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울랜드 도련님과 버드 엘런

읽을꺼리 2007.05.09 01:20 posted by 조재형

로울랜드 도련님과 버드 엘런

(Childe Rowland and Burd Ellen)


  다크 타워의 뿌리을 찾아서!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와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알쏭달쏭한 작자미상의 중세시대 전래동화 <로울랜드 도련님과 버드 엘런>을 소개합니다. 이 전래동화에는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와 흡사하게 다크 타워라든가 마법사 멀린같은 요소들이 등장하고, 킹이 창조한 주인공 총잡이 롤랜드(Roland)와 주인공 이름도 비슷합니다.

   이 전래동화는 상당히 유서깊은 이야기라서 세익스피어가 쓴 희곡 <리어왕>에서도 인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리어왕> 3막 4장에서 에드가라는 인물이 로울랜드와 다크 타워에 관해서 수다를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울랜드 도련님과 그의 두 형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막내 여동생 버드 엘런도

오빠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로울랜드 도련님은 공을 발로 차기도 하고

무릎으로 공을 막기도 하면서 뛰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형들한테 힘껏 찬 공이

교회 지붕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버드 엘런이 교회 건물 주위를 빙 돌아서

공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오빠들이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버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들은 동생을 찾아 동쪽도 살펴보고 서쪽도 살펴보고

위아래 모두 살펴 보았지만,

오빠들의 가슴 속이 괴로움으로 가득찰 뿐이었다.

동생을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했으니.


그래서 마침내 제일 큰 오빠가 마법사 멀린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버드 엘런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아름다운 버드 엘런은," 마법사 멀린이 말했다. "요정들이 납치해서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다. 그 아이가 교회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방향이니까. 그 아이는 지금 요정왕국의 왕이 사는 다크 타워(The Dark Tower)에 갇혀 있다. 기독교 국가에서 가장 용감한 기사만이 그 아이를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렇다면 구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군요." 큰 오빠가 말했다. "제가 구출하겠습니다. 죽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죠."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법사 멀린이 말했다. "하지만 길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을 잘 명심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야."


버드 엘런의 큰 오빠는 닥쳐올 위험이 두려워 동생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법사 멀린을 졸라 여동생을 구하러 갈 때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리고 마법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기며 그는 요정왕국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남아있는 오빠들이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혹시나하는 기대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오빠들의 가슴 속이 괴로움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큰 오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러자 끝없는 기다림에 지치고 지쳐버린 둘째 오빠가 마법사 멀린을 찾아가 큰 오빠가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물어 보았다. 대답을 들은 둘째 오빠는 요정왕국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혹시나하는 기대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막내 오빠의 가슴 속이 괴로움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둘째 오빠마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게 되자, 버드 엘런의 막내 오빠 로울랜드 도련님이 훌륭한 왕비인 어머니를 찾아가 이번에는 자신이 길을 떠날 것이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로울랜드는 마지막 남은 귀한 자식이기 때문에, 만약 그마저 잃게 되면 모든 자식을 잃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간청하고 또 간청했고, 마침내 왕비는 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쓰던 명검을 주었다. 아들의 허리에 검을 매주며, 그녀는 승리의 주문을 불어 넣었다.


자 이제 로울랜드 도련님은 훌륭한 왕비인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하고, 마법사 멀린이 살고 있는 동굴로 찾아갔다. "한 번만 더, 이번 한 번만 더," 그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여동생 버드 엘런과 두 형들을 어떻게하면 구할 수 있을지 말해 주세요."


"오호, 용감한 아이로군." 마법사 멀린이 말했다. "두 가지 사항을 명심하면 된다. 간단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실천하기에는 좀 까다롭지. 해야 될 것 하나와 하지 말아야 될 것 하나다. 해야 될 것이란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요정의 땅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버드 엘런을 무사히 구할 때까지 누구든 너에게 말을 하는 자는 네 아버지의 검으로 목을 베어버려라. 그리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이란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리 배고프고 목이 마르더라도 한 입도 먹지 말고 한 모금도 마시지 마라. 요정왕국에 있는 동안 한 입이라도 먹거나 한 모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너는 두 번 다시 중간계(Middle Earth)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로울랜드 도련님은 두 가지 사항을 계속 되뇌이며 마음 속에 단단히 새긴 후, 마법사 멀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길을 따라 끝없이 강행군을 계속한 끝에 그는 요정왕국의 왕을 위해 말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 목동과 만났다. 말들의 매서운 눈매를 통해 로울랜드는 마침내 요정왕국에 도착하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말해줘." 로울랜드 도련님이 말 치는 목동에게 말했다. "요정왕국의 왕이 있는 다크 타워는 어디지?"


"너에게 말해줄 수 없어." 말 치는 목동이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소 치는 목동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 걔가 말해줄 거야."


그러자 한 마디 말도 없이 로울랜드 도련님이 명검을 뽑아들고 말 치는 목동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길을 더 가다가 소 치는 목동을 만나게 되자,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에게 말해줄 수 없어." 목동이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닭 기르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자라면 분명히 말해줄 거야."


그러자 로울랜드 도련님이 명검을 뽑아들고 소 치는 목동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회색 망토를 뒤집어 쓴 나이 든 여자를 만나게 되자, 요정왕국의 왕이 있는 다크 타워가 어딨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닭 기르는 여자가 말했다. "가다보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녹색으로 덮여있고 첨탑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둥그스름한 언덕을 발견하게 될 거야. 언던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3번 돌면서, 1번씩 돌 때마다 이렇게 외쳐.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나를 들여 보내줘.


그렇게 3번 외치고 나면 문이 열리게 되고, 너는 그 때 들어가면 돼." 이 말을 듣고 로울랜드 도련님이 서둘러 길을 떠나려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로울랜드 도련님은 명검을 뽑아들고 닭 기르는 여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 후로 길을 따라 계속 계속 한없이 가다보니 둥그스름한 녹색 언덕과 만나게 되었고, 그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3번 돌면서, 1번씩 돌 때마다 그는 소리쳤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나를 들여 보내줘.


3번째 외침에 언덕의 문이 열렸다. 그가 들어가자 문이 쿵소리를 내며 닫혔다. 로울랜드 도련님은 어둠 속에 혼자 있게 되었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고, 어슴푸레 빛이 남아 있었다. 주위에는 창문이나 촛불이 있는 게 아니어서, 벽과 천장이 아니라면 어디로부터 빛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좀 더 걸어보니 벽과 천장이 표면이 울퉁불퉁한 바위로 반원형 아치를 이루고 있었는데, 속이 비치는 투명한 바위 위를 빛이 나는 돌들이 뒤덮고 있었다. 주위가 바위로 막혀 있었지만, 요정왕국의 다른 곳들처럼 공기는 아주 따뜻했다. 그래서 그는 이 통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넓고 높다란 문 두 개가 살짝 열려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어보니, 너무나 놀랍고도 멋진 광경이 보였다. 커다랗게 확 트인 홀이 보였는데, 어찌나 커다랗던지 녹색 언덕만큼 길고 넓은 것 같았다. 천장을 멋진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는데, 어찌나 커다랗게 높이 솟아있던지 그에 비하면 대성당에 있는 기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기둥들은 모두 금과 은이었고 겉에는 정교한 격자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기둥 사이사이와 그 부근에는 꽃밭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꽃밭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꽃밭들에는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그 밖에 모든 귀한 보석들이 피어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 둥글게 구부러지 아치들 중앙에 박혀 있는 머릿돌을 다아아몬드, 루비, 진주, 그리고 수없이 많은 귀한 보석들이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아치들이 천장 한가운데서 만나는데, 그 곳에는 매우 투명하고 거대한 진주알을 파서 만든 큰 램프가 금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램프 가운데에 박힌 크고 거대한 홍수정이 끊임없이 빛을 발산했다. 그래서 홀 전체를 환하게 만들어 주었고, 지는 해가 빛을 내는 것처럼 밝았다.


홀 안을 장식하고 있는 가구들도 모두 으리으리한 것이었고, 한쪽 끝에는 벨벳천과 비단과 금으로 된 화려한 소파가 있었다. 그 소파에 버드 엘런이 앉아서 은빗으로 그녀의 금발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로울랜드 도련님을 보고는 얼어나서 말했다.


신께서 오빠를 불쌍히 여기시겠구나, 불쌍하고 불쌍한 바보 같으니.

여긴 뭐하러 왔어?


내 말 잘 들어, 막내 오빠야.

그냥 집에 편히 있지 그랬어?

오빠 목숨이 십만개 붙어있다해도

여기서는 단 하나도 건질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우선 여기 앉아봐. 하지만 불쌍해, 오 불쌍해라.

