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소부인 바람났네>와 나

읽을꺼리 2007.05.09 03:16 posted by 조재형
이것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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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반 때 일이다.

그 때 한시네마라는 에로 비디오 제작사가 내놓은 한 영화가 장안을 강타했다. 그 이름 <젖소부인 바람났네>. 그 명성에 감동한 나는 며칠간을 설렘과 망설임으로 고민하던 끝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빌려다 보고야 말았다.

젖소부인 역을 맡은 배우 진도희 씨는 최고였다. 사실 그저 최고가 아니였다. 최~에~고였다. 진도희 씨의 도발적인 매력에 나는 눈물을 쏟고 콧물을 터뜨리고 침을 질질 방출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에로계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실망이었다. 줄거리가 엉성한데다 끝내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나는 놀랬다. 아니, 어떻게 이런 줄거리로 한국의 에로 비디오계를 석권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써도 이거보다는 잘 쓰겠다. 그것은 내가 쓰면 대박 확실이란 얘기? 그래, 써보자! 에로영화 시나리오를 쓰자! 도전하는 젊음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남들이 안가는 길에 도전하고 대박을 터뜨리자!

남들은 대학 4학년이라 취업에 힘쓰던 그 시간에 나는 일주일간을 에로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 매달렸고, 감동적인 작품이 하나 탄생하고야 말았다.

제목은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된 조모씨. 출중한 외모와 넘치는 힘으로 다양한 개성과 몸매를 자랑하는 회사 여직원들의 육탄공세에 빠져 행복한 신음소리를 내지르지만 결국엔 끈질긴 관심과 애정을 피력한 여사장님과 진정한 (육체적인) 사랑을 이루고 만다는 상당히 교훈적인 내용이다.

이제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니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만든 한시네마를 찾아가 교섭하는 일만 남았다. 과연 이 불후의 명작 시나리오를 그들은 얼마에 살 것인가? 천만원? 삼십억? 나는 인생대박의 꿈에 젖어 식음을 전폐한 채 방구석에서 혼자 실실 웃고 지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은근슬쩍 <젖소부인 바람났네> 비디오 케이스를 훔쳐봐서 한시네마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죽이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보여드리고 싶군요." 전화를 받은 한시네마 시나리오 담당자라는 사람은 순순히 한시네마 위치를 알려 주었다.

조금 헤맨 끝에 찾아가 보니 100층짜리 인텔리전트 빌딩인 줄 알았던 한시네마는 2층짜리 가정집이었다. 그래도 우리집보다는 100배 좋은 집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일반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이 나를 맞는다. 글래머 에로배우가 손님을 맞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좋아했던 내 예상을 잔인하게 배반하는 순간이다. 시나리오 건으로 왔다고 했더니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한다. 나는 유리 탁자가 있는 거실 탁자에 앉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합이 8근.

잠시 후 누가 거실로 나왔다. 앗! 이 사람은 한시네마의 사장 한지일 씨였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서도 봤었던 영화배우 출신이다. 사실은 <정사수표> 10탄에 출연했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지만.

하여간 한시네마 한지일 사장이 내 앞에 앉는다. "시나리오 담당자가 영상물 심의위원회에 나가느라 자리를 비워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동안 나는 <정사수표>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사인을 받을까 하다가 관뒀다. 비지니스 협상에서 쫄싹거리는 행동은 일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의젖하게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나는 <사장님, 이러시면 안되요> 시나리오를 건넸다. 그가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각본을 쓸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을 봤는데 줄거리에 실망했다, 내가 쓰면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물을 가져왔다, 자 보시오!

그는 내가 쓴 시나리오를 훌훌 넘겨본다. "음... 이렇게 코믹하게 처리한 건 좋네.... 등장인물이 적은 것도 좋고..." 이랬던 그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런데 저희가 원하는 각본은 아니군요."

허걱, 왜냐?

"너무 짧아요." 그는 내가 쓴 A4용지 15장짜리 시나리오를 흔들며 말했다. "보통 70씬, 80씬, 많으면 90씬도 넘어가는데 뿅망치님(본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 처리)께서 쓰신 각본은 너무 짧아서 쓸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한시네마에서 준비 중이라는 한 영화의 각본을 보여주었다. 갱지에 인쇄가 되어있는 그 시나리오는 정말 한지일 사장 말대로 분량이 많았다.

아아~ 그렇다. 나는 처음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거라 정확히 얼마만큼의 분량으로 써야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내 맘대로 썼던 것이다. 경험부족에서 오는 슬프고도 필연적인 어설픔의 미학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막혔다. 생전 처음으로 에로 영화사 사장한테서 직접적인 거절통지를 경험하게 된 나는 경황이 없었다. 그저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저기, 이거 가져가셔야죠." 한지일 사장이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 시나리오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순간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왠지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것 같아 그 시나리오를 그냥 놔두고 왔다. 가져가라고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그 시나리오를 그냥 가져와 버리면 나의 패배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그렇게 얕보던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세계에 깔려 항복선언을 하는 것 같았다. 패배자를 향한 확인사살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 시나리오를 그냥 한시네마에 놔두고 왔다. 나중에 쓸 일 있으면 그냥 쓰라는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말을 하면서.

한시네마를 나와 길을 내려갔다. 큰 길까지 나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자동차가 한 대 와서 멈췄다. 한지일 사장이 얼굴을 내민다. "저 지금 명동 나가는 길인데, 타시죠. 가는 길에 태워드릴께요."

