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아이들 [3]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11 posted by 조재형

요새 안에서 그녀의 생활은 신기한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어떤 것은 즐거웠고(고옴의 미소, 피자, 근처 마당에서 벌어지는 게임 즐기는 소리들), 어떤 것은 불쾌했다(그녀가 요새로 들어오게 된 동기를 묻는 조사, 그녀가 요새 안에서 목격한 것들을 알아내려는 협박).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이 감옥이 대체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여기 감옥의 수감자들이 겨우 5명 밖에 안되는 이유는 뭐고(그녀까지 포함하면 6명), 고옴의 표현대로 나이를 먹어 쪼그라든 노인들만 갇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인이 플로이드를 호통치는 광경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는 이 곳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든 자유를 향한 고옴의 노력을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고옴교수는 그 날 저녁 이후로 나타나지 않아 그녀를 실망시켰다. 그녀 생각으로는 아마 플로이드가 체포된 후 이 곳 감옥의 경비가 더욱 엄격해진 탓인 것 같았다. 감시인 길리멋이 그녀에게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전번에 말한대로 포커를 가르쳐주지는 않았고, 그녀는 산책마저 금지당했다. 답답한 방 안에 친구도 없이 혼자 있자니 자기 발가락이나 세고 있는 일 외에는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녀는 급속도로 생기를 잃고 잠에 취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 무엇인가 창문 밖에서 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오후 내내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가봤더니 어떤 물체가 창문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그것은 쿵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누가 이런 걸 던졌나 싶어 창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작은 꾸러미 속에는 열쇠 하나가 들어있었고, 메모가 붙어 있었다. <바네사, 준비하고 있어. In saecula saeculorum 고옴.>

그녀는 라틴어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녀는 메모 속 라틴어가 그저 인삿말일 뿐 행동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길 바랬다. 그녀는 열쇠를 문에 넣고 돌려보았다. 문이 열렸다. 고옴의 메모는 지금 당장 그녀한테 문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호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 분명했다. <준비하고 있어.>하고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 법. 감방 문이 열리고 햇빛이 작열하는 바깥으로 통하는 복도가 훤히 보이니까, 고옴과 그의 동료들은 싹 외면해버리고 혼자서 지금 즉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았다. 그렇기는해도 H.G.(하비 고옴)는 위험을 무릎쓰고 감방 열쇠를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니, 그의 말을 잘 따르기로 했다.

열쇠를 얻은 뒤로, 바네사는 더이상 잠에 취해 졸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거나 마당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고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저녁으로 변했다. 길리멋이 나타나 저녁식사로 피자와 코카콜라를 건네주고 가버렸고, 밤이 깊어졌고, 또 하루가 저물었다.

어쩌면 그들은 어둠을 이용해서 나한테 올꺼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달이 뜨고 밤하늘은 유유히 흘러다니건만, H.G.가 오거나 대탈출이 벌어질듯한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고옴 일행의 탈출계획이 들통나서 모두들 처벌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탈출계획에 그녀도 가담했다는 것을 조만간 미스터 클라인이 알게 되지 않을까? 비록 그녀의 가담 정도가 아주 경미한 수준이라지만, 초콜렛맨은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 자정이 지났을 무렵, 도끼가 목에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이드처럼 확 저질러버리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녀는 감방을 나와 문을 잠궜다. 될 수 있는 한 그림자를 숨기려 노력하면서 황급히 감옥 복도를 지나갔다. 다른 사람의 흔적은 안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을 감시하던 마리아상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데서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조심조심 행동하고 얼마간의 행운이 곂친 끝에, 그녀는 얼마전 잡혀온 플로이드와 미스터 클라인이 만났던 마당으로까지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출구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둠 속에서, 그녀의 변덕스런 방향감각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고 잘 빠져나온 행운을 굳게 믿으며, 그녀는 마당에 연결된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도망쳤다. 지붕이 덮혀있는 통로길을 따라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나가다보니 또다른 마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조금 전 마당보다 더 큰 마당이었다. 마당 가운데 서있는 두 그루 월계수에서 나뭇잎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렸다. 밤벌레들이 벽들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광장에는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했다. 그 때 구름에 가려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서 벽에 둘러싸인 마당을 밝게 비추었다.

월계수 두 그루와 나무에서 뻗어나온 그림자만 빼면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가 평평한 마당 바닥 위에 페인트로 그려진 복잡한 그림 위에 걸쳐 있다. 호기심에 빠져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녀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어떤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모양. 그녀는 그림의 정체를 알아내려 고민하면서 조용히 그림 주위를 걸어다녔다. 잠시 후 위아래가 뒤바뀐 채 전체 그림을 거꾸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당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림의 디자인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세계지도였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작은 섬에 이런 게 있었다니. 지도 위에는 전세계 주요도시들이 표시돼 있고, 수백개 자잘한 선들이 바다와 대륙을 가로질러 위도와 경도같은 지리정보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도에 그려진 수많은 기호들이 무척 특이했지만, 이 지도가 정치적인 정보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분쟁지역의 국경, 국가의 영해 통치범위, 접근 금지구역. 이 모든 것들이 매일 변하는 국제정세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이, 분필로 그려진 선들이 그 위로 여러차례 다시 그려져 있었다. 어떤 지역들은 심각한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휘갈겨쳐진 분필선들이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이 요상한 세계지도에 푹 빠져들었다. 정신을 지도에만 팔고 있느라 하마터면 지도의 북극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뻔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려다 달빛 속에 드러난 사람을 자세히 보니 고옴이었다.

"움직이지 마." 세계 저편에서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따랐다.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불안하게 마당을 두리번거리던 H.G.는 마당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나서 바네사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오지 않아서." 그녀가 이유를 설명했다. "당신이 나를 아주 잊은 걸로 생각했어요."

"상황이 나빠져서 그랬어. 놈들이 우릴 한순간도 빠짐없이 감시하더군."

"하비, 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여기는 휴일을 보낼만한 곳이 아니라구요."

"물론 자네 말이 맞아."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여기는 희망이 없는 곳이야. 희망이 없어. 당신 혼자서 여길 빠져나가야 돼. 우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려. 놈들은 우릴 절대 놔주지 않을거야. 진실이 너무 끔찍하거든."

"무슨 진실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잊어버려. 우리가 만났던 사실도 다 잊어버리라구."

바네사는 비쩍 마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렇겐 못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어요."

고옴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당신이 알아야할지도 몰라. 어쩌면 전세계가 알아야할지도 모르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샛길 안으로 끌고 갔다.

"저 지도는 뭐죠?" 그녀의 첫번째 질문이었다.

"우리들이 게임을 하는 곳이야." 그가 마당 바닥에 어지럽게 그려진 분필선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한숨 쉬었다. "물론 항상 게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자네도 알겠지만 시스템은 썩어버렸거든. 그것은 문제의 본질과 이성적 해결 모두에 해당하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야. 처음에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어. 20년간을... 20년간을..."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운 듯, 자꾸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개구리를 가지고 놀았던 거야."

"하비, 당신 말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일부러 어렵게 말한 거에요 아니면 혹시 당신한테 치매끼가 있는 걸까요?"

바네사의 푸념에 그는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졌고, 신통하게도 효과가 나타났다. 시선은 여전히 세계지도에 고정한 채, 그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미리 정리한 다음에 말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과거에 대한 고백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권력다툼으로 세계가 파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1962년 세계의 권력자들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날을 잡았다. 그들로서도 멸망한 지구를 바퀴벌레들이 지배하게 된다는 생각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만약 지구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인간의 생존본능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라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권력자들은 밀실 안에 모였다. 지성적인 회담같은 것은 없었다. 공산당 정치국, 국회, 의회의 지도자들-세계를 지배하는 군주들-이 얼굴을 맞대고 하나의 거대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앞으로 발생하는 국제문제들은 특별위원회가 감독하며, 위원회는 정치적 취향에 휘둘리지 않고서 인류가 집단자살을 면할 수 있게 원칙들을 제시할 수 있는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인물들이 운영한다는 약속이 정해졌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지성과 윤리의 엘리트들-최고 중의 최고-로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의 지혜가 한 데 모여 인류를 새로운 황금시대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어쨌든 권력자들이 도출해낸 이론은 이렇게 결정나 버렸다.

바네사는 고옴의 짧은 설명이 그녀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 수백가지 질문들을 꾹 참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옴이 계속 말을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이론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어. 정말 멋지게 실현되었다구. 국제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특별위원회 멤버는 총 13명이었어. 러시아인 1명, 나를 포함한 유럽인 몇 명, -물론 요니요꼬씨도 멤버였지- 뉴질랜드인 1명, 미국인 2명... 우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집단이었어. 우리 중에서는 나를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도 2명 끼어있었고-"

이제 그녀는 고옴의 정체를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의 얼굴을 전에 어디서 봤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때는 그도 그녀도 무척 젊었을 때였다. 그녀는 어린 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그의이론을 무조건 암기하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조언은 권력자들간에 의견일치를 보도록 이끌었고, 안정적인 경제구조를 확립하고 신생국가들이 문화적 주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어. 물론 지금에 와선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엔 매혹적으로 들리는 일들이었다구. 그런데 사실 위원회 출범 초기부터 우리의 관심사는 주로 영토문제였어."

영토문제?

고옴은 앞에 있는 지도를 품에 껴앉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전세계를 알맞게 나누는 일에 도움을 주었단 말이야."그가 말했다. "작은 전쟁들을 통제해서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게 하고 독재정치가 세상에 범람하는 것을 막았어. 우리는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 되어, 더러운 때가 너무 두껍게 낀 곳이 생길 때마다 깨끗이 청소했어. 굉장한 책임감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아주 행복하게 받아들였어. 우리 13명이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각국 정부의 최고권력자들만 빼면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이 즐겁기까지 했다구."

바네사는 생각했다. 이것은 자기가 나폴레옹이라고 믿는다는 과대망상이 한 단계 더 발전한 수준이다. 고옴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친 게 확실하다. 영웅을 꿈꾸는 정신병이다! 그래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병이다. 사람들은 왜 그를 가둬놓는거지? 그는 남에게 피해를 끼칠 능력도 없는데.

"옳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갇혀있는 것은-"

"물론 그건 보안을 위해서야." 고옴이 대답했다. "어떤 무정부주의자 그룹이 우리가 활동하는 장소를 찾아내 우리를 납치해 버린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라구. 우리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처음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스템은 썩어버렸거든.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 중요한 결정을 내려줄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점점 더 스스로 고민해서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고, 점점 더 자신들의 권력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리는데만 탐닉하게 되었어. 위원회 활동이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단순한 조언자 역할을 벗어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권력자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

"재밌네요." 바네사가 말했다.