불쌍한 오빠의 운명.

이제 요정왕국의 왕이 들이닥칠 테니까

오빠의 운도 이젠 끝장이야.


로울랜드는 슬픔에 젖어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검을 뽑아들고 그녀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보니 동생이 그의 앞에서 온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왔던 두 오빠들은 자기가 말을 했을 때 자기 목을 베어버릴 만한 용기를 내지 못해서 일을 그르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로울랜드 도련님과 동생은 소파에 함께 앉았다. 로울랜드 도련님은 동생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했다. 그리고 동생은 로울랜드 도련님에게 이전에 다크 타워에 왔던 두 오빠들이 요정왕국의 왕에 의해 마법에 걸려 죽은 뒤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동생과 서로 이야기를 길게 나누다보니, 로울랜드 도련님은 오랜 여행으로 인해 배가 고프기 시작했고, 마법사 멀린의 경고는 잊어버린 채 동생 버드 엘런에게 배가 너무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했다.


버드 엘런은 로울랜드 도련님을 슬프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마법에 걸려있는 몸이라서 오빠에게 경고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황금접시에 빵과 우유를 한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로울랜드 도련님이 빵과 우유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동생과 눈이 마주쳤고, 자신이 이 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기억해냈다. 그래서 그는 접시를 땅에 내던져 버리고 말했다. "나는 한 입도 먹지 않을 것이며,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버드 엘런이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고,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잡아, 잡아, 잡아 먹자.

기독교를 믿는 사내의 피냄새가 나는구나.

그 녀석의 목숨이 나의 검에 달려있다.

그 녀석 머리통을 쪼개 뇌를 박살내 주마.


그리고 홀 출입문이 활짝 열리고, 요정왕국의 왕이 뛰어들어 왔다.


"그렇다면 한 번 붙어보자, 이 괴물아. 덤벼 봐라." 로울랜드 도련님이 소리높여 외쳤다. 그리고 명검을 들고 요정왕국의 왕에게 돌진했다. 그들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마침내 로울랜드 도련님이 승리하고 요정왕국의 왕이 무릎을 꿇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너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마." 로울랜드 도련님이 말했다. "내 여동생을 마법에서 풀어주고 내 형들을 다시 살려내고 우리가 집에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지 마라. 그러면 네 죄를 용서해 주겠다." "알겠습니다." 요정왕국의 왕이 일어나서 커다란 상자 있는 곳으로 가더니 그 상자에서 피같이 빨간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왕이 죽은 두 형들의 귀, 눈꺼풀, 콧구멍, 입술, 손가락 끝에다 빨간 액체를 바르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두 형들이 즉시 살아나서 벌떡 일어났고, 한 때는 그들의 영혼이 밖으로 나가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왔다고 기쁘게 이야기했다. 요정왕국의 왕이 버드 엘런에게 몇마디 말을 하니 그녀는 마법에서 풀려났다. 그렇게해서 로울랜드 일행 네 명은 홀을 나와 긴 통로를 지나 다크 타워를 빠져나왔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집으로, 훌륭한 왕비이신 그들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버드 엘런은 두 번 다시 교회 건물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 THE END >

바벨의 아이들 [5]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17 posted by 조재형

"제이프 부인? 제이프 부인?"

누군가의 부름에 바네사는 눈을 떴다. 머리도 쑤시고 팔도 쑤신 상태였다. 최근에 아주 안좋은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잠깐동안의 고민 끝에 기억이 돌아왔다.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문짝이 떨어져 나간 공간을 통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었다. 차는 가라앉았고, 그녀 주위엔 온통 광란의 비명소리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차 밖으로 탈출하려 기를 쓰고 있을 때, 그녀 옆으로 플로이드의 몸이 떠다녔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육체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 때의 일을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다.

"죽었습니다."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그 사람들 전부 다 사망했습니다."

"그럴수가."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클라인의 얼굴대신 그의 제복에 묻은 초콜렛 얼룩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들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쓰지 말라구요?"

"제이프 부인, 그보다 더 중요한 비지니스가 있습니다. 빨리 정신차리고 일어나세요."

클라인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다급한 분위기에 이끌려 바네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들이 있는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네, 아침입니다." 클라인이 조바심을 내며 대답했다. "이제 저랑 같이 가실까요? 보여줄 게 있습니다." 그가 문을 열었고, 그들은 침침한 통로로 나갔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로 앞쪽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수많은 사람들 목소리가 언성을 높이고, 저주를 퍼붓고, 격렬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무슨 일 났어요?"

"세상이 망할까봐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진흙 레슬링 선수들을 봤던 방으로 안내했다. 이제는 방 안의 모든 비디오 스크린들이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고, 각각의 화면에는 전부 다른 실내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 지휘소, 대통령 집무실, 각료 회의실, 그리고 국회 의사당들. 각각의 모든 장소에서는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당신은 꼬박 이틀동안 의식이 없었습니다." 클라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눈 앞에 보이는 혼란스런 광경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서가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모든 화면들을 두리번거렸다. 워싱턴에서 함부르크에서 시드니에서 리오 데 자네이로까지. 전세계 모든 나라의 권력자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식을 전해줄 신의 사도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저 사람들은 그저 심부름꾼입니다." 고함소리가 흘러나오는 화면들을 손짓하며, 클라인이 말했다. "서로 도와 어깨를 잡고 2인 3각 경주를 할 줄도 모르죠. 세상이 어찌되든 상관 안합니다. 점점 이성을 잃고 있어요.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근질근질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보고 뭘 어쩌라구요?" 바네사가 물었다. 허무한 바벨탑의 실체를 보고 있는 바네사는 우울해졌다. "나는 국제정치 전략가가 아니에요."

"고옴과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아주 오래 전엔 전략가의 신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그런 신분따위 쓸모없게 됐으니까요."

"시스템이 썩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스템만의 문제라고 할 순 없죠. 제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는 이미 위원회 멤버 중 절반이 죽고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서는-"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어요. H.G.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뭐 그럭저럭." 클라인이 대답했다.

"무슨 뜻이죠? 그럭저럭?"

클라인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눈물을 쏟을 것만 같다.

"고옴이 말 안하던가요? 제이프 부인, 그들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들은 투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멤버들간의 의견교환이 지겨워지면, 토론같은 건 집어치우고 동전을 던져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럴리가."

"그리고 개구리경주 같은 것도 요긴하게 써먹었죠. 그들이 제일 좋아하던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 고위층들이-"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허술하게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일 리가-"

"그 사람들이 그런 거 상관이나 하는 줄 알아요?" 클라인이 말했다. "그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한 그들한테 중요한 게 뭐겠습니까? 아랫것들한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잡담꺼리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말들이 얼마나 합리적인 과정으로 도출되었느냐 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결정이든 상관없다?" 그녀가 말했다.

"왜 아니겠어요? 그것은 매우 훌륭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양의 내장으로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했으니까요."

"말도 안돼요."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이 곳에서 게임으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저 사람들의 손에 지구의 운명을 고스란히 맡기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일까요?" 그는 화면에 나오는 성난 얼굴들을 가리켰다.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날이 밝았는데도 어느 쪽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어야하는 지 방침이 서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독재자들은 지령을 받지 못해 자기들의 잔혹한 정권이 힘을 잃고 무너질까봐 겁에 질려 있었다. 기관지 천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상 한 명이 보좌관 둘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다른 정치가는 화면에 리볼버 권총을 들이대며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정치가는 가발을 씹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치의 나무가 키워낸 최상품 과실이란 말인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거만하고, 감언이설로 생활하는 바보얼간이들.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튀어야 하는 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졸도 직전까지 몰렸다? 그들 가운데서는 바네사가 여행을 떠날 때 길안내를 믿고 맡길만한 남자나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개구리를 믿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     *     *     *     *     *     *     *

어두컴컴한 벙커에서 나와 넓은 마당에 서니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벙커 속에서 울려 퍼지던 지긋지긋한 고함소리들로부터 해방되어 바네사는 기뻤다. 길을 걸으면서 클라인은 정치인들이 조속히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기까지 적어도 수주일은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바네사가 보았던 인간들이 절망에 빠져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도 있다. 그들은 위원회로부터 판결을 받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이니까. 지금 당장 소원을 풀어주어야 한다.

"골드버그가 아직 살아있어요." 클라인이 말했다. "그가 계속 게임을 해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게임을 하려면 2명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하면 되겠네요."

"골드버그가 나를 싫어해서 안됩니다. 우리 경비병들 모두를 싫어하죠. 그가 당신하고만 게임을 하겠답니다."

