킹 아저씨가 짱이다."

역시 스티븐 킹 소설 감상문은 스티븐 킹 찬양으로 끝을 맺어야 제격이다. 역시~! 역시~!

p.s. 황금가지출판사에서 "11/22/63"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번역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