"한동안은 그렇게 잘 지냈지. 그랬던 것 같아." 고옴이 대답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갑작스럽게 무너졌어. 10년정도가 지나자 눌려왔던 압력이 터졌어. 이젠 위원회 멤버 절반이 죽어버렸거든. 골로바텐코가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어. 부캐넌-뉴질랜드인-은 매독으로 죽었는데, 본인은 끝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구. 노환으로 인해 요니요꼬, 베른하이머, 사우어버츠도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 이제 조만간 남은 우리들도 모두 저 세상 구경을 하겠지. 그래서 클라인이 우리가 죽었을 때 임무를 떠맡을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눈꼽만치도 신경을 안 써. 아무런 대꾸도 없다구! 우리는 그저 머슴생활이나 하고 있는거야." 그는 좀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권력자들한테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는 한, 그들은 행복한 거라구. 젠장..." 격앙됐던 목소리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다 때려칠거야."

바네사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아실현의 순간이 온 것일까? 고옴의 머리 속에 있는 정상적인 인격이 세계지배라는 허황된 이야기를 벗어던지려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의 회복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탈출하고 싶어요?"

고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내가 살던 집에 가보고 싶어. 바네사, 난 위원회 활동을 하느라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왔어. 정말 미칠 지경이야." 바네사는 생각했다. 그래, 그도 자기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거로군.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지구 평화를 위해 희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자신이 맡고 있다는 막중한 임무를 뽐내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말 않고 미소만 지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지! 상관안해. 나는 여길 나가고 싶어! 내가 바라는 것은-"

"목소리 좀 낮춰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고옴은 이내 이성을 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죽기 전에 작은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이야. 우리들 모두 같은 마음이지.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그가 말했다.

"뭐가요?"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거야?"

"하비, 당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요. 당신은 위험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치만-"

"잠깐만." 고옴이 말했다. "내가 이제까지 당신한테 해 준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거야? 내가 이 곳에서 곤경에 빠진..."

"하비 당신의 얘기 참 멋진 스토리에요..."

"스토리? 스토리라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지?" 그가 후끈 달아오른 상태에서 말했다. "오호라... 알겠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로군. 그렇지? 바로 그거였어! 나는 방금 자네한테 이 세상 가장 큰 비밀을 알려줬는데, 자네는 날 못 믿겠다!"

"당신이 거짓말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나를 미친 놈으로 봤다는 소리네!" 고옴이 화를 냈다.  그의 성난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그러자 건물들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고 빠르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당신이 한 짓을 봐." 고옴이 말했다.

"내가 했다니요?"

"우리가 위험에 빠지게 됐잖아."

"이봐요 H.G. 이렇게 된 건-"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당신은 여기 가만있어. 내가 뛰쳐나가서 놈들을 유인할테니까."

그는 뛰려다말고 그녀에게 돌아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그의 입술에 갖다댔다.

"내가 미쳤다면," 그가 말했다. "날 미치게 만든 건 바로 당신이야."

그는 짧은 다리로 꽤 빠르게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월계수 있는 곳에 다다르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멈추라고 소리쳤다. 고옴이 무시하고 계속 달리자, 경비병 하나가 총을 쐈다. 총알이 고옴 발 밑에 있는 세계지도의 해양부분에 구멍을 냈다.

"알았다구," 그가 소리쳤다. 발을 멈추고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Mea culpa(내가 잘못했어)!"

총소리가 멈췄다. 경비병들이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트자, 그들의 상관이 걸어나왔다.

"오, 시드니 당신이로군." H.G.가 미스터 클라인 대위에게 말했다. 대위는 부하들 앞에서 자기 이름이 아무렇게나 스스럼없이 불려지자 몸을 움찔했다.

"밤이 깊은 시간에 뭐하는 겁니까?" 시드니가 물었다.

"별구경." 고옴이  대답했다.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대위가 말했다. 바네사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옴이 서있는 넓은 마당을 거치지 않고서 그녀의 감방까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쯤은 비상경계령이 내려져서 길리멋이 그녀의 감방을 이미 체크했을 것이다.

"자네 말이 맞아." 고옴이 말했다. "난 혼자가 아니었어." 좀 전에 그녀가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니, 이제 그는 그녀를 배신하려는 것인가? "당신들이 가둬놓은 여자를 봤었는데-"

"어딨어요?"

"벽을 타고 넘어갔어." 그가 말했다.

"이런 젠장!" 대위가 말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그녀를 추적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그 여자한테 말을 해줬지." 고옴이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 벽 잘못 타다가 목 부러진다. 군인들이 철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낫다-"

철문을 열어준다. 이런 사실을 슬그머니 알려주다니, 고옴은 완전히 미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필리펜코-" 대위가 말했다. "하비를 숙소까지 모셔다 드려."

고옴이 투덜댔다. "난 어린애가 아냐. 고맙지만 혼자서도 갈 수 있어."

"하비와 같이 가라."

경비병이 H.G.를 데리고 사라졌다. 오랫동안 서성거리던 대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드니, 도대체 누가 똑똑한 아일까?"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또다시 마당은 텅 비어버렸다. 달빛에 물든 세계지도만 남긴 채.

바네사는 주위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은신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그녀를 추적하러 나간 경비병들이 지나갔던 길을 쫓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길리멋과 산책하던 낯익은 길에 이르게 되었다. 용기백배한 그녀는 계속 서둘러 통로를 따라가서 전자눈으로 감시하는 마리아상이 버티고 서있는 마당에 도착했다. 조각상의 눈길을 피하려 벽쪽에 바짝 붙어 몸을 웅크리고 걷다보니 결국 그렇게도 원하던 철문을 보게 되었다. 철문은 열려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노인이 불평했던 것처럼, 경비상태는 정말 형편없었고,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녀가 철문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자갈바닥을 구르는 부츠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어깨 너머로 살펴보니 손에 소총을 들고 있는 시드니 대위가 나무 뒤에서 걸어나왔다.

"제이프 부인, 초콜렛 좀 드시겠소?"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     *     *     *     *     *     *     *

"여기는 정신병원이더군요." 클라인이 그녀를 조사실로 데려오자, 그녀가 말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당신들은 날 여기에 감글할 권리가 없어요."

그는 그녀가 불평하는 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당신은 고옴에게 말을 했어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고옴도 당신에게 말을 했구요."

"그 사람이 나한테 말거는 게 어쨌다는 거죠?"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그 사람이 말거는 게 어쨌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도 당신한테 물었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 클라인이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녀는 그가 졸도하지나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제이프 부인, 난 꼭 알아야 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기가 자꾸 클라인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한테 이상한 말들을 해댔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는 미쳤어요. 내 생각엔 당신들도 죄다 미쳤어요."

"그가 당신한테 어떤 이상한 말을 했습니까?"

"그냥 쓸데없는 얘기."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제이프 부인." 클라인이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협조해 주세요."

"그가 말하길 여기에 어떤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대요. 그 위원회가 세계정치에 관련해서 결정을 내려주는 곳인데, 그가 위원회 멤버 중 한 명이래요. 뭐 대충 그런 얘기였어요."

"그리고나서?"

"그리고나서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해줬어요. 고옴, 당신은 정말 미친 것 같다고."

미스터 클라인이 억지로 미소지었다. "물론 그가 내뱉은 말들은 완전히 지어낸 얘깁니다."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바네사가 말했다. "미스터 클라인, 제발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나는 어엿한 성인여자-"

"미스터 고옴은-"

"그는 자기가 교수랬어요."

"그것도 그의 과대망상입니다. 미스터 고옴은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그는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지금 당신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건 정말 행운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누구?"

"그는 혼자가 아니랬어요. 나도 그의 동료를 목소리를 들어봤어요. 그 사람들도 전부 정신분열증이에요?"

클라인이 한숨 지었다. "각자 증상에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미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한창 때 그들은 모두 살인자였어요." 그는 말을 계속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잠시 주저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연쇄살인범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이 세상과 격리되어 여기에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곳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모두 무장을 하고-"

바네사는 경비원들이 왜 수녀로 변장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클라인은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내 말을 믿어요. 당신이 여기에 머무는 것을 언짢아하는 것만큼 내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럼 날 내보내줘요."

"우리측 조사가 끝나면요." 그가 말했다. "그때까진 협조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미스터 고옴이나 다른 환자들이 당신에게 어떤 계획같은 것을 같이 하자고 접근해 오면, 나한테 즉시 보고해 줘요. 그렇게 해주겠죠?"

"내 생각에는-"

"그리고 앞으로는 멋대로 여길 탈출하려는 행동을 자제해 주세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당신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일 합시다. 시간이 난다면."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잠이나 푹 자요."

*     *     *     *     *     *     *     *

잠이 오지 않아 그녀는 계속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그녀 앞에 놓인 여러가지 사실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터무니없는 것일까? 그녀는 몇가지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고옴이 알려준 것, 클라인이 알려준 것, 그녀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 그 어떤 것도 속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없었다. 모든 해결책들은 그녀를 이 곳까지 오게 만든 산길처럼 종착역이 어디가 될 지 흐리멍텅하기만 했다. 그녀는 낯선 길을 탐험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이 빚어낸 현재의 결과때문에 괴로웠다. 현재의 그녀를 보라. 피곤에 찌들고, 이리저리 치여다니다, 탈출의 희망도 없이 붙들려 있다. 하지만 낯선 길에 대한 모험심은 그녀의 천성이었다. 언젠가 전남편 로널드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괴팍한 모험심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만약 이제와서 그녀가 그녀의 괴팍한 본능을 애써 무시하려 든다면, 그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머리 속으로 쓸모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며 눈을 뜬 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그녀는 마음 속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바벨의 아이들 [2]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08 posted by 조재형

한 때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바네사의 형부가 그녀에게 알려준 사실에 의하면, 희극을 훌륭하게 공연하기 위해서는 배우가 철저하게 진지한 분위기로 연기해야 한다. 희극작가의 코믹한 의도를 표현한답시고 배우가 관객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려서는 안된다. 배우가 코믹함을 무책임하게 관객들에게 완전히 드러내 놓는 것은, 극의 리얼리티를 훼손시키는 것이고, 배우의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그녀는 완벽히 희극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수염달린 수녀, 주위를 감시하는 마리아상 등등- 현재의 웃기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통 일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 사람들은 그들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고, 그들에게서는 진심을 알아챌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에겐 이런 종류의 코미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부족했다. 이 사람들이 배우 선정에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연극무대에서 쫓아내 줄수록, 그녀는 더 한층 행복해질 것이다.