골드버그가 월계나무 밑에 앉아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진행되는 놀이였다. 그는 시력이 너무 나빠서 각각의 카드들을 일일이 코 앞에 갖다대고 읽어야만 했는데, 쭉 늘어선 카드의 맨 끝 카드를 읽을 때 쯤이면, 맨 처음 카드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네사가 승낙했어요." 클라인이 말했다. 골드버그는 카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지금 바네사가 승낙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장님이지 귀머거리는 아냐." 여전히 카드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골드버그가 클라인에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바네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가 그 친구들한테 탈출은 실패할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해줬는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바네사는 그의 말 속에서 친구들을 잃은 슬픔을 느꼈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어. 우리는 이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탈출은 소용없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카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때문에 도망을 가? 세상이 변했는데. 나는 알아. 우리가 세상을 바꿔버렸어."

"아주 참혹하진 않았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세상이?"

"동료분들이 돌아가신 사고가."

"아."

"우리는 모두 즐겁게 드라이브를 했어요.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고옴은 지독하게 감상적인 사람이었어." 골드버그가 말했다.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바네사가 있는 쪽으로 튀어나왔다. 그 움직임이 골드버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건 뭐지?" 그가 물었다.

개구리는 바네사의 발을 적으로 생각하고 경계했다. "그냥 개구린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어떻게 생겼어?"

"뚱뚱해요." 그녀가 말했다. "등에 빨간 점 3개가 있구요."

"그건 이스라엘이야."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을 밟으면 안돼."

"정오 쯤엔 판결이 나올 수 있겠죠?" 클라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특히 걸프만 사태가 심각하구요, 또 멕시코 분쟁이랑, 또-"

"알어, 알어, 안다구." 골드버그가 말했다. "이제 여기서 꺼져."

"-피그만에서 또 사건이-"

"나도 이미 다 아는 얘기잖아. 빨리 꺼져! 너때문에 나라들이 불안해 하잖아." 그는 바네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데 자네는 여기에 앉을건가 아니면 딴데 갈 건가?"

그녀는 앉았다.

"잘 좀 해주십쇼." 클라인이 말하며 물러났다.

골드버그가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꾸웩-꾸웩-꾸웩. 개구리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 소리에 반응해서 마당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네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가 전에 한 번 생각했던 것처럼, 희극을 연기할 때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야한다. 그 모든 터무니없는 말들을 정말로 믿고 있는 듯이 말이다. 오직 비극만이 웃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개구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바네사와 골드버그는 웃음을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 The End >

바벨의 아이들 [4]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15 posted by 조재형

그녀는 하루 종일 고옴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큰 곤경에 처해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혼자 있도록 방치되지 않았다. 길리멋이 수시로 그녀에게 들러 음식과 음료를 갖다주었고, 오후에는 같이 카드놀이를 했다. 그녀가 파이브 카드 포커치는 요령을 금새 배워 길리멋과 한두 시간동안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는 동안, 마당에서는 정신병자들이 개구리경주를 벌이며 소리지르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나 목욕 좀 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안되면 샤워만이라도 어떻게 좀..." 그 날 저녁 길리멋이 저녁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몸이 너무 끈적끈적해서 못 살겠어요."

그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목욕할만한 데를 찾아볼께요."

"정말?"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역시 당신은 친절해."

그는 1시간쯤 뒤에 돌아와서 샤워실을 찾아내 허락을 맡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샤워실 가는 것이 좋기만 할까?

"샤워실에서 나 등 좀 밀어줄래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길리멋의 두 눈이 충격으로 껌뻑거렸고, 양쪽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를 따라오세요." 그가 말했다. 조용히 길리멋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녀는 샤워실로 가는 길을 마음 속에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감시인이 없을 경우에 혼자서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그가 안내한 곳으로 들어가 본 거울 달린 샤워실은 시설이 형편없어 실망스러웠다. 사실 지금 그녀가 처리해야 하는 일 중에서 샤워는 그리 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형편없는 시설 따위 상관하지 말자. 샤워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나는 문 밖에 있을께요." 길리멋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네요." 등을 밀어달라는 조금 전 말을 상기시키는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며, 그녀는 샤워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을 세차게 틀어놔서 샤워실 안이 온통 수증기로 가득하게 만들었고, 네 발로 엎드려 바닥을 비누로 문질렀다. 샤워실 안이 수증기 안개로 둘러싸여 앞이 안보이고 샤워실 바닥이 비누칠로 잔뜩 미끌미끌해지자, 그녀는 길리멋을 불렀다. 부르자마자 튀어들어오는 그의 놀라운 스피드에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쭐하는 대신 재빨리 그의 뒤로 돌아가 수증기 속에서 허둥대고 있던 그를 힘껏 밀었다. 그는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샤워기에 부딪혔고, 펄펄 끓는 물이 머리를 덮치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동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정신을 차리려는 그보다 먼저 그녀가 총을 낚아챘다. 그녀는 그의 몸통을 향해 총을 겨눴다. 그녀는 명사수가 아니었고, 지금 그녀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장님일지라도 표적을 못 맞출래야 못 맞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길리멋도 알고 있었다. 그가 양손을 들었다.

"쏘지마."

"만약 니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제발... 쏘지 마요."

"이제... 미스터 고옴과 그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라. 빨리 그리고 조용히."

"왜?"

"시키는 대로만 해." 손에 쥔 총으로 샤워실 밖으로 나가서 앞장 서라는 동작을  취하며, 그녀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어리석은 짓을 하면, 네 놈 등을 쏴버릴거다." 그녀가 말했다. "등 뒤에서 쏘는 게 신사다운 행동이 아니란 건 알지만, 난 신사도 아닌데 뭐. 나는 그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한 여자일 뿐이야. 그러니 나를 열받게 만들지마."

"... 알았어요."

그는 명령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녀를 데리고 샤워실 건물을 나와서 길게 이어진 통로를 지나 종탑과 그 주위에 모여있는 건물촌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항상 이 곳 요새의 중심부는 예배당일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종탑건물의 겉모습은 사각타일이 겹쳐있는 지붕에 하얗게 칠한 벽들이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했다. 바네사와 길리멋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펼쳐진 풍경은 신앙의 장소라기보다는 고풍스런 군사 벙커를 연상시키는 콘크리트 미로였다. 그녀는 이 건물이 핵폭탄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모든 통로들이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여기가 정신병원이라면, 소수의 특별한 정신병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곳일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그녀가 길리멋에게 물었다.

"우리들이 안방이라고 부르는 곳이에요." 그가 말했다.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죠."

지금은 별다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통로에 붙어있는 사무실 대부분에 불이 꺼져 있었다. 한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없는데, 컴퓨터 한 대가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다른 사무실에서는 텔렉스 기계가 글씨로 가득찬 종이용지를 뱉어내고 있었다. 바네사와 길리멋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계속 건물 심층부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모통이 하나를 돌자마자 엎드려서 리놀륨 바닥을 닦고 있는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갑작스런 만남에 양쪽 모두 당황하고 있는 틈을 길리멋이 재빨리 이용했다. 그는 바네사를 벽으로 확 밀치고 달아났다. 그녀가 몸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얼마 안있어 비상벨이 울리고 경비병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녀는 낯선 곳에서 막막해졌다. 앞에는 똑같이 불길하게 보이는 출구 3개가 있었는데, 그녀는 망연자실해서 굳어있는 청소부를 뒤에 내버려두고 간단히 가장 가까운 출구로 뛰어갔다. 그녀가 선택한 출구는 또다른 모험을 안겨주었다. 출구를 따라서 수많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방에는 시계 수십개가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표시하고 있었다. 다음 방에서는 검은 전화기 50대가 윗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다음 방은 제일 큰 방이었는데, 모든 벽에 TV 스크린들이 붙어 있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스크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스크린이 꺼져 있는데, 딱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유일하게 켜져있는 스크린에서는 얼핏 보기에 진흙 레슬링 경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사실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포르노 영화였다. 맥주캔을 배 위에 올려놓고 의자 속에 몸을 쭉 편 채 포르노를 보고 있는 것은 콧수염 달린 수녀 한 명이었다. 바네사가 들어오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반항하면 죽여버리겠어."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젠장."

"고옴과 동료들은 어디 있어?"

"뭐?"

"그 사람들 어디 있냐니까! 어서 말해."

"홀 밑에. 왼쪽으로 돌아서 한 번 더 왼쪽으로 돌면 돼." 그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난 죽기 싫어."