나는 거절했다. 그와 같은 차를 타고 간다면 더 우울할 것만 같았다. 그는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나는 그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쳐다보며 슬픈 자태로 걸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얼마전 나는 신문에서 기사를 봤다. 한지일 사장이 여배우 진도희 씨한테 소송을 당해서 젖소부인의 새로운 시리즈를 내보내기가 어렵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한지일 사장은 1인 시위를 벌이며 젖소부인 비디오테이프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그가 측은한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또 들었다. 그와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저...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 시나리오 아직도 갖고 계세요? 있으면 저에게 돌려 주시와요."

어쩐지 나는 아직도 그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가 한국 에로영화계를 혁신시킬 문제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 시나리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진다. 아아~ 그리워라~ 나의 걸작이여~

[조재형, 2003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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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과 성인 잡지

읽을꺼리 2007.05.09 01:49 posted by 조재형
  젊은 시절 가난에 허덕이던 스티븐 킹이 쓴 글을 받아준 곳 중에는 성인잡지들이 많았습니다. 킹의 재능을 알아보고 흔쾌히 원고료를 지불한 그 고마운 성인잡지들을 한 자리에 모아봤습니다. 잡지 표지 밑에 발행일과 그 잡지에 실린 킹의 글 제목을 적어 놓았습니다. 성인잡지들을 모아놓고 보니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지네요. -_-;;

※ 출처 http://www.stephen-king.de/

Adel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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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2.

On Becoming a Brand Name

1980. 6.

Burnt Offerings

1980. 7.

The Brave and the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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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8.

Two for Terror

1980. 9.

Traveller's

1980. 11.

제목 미상

Cava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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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10.

Graveyard Shift

1971. 3.

I am the Doorway

1972. 2.

Suffer the Little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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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4.

The Fifth Quarter

1972. 9.

Battleground

1972. 12.

The Man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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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3.

The Boogeyman

1973. 6.

Trucks

1973. 10.

Grey 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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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합본.

Battleground

1974. 3.

Sometimes They Come Back

1974. 8.

Night Su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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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5.

The Lawnmowerman

1975. 11.

Strawberry Spring

1975. 합본.

Gray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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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5.

Weeds

1976. 합본.

Night Surf

1977. 3.

The Cat From Hell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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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6. The Cat From Hell 2부 1978. 12. The Man with a Belly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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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8.

The Man Who Loved Flowers

1979. 7.

The Crate

1980. 11.

The Mon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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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2.

The Jaunt

1982. 11.

The Raft

1986. 1.

Interview

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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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12.

The Boogeyman

1977. 2.

Strawberry Spring

1977. 12.

The Cat From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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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2.

Man with a Belly



Nug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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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4.

Weeds



O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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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1.

The Fright Report

1981. 8.

Interview The Kings of Horror


Pla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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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

Why We Crave Horror Movies

1982. 1.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1983. 1.

The Word Proc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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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6.

Interview

1984. 9.

Rock Bottom Remainders


Pent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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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7.

The Ledge

1977. 3.

Children of the Corn

1982. 4.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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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9.

Nightmares in the Sky



L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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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5.

Wer im Penthouse sitzt, sollte nicht um Liebe spielen



독일판 Pent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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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8.

Wenn der Milchmann kommt

1989. 11.

King of Horror


독일판 Pla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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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11

Taste des Todes

2000. 6.

Das Madchen

2000. 10.

Das Leben und das Schrei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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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5.

Alles, was du liebst, wird dir genom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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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울랜드 도련님과 버드 엘런

읽을꺼리 2007.05.09 01:20 posted by 조재형

로울랜드 도련님과 버드 엘런

(Childe Rowland and Burd Ellen)


  다크 타워의 뿌리을 찾아서!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와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알쏭달쏭한 작자미상의 중세시대 전래동화 <로울랜드 도련님과 버드 엘런>을 소개합니다. 이 전래동화에는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와 흡사하게 다크 타워라든가 마법사 멀린같은 요소들이 등장하고, 킹이 창조한 주인공 총잡이 롤랜드(Roland)와 주인공 이름도 비슷합니다.

   이 전래동화는 상당히 유서깊은 이야기라서 세익스피어가 쓴 희곡 <리어왕>에서도 인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리어왕> 3막 4장에서 에드가라는 인물이 로울랜드와 다크 타워에 관해서 수다를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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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울랜드 도련님과 그의 두 형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막내 여동생 버드 엘런도

오빠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로울랜드 도련님은 공을 발로 차기도 하고

무릎으로 공을 막기도 하면서 뛰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형들한테 힘껏 찬 공이

교회 지붕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버드 엘런이 교회 건물 주위를 빙 돌아서

공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오빠들이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버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들은 동생을 찾아 동쪽도 살펴보고 서쪽도 살펴보고

위아래 모두 살펴 보았지만,

오빠들의 가슴 속이 괴로움으로 가득찰 뿐이었다.

동생을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했으니.


그래서 마침내 제일 큰 오빠가 마법사 멀린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버드 엘런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아름다운 버드 엘런은," 마법사 멀린이 말했다. "요정들이 납치해서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다. 그 아이가 교회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방향이니까. 그 아이는 지금 요정왕국의 왕이 사는 다크 타워(The Dark Tower)에 갇혀 있다. 기독교 국가에서 가장 용감한 기사만이 그 아이를 되찾아 올 수 있다."


"그렇다면 구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군요." 큰 오빠가 말했다. "제가 구출하겠습니다. 죽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죠."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법사 멀린이 말했다. "하지만 길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을 잘 명심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야."


버드 엘런의 큰 오빠는 닥쳐올 위험이 두려워 동생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법사 멀린을 졸라 여동생을 구하러 갈 때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리고 마법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기며 그는 요정왕국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남아있는 오빠들이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혹시나하는 기대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오빠들의 가슴 속이 괴로움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큰 오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러자 끝없는 기다림에 지치고 지쳐버린 둘째 오빠가 마법사 멀린을