그녀가 미스터 클라인과의 심문을 끝내고 방에 돌아와보니, 사려깊은 누군가가 반쯤 남은 위스키 한 병을 놓고 갔다. 위스키의 도움으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 돼서 그녀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는 깨질듯 아팠고, 혀는 가죽장갑이라도 된 듯 텁텁했다. 잠시동안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 것인지 파악하느라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사이,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에 붙은 작은 창문이 바깥쪽에서 열렸다. 다급한 표정의 얼굴이 창문 구멍에 바짝 붙었다. 부드러운 턱수염에 매서운 눈을 가진 늙은 남자였다. "제이프 부인," 그가 말했다. "제이프 부인. 우리 잠깐 대화 좀 나눌래요?"

그녀는 문쪽으로 가서 창문 속을 보았다. 노인에게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풍겼다. 노인이 그녀보고 더 가까이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창문과 거리를 둬서 노인의 술냄새를 멀리했다.

"누구세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햇볕에 그을려 탄탄한 노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은 것도 같아 물어보았다.

그는 뭔가 기대감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가 말했다.

"내가 당신과 아는 사이였던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엔 당신은 너무 어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알지. 나는 당신이 철문을 지나 이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 때 당신을 말리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만."

"당신도 여기 죄수에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근데 나한테 좀 알려줘... 플로이드를 봤나?"

"누구?"

"플로이드는 여길 도망쳤어. 그저께."

"오," 바네사가 말했다. 대화의 요점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 때 사람들이 막 쫓아가던 사람이 플로이드인 건가?"

"그래, 맞아. 당신이 목격한 대로 그는 여길 몰래 탈출해 줄행랑을 친 거야. 그래서 사람들-바보자식들-이 황급히 그를 추적하느라 그만 철문을 열어놓고 나간거였구. 요즘엔 여기 경비상태가 정말 그지같았어." 그지같은 경비상태의 피해자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도 덕분에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돼서 기쁘긴해."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절박한 심정같은 것을 느꼈다. 슬픔같은 감정에 무너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심정. "우린 총소리도 들었어."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를 잡은거야? 그건 아니겠지?"

"확실히 보진 못했어요." 바네사가 대답했다. "어떻게 됐는지 보러 가보긴 했었는데요, 아무런 흔적도-"

"하!" 표정이 밝아지며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 그는 탈출에 성공했을거야."

바네사는 순간적으로 지금의 대화가 함정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인은 그녀를 심문한 사람의 끄나풀이고, 노인이 여기 온 것은 그녀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한 수작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그런 생각과는 반대였다. 그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삐에로 대장같은 그의 얼굴이 거짓감정을 꾸며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잘하는 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노인을 신뢰했다. 그 밖에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나가게 도와줘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나가야 돼요."

그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벌써?" 그가 말했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난 도둑이 아니에요. 이렇게 감방에 갇혀있긴 싫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신은 갇혀 있기 싫을거야." 그는 방금 전에 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발언을 조용히 질책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성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나는 말주변도 별로 없고..."

"어디선가 당신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모르세요?" 바네사가 물었다. "당신 얼굴이 무척 낯익은 것 같아서요."

"정말?" 그가 말했다. "정말 기분좋은 말이야. 우린 모두 여기에 있느라 완전히 잊혀진 줄로만 생각했거든."

"우리 모두?"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이 곳으로 끌려왔어. 그 당시 우리들 대부분은 이제 막 새로운 연구활동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플로이드가 도망간 것도 그 때문이야. 그는 남은 여생동안 단 몇 달 동안만이라도 연구를 하고 싶어했어. 나도 가끔씩은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그는 우울한 추억회상을 중단하고,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하비 고옴. 하비 고옴 교수야. 지금은 내 전공이 무엇이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지만."

고옴. 흔치 않은 이름이고, 그녀의 머리 속에 뭔가 떠오를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

"나에 관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어?"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일순간 거짓으로라도 말해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랬다간 여기에 와서 유일하게 만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었다.

"아니요... 확실히 기억나는 게 없어요. 뭔가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걸 알려줄래요?"

그러나 노인이 자신의 의문에 찬 과거에 대해 말해주려는 순간, 밖에서 소리가 났다.

"지금은 말할 수 없을 것 같군, 제이프 부인."

"그냥 바네사라고 불러주세요."

"그래도 돼?" 그녀의 호의에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바네사."

"나를 도와줄거죠?" 그녀가 말했다.

"최선을 다할께."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말야 나를 보더라도-"

"-모르는 척 할께요."

"좋았어. 그럼 안녕." 그는 문에 붙은 창문을 닫았다. 바네사는 통로를 따라 사라져가는 노인의 발소리를 들었다. 몇 분 뒤, 그녀의 감시인으로 일하는 길리멋이라는 이름의 친절한 듯 보이는 사내가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선심쓰듯 활짝 웃어주었다.

*     *     *     *     *     *     *     *

어제 마음 속에 있던 불만을 클라인에게 확 터놓고 표출했더니 약간의 결실이 있었다. 아침식사 후에 미스터 클라인이 그녀를 잠깐 불러서 이제부터는 주변을 산책해도 좋다고(물론 길리멋과 함께) 말해주었다. 덕분에 햇빛을 맘껏 쬘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새 옷들도 제공되었다. 사이즈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24시간을 넘게 입어서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뻤다. 그러나 새 옷이 지급됐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속옷까지 전부 갈아입을 수 있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미스터 클라인은 그녀를 지금 당장은 풀어줄 의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묵고 있던 작은 호텔의 우둔한 매니저가 바네사는 객실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려면 얼마나 걸릴까? 알아챘다고 한다면, 그는 어떤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그는 벌써 관계당국에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관계당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길가에 버려진 그녀의 차를 찾은 다음에, 그녀의 자취를 쫓아오다 이 의문의 요새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 속 희망은 오늘 아침 산책길에 무참히 부서져 버렸다. 그녀의 차는 월계수 나무가 있는 철문 옆 담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비둘기들이 차 지붕 위로 무수히 떨어뜨린 응가 덩어리들로 판단해 볼 때, 차는 지금의 위치에 밤새동안 주차돼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영국에 있는 누군가가 불현듯 그녀가 걱정되어, 그녀의 위치를 수소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 때쯤 되면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콱 죽어버렸을 것이다.

요새 안의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다 못해 미쳐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한 취미를 가진 것 같았다. 아침산책으로 바네사와 길리멋이 요새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그 중 하나는 고옴의 목소리였다-가 들려왔다. 목소리들은 전부 흥분해서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겁니다." 길리멋이 대답했다.

"우리도 저기 가서 구경할래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안됩니다."

"나도 게임 좋아하는데."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언제 한 번 게임해볼래요?"

이것은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요구했다가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러죠 뭐." 그녀가 말했다. 감시인의 신임을 얻는 것이 그녀에겐 유리할 수도 있었다.

"포커 어때요?" 그가 말했다.

"그건 한 번도 안해봤는데."

"내가 가르쳐줄께요." 그가 대답했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근처에서 게임하는 사람들은 이제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었다. 서로들 무엇인가를 격려하는 소리를 질러대는 것으로 봐서 무슨 경주를 벌이는 모양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잠잠해지는 것을 보니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했나보다. 길리멋이 그녀가 소리나는 쪽으로 귀 기울이는 것을 보았다.

"개구리에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구리경주를 벌이는 겁니다."

"궁금하다."

길리멋이 다정해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신경끄는 게 신상에 좋아요."

길리멋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일단 게임하는 소리에 솔깃해진 그녀의 머리에서는 개구리경주가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게임은 오후에도 계속됐고, 고함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가끔씩은 웃음소리도 나오기도 했고, 가끔씩은 언쟁을 벌이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게임을 하는 고옴과 그의 친구들이 개구리경주같은 하찮은 일때문에 말다툼하는 것을 들으니, 그들이 마치 어린애같았다. 그렇다고해서 더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라고 격려는 못할망정 그들을 유치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날 저녁 바네사의 문창에 고옴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말했다. "오늘 아침에 산책 나갔다가 당신 목소리를 들었어요. 오후에도 들었구요. 당신들은 정말 재미있게 지내는 것 같더군요."

"오, 게임하는 거 말이로군." 고옴이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 바쁜 날이었어. 경주할 게 어찌나 많던지."

"당신 친구들을 설득해서 나도 같이 게임해도 돼요? 여기서 가만히 있는 건 너무 지루해요."

"불쌍한 바네사.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실 그러는 건 불가능해. 플로이드가 도망간 것 때문에, 지금 당장은 우리 모두 과로했거든."

과로했다구? 그녀는 생각했다. 개구리 경주시키느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범죄자같은 것은 아니겠죠?"

고옴의 얼굴이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범죄자라구?"

"죄송해요..."

"아니야. 자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이해해. 우리가 이 곳에 잡혀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아냐, 우린 범죄자는 아니야."

"그럼 뭐죠? 저한테 무슨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어요?"

고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 대답했다. "만약 내가 자네한테 비밀을 말해주면," 그가 말했다. "우리가 여길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겠어?"

"어떻게 탈출해요?"

"당신 차. 요 앞에 주차돼 있어."

"나도 봤어요..."

"우리가 그 차에 타면, 운전해 줄꺼지?"

"당신들은 모두 몇 명인데요?"

"넷. 나도 있고, 이레냐도 있고, 모터스헤드도 있고, 골드버그도 있어. 물론 플로이드도 저멀리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는 자기가 알아서 처신하겠지. 안그래?"

"내 차는 작은 차에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우리도 작은 사람들이야." 고옴이 대답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말라비틀어진 과일처럼 쪼그라드는 법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 정도로 나이를 먹었어. 플로이드까지 해서 우리 나이를 전부 합치면 398살이나 된다구. 우리 모두 이 나이 되도록 모진 경험을 참 많이도 했어."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현명해지지는 못했어."

갑자기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고옴은 문에서 잠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는 짧게 중얼거렸다. "놈들이 그를 찾아냈어. 오 마이 갓. 놈들이 그를 찾아냈다구." 그리고서 그는 가버렸다.