"그럼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있어." 그녀가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신앙심이 깊어서 칭찬받겠구만." 그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방을 나자가 그는 무릎이 꺽이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뒤에서는 신나는 진흙 레슬링이 펼쳐지고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 또다시 왼쪽으로. 길을 따라 가보니 방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녀가 한 군데를 골라 방문을 노크하려는 순간 건물 전체로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조심성 따위는 던져버리고 요란하게 문들을 열어 제꼈다. 방 안에서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투덜대면서 왜 이렇게 비상벨이 요란하냐고 묻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세번째 방에서 고옴을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바네사." 복도로 튀어나오면서 그가 말했다. 그는 긴 조끼만 걸치고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정말 당신이야? 어? 정말이구나!"

잠에 취한 눈으로 다른 방에서도 사람들이 나왓다. 이레냐, 플로이드, 모터스헤드, 골드버그. 쪼글쪼글한 얼굴들을 보니 바네사는 그들의 전체 나이가 400살에 육박한다는 고옴이 말이 믿겨졌다.

"정신차려, 이 늙은이들아." 고옴이 말했다. 그는 바지 하나를 찾아내서 입었다.

"비상벨이 울리는데-" 동료 한 명이 말했다. 하얗게 세버린 그의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사람들이 금방 올거야-" 이레냐가 말했다.

"상관없어." 고옴이 대답했다.

플로이드는 벌써 옷을 다 차려 입었다. "난 준비됐어."

"그런데 우리는 인원이 너무 많아요." 바네사가 걱정이 돼서 말했다. "우리는 살아선 여길 못나갈 거에요."

"이 여자 말이 맞아." 동료 한 명이 그녀를 훓어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주둥이 닥쳐, 골드버그." 고옴이 쏘아붙였다. "바네사는 총을 갖고 있단말야, 안 그런가?"

"딱 한 개." 백발노인이 말했다. 바네사는 그가 모터스헤드 일거라 생각했다. "총 하나로 경비병들을 모두 다 상대하겠다는 거로군."

"다시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골드버그가 말했다.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야." 고옴이 말했다. "어쩌면 우리한테 남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고옴 말이 맞아." 이레냐가 말했다.

"그럼 게임은 어떻게 되는 건데?" 골드버그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게임은 잊어버려." 플로이드가 말했다. "개구리로 국이나 끓여 먹으라지."

"너무 늦었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놈들이 오고 있어요." 통로 양쪽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린 갇혀 버렸어요."

"좋구만." 고옴이 말했다.

"당신 미쳤군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우릴 쏴버릴 수 있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플로이드가 투덜댔다. "난 죽어서 여길 나가고 싶지는 않아."

"협박해! 협박하란 말이야!" 고옴이 말했다. "놈들한테 허튼 짓하면 우릴 모두 총으로 죽여버리겠다고 말해!"

이레냐가 웃었다. 틀니를 침실에 두고 와서 입 언저리가 움푹 들어갔다.

"당신 얼굴 표정이 유난히 이뻐보여." 고옴이 이레냐에게 말했다.

"고옴 말이 맞아." 플로이드가 말했다. 이제는 싱글벙글 기쁨에 젖어있다. "우리 목숨이 위태로운데 놈들이 감히 쓸데없는 짓은 못할 거야. 우리를 순순히 놔 줄 수 밖에 없겠지."

"너희들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골드버그가 궁시렁댔다. "외부로 나간다해도 우리를 반겨줄 곳은 아무데도 없어..."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곧 이어 복도 양끝으로 경비병들이 몰려와 막아버렸다.

고옴은 바네사의 총을 잡고 자기 심장을 향해 총부리를 갖다댔다.

"침착하게 잘 해." 그는 조용히 속삭이면서 입술로 살짝 키스를 보냈다.

"제이프 부인, 무기를 내려 놓으시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미스터 클라인이 나타났다. "이제 그만해요. 당신은 완전히 포위됐으니까."

"이 사람들 다 죽여버리겠어." 약간 머뭇거리며 바네사가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는 현재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당신들한테 경고하겠어. 나 지금 이판사판이야. 날 쏘면 이 사람들도 전부 죽일거야."

"알았어요..." 클라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왜 당신은 그 사람들이 죽을까봐 내가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일 뿐인데. 전에 내가 말했잖아요. 모두 정신병자라고, 살인자라고..."

"우린 둘 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텐데." 클라인의 얼굴에 나타난 불안한 표정을 보고, 바네사는 더욱 확신을 얻었다. "지금 당장 요새의 철문을 열어놓고, 내 차 시동장치에 차 키를 꽂아놔. 미스터 클라인, 당신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하면 여기 인질들을 가차없이 쏴버리겠어. 자 이제 당신 똘마니들 여기서 내보내고 내가 요구한 대로 준비해."

미스터 클라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부하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옴의 눈이 반짝거렸다. "잘 했어." 그가 속삭였다.

"길 안내 좀 해줄래요?" 바네사가 고옴에게 부탁했다. 고옴의 뒤를 따라 바네사 일행은 시계와 전화기와 비디오 스크린이 가득한 방들을 지나 복잡하게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갔다. 한 걸음씩 내딪을 때마다 바네사는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올까봐 불안했지만, 확실히 미스터 클라인은 그녀의 협박대로 노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았다. 바네사 일행은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건물 밖으로 무사히 나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경비병들이 어디엔가 숨어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차가 준비되어 있는 마당으로 가는 동안, 바네사는 계속해서 인질들 4명 쪽으로 소총을 겨냥했다. 차 있는 곳에 와보니 철문이 열려 있었다.

"고옴." 그녀가 속삭였다. "차 문을 열어요."

고옴이 문을 열었다. 그가 전에 말한대로 나이가 들어 늙으면 몸이 쪼그라든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작은 차에 5명이 탄다는 것은 상당히 빠듯한 일이었다. 바네사가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운전석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숙이는데 총알 하나가 날아왔다. 그녀는 어깨를 후려치는 고통을 느꼈다. 소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개새끼들." 고옴이 말했다.

"그 여잔 그냥 놔두고 빨리 가자." 뒷좌석에 앉은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옴은 이미 차에서 내려 바네사를 뒷좌석 플로이드 옆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운전석으로 달려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운전할 줄 알아?" 이레냐가 물었다.

"물론이지. 내가 운전 하나는 끝내준다구!" 그가 소리쳤다. 기어를 삐걱거리며 자동차는 철문을 지나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네사는 과거에 총에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이제 경험을 하고 보니 -만약 이 난리통에서 목숨을 건진다면- 다시는 총상을 입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 난 상처에서 출혈이 심했다. 옆에서 플로이드가 그녀의 상처를 지혈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고옴의 난폭한 운전 속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저기 길이 있어요-"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고옴에게 말했다. "저쪽에."

"저쪽이란 게 어느 쪽이야?" 고옴이 소리쳤다.

"오른쪽이요! 오른쪽!" 그녀도 소리질렀다.

고옴이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오른쪽이 어느 쪽이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옆에 앉은 이레냐가 고옴의 손을 다시 운전대로 끌고 갔다. 자동차가 춤추듯이 흔들렸다. 이리저리 덜컹거릴 때마다 바네사는 고통때문에 신음했다.

"찾았다!" 고옴이 말했다. "저기 길이 보여!" 그는 액셀을 밟아 속력을 더 높였다.

엉성하게 닫혀있던 차 뒷문 하나가 열려서 바네사의 몸이 밖으로 떨어지려 했다. 모터스헤드가 플로이드 쪽으로 몸을 날려 가까스로 그녀를 안전하게 끌어당겼다. 열린 문은 다시 닫을 새도 없이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서있던 이정표 바위에 충돌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이쯤에서 한숨 돌려도 되겠어." 운전을 계속하며 고옴이 말했다.

에게해의 밤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은 고옴 일행의 차만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서 불빛이 따라오고 있었고, 맹렬히 추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가 수도원에 소총을 떨어뜨리고 갔기 때문에, 클라인으로서는 그녀가 인질을 총으로 쏴죽일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빨리 가야겠어!" 플로이드가 말하며 입이 찢어질 듯 활짝 미소지었다. "놈들이 우릴 쫓아오는데."

"무슨 짓을 해서든 저 놈들을 따돌릴테다." 고옴이 말했다.

"헤드라이트 꺼." 이레냐가 말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 눈에 덜 띄지."

"그럼 나보고 어떻게 길을 보란 말야." 시끄러운 엔진소리 속에서 고옴이 불평했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 길도 아닌데도 아무데나 막 달리고 있으면서."