바네사는 창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밑에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자매님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소동의 한가운데서 경비원 두 명의 손에 잡혀 몸부림치고 있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 보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도망갔던 플로이드였다. 밤낮으로 도망자 생활을 하느라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는데, 축 늘어진 얼굴은 때에 쩔어있었으며, 강렬한 햇볕에 과다하게 노출된 대머리는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서 바네사는 미스터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었고, 잠시 후 그가 마당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플로이드에게 다가가서 인정사정없이 호되게 화를 냈다. 바네사는 클라인의 말을 명확하게 들을 수는 없었는데, 클라인의 냉혹한 질책에 노인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녀는 창문에서 몸을 돌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간식으로 먹는 초콜렛이 목에 걸려 클라인이 숨막히게 해달라고.

[3]편으로 이어집니다.

바벨의 아이들 [1]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0:52 posted by 조재형
 스티븐 킹이 "호러의 미래"라고 격찬했던 클라이브 바커는 소설(피의 책), 영화(헬레이져), 그림, PC게임(언다잉), 액션피겨인형(Tortured Souls) 등 공포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포영화 감독/제작자로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이제까지 수십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입니다.

   지금 소개하는 단편 "바벨의 아이들"은 바커의 단편집 "피의 책(The Books of Blood)" 제5권에 등장하는 작품으로서, 스티븐 킹의 단편 "옥수수밭의 아이들"을 방불케하는 멋진 낯선 마을 이야기입니다.

바벨의 아이들 [1] by 클라이브 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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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바네사는 표지판 하나 붙어있지 않는 낯선 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일까?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오직 하나님 혼자서만 알 수 있을 것같은 낯선 길의 유혹을 말이다. 너무하다 싶을만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열광적인 그녀의 행동은 과거 여러차례 말썽을 일으키고는 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알프스에서의 조난사고. 강간당할 위기에 처했던 마라케치에서의 사건. 칼을 먹어삼키는 차력사의 수제자와 함께 했던 로워 맨하탄 벌판에서의 모험. 이렇게 과거의 쓰라린 경험들이 그녀에게 값비싼 교훈을 알려 주었건만, 목적지가 명확히 정해진 길과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낯선 길을 앞에 두게 되면, 그녀는 언제나 아무런 거리낌없이 낯선 길을 선택했다.

지금 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쪽 길은 키스노스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가는 길이다. 이 길은 과연 그녀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해줄 것인가? 수풀이 우거진 울퉁불퉁한 맨땅을 달리는 드라이브-우연히 야생염소와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와 도로가 지나는 절벽에서 바라보는 푸른 에게해의 풍경같은 것은 빼고 말이다. 에게해 풍경쯤이야 그녀가 묵고 있는 메리카베이의 호텔방에서도 심지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반면에 그녀가 지금 멈춰있는 교차로에서 뻗어나가는 나머지 길들은 목적지가 너무나도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한쪽은 베니스풍 요새 유적이 있는 로트라로 가는 길. 다른 한쪽은 드리오피스로 가는 길. 로트라든 드리오피스든 그녀는 어느 쪽도 방문해 본 적이 없었지만, 둘 다 매력적인 마을이라는 소리는 들었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너무나도 뻔히 정해져 있다는 사실때문에 그녀는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교차로의 나머지 이쪽 길은 어디로 가게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로 막막한 길이다- 적어도 확실하게 그녀를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집스럽게 이쪽 길로 차를 몰았다.

도로(급속도로 오솔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쪽으로 보이는 풍경은 무척 지루했다. 차로 달리면서 지켜보고 있자니 당초 예상했던 염소들과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식물들은 영양실조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섬은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그림같이 멋진 화산이 있는 산토리니나 호화로운 해변과 그보다 몇 배는 더 호화로운 호텔들로 가득한 마이코노스-사이클라데스의 타락한 소돔이라 불리는 곳-와는 다르게, 키스노스는 여행객에게 자랑할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때문에 그녀는 이 섬을 찾아온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시끌벅적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은 그녀에게 더욱 완벽한 평온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하지만 왼편에 늘어선 낮은 언덕들쪽에서 들려온 고함소리는 평온함을 추구하고픈 그녀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절박한 경고를 담고 있는 고함소리. 털털거리는 그녀의 렌트카 속에서도 고함소리는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고물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또한번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이번엔 총소리도 함께였다. 잠시 침묵 후에 두번째 총성이 터졌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차문을 열고나와 오솔길에 발을 내딛었다. 바깥 공기는 야생화들의 향기로 가득했다. 차 안을 맴돌던 역겨운 휘발유 꼬랑내를 말끔히 날려버렸다. 자연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세번째 총소리가 났다. 그녀는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남편이었더라도 몰라봤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잠시 후 봉우리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총성이 서너발 울려퍼지고 나서, 그 사람을 추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총이 또 한 발 발사됐다. 총을 쏘는 모습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겨냥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추적자들은 쫓고 있는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멈추게 하려고 경고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추적자들의 모습은 조금 전의 도망자만큼이나 희미했지만, 한가지 불길한 점이 있었다. 추적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언덕에 올라 저들이 벌이는 술래잡기의 정체를 알아볼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그녀는 차 옆에 서서 망설였다. 총소리는 확실히 유쾌하지 못한 소리였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녀가 지금같은 미스테리의 현장에서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일이 가능한 일이던가? 검은 옷의 사람들은 사냥감을 쫓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동안 그들이 떠난 자리를 응시하더니, 가능한 한 자세를 낮추면서 그들이 있던 지점을 향해 출발했다.

지형이 눈에 띄는 특징없이 단조로워서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모래투성이 언덕들은 어느 것이나 죄다 똑같아 보였다. 나무들 사이를 돌고 돌아 거의 10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도망자와 추적자들이 사라진 지점이 어디였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그녀는 온통 잡풀이 무성한 언덕 위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함소리와 총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 소리라곤 갈매기소리와 발 아래에서 성가시게 울려퍼지는 매미소리뿐이었다.

"씨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야?"

그녀는 근처에 있는 가장 큰 언덕을 골라 모래흙에 익숙치 않아 고생하고 있는 발을 이끌고 꼭대기까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잘하면 차를 두고 온 오솔길을 발견하든지 아쉬운대로 바다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만약 절벽들이라도 보게 되면, 차를 두고 왔던 지점을 어림잡아 정확한 방향을 정해서 쭉 가보면 얼마 안있어 오솔길에 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언덕들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어느 게 어느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똑같은 모양의 봉우리들이 오후 햇살 속에 불쑥 솟아나 있었다. 다급해진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머리 위로 올려 보았다. 언젠가 바람이 바다쪽에서 불어온다고 주워들었었기 때문에 바람방향만 알게 되면 정확한 탈출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바람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만큼 약하게 불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오솔길이 있을법한 방향을 결정하고서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돌릴 틈 없이 5분동안 언덕들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힘겹게 봉우리에 올랐어도, 그녀는 자신의 차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대신 아까 전의 언덕 꼭대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발견되었다. 하얀색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감시탑이 서있고 높은 벽이 건물들 주위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새처럼 보였다. 도망자와 추적자들 모두가 이 곳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건물들 속의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볼 엄두도 못내고 무턱대고 이 황무지를 배회하다가 영원히 그녀의 차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되지는 않을까? 게다가 건물들 모양새를 보니 별로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밝은 색으로 칠해진 벽 위로 삐죽 나온 잎사귀 한 장으로 봐서는 그 안에 정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원한 그늘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이제까지 걸어오던 방향을 바꿔 그녀는 건물촌의 입구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오래된 철문 앞에 도착했다. 안도감이 들면서 피로가 밀려왔다. 언덕들을 헤매느라 지친 허벅지와 정강이가 부르르 떨렸다.

거대한 양쪽 철문 중 한 쪽이 열려 있어서, 그녀는 그리로 들어갔다. 철문 뒤에 펼쳐진 마당은 잘 다듬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비둘기 똥이 얼룩져 있었다. 똥 싼 장본인들 중 몇몇이 나무 위에 앉아서 그녀를 보고 울어댔다. 지붕이 씌워져 있는 길들이 마당으로부터 뻗어나가 건물들이 몰려있는 미로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험을 앞에 두고 낯선 길을 좋아하는 그녀의 괴팍스런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고, 맘에 드는 길을 하나 골라 걸어갔다. 햇빛을 피해 길을 걸어가니 평범한 모양의 벤치들이 늘어선 통로를 걷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작은 울타리 벽이 둘러쳐진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울타리 벽 한 쪽엔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벽이 움푹 들어가 있는 부분에 성모 마리아상이 서있었다. 그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아이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린 채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조각상을 보고 있으니, 이제까지 품어왔던 의문이 확 풀렸다. 외진 장소, 고요함, 단정하게 꾸며놓은 마당과 길. 이 곳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10대 시절부터 쭉 무신론자였고, 지난 25년간 교회 문턱을 넘어본 적도 거의 없다. 현재 41살이 된 그녀가 과거를 따져보니, 이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침입자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종교사원을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단지 오솔길로 가는 방향을 찾으려는 것 뿐이다. 이 곳에서 사람을 만나 길을 물어보고, 그 즉시 떠나면 그만이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조각상을 지날 때, 그녀는 누군가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널드와 함께 했던 결혼생활에서 그녀가 터득한 민감한 육감이 제공하는 믿을 수 있는 정보였다. 석달 전에 끝장난 그녀의 결혼생활 내내 화이트홀이나 워싱턴의 비밀정보부 뺨치는 별의별 방법으로 그녀를 감시하던 남편의 의처증으로 인해 그녀의 육감은 단련돼왔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수많은 눈이 그녀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들의 작은 창문들을 곁눈질로 살펴 보았고, 창문 중 한 군데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도 같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소리쳐 부르지는 않았다. 여기엔 무언의 의식, 침묵의 서약같은 것을 철저히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과 대화하려면 손짓, 발짓을 총동원해야하는 걸까? 뭐, 그렇다면 그렇게하는 거지 뭐.

그녀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여럿이서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통로 아래쪽에서는 철문이 쿵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두근 춤을 추며 온몸을 흐르는 핏 속에 경고신호를 보냈다. 흥분한 심장이 그녀의 얼굴에 튀어올라올 지경이었다. 피곤한 두 다리가 또다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급히 뛰어오는 발소리의 주인공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때 마리아상의 머리가 슬쩍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리아상의 푸른 눈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온 그녀의 행적을 쭉 지켜봤던 것이며, 지금의 그녀의 등 뒤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장승처럼 꼿꼿이 서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 성모상이 있으니 섣불리 도망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됐건 하늘로 솟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수도원 그늘 속에서 수녀님 3명이 수녀복을 펄럭거리며 나타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녀들의 턱에 난 턱수염과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반짝거리는 자동소총은 수녀님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환상을 깨뜨려 버렸다. 그녀는 어색하고 이상한 수녀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수녀들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수녀들은 한마디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수녀처럼 차려입은 중무장한 남자들이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거룩하신 자매님들 셋이 -이 사람들은 그녀가 마치 로마 교황청을 박살낸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다루었다- 그녀를 마당에서 끌어내고는 몸수색을 샅샅이 실시했다. 좀 투덜대기는 했어도 그녀는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순순히 응했다. 수녀들이 겨누고 있는 총구가 한 순간도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복종만이 최선의 행동일 듯 싶었다. 몸수색이 끝나자 수녀들이 그녀에게 다시 옷입을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가서 감금해 버렸다. 잠시 후 수녀 한 명이 맛좋은 렛시너 포도주 한 병과 함께 그녀가 시카고에서 맛 본 적 있는 속이 깊은 접시에 담긴 피자 한 판을 가지고 왔다. 오늘 일어난 석연찮은 일들에 대해 자축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어찌됐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신세가 된 그녀로서는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     *     *     *     *     *     *     *

"착오가 있었던 것 같네요." 몇시간에 걸친 심문 끝에 반들반들한 콧수염의 남자가 바네사의 진술에 호의를 나타냈다. 바네사는 이 남자가 비록 요새 경비대 제복같은 것을 입고는 있지만, 여자 수도원장이 되기 위한 실적을 쌓으려고 불쌍한 민간인을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야망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그의 사무실-진짜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은 별다른 장식이 꾸며져 있지는 않았는데,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장식품은 인간 해골이었다. 해골은 아래턱이 없었는데, 책상 위에 앉아서 텅빈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콧수염 남자는 옷을 제법 맵시나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비 넥타이는 반듯하게 매었고, 바지에는 칼같은 주름이 잡혀있다.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영어를 말했는데, 그녀는 그의 말 속에 담긴 색다른 억양을 감지했다. 프랑스인? 독일인인가? 그가 책상 서랍에서 초콜렛을 꺼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그가 스위스사람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로는, 그의 이름은 미스터 클라인이었다.

"착오라구요?" 그녀가 말했다. "당연하지. 당신 말대로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구요!"

"우리는 당신 차를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묵고 있다는 호텔쪽도 체크해 봤습니다. 이제까지 한 당신의 진술은 사실이더군요."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미스터 클라인이 우호의 표시로 초콜렛을 건네주었지만, 그녀는 전혀 우호적인 상태가 될 생각이 없었다. 이 곳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 속 수많은 방들 중 하나, 별다른 장식도 없는 밋밋한 작은 방에 시계도 없이 갇혀 있어 정확히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현재 시간이 밤이 꽤 깊은 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미스터 클라인과 그의 부하랑 함께 하는 심문시간이 너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그녀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다. "늦게라도 당신이 내 말귀를 알아듣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제 나를 호텔로 돌려보내주는 거죠? 피곤해 죽을 지경이에요."

클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그가 말했다. "허락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

바네사는 벌떡 일어나서, 격한 동작으로 의자를 뒤엎어 버렸다. 의자소리가 난 지 1초도 안되서 문이 열리더니 턱수염 자매님 하나가 권총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괜찮아, 스타니슬라우스." 클라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제이프 부인이 내 목을 절단낸 것도 아닌데 뭐."

스타니슬라우스 자매님은 문을 닫고 나갔따.

"왜?" 바네사가 말했다. 그녀의 분노는 경비원의 출현때문에 좀 수그러 들었다. "왜 안된다는 건데?"

클라인은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한 시간 전부터 놓여있던 커피 주전자에 손을 대보고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지 살펴봤다. 그는 컵에 커피를 따르고나서 대답했다. "제이프 부인, 내 생각에는 당신이 지금 상황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가능한 한 신속하게 당신을 풀어드리겠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약속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상황을 그저 게임이라고 생각하세요... " 그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 사람들은 원래 게임을 좋아하잖습니까."

"누가 그 따위 소릴 해요?"

클라인이 표정을 찡그렸다. "신경쓰지 마요."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가 당신의 기억을 없애기 위해 괴롭히는 일도 적어질 것입니다."

그녀는 해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게 하나도 이해가 안돼." 그녀가 말했다.

"굳이 이해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미스터 클라인이 대답했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제이프 부인, 당신은 이 곳에 발을 들여놓는 안타까운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당신이 들어오도록 방치한 실수를 한 것이구요. 평상시에는 당신이 목격한 것보다 우리의 경비태세가 훨씬 철저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경계가 느슨해진 순간에 이 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이봐요," 바네사가 말했다. "나는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가서 남은 휴일을 평화롭게 끝마치는 것 뿐이라구요." 심문관의 얼굴표정으로 보건대, 그녀의 호소는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거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짓도 않했어요. 아무 것도 보지 않았구요. 도대체 뭐가 문제에요?"

미스터 클라인이 일어섰다.

"문제라," 그는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문제가 하나 있긴 하지." 하지만 그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부하를 불렀다. "스타니슬라우스?"

문이 열리고 수녀가 들어왔다.

"제이프 부인을 방으로 모시고 가주게."

"우리 대사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분노로 불타오르며, 바네사가 말했다. "나한테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구요!"

"제발 부탁입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소리 지른다고 아무 것도 도움이 될 건 없어요."

수녀가 바네사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권총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같이 가실까요?"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안가면 안될까?" 그녀가 말했다.

"장난치지 마쇼."

[2]편으로 이어집니다.

K박사의 연구 [2] by 김동인

읽을꺼리 2007.05.09 00:47 posted by 조재형

오후 한 시쯤 손님들이 왔네, 원래 착하고 교제성이 없는 박사는 정신을 못 차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일변 웃으며 연거퍼 복동아 수남아를 찾으며, 조수들을 꾸짖으며 어리등등한 모양이야.

신사 숙녀 한 오십 명쯤 초대한 사람이 거진 모인 뒤에 두 시에 식당은 열렸네, 박사의 취지 설명이 있었은 뒤에 I신문사 주필 W씨의 답례로써 시식회가 시작되었어, 그런데 시작되자마자 어떤 신문기자 한 사람이 박사를 찾데그려.

"K박사."

"네?"

"이 ○○병에서 향기롭지 못한 내음새가 좀 납니다그려."

"?"

이때에 박사의 얼굴의 변화는 내 일생에 잊지 못하겠데, 문득 하얘지더니 웃음 비슷한 울음 비슷한 변한 얼굴을 하더니 별한 신음을 하면서 벌떡 일어서서 연구실로 가, 그래서 나도 따라가려니까 박사는 가던 발을 다시 돌이키며 나를 붙잡더니 내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리 작은 소리도 아니야, 그런 소리로써

"야단났네그려, 스캇톨이나 인돌의 반응은 없었지?"

내야 인돌이 뭐인지 스캇톨이 뭐인지 아나, 박사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더구나 반응인지야 알 리도 없잖아.

그래도 박사의 그 표정을 보니깐 모른다고 그러지도 못하겠데그려, 그래서

"확실히 없었습니다."

고 그랬네, 그러하니깐 그래도 아직 미안한지

"야단났네, 큰일났어."

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데그려.

"아 선생님 걱정하실 게 뭡니까 지금 모두들 맛있게 잡숫는데- "

사실 말이지, 한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기는 했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맛있게 먹고 있어. 내 말을 듣고 그 양을 보더니야 박사는 마음이 놓이는지 숨을 내어쉬며-

"좌우간 반응은 없었겠다. 확실히 없었어. 여보게 C군, 그 성명서 돌리게."

하데그려.

문제는 이게 문제일세. 한창 맛있게들 먹는 판에 당신네들이 먹고 있는 것이 똥이외다고 알게 하여 놓으면 무사할는지 이게 의문이야. 그러니 안 돌릴 수도 없고 그래서 그 인쇄물을 갖다가 복동이와 수남이를 시켜서 돌렸네그려. 그러니깐 어떤 사람은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어떤 사람은 식탁 위에 놓고, 어떤 사람은 읽어 보는데 나는 슬며시 빠져서 다른 방으로 가버렸지, 달아는 났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깐 무엇이 왹왹하며 콰당콰당해 뛰어가 보았지. 하니깐 부인 손님 두 사람과 신시 한 사람이 입에 손수건을 대고 게워내는데, 그리고 몇 사람은 저편으로 변소변소 하면서 달아나고,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중독되었다고 의사를 청하라고 야단인 가운데 박사는 방 한편 모퉁이에 눈만 멀진멀진하면서 서 있데그려. 이게 무슨 꼬락서닌가 망신이데그려. 그래서 박사에게가서 웬 셈입니까고 물었더니 박사는 우들우들 떨면서

"야단났네, 망신이야, 큰일났어, 야 수남아."

하더니, 우물쭈물 저편 방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데그려. 그래서 하는 수 있나. 그래도 이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해서 내가 몰래 진토제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 있기에 내다가 임시 조수며 복동이 수남이를 시켜서 (초대 받았던 의사 몇 사람까지 협력해서) 간호들을 한 뒤에 박사는 몸이 편치 않아서 못 나온다고하고 사과를 한 뒤에 손님들을 보내버렸지.

시식회는 이렇게 흐지부지 끝이 났네그려.

그런 뒤에 박사의 침실에를 가 보았더니 박사는 몸에 신열까지 나고 헛소리를 탕탕하고 있지 않겠나. 나도 미안스럽기도 하거니와 딱하데, 그래서 얼음을 갖다가 박사의 머리를 식히면서 한참 간호하니깐야 정신을 좀 차려. 그리고 연하여 야단이다, 망신이다, 어쩌나를 연발하는데 거북상스럽데, 한참 정신없이 눈을 한군데만 향하고 있다가는

"여보게 C군 이 일을 어쩌나, 야단났네그려, 이런 괴변이 어디 있겠나?"

하고 하는데 내니 무어라고 대답하겠나,

"뭘하리까?"