모터스헤드가 웃음을 터뜨렸고, 바네사도 -그녀의 이성이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웃음을 터뜨렸다. 피를 많이 흘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백발노인 4명과 바네사를 태우고 문짝이 하나 빠진 자동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미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몰고 갔을 것이다. 이 노인들이 클라인의 말처럼 정신병자들이 아니라는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를 바네사는 보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노인들은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고옴은 운전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베르디의 노래를 부르는가 싶더니 "오버 더 레인보우"를 가성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만약 어질어질 기운없는 그녀의 마음이 확신하는대로 이 노인들이 그녀처럼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먼젓번에 고옴이 그녀에게 설명했던 얘기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부 사실이란 말인가? 지금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이 노인들이 인류의 멸망을 막아냈다는 것이 사실일까?

"놈들이 우리 뒤를 따라붙었다!" 플로이드가 말했다. 그는 뒷좌석에서 무릎 꿇고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젠 다 글렀나본데." 웃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모터스헤드가 말했다. "우리 모두 다 죽게 생겼어."

"저기 봐!" 이레냐가 외쳤다. "저기 또 길이 있어! 저기로 가자! 빨리 저기로 가!"

고옴이 운전대를 힘껏 돌리자, 차는 거의 넘어질듯이 기우뚱거리면서 달리던 길을 벗어나 새 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리느라 앞에 보이는 길이 겨우겨우 흔적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어두웠지만, 고옴의 운전 스타일은  그런 사소한 불편 정도에 벌벌 떠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는 엔진이 숨 넘어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까지 속력을 올렸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뒷좌석으로 튀어오른 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멋 모르고 길 한가운데 서있던 염소 한 마리가 차와 충돌하기 직전 가까스로 달아났다.

"우리 지금 어디가는 거에요?" 바네사가 소리쳤다.

"난 모르겠는데." 고옴이 대답했다. "자네는 아는가?"

그들이 어디로 가던지간에 그들의 스피드는 적당하게 빨랐다. 이번 길은 방금 지나왔던 길보다는 평평했기 때문에 고옴이 운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는 또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터스헤드가 몸을 숙여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가 바람에 마구 날리는 가운데 그는 추적자들이 쫓아오는지 살펴 보았다.

"우리가 놈들을 따돌렸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쳤다. "우리가 놈들을 따돌렸다구!"

나머지 동료들도 기쁨에 겨워 들썩거렸다. 모두들 H.G.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길이 사라진 것 같다고 모터스헤드가 말하는 소리를 고옴은 미처 듣지 못했다. 고옴은 자기가 낭떠러지로 차를 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곧이어 자동차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낭떠러지에서 추락했고, 차 안의 사람들은 낭떠러지 아래 바닷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5]편으로 이어집니다.

바벨의 아이들 [3]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11 posted by 조재형

요새 안에서 그녀의 생활은 신기한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어떤 것은 즐거웠고(고옴의 미소, 피자, 근처 마당에서 벌어지는 게임 즐기는 소리들), 어떤 것은 불쾌했다(그녀가 요새로 들어오게 된 동기를 묻는 조사, 그녀가 요새 안에서 목격한 것들을 알아내려는 협박).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이 감옥이 대체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여기 감옥의 수감자들이 겨우 5명 밖에 안되는 이유는 뭐고(그녀까지 포함하면 6명), 고옴의 표현대로 나이를 먹어 쪼그라든 노인들만 갇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인이 플로이드를 호통치는 광경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는 이 곳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든 자유를 향한 고옴의 노력을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고옴교수는 그 날 저녁 이후로 나타나지 않아 그녀를 실망시켰다. 그녀 생각으로는 아마 플로이드가 체포된 후 이 곳 감옥의 경비가 더욱 엄격해진 탓인 것 같았다. 감시인 길리멋이 그녀에게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전번에 말한대로 포커를 가르쳐주지는 않았고, 그녀는 산책마저 금지당했다. 답답한 방 안에 친구도 없이 혼자 있자니 자기 발가락이나 세고 있는 일 외에는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녀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고 잠에 취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 무엇인가 창문 밖에서 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오후 내내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가봤더니 어떤 물체가 창문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그것은 쿵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누가 이런 걸 던졌나 싶어 창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작은 꾸러미 속에는 열쇠 하나가 들어있었고, 메모가 붙어 있었다. <바네사, 준비하고 있어. In saecula saeculorum 고옴.>

그녀는 라틴어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녀는 메모 속 라틴어가 그저 인삿말일 뿐 행동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길 바랬다. 그녀는 열쇠를 문에 넣고 돌려보았다. 문이 열렸다. 고옴의 메모는 지금 당장 그녀한테 문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호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 분명했다. <준비하고 있어.>하고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법. 감방 문이 열리고 햇빛이 작열하는 바깥으로 통하는 복도가 훤히 보이니까, 고옴과 그의 동료들은 싹 외면해버리고 혼자서 지금 즉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았다. 그렇기는해도 H.G.(하비 고옴)는 위험을 무릎쓰고 감방 열쇠를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니, 그의 말을 잘 따르기로 했다.

열쇠를 얻은 뒤로, 바네사는 더이상 잠에 취해 졸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거나 마당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고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저녁으로 변했다. 길리멋이 나타나 저녁식사로 피자와 코카콜라를 건네주고 가버렸고, 밤이 깊어졌고, 또 하루가 저물었다.

어쩌면 그들은 어둠을 이용해서 나한테 올꺼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달이 뜨고 밤하늘은 유유히 흘러다니건만, H.G.가 오거나 대탈출이 벌어질듯한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고옴 일행의 탈출계획이 들통나서 모두들 처벌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탈출계획에 그녀도 가담했다는 것을 조만간 미스터 클라인이 알게 되지 않을까? 비록 그녀의 가담 정도가 아주 경미한 수준이라지만, 초콜렛맨은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 자정이 지났을 무렵, 도끼가 목에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이드처럼 확 저질러버리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녀는 감방을 나와 문을 잠궜다. 될 수 있는 한 그림자를 숨기려 노력하면서 황급히 감옥 복도를 지나갔다. 다른 사람의 흔적은 안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을 감시하던 마리아상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데서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조심조심 행동하고 얼마간의 행운이 곂친 끝에, 그녀는 얼마전 잡혀온 플로이드와 미스터 클라인이 만났던 마당으로까지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출구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둠 속에서, 그녀의 변덕스런 방향감각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고 잘 빠져나온 행운을 굳게 믿으며, 그녀는 마당에 연결된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도망쳤다. 지붕이 덮혀있는 통로길을 따라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나가다보니 또다른 마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조금 전 마당보다 더 큰 마당이었다. 마당 가운데 서있는 두 그루 월계수에서 나뭇잎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렸다. 밤벌레들이 벽들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광장에는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했다. 그 때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서 벽에 둘러싸인 마당을 밝게 비추었다.

월계수 두 그루와 나무에서 뻗어나온 그림자만 빼면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가 평평한 마당 바닥 위에 페인트로 그려진 복잡한 그림 위에 걸쳐 있다. 호기심에 빠져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녀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어떤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모양. 그녀는 그림의 정체를 알아내려 고민하면서 조용히 그림 주위를 걸어다녔다. 잠시 후 위아래가 뒤바뀐 채 전체 그림을 거꾸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당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림의 디자인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세계지도였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작은 섬에 이런 게 있었다니. 지도 위에는 전세계 주요도시들이 표시돼 있고, 수백개 자잘한 선들이 바다와 대륙을 가로질러 위도와 경도같은 지리정보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도에 그려진 수많은 기호들이 무척 특이했지만, 이 지도가 정치적인 정보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분쟁지역의 국경, 국가의 영해 통치범위, 접근 금지구역. 이 모든 것들이 매일 변하는 국제정세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이, 분필로 그려진 선들이 그 위로 여러차례 다시 그려져 있었다. 어떤 지역들은 심각한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휘갈겨쳐진 분필선들이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이 요상한 세계지도에 푹 빠져들었다. 정신을 지도에만 팔고 있느라 하마터면 지도의 북극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뻔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려다 달빛 속에 드러난 사람을 자세히 보니 고옴이었다.

"움직이지 마." 세계 저편에서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따랐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불안하게 마당을 두리번거리던 H.G.는 마당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바네사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오지 않아서." 그녀가 이유를 설명했다. "당신이 나를 아주 잊은 걸로 생각했어요."

"상황이 나빠져서 그랬어. 놈들이 우릴 한순간도 빠짐없이 감시하더군."

"하비, 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여기는 휴일을 보낼만한 곳이 아니라구요."

"물론 자네 말이 맞아."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여기는 희망이 없는 곳이야. 희망이 없어. 당신 혼자서 여길 빠져나가야 돼. 우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려. 놈들은 우릴 절대 놔주지 않을거야. 진실이 너무 끔찍하거든."

"무슨 진실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잊어버려. 우리가 만났던 사실도 다 잊어버리라구."