이런 대답은 하지만 참 거북상스럽기가 짝이 없데. 소위 사회의 일류라는 사람들을 초대하여다가 똥을 멕여 놓았으니 이런 괴변이 어디 있겠나, 세상사에 어두운 박사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뜻도 안하였겠지만 나 역시 뜻밖일세그려. 아니 나는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예감은 했었지만 박사의 그 걱정하는 태도를 보니깐 예상 이외로 나도 겁이 나데그려. 내 생각으로는 대상인 피해자(?)를 개인 개인으로 여겼지 그것이 합한 <사회>라는 것을 생각 안했네그려. 그러니 이제 사회의 명사 숙녀들을 똥을 멕여 놓았으니 말썽이 안 생기겠나.

그러는 동안에도 연하여 신문기자가 찾아오며 전화가 오는 것을 복동이를 시켜서 모두 거절하여 버린 뒤에 그날 오후 종일과 밤을 새워 가지고 협의한 결과 말썽이 좀 삭아지기까지 박사와 나와 어떤 시골에 한두달 숨어 있기로 작정을 하였네, 그리고 목적지는 박사의 토지가 몇백 정보 있는 T군의 박사의 사음의 집으로 작정하였네그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첫차로 그리로 뺑소닐 쳤지.

그런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신문에서 꽤 왁자지그르할 줄 알았더니 비교적 말이 없데그려. I신문 잡보란에 조그맣게 ○○떡 시식회라 하는 제목 아래 간단히 기사가 날 뿐 그 굉장한 사건이며 ○○병의 원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어, 아마 신문사에서도 창피스럽던 모양이야. K역에서 내려서 T군을 가는 자동차를 기다리기 위해서 어떤 여관에서 묵은 뒤에 이튿날 아침에야 우리는 그 신문기사를 보았는데 이 기사를 보더니 박사는 적이 안심이 되는지 처음으로 조금 웃데그려. 그러더니 갑자기 T군은 그만두고 그 역에서 머지 않은 Y온천장으로 가자데그려, 내야 이의가 있을 리가 있나. 온정으로 갔지.

온정에서도 박사는 생각만 나면 그 이야기만 하자네그려.

"C군 스캇톨의 반응은 확실히 없었지? 혹은 좀 있었던가. 왜들 토해. C군 반응은 확실히 없었나? 아무래도 있은 모양이야."

"반응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은 없었다해두 게우는 게 당연하지요. 누가- "

"C군!"

박사는 이런 때는 꼭 역증을 내데그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내 성미도 그리 곱지는 못하니까 막 쏘아주지.

"똥 먹구 구역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똥?"

한 뒤에는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한참 그치데그려, 그러다가

"자네 오핼세. 과학의 힘으로 부정한 놈은 죄 없애버린 게 왜 똥이야. 오핼세."

한 뒤에는 또 이유도 없이 하하하하 웃지.

"선생님, 그렇지 않어요. 분석해 보면 아무리 정한게라 해두 똥으로 만들은 것을 먹고야 왜 구역을 안해요? 세상사는 그렇게 공식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깐요."

"공식? 아무리 생각해두 자네 오해야 그렇진 않으리."

"그럼 왜들 게웠어요."

"글쎄 반응은 없었는데, 혹은 있었든가...... "

단순한 박사는 아직껏 손님들의 게운 이유를 스캇톨이나 인돌이 좀 남아서 대변 특유의 내음새가 난 데 있는 줄만 알데그려.

한인은 연정을 <오매불망>이라고 형용했지만 박사와 ○○병의 새야말로 오매불망인 모양이야. 우두커니 앉았다가도 문득 스캇톨이 있었나 한숨을 하고는 쉬고 하네, 자다가도 세척이 부족한 모양이야하면서 벌떡 일어나네그려, 곁에서 보는 내가 참 미안하고 딱하데, 너무 민망스러워서,

"선생님 인전 그 생각은 잊어버리시구려."

하며는

"잊지 않자니 헐 수 있나?"

하고는 또 한숨을 쉬네, 여간 민망스럽지 않데, 사실 말이지 귀한 발견이야. 귀한 발견이 아닌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헛되이 땅속에서 썩어 버리는 폐물 가운데서 평균 오할 약의 귀중한 자양품을 얻어낸다하는 것은 인류 경제 문제의 얼마나 큰 발견인가. 우리의 인습 때문에 비위가 받지를 않으니 말이지 그것을 만약 어떤 사람이 원료를 비밀히 해가지고 대량으로 만들어서 판다할지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큰 공헌인가. 그래서 어떤 날 저녁을 먹다가 박사에게 그 떡을 학분광의 나라 독일 학계에 발표해 보면 어떻느냐고 물어 보았지. 하니깐 대답도 없어. 그리고 나도 그 말만 한 뿐 잊어버리고 말았었는데 박사는 잊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날 밤 한잠 들었다가 목이 너무 말라서 깨어서 물을 먹으려는데 박사가 그냥 안 잤댔는지

"독일도 틀렸어."

하데그려. 나야 자다 주먹이라 무슨 뜻인지를 알겠나. 그래서 그저 네네 하면서 물을 먹고 다시 누우니까

"○○떡은 독일도 자미가 없어."

하고 다시 주를 놓데그려. 그 소릴 들으니까 펄덕 졸음이 천 리 밖으로 달아나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즈음 늘 민망스럽던 판에 박사가 밤에 잠도 안 자고 그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니깐 막 눈물이 나오려데그려. 그래서 왜 그렇느냐고 물으니까

"독일서는 공기에서 식품을 잡는 것을 연구해서 거진 성공했다니까 이것은 그다지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 못될 것 같어."

하면서 또 한숨을 쉬데그려. 나도 할말이 없어서 그것도 그렇겠읍니다 하고 다시 먹먹히 있노라니깐 또 찾지 않겠나-

"C군 자나?"

"네?"

"안 자나"?

"네?"

"일본은 어떨까 나라는 좁고 백성은 많은...... "

"말씀 마십쇼. 일인에게는 소위 결백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そ うへ入(똥 먹어)라는 것은 욕이 아닙니까. 어림도 없읍니다."

"그래도 일인들은 더러운 목간물을 벌걱 벌걱 들어마시지 않나?"

"그게야- 그래두 ○○떡은 안 먹습니다."

"안 먹을까...... "

"안 먹지 않고요."

박사는 또 한숨을 쉬네.

"선생님 그것을 미국에다 발표해 보면 어떻습니까."

"미국놈은 먹어 줄까?"

"먹을 건 모르지만 그놈들은 아무것이든 신기한 것과 과학이라는 데는 머리를 싸매고 덤벼드는 놈이니깐 혹은 좋다 할지도 모르지요."

"글쎄- "

이러한 말을 주고받고 하다가 아무런 해결도 얻지 못하고 자고 말았지.

온정에는 한 달 남짓이 묵어 있었는데 박사의 ○○떡에 대한 집착은 조금도 줄지 않데그려. 그 지독한 집착심이야...... 이러구러 한 달 남아나 지난 뒤에 인제는 돌아가자고 온정을 출발해서 K역까지 왔다가 여기까지 온 이상에는 박사의 토지도 돌아볼 겸 T군까지 다녀 가자는 의논이 생겨서 우리는 T군으로 갔었네그려.

양력 이월 초승인데 혹혹 쏘는 바람을 안고 자동차로 두 시간이나 흔들리면서 T군까지 가니깐 정신이 다 없어지데, 눈이 보이지를 않고 다리가 뻗뻗하며 코가 굳어진 것 같고 몸의 혈액 순환까지 멎은 것 같어. 그것을 겨우 자동차에서 내려서 (면장 노릇 하는) 박사의 사음의 집을 찾아갔지. 머리가 휑한 정신이 없는 것을 그 집을 찾아 들어가니깐 반갑게 맞으면서 자기네들은 모두 건넌방으로 건너가며 큰방을 우리에게 내어주어. 그래서 우리는 들어가서 다짜고짜로 자리를 펴고 누웠지.

방을 절절 끓여 놓고 두어 시간 자고 나니깐 정신이 좀 들데, 박사도 그때야 정신이 드는지 부시시 일어나더니 토지를 돌아보러 나가자데그려. 세수들을 하고 옷을 든든히 차린 뒤에 사음의 아들을 불러서 앞세우고 그 집을 나서려는데 개가 한 마리 변소에서 뛰쳐나오면서 컹컹 짖겠지. 보니깐 변소에서 똥을 먹고 있던 모양이라 입에 잔뜩 발라가지고 그 더러운 입을 쩍쩍 벌리며 따라오데그려, 사음의 아들은 개를 쫓아 버리노라고 야단인데 가는 박사에게 개도 ○○떡을 먹다가 온다고 그러니깐 박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에 더러워 C군 실험실과는 다르네. 이놈의 개 오지 마라 가!"

하며 슬슬 피하며 나가는 모양은 요절하겠데. 박사의 토지라는 것은 꽤 크데. 이백 몇 십 정보라는데 말은 쉽지만 눈으로 덮인 무연한 벌판인데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좀체 모르겠데. 그것을 한 번 다 돌아보고 사음의 집까지 돌아오니깐 벌써 저녁때가 되었어.

몸도 녹일 틈이 없이 저녁상을 들여왔데그려. 시장하던 김이라 상을 움켜안고 먹지.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개고기가 있데그려. 그래서 밥은 제쳐놓고 개고기만 뜯어먹고있지. 박사도 괜찮은 모양이야. 글쎄 한 달 남아를 일본 여관에 묵노라고 고기는 맛까지 거의 잊게 되었네그려. 그런 판이니까 오래간만에 만나는 고기라 박사도 한참 고기만 뜯더니

"C군."

하고 찾데그려.

"왜 그러십니까."

"이런 시굴서도 암소를 잡는 모양이야."

".......?"

"고기 맛이 썩 부드러운데 암소고기야."

"선생님 개고기올시다."

"개?"

"아까 그 짖던 개요. 돌아올 때는 안 보이지 않습디까."

"아까 그? 그 똥 먹던?"

"그럼요."

박사는 덜컥 젓가락을 놓데그려. 그러더니 얼굴이 차차 하얘지더니 히끈 저편으로 돌아 앉겠지.

그러고 힉힉 두어 번 숨을 들여쉬더니 확하니 모두 토해 버리데그려.

왜 그러십니까고 나도 먹던 것을 집어치우고 박사에게로 가서 잔등을 쓸어주니까 가만 있게, 가만 있게 하면서 연하여 힉힉 소리를 내데그려. 그것을 한 십분 동안이나 쓸어주니깐 좀 진정되는지

"안됐네. 이것 주인 몰래 치우세."

하면서 손수 걸레로 모두 훔쳐서 문밖에 내어놓기에 나는 그것을 집어다가 대문 밖에 멀리 내버리고 도로 들어오니깐 박사는

"에 속이 편찮어, 야- 수남- 야- 상치워라."

하더니 베개를 내리고 벌떡 눕고 말데그려. 상을 치운 뒤에 사음이 불을 켜 가지고 들어왔는데 박사는 돌아누운 대로 그냥 모른 체하기에 몸이 곤하신 모양이라고 사음을 내보내고 나도 베개를 내려서 드러누웠더니 한참있다가 박사가 돌아누운 대로 찾아

"C군."

"네?"

"개고기하고 돼지고기하고 어느 편이 더 더러울까?"

"글쎄 돼지가 더 더러울걸요."

"그럴까. 둘 다 마찬가지겠지. 마찬가지야, 소고기두 마찬가지구."

혼잣말같이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또 잠잠해 버려. 나도 곤하던 김이라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 좌우간 나는 입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는데 아마 박사가 그렇게 한 게야. 자리를 모두 펴고 옷을 벗겨서 이불속에 집어넣었데그려. 내야 알 리가 있나. 이튿날 아침에 깨어서야 처음 알았지.

이튿날 아침 눈을 부시시 뜨니깐 박사는 언제 깼는지 벌써 깨어 있다가 내가 눈을 뜨는 것을 보고 C군 하데그려. 그래서 대답을 하니까

"일인도 안 먹을 께야."

또 자다 주먹일세그려.

"네?"

"○○병은 일인도 안 먹을 께야.목간물은 벌걱 벌걱 먹어두."

"네- 아마- "

"돼지고긴 좋아두 개고긴 못 먹겠거든. 자네 개고기 잘 먹나?"

"육중문왕(肉中文王)입니다."

"그럴 께야."

하더니 한숨을 내어쉬어.

그때부터 박사의 입에서는 ○○병의 문제는 없어졌네그려.

그뒤에 집에 돌아와서도 박사는 ○○병의 문제는 집어치우고 전자와 원자의 관계의 연구를 쌓는 중이니깐 이제 언제 거기 대한 무슨 발명이나 발견이 나올 테지. 그리고 이번 것은 그 ○○병과 같이 실패에 안 돌아가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네.

이것이 C가 들려준 바 K박사의 연구의 성공에서 실패로 또다시 일전(一轉)하여 회개까지의 경로였었다.

< The End >

K박사의 연구 [1] by 김동인

읽을꺼리 2007.05.09 00:45 posted by 조재형

   김동인(1900~1951)님은 한국 소설계의 거장입니다. 학교 다닐 때 김동인님의 단편 "광염 소나타"를 읽고 뜨겁게 감동했었습니다. 그 작품 속에는 스티븐 킹이나 클라이브 바커 전혀 부럽지 않은 엄청난 광기의 세계가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도 이런 작가가 있었다니!

   지금 소개하는 "K박사의 연구"는 김동인님의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유감없이 표출된 굉장한 소설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K박사의 연구에 동참합시다. 두려워 말고~.

K박사의 연구 [1] by 김동인

(1929년 12월. 잡지 "신소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네 선생은 이즈음 뭘하나?"

나는 어떤 날 K박사의 조수로 있는 C를 만나서 말 끝에 이런 말을 물어 보았다.

"노신다네."

"왜?"

"왜란?"

"그새 뭘 연구하고 있었지?"

"벌써 그만뒀지."

"왜 그만둬?"

"말하자면 장난이라네. 하기야 성공했지. 그렇지만 먹어 주질 않으니 어쩌나."

"먹다니?"

"글쎄. 이 사람아, 똥을 누가 먹어."

"똥?"

"자네 시식회에 안 왔었나?"

"시식회?"

C의 말은 전부 <?>였었다.

"시식회까지 모를 적에는 자네는 모르는 모양일세 그려. 그럼 내 이야기 해줄께 웃지 말구 듣게."

이러한 말끝에 C는 K박사의 연구며 그 성공에서 실패까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     *     *     *     *     *     *     *     *     *     *

         맬더스라나.

        [사람은 기하학급으로 늘어 가고 먹을 것은 수학급으로밖에는 늘지 못한다]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지 않나. 박사의 연구도 이 말을 근본삼아 가지고 시작되었다네.

어떤 날(여름일세) 박사는 책을 보고 있고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같이 앉았었노라는데 박사가 머리를 번듯 들더니

"자네 똥 좀 퍼오게."

하데그려.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나. 그래서 똥이란 대변이느냐고 물었더니 대변 아닌 똥도 있느냐고 그래. 그래서 무슨 검사라도 할 일이 있는가 하고

"뉘 변을 말씀이외까."

했더니 벌꺽 성을 내면서 뉘 똥이던 퍼오라데그려, 너무 어망처망하여 가만 있었지. 글쎄(의사는 아니지만) 검사라도 할 양이면 뉘변이던 지적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박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노라니깐 채근도 없어. 흥 잊었구나 하고 다시 앉으려 하니까,

"퍼왔나?"

하면서 일어서데그려. 자 이렇게 채근까지 하는 것을 보면 농담도 아니야, 할 수 없이 변소에 가서 내음새나는 것을 조금 퍼다가 박사께 드렸네그려. 그것을 힐끗 보더니 조금만 퍼왔다고 또 성을 내거든, 나도 슬그머니 결이 나데그려. 그래서 다시 가서 한 바가지 드북히 퍼왔지. 그러니깐야 만족하다는 듯이 웃더니 실험옷의 팔을 걷으면서 나도 연구실로 가자고 그래,

자네나 아다시피 내야 이학상 지식이야 어디 조금이라도 있나. 단지 박사의 서기로 들어가 있는 사람이니깐 좌우간 알던 모르던 따라 들어갔지. 박사는 똥을 떠 가지고 현미경으로 시험관에 넣어서 끓이며 세척하며 전기로 분해하며 별별짓을 다 해보더니 그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저녁까지 굶어 가면서 밤새도록 가지고 그러데그려. 아무리 전기 환기 장치를 했다해도 그 내음새는 참 죽겠데. 코가 저리고 눈이 쓰리고 나는 참다 못해서 슬그머니 나와 버렸네그려. 그랬더니 새벽 두 시쯤 찾아. 그래서 가보니깐,

"이게 새 똥이냐, 낡은 똥이냐?"

또 묻데그려, 내니 어찌 알겠나, 변소에서 퍼온 뿐이지. 변의 신구야 알 리가 있겠나. 그래서 모르겠다고 그러니깐

"낡은 겐 모양이군. 다 썩었어. 낡은 게야."

혼자서 중얼중얼하더니 나더러 새 똥을 좀 누라데그려. 나도 성미가 그다지 곱지 못한 사람이라 마렵지 않노라고 해버리니깐 박사는 근심스러이 머리를 기웃기웃하더니,

"나두 그리 매렵지 않은걸.'

하면서 그릇을 가지고 저편 방에 가더니 마렵지 않다던 사람이 웬걸 그다지 누었는지 한 그릇 무더기 담긴 것을 가지고 들어오데그려, 아, 우습기도 하고 잠 못 자는 것이 일변 성도 나고 그래서 "밤참으로는 넉넉하겠읍니다."고 쏘아 주려다가 그래도 박사가 <마지메>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니깐 그러지도 못하겠어. 그래서

"전 먼저 자겠읍니다."

하고 나와서 내 방으로 가서 자버렸지.

그 이튿날부터는 박사는 꼭 연구실에 틀어박히었는데 음식까지 그 내음새나는 방에서 먹고 하는데 오히려 불쌍하데, 땀을 빽빽 흘리면서 더러운 물건을 이리 주물고 저리 주무는 양은 우습기도 하거니와 한쪽으로 생각하면 그 사치하게 길러나고, 아무 고생이며 더러움을 체험해 보지 못한 박사가 연구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고 내음새나는 방에서 음식까지 먹으며 밤잠까지 못 자며 돌아가는 것은 어떻게 엄숙해 보이기도 하고 존경할 생각도 나데.

이러구러 몇 달이 지났네. 무얼 하는지는 모르지만 대변을 분석해 가지고 무슨 유효성분을 얻어 보려는 것은 알겠데. 좌우간 낡은 똥은 쓸 수가 없다 해서 그 뒤부터는 집안 하인의 변까지 죄 그릇에 누어서 박사의 연구실로 들어가게 되었네그려. 그러니깐 변소는 늘 소변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집안 사람이래다 박사와 나와 행랑 식구 세 사람과 식모 하나 침모 하나와 사환애 둘이었는데, 때때로는 그 아홉 사람의 것으로도 부족될 때가 있어 그런 때는 박사는 가족이 이십 인이며 삼십 인이며 하는 사람들을 슬며시 부러워하는 기색까지 보이는데 연구 재료가 부족해서 박사가 안타까와 하며 발을 동동 구를 때는 너무 미안스러워서 될 수만 있으면 서너 동이씩 만들어 보고 싶데.

그러는 동안에 시골 계신 할머님이 세상을 떠나서 나는 시골 내려가서 한 달쯤 있다가 가을에야 다시 올라왔네그려. 그래서 곧 박사네 집으로 가서 짐을 풀은 뒤에 복동이(사환애)에게 물으니깐 박사는 역시 연구실에 있다 하기에 들어가서 인사를 드렸네, 박사는 무엇을 먹고 있었는데 몹시 반겨하면서 와서 같이 먹자고 그래, 오래간만에 맡으니깐 내음새는 꽤 지독하데,

연구실 한편 모퉁이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거기서 박사는 점심을 먹고 있는데 나도 오라기에 교자를 하나 끄을고 그리로 갔지. 점심조차 떡 비슷한 것인데 맛은 <고깃국물을 조금 넣고 만들은 밥>이랄까 좌우간 그 비슷한 맛이 나는 아직껏 먹어 보지 못한 물건이야. 그래서 혹은 양식인가 하고 두어덩이 소금을 찍어서 먹으니깐

"맛 좋지?"

하고 묻데그려, 그래서 괜찮다고 하니깐

"똥내도 모르겠지?"

하고 또 묻데그려.

"?"

아닌게 아니라 내음새가 좀 나기는 하는 것을 이 방안의 공기 탓이라고 하고 그냥 먹었네그려.

그렇지만 박사의 그 말을 듣고 나니깐 혀 아래서 맑은 침이 핑그르르 돌더니 걷잡을 새 없이 구역이 나겠지. 그래서 변소로 가려고 일어서려다 그만 그자리에 욱하니 토하여버렸네.

"왜 그러나? 왜 그래 야 복동아, 수남아."