바네사는 비쩍 마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렇겐 못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어요."

고옴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당신이 알아야할지도 몰라. 어쩌면 전세계가 알아야할지도 모르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샛길 안으로 끌고 갔다.

"저 지도는 뭐죠?" 그녀의 첫번째 질문이었다.

"우리들이 게임을 하는 곳이야." 그가 마당 바닥에 어지럽게 그려진 분필선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한숨 쉬었다. "물론 항상 게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자네도 알겠지만 시스템은 썩어버렸거든. 그것은 문제의 본질과 이성적 해결 모두에 해당하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야. 처음에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어. 20년간을... 20년간을..."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운 듯, 자꾸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개구리를 가지고 놀았던 거야."

"하비, 당신 말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일부러 어렵게 말한 거에요 아니면 혹시 당신한테 치매끼가 있는 걸까요?"

바네사의 푸념에 그는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졌고, 신통하게도 효과가 나타났다. 시선은 여전히 세계지도에 고정한 채, 그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미리 정리한 다음에 말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과거에 대한 고백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권력다툼으로 세계가 파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1962년 세계의 권력자들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날을 잡았다. 그들로서도 멸망한 지구를 바퀴벌레들이 지배하게 된다는 생각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만약 지구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인간의 생존본능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라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권력자들은 밀실 안에 모였다. 지성적인 회담같은 것은 없었다. 공산당 정치국, 국회, 의회의 지도자들-세계를 지배하는 군주들-이 얼굴을 맞대고 하나의 거대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앞으로 발생하는 국제문제들은 특별위원회가 감독하며, 위원회는 정치적 취향에 휘둘리지 않고서 인류가 집단자살을 면할 수 있게 원칙들을 제시할 수 있는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인물들이 운영한다는 약속이 정해졌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지성과 윤리의 엘리트들-최고 중의 최고-로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의 지혜가 한 데 모여 인류를 새로운 황금시대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어쨌든 권력자들이 도출해낸 이론은 이렇게 결정나 버렸다.

바네사는 고옴의 짧은 설명이 그녀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 수백가지 질문들을 꾹 참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옴이 계속 말을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이론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어. 정말 멋지게 실현되었다구. 국제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특별위원회 멤버는 총 13명이었어. 러시아인 1명, 나를 포함한 유럽인 몇 명, -물론 요니요꼬씨도 멤버였지- 뉴질랜드인 1명, 미국인 2명... 우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집단이었어. 우리 중에서는 나를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도 2명 끼어있었고-"

이제 그녀는 고옴의 정체를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의 얼굴을 전에 어디서 봤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때는 그도 그녀도 무척 젊었을 때였다. 그녀는 어린 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그의이론을 무조건 암기하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조언은 권력자들간에 의견일치를 보도록 이끌었고, 안정적인 경제구조를 확립하고 신생국가들이 문화적 주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어. 물론 지금에 와선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엔 매혹적으로 들리는 일들이었다구. 그런데 사실 위원회 출범 초기부터 우리의 관심사는 주로 영토문제였어."

영토문제?

고옴은 앞에 있는 지도를 품에 껴앉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전세계를 알맞게 나누는 일에 도움을 주었단 말이야."그가 말했다. "작은 전쟁들을 통제해서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게 하고 독재정치가 세상에 범람하는 것을 막았어. 우리는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 되어, 더러운 때가 너무 두껍게 낀 곳이 생길 때마다 깨끗이 청소했어. 굉장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아주 행복하게 받아들였어. 우리 13명이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각국 정부의 최고권력자들만 빼면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이 즐겁기까지 했다구."

바네사는 생각했다. 이것은 자기가 나폴레옹이라고 믿는다는 과대망상이 한 단계 더 발전한 수준이다. 고옴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친 게 확실하다. 영웅을 꿈꾸는 정신병이다! 그래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병이다. 사람들은 왜 그를 가둬놓는거지? 그는 남에게 피해를 끼칠 능력도 없는데.

"옳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갇혀있는 것은-"

"물론 그건 보안을 위해서야." 고옴이 대답했다. "어떤 무정부주의자 그룹이 우리가 활동하는 장소를 찾아내 우리를 납치해 버린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라구. 우리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처음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스템은 썩어버렸거든.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 중요한 결정을 내려줄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점점 더 스스로 고민해서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고, 점점 더 자신들의 권력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리는데만 탐닉하게 되었어. 위원회 활동이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단순한 조언자 역할을 벗어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권력자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

"재밌네요." 바네사가 말했다.

"한동안은 그렇게 잘 지냈지. 그랬던 것 같아." 고옴이 대답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갑작스럽게 무너졌어. 10년정도가 지나자 눌려왔던 압력이 터졌어. 이젠 위원회 멤버 절반이 죽어버렸거든. 골로바텐코가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어. 부캐넌-뉴질랜드인-은 매독으로 죽었는데, 본인은 끝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구. 노환으로 인해 요니요꼬, 베른하이머, 사우어버츠도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 이제 조만간 남은 우리들도 모두 저 세상 구경을 하겠지. 그래서 클라인이 우리가 죽었을 때 임무를 떠맡을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눈꼽만치도 신경을 안 써. 아무런 대꾸도 없다구! 우리는 그저 머슴생활이나 하고 있는거야." 그는 좀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권력자들한테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는 한, 그들은 행복한 거라구. 젠장..." 격앙됐던 목소리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다 때려칠거야."

바네사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아실현의 순간이 온 것일까? 고옴의 머리 속에 있는 정상적인 인격이 세계지배라는 허황된 이야기를 벗어던지려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의 회복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탈출하고 싶어요?"

고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내가 살던 집에 가보고 싶어. 바네사, 난 위원회 활동을 하느라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왔어. 정말 미칠 지경이야." 바네사는 생각했다. 그래, 그도 자기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거로군.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지구 평화를 위해 희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자신이 맡고 있다는 막중한 임무를 뽐내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말 않고 미소만 지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지! 상관안해. 나는 여길 나가고 싶어! 내가 바라는 것은-"

"목소리 좀 낮춰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고옴은 이내 이성을 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죽기 전에 작은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이야. 우리들 모두 같은 마음이지.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그가 말했다.

"뭐가요?"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거야?"

"하비, 당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요. 당신은 위험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치만-"

"잠깐만." 고옴이 말했다. "내가 이제까지 당신한테 해 준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거야? 내가 이 곳에서 곤경에 빠진..."

"하비 당신의 얘기 참 멋진 스토리에요..."

"스토리? 스토리라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지?" 그가 후끈 달아오른 상태에서 말했다. "오호라... 알겠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로군. 그렇지? 바로 그거였어! 나는 방금 자네한테 이 세상 가장 큰 비밀을 알려줬는데, 자네는 날 못 믿겠다!"

"당신이 거짓말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나를 미친 놈으로 봤다는 소리네!" 고옴이 화를 냈다.  그의 성난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러자 건물들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고 빠르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당신이 한 짓을 봐." 고옴이 말했다.

"내가 했다니요?"

"우리가 위험에 빠지게 됐잖아."

"이봐요 H.G. 이렇게 된 건-"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당신은 여기 가만있어. 내가 뛰쳐나가서 놈들을 유인할테니까."

그는 뛰려다말고 그녀에게 돌아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그의 입술에 갖다댔다.

"내가 미쳤다면," 그가 말했다. "날 미치게 만든 건 바로 당신이야."

그는 짧은 다리로 꽤 빠르게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월계수 있는 곳에 다다르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멈추라고 소리쳤다. 고옴이 무시하고 계속 달리자, 경비병 하나가 총을 쐈다. 총알이 고옴 발 밑에 있는 세계지도의 해양부분에 구멍을 냈다.

"알았다구," 그가 소리쳤다. 발을 멈추고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Mea culpa(내가 잘못했어)!"

총소리가 멈췄다. 경비병들이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트자, 그들의 상관이 걸어나왔다.

"오, 시드니 당신이로군." H.G.가 미스터 클라인 대위에게 말했다. 대위는 부하들 앞에서 자기 이름이 아무렇게나 스스럼없이 불려지자 몸을 움찔했다.

"밤이 깊은 시간에 뭐하는 겁니까?" 시드니가 물었다.

"별구경." 고옴이  대답했다.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대위가 말했다. 바네사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옴이 서있는 넓은 마당을 거치지 않고서 그녀의 감방까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쯤은 비상경계령이 내려져서 길리멋이 그녀의 감방을 이미 체크했을 것이다.