하면서 박사는 일어서서 나를 붙들어다가 소파에 뉘이려데그려. 아, 결도 나고 성도 나고 그래서 괜찮다고 하고 박사를 밀쳐 버리고 대체 그 먹은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네. 둔감한 박사는 내가 토한 원인을 그 때야 처음으로 알은 모양이데그려.

"먹은 것? 응 그것 말인가? 그것 때문에 토했나? 난 또 차멀미로 알았군. 그건 순전한 자양분일세. 하하하하하(박사는 웃을 경우에는 웃을 줄을 모르고, 웃지 않을 경우에는 잘 웃는 사람이라네) 건락(乾酪), 전분 지방 등 순전한 양소화물(良消化物)로 만들은 최신최량원식품(最新最良原食品)."

"원료는- 그- "

"그렇지 자네도 아다시피 그- "

나는 그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다시 일어서면서 토했지. 좀 메스껍기도 하고 성도 나는 김에 박사의 얼굴을 향하여 토했네그려. 박사도 놀란 모양이야.

"아- 이 사람두. 야 수남아- 복동아- "

그때 결나는 것을 보아서는 박사를 한 대 쥐어박고 싶기는 하지만 꿀꺽 참고 내 방으로 돌아와서 이불을 쓰고 눕고 말았지. 그뒤 사흘 동안을 음식 하나 못 먹고 앓았네. 글쎄 구역에 음식을 어찌 먹겠나. 아무것이라도 뱃속에 들어만 가면 잠시를 머물러 있지 않고 도로 입으로 나오데그려. 아무것을 먹어도 그 내음새가 나는 것 같아.

박사는 미안한지 진토제를 주면서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몸소 간호하겠지. 그러면서 연거퍼 자양분만 뽑아서 정제한 것이니깐 아무 불쾌할 리가 없다고 설명해 주네그려. 아닌게아니라 그러고 보니깐 나도 미안하데. 무슨 악의로써 내게다가 그것을 멕인 바도 아니오. 박사 자기도 먹으면서 내게도 좀 준 것이니 말하자면 원망할 것도 없어 박사의 말마따나 무슨 부정한 것이 섞인 배도 아니오, 과학의 힘으로써 가장 정밀히 만들은 것이겠으매 웬만한 음식점의 음식들보다는 훨씬 깨끗할 것일세. 그저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그것을 책임 관념상 박사가 그렇게 미안해 하는 것을 보니깐 오히려 내가 미안해 오데그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 일어났지.

"그 음식이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내 비위에 맞지 않는 것뿐이니깐 그 마음상만 고치면 되겠지요."

그리고 일어나서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연구실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네그려. 처음에는 참 역하데, 박사는 점심은 역시 손수 만들은 음식을 먹는데 그것을 보기만해도 구역이 탁탁 가슴에 치받치는데 참 못견디겠어. 박사는 먹기는 먹으면서도 미안한지,

"이게 어떻담, 하하하하하."

하면서 먹고 해.

그러는 가운데도 박사는 실험을 거듭하여 몇 가지 조미료를 가해서 맛에 대한 연구를 쌓데그려, 그리고 한 가지의 조미료를 더 넣을 때마다 자기가 몸소 맛 본 뒤에는 연대감정인으로 차마 내게는 먹어 보래지 못하고 복동아, 수남아 하여 가지고는 애들에게 먹어 보래지, 그애들이야말로 ありがためりわく(지나친 친절)야, 얼굴이 벌개지면서 주인의 명령이라 거역지는 못하고 입에 조금 넣는처럼 한 뒤에는 삼키지도 않고

"먼저번 것보담도 더 좋은걸요."

하고는 달아나고 하는 양은 가련해. 그럴 때마다 정직한 박사는 <득의만면>해 가지고 그러려니 그러려니 하면서 상금으로써 그애들에게 오십 전씩 준다네, <감정료>지.

박사의 말을 의지하건대 똥에는 음식의 <불능소화물> 즉 섬유며 <결체조직>이며 각물질이며 <장관내분비물의 불요분(不要分)> 즉 코라-고산(酸), 띄스린 <담즙점액소>들 밖에 부패산물인 스캇톨이며 인들이며 지방산들과 함께 아직 많은 건락과 전분과 지방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람 사람에게 따라서 혹은 시간을 따라 각각 다르지만 그 양소화물이 삼 할에서 내지 칠 할까지는 그냥 남아서 홍문으로 나온다네그려. 그리고 그 대변 가운데 그냥 남아 있는 자양분은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이 헛되이 썩어 버리는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추출할 수만 있다 하며는 그야말로 식료품 문제에 위협 받는 인류의 큰 복음이 아닌가. 그래서 연지구지하여 그 방식을 발견하였다나. 말하자면 석탄의 완전연소와 마찬가지로 자양분의 완전소화를 계획하여 성공한 셈이지, 즉 대변을 분석해서 그 가운데 아직 삼 할 혹은 칠 할이나 남아있는 자양분을 자아내어 그것을 다시 먹자는 말일세그려.

그러니까 사람이 하루에 세 끼씩 먹는 가운데 두 끼는 보통 음식을 먹고 한 끼분은 그 새로운 주식품을 먹으면은 이 지구상의 식료원품이 삼 할 이상 늘어가는 셈 아닌가. 이 지구에 지금보다 인구가 삼 할쯤 한 오천만 명쯤은 더 많아져도 박사의 연구가 실현만되면 걱정이 없는 셈일세그려. 맬더스도 이후에 이런 천재가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그런 걱정을 했지.

좌우간 그러는 동안에 조미(調味)에 대한 연구까지 끝나지 않았겠나. 나는 첫번 모르고 한 번 먹을 뿐 그 뒤에는 절대로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박사도 내게는 권하지도 않았으니깐 모르지만 내음새는 마지막에는 꽤 좋은 내음새가 나데. 스끼야끼 비슷하고도 더 침이 도는 내음새야, 내음새뿐으로는 구미도 들데, 그만큼 되었으니깐 이제 남은 것은 <발표>라 하는 과정일세 그려. 박사는 어림도 없이 발명 경로를 신문에 발표한  뒤에 시식회를 열겠다고 그래. 그것을 내가 우쩍 말렸지. 나는 먹어도 못 보았지만 짐작컨대 맛은 괜찮은 모양인데-

그러니깐 그 맛있는 것을 먼저 먹여 놓은 뒤에 이것의 원료를 발표해야지. 먼저 원료를 발표하면 시식회에는 한 사람도 나오지도 않을 것일세그려. 그렇지 않나. 그래서 말렸더니 박사도 그럴듯한지 내 의견대로 하자고 그러더먼. 그리고 박사와 나와 의논한 결과 그 발명품의 이름은 박사의 이름을 따라 ○○병(餠)이라 하기로 하고 그 ○○병에 대한 성명서를 박사가 초(草)하였네. 지금 똑똑히 기억지는 못하지만 대략 이런 뜻이야.

- 생거(M.Sanger)라 하는 폭녀가 나타나서 산아제한을 주장한 것을 일부 인도주의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거기도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을 어찌하랴. 위생관념이 많아 가면서 년(年)년이 사람의 죽는 율은 주는데 그에 반하여 이 지구는 더 커지지 않으니까 여기 사람의 나아갈 세 가지의 길이 생겼으니 하나는 <도로 옛날로 돌아가서 이 세상에서 위생이라 하는 것을 없이하고 살인기관으로 전쟁을 많이 하여 사람의 수효를 도태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람의 출세(出世)를 적게 하는 것>이요, 나머지는 <아직껏 돌아보지 않던 데서 식원료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인인 생거는 이미 있는 인명을 없이하자 할 용기는 못 가졌었다. 여인인 생거는 신국면 발견이라 하는 천재적 두뇌도 못 가졌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식적 구제책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이 <산아제한론>이다.

그러나 독창력과 발명력을 가진 오인은 그러한 고식책으로써는 만족지 못할지니 오인의 연구는 여기서 비롯하였다. 오인의 매일 배설하는 대변에는 아직 많은 자양분이 남아 있으니 그 전분량의 삼 할 내지 칠 할-평균 잡아서 오 할 약(弱)이나 되는 자양분은 헛되이 땅 속에서 썩어 버린다.

(그리고 대변에 대한 분석표며 그 밖 숫자가 있지만 그것은 약해 버리세.)

이것을 헛되이 썩여 버릴 필요는 없다. 이것을 자아낼 수만 있다 하면 자아내어 가지고 오인의 식탁에 올리는 것이 오인의 가장 정당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각 가지로 각 방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고식적 문제도 그 근본을 캐자면 인류의 식료품 결핍이라는 무서운 예감 때문에 생겨난 신경과민적 부르짖음이라 할 수 있으니 인류의 생활이 유족하여지면 온갖 문제와 그 문제의 근본까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오인의 연구는 여기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연구의 경로도 약해 버리지.)

이러한 동기 아래서 이러한 경로를 밟아서 생겨난 이 ○○병을 귀하의 식탁에 바치노니 고평(高評)을 바란다. 운운,

이것을 인쇄소에 보내서 썩 맵시나게 인쇄를 해왔겠지,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기회로 박사댁에서 시식회를 열기로 각 방면에 초대장을 보냈네그려. 그 초대장에는 그저 ○○병이라 할 뿐 원료며 그 동기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없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지.

크리스마스 한 사나흘 전부터는 꽤 분주하데. 겨울이라 대변의 자양분이 썩을 염려는 없어, 그래서 소제부에게 부탁해서 열 통을 사들였네그려,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고 처리하고 하노라고 사나흘 동안은 박사, 나, 수남이, 복동이 임시 조수 두 사람, 모두 다 똥속에서 살았네그려, 더럽기가 짝이 있겠나, 에이 구역나, 생각만 해도 구역이 나서 못 견디겠네, 박사도 미안하긴 한 모양이야, 누가 청하지도 않는데 연방 조선호텔 한턱 쓰지하면서 복동아, 수남아, 하면서 돌아가네그려, 크리스마스 전날은 밤까지 새워 가면서 모두 만들어 놓은 뒤에 당일 아침에는 집을 씻느라고 또 야단이지 글쎄 이 방 저 방 할 것 없이 모두 똥내가 배어 들은 것을 어찌하나. 아닌게아니라 독한 놈의 내음샌데 배어들은 다음에는 빠지질 않아, 물로 약품으로 씻다못해서 마지막에는 향수를 막 뿌려서 내음새를 감추도록 해버렸지.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