"자네 말이 맞아." 고옴이 말했다. "난 혼자가 아니었어." 좀 전에 그녀가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니, 이제 그는 그녀를 배신하려는 것인가? "당신들이 가둬놓은 여자를 봤었는데-"

"어딨어요?"

"벽을 타고 넘어갔어." 그가 말했다.

"이런 젠장!" 대위가 말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그녀를 추적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그 여자한테 말을 해줬지." 고옴이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 벽 잘못 타다가 목 부러진다. 군인들이 철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낫다-"

철문을 열어준다. 이런 사실을 슬그머니 알려주다니, 고옴은 완전히 미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필리펜코-" 대위가 말했다. "하비를 숙소까지 모셔다 드려."

고옴이 투덜댔다. "난 어린애가 아냐. 고맙지만 혼자서도 갈 수 있어."

"하비와 같이 가라."

경비병이 H.G.를 데리고 사라졌다. 오랫동안 서성거리던 대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드니, 도대체 누가 똑똑한 아일까?"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또다시 마당은 텅 비어버렸다. 달빛에 물든 세계지도만 남긴 채.

바네사는 주위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은신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그녀를 추적하러 나간 경비병들이 지나갔던 길을 쫓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길리멋과 산책하던 낯익은 길에 이르게 되었다. 용기백배한 그녀는 계속 서둘러 통로를 따라가서 전자눈으로 감시하는 마리아상이 버티고 서있는 마당에 도착했다. 조각상의 눈길을 피하려 벽쪽에 바짝 붙어 몸을 웅크리고 걷다보니 결국 그렇게도 원하던 철문을 보게 되었다. 철문은 열려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노인이 불평했던 것처럼, 경비상태는 정말 형편없었고,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녀가 철문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자갈바닥을 구르는 부츠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어깨 너머로 살펴보니 손에 소총을 들고 있는 시드니 대위가 나무 뒤에서 걸어나왔다.

"제이프 부인, 초콜렛 좀 드시겠소?"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     *     *     *     *     *     *     *

"여기는 정신병원이더군요." 클라인이 그녀를 조사실로 데려오자, 그녀가 말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당신들은 날 여기에 감글할 권리가 없어요."

그는 그녀가 불평하는 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당신은 고옴에게 말을 했어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고옴도 당신에게 말을 했구요."

"그 사람이 나한테 말거는 게 어쨌다는 거죠?"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그 사람이 말거는 게 어쨌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도 당신한테 물었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 클라인이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녀는 그가 졸도하지나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제이프 부인, 난 꼭 알아야 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기가 자꾸 클라인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한테 이상한 말들을 해댔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는 미쳤어요. 내 생각엔 당신들도 죄다 미쳤어요."

"그가 당신한테 어떤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그냥 쓸데없는 얘기."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제이프 부인." 클라인이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협조해 주세요."

"그가 말하길 여기에 어떤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대요. 그 위원회가 세계정치에 관련해서 결정을 내려주는 곳인데, 그가 위원회 멤버 중 한 명이래요. 뭐 대충 그런 얘기였어요."

"그리고나서?"

"그리고나서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해줬어요. 고옴, 당신은 정말 미친 것 같다고."

미스터 클라인이 억지로 미소지었다. "물론 그가 내뱉은 말들은 완전히 지어낸 얘깁니다."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바네사가 말했다. "미스터 클라인, 제발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나는 어엿한 성인여자-"

"미스터 고옴은-"

"그는 자기가 교수랬어요."

"그것도 그의 과대망상입니다. 미스터 고옴은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그는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지금 당신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건 정말 행운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누구?"

"그는 혼자가 아니랬어요. 나도 그의 동료를 목소리를 들어봤어요. 그 사람들도 전부 정신분열증이에요?"

클라인이 한숨 지었다. "각자 증상에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미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한창 때 그들은 모두 살인자였어요." 그는 말을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잠시 주저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연쇄살인범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이 세상과 격리되어 여기에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곳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모두 무장을 하고-"

바네사는 경비원들이 왜 수녀로 변장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클라인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내 말을 믿어요. 당신이 여기에 머무는 것을 언짢아하는 것만큼 내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럼 날 내보내줘요."

"우리측 조사가 끝나면요." 그가 말했다. "그때까진 협조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미스터 고옴이나 다른 환자들이 당신에게 어떤 계획같은 것을 같이 하자고 접근해 오면, 나한테 즉시 보고해 줘요. 그렇게 해주겠죠?"

"내 생각에는-"

"그리고 앞으로는 멋대로 여길 탈출하려는 행동을 자제해 주세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당신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일 합시다. 시간이 난다면."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잠이나 푹 자요."

*     *     *     *     *     *     *     *

잠이 오지 않아 그녀는 계속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그녀 앞에 놓인 여러가지 사실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터무니없는 것일까? 그녀는 몇가지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고옴이 알려준 것, 클라인이 알려준 것, 그녀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 그 어떤 것도 속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없었다. 모든 해결책들은 그녀를 이 곳까지 오게 만든 산길처럼 종착역이 어디가 될 지 흐리멍텅하기만 했다. 그녀는 낯선 길을 탐험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이 빚어낸 현재의 결과때문에 괴로웠다. 현재의 그녀를 보라. 피곤에 찌들고, 이리저리 치여다니다, 탈출의 희망도 없이 붙들려 있다. 하지만 낯선 길에 대한 모험심은 그녀의 천성이었다. 언젠가 전남편 로널드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괴팍한 모험심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만약 이제와서 그녀가 그녀의 괴팍한 본능을 애써 무시하려 든다면, 그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머리 속으로 쓸모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며 눈을 뜬 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그녀는 마음 속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바벨의 아이들 [2]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08 posted by 조재형

한 때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바네사의 형부가 그녀에게 알려준 사실에 의하면, 희극을 훌륭하게 공연하기 위해서는 배우가 철저하게 진지한 분위기로 연기해야 한다. 희극작가의 코믹한 의도를 표현한답시고 배우가 관객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려서는 안된다. 배우가 코믹함을 무책임하게 관객들에게 완전히 드러내 놓는 것은, 극의 리얼리티를 훼손시키는 것이고, 배우의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그녀는 완벽히 희극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수염달린 수녀, 주위를 감시하는 마리아상 등등- 현재의 웃기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통 일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 사람들은 그들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고, 그들에게서는 진심을 알아챌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에겐 이런 종류의 코미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부족했다. 이 사람들이 배우 선정에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연극무대에서 쫓아내 줄수록, 그녀는 더 한층 행복해질 것이다.

그녀가 미스터 클라인과의 심문을 끝내고 방에 돌아와보니, 사려깊은 누군가가 반쯤 남은 위스키 한 병을 놓고 갔다. 위스키의 도움으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 돼서 그녀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는 깨질듯 아팠고, 혀는 가죽장갑이라도 된 듯 텁텁했다. 잠시동안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 것인지 파악하느라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사이,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에 붙은 작은 창문이 바깥쪽에서 열렸다. 다급한 표정의 얼굴이 창문 구멍에 바짝 붙었다. 부드러운 턱수염에 매서운 눈을 가진 늙은 남자였다. "제이프 부인," 그가 말했다. "제이프 부인. 우리 잠깐 대화 좀 나눌래요?"

그녀는 문쪽으로 가서 창문 속을 보았다. 노인에게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풍겼다. 노인이 그녀보고 더 가까이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창문과 거리를 둬서 노인의 술냄새를 멀리했다.

"누구세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햇볕에 그을려 탄탄한 노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은 것도 같아 물어보았다.

그는 뭔가 기대감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가 말했다.

"내가 당신과 아는 사이였던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엔 당신은 너무 어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알지. 나는 당신이 철문을 지나 이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 때 당신을 말리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만."

"당신도 여기 죄수에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근데 나한테 좀 알려줘... 플로이드를 봤나?"

"누구?"

"플로이드는 여길 도망쳤어. 그저께."

"오," 바네사가 말했다. 대화의 요점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 때 사람들이 막 쫓아가던 사람이 플로이드인 건가?"

"그래, 맞아. 당신이 목격한 대로 그는 여길 몰래 탈출해 줄행랑을 친 거야. 그래서 사람들-바보자식들-이 황급히 그를 추적하느라 그만 철문을 열어놓고 나간거였구. 요즘엔 여기 경비상태가 정말 그지같았어." 그지같은 경비상태의 피해자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도 덕분에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돼서 기쁘긴해."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절박한 심정같은 것을 느꼈다. 슬픔같은 감정에 무너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심정. "우린 총소리도 들었어."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를 잡은거야? 그건 아니겠지?"

"확실히 보진 못했어요." 바네사가 대답했다. "어떻게 됐는지 보러 가보긴 했었는데요, 아무런 흔적도-"

"하!" 표정이 밝아지며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 그는 탈출에 성공했을거야."

바네사는 순간적으로 지금의 대화가 함정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인은 그녀를 심문한 사람의 끄나풀이고, 노인이 여기 온 것은 그녀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한 수작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그런 생각과는 반대였다. 그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삐에로 대장같은 그의 얼굴이 거짓감정을 꾸며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잘하는 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노인을 신뢰했다. 그 밖에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나가게 도와줘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나가야 돼요."

그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벌써?" 그가 말했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난 도둑이 아니에요. 이렇게 감방에 갇혀있긴 싫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신은 갇혀 있기 싫을거야." 그는 방금 전에 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발언을 조용히 질책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성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나는 말주변도 별로 없고..."

"어디선가 당신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모르세요?" 바네사가 물었다. "당신 얼굴이 무척 낯익은 것 같아서요."

"정말?" 그가 말했다. "정말 기분좋은 말이야. 우린 모두 여기에 있느라 완전히 잊혀진 줄로만 생각했거든."

"우리 모두?"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이 곳으로 끌려왔어. 그 당시 우리들 대부분은 이제 막 새로운 연구활동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플로이드가 도망간 것도 그 때문이야. 그는 남은 여생동안 단 몇 달 동안만이라도 연구를 하고 싶어했어. 나도 가끔씩은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그는 우울한 추억회상을 중단하고,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하비 고옴. 하비 고옴 교수야. 지금은 내 전공이 무엇이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지만."

고옴. 흔치 않은 이름이고, 그녀의 머리 속에 뭔가 떠오를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

"나에 관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어?"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일순간 거짓으로라도 말해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랬다간 여기에 와서 유일하게 만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었다.

"아니요... 확실히 기억나는 게 없어요. 뭔가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걸 알려줄래요?"

그러나 노인이 자신의 의문에 찬 과거에 대해 말해주려는 순간, 밖에서 소리가 났다.

"지금은 말할 수 없을 것 같군, 제이프 부인."

"그냥 바네사라고 불러주세요."

"그래도 돼?" 그녀의 호의에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바네사."

"나를 도와줄거죠?" 그녀가 말했다.

"최선을 다할께."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말야 나를 보더라도-"

"-모르는 척 할께요."

"좋았어. 그럼 안녕." 그는 문에 붙은 창문을 닫았다. 바네사는 통로를 따라 사라져가는 노인의 발소리를 들었다. 몇 분 뒤, 그녀의 감시인으로 일하는 길리멋이라는 이름의 친절한 듯 보이는 사내가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선심쓰듯 활짝 웃어주었다.

*     *     *     *     *     *     *     *

어제 마음 속에 있던 불만을 클라인에게 확 터놓고 표출했더니 약간의 결실이 있었다. 아침식사 후에 미스터 클라인이 그녀를 잠깐 불러서 이제부터는 주변을 산책해도 좋다고(물론 길리멋과 함께) 말해주었다. 덕분에 햇빛을 맘껏 쬘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새 옷들도 제공되었다. 사이즈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24시간을 넘게 입어서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뻤다. 그러나 새 옷이 지급됐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속옷까지 전부 갈아입을 수 있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미스터 클라인은 그녀를 지금 당장은 풀어줄 의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묵고 있던 작은 호텔의 우둔한 매니저가 바네사는 객실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려면 얼마나 걸릴까? 알아챘다고 한다면, 그는 어떤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그는 벌써 관계당국에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관계당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길가에 버려진 그녀의 차를 찾은 다음에, 그녀의 자취를 쫓아오다 이 의문의 요새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 속 희망은 오늘 아침 산책길에 무참히 부서져 버렸다. 그녀의 차는 월계수 나무가 있는 철문 옆 담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비둘기들이 차 지붕 위로 무수히 떨어뜨린 응가 덩어리들로 판단해 볼 때, 차는 지금의 위치에 밤새동안 주차돼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영국에 있는 누군가가 불현듯 그녀가 걱정되어, 그녀의 위치를 수소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 때쯤 되면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콱 죽어버렸을 것이다.

요새 안의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다 못해 미쳐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한 취미를 가진 것 같았다. 아침산책으로 바네사와 길리멋이 요새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그 중 하나는 고옴의 목소리였다-가 들려왔다. 목소리들은 전부 흥분해서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겁니다." 길리멋이 대답했다.

"우리도 저기 가서 구경할래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안됩니다."

"나도 게임 좋아하는데."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언제 한 번 게임해볼래요?"

이것은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요구했다가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러죠 뭐." 그녀가 말했다. 감시인의 신임을 얻는 것이 그녀에겐 유리할 수도 있었다.

"포커 어때요?" 그가 말했다.

"그건 한 번도 안해봤는데."

"내가 가르쳐줄께요." 그가 대답했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근처에서 게임하는 사람들은 이제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었다. 서로들 무엇인가를 격려하는 소리를 질러대는 것으로 봐서 무슨 경주를 벌이는 모양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잠잠해지는 것을 보니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했나보다. 길리멋이 그녀가 소리나는 쪽으로 귀 기울이는 것을 보았다.

"개구리에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구리경주를 벌이는 겁니다."

"궁금하다."

길리멋이 다정해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신경끄는 게 신상에 좋아요."

길리멋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일단 게임하는 소리에 솔깃해진 그녀의 머리에서는 개구리경주가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게임은 오후에도 계속됐고, 고함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가끔씩은 웃음소리도 나오기도 했고, 가끔씩은 언쟁을 벌이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게임을 하는 고옴과 그의 친구들이 개구리경주같은 하찮은 일때문에 말다툼하는 것을 들으니, 그들이 마치 어린애같았다. 그렇다고해서 더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라고 격려는 못할망정 그들을 유치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날 저녁 바네사의 문창에 고옴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말했다. "오늘 아침에 산책 나갔다가 당신 목소리를 들었어요. 오후에도 들었구요. 당신들은 정말 재미있게 지내는 것 같더군요."

"오, 게임하는 거 말이로군." 고옴이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 바쁜 날이었어. 경주할 게 어찌나 많던지."

"당신 친구들을 설득해서 나도 같이 게임해도 돼요? 여기서 가만히 있는 건 너무 지루해요."

"불쌍한 바네사.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실 그러는 건 불가능해. 플로이드가 도망간 것 때문에, 지금 당장은 우리 모두 과로했거든."

과로했다구? 그녀는 생각했다. 개구리 경주시키느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범죄자같은 것은 아니겠죠?"

고옴의 얼굴이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범죄자라구?"

"죄송해요..."

"아니야. 자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이해해. 우리가 이 곳에 잡혀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아냐, 우린 범죄자는 아니야."

"그럼 뭐죠? 저한테 무슨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어요?"

고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 대답했다. "만약 내가 자네한테 비밀을 말해주면," 그가 말했다. "우리가 여길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겠어?"

"어떻게 탈출해요?"

"당신 차. 요 앞에 주차돼 있어."

"나도 봤어요..."

"우리가 그 차에 타면, 운전해 줄꺼지?"

"당신들은 모두 몇 명인데요?"

"넷. 나도 있고, 이레냐도 있고, 모터스헤드도 있고, 골드버그도 있어. 물론 플로이드도 저멀리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는 자기가 알아서 처신하겠지. 안그래?"

"내 차는 작은 차에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우리도 작은 사람들이야." 고옴이 대답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말라비틀어진 과일처럼 쪼그라드는 법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 정도로 나이를 먹었어. 플로이드까지 해서 우리 나이를 전부 합치면 398살이나 된다구. 우리 모두 이 나이 되도록 모진 경험을 참 많이도 했어."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현명해지지는 못했어."

갑자기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고옴은 문에서 잠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는 짧게 중얼거렸다. "놈들이 그를 찾아냈어. 오 마이 갓. 놈들이 그를 찾아냈다구." 그리고서 그는 가버렸다.

바네사는 창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밑에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자매님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소동의 한가운데서 경비원 두 명의 손에 잡혀 몸부림치고 있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 보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도망갔던 플로이드였다. 밤낮으로 도망자 생활을 하느라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는데, 축 늘어진 얼굴은 때에 쩔어있었으며, 강렬한 햇볕에 과다하게 노출된 대머리는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서 바네사는 미스터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었고, 잠시 후 그가 마당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플로이드에게 다가가서 인정사정없이 호되게 화를 냈다. 바네사는 클라인의 말을 명확하게 들을 수는 없었는데, 클라인의 냉혹한 질책에 노인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녀는 창문에서 몸을 돌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간식으로 먹는 초콜렛이 목에 걸려 클라인이 숨막히게 해달라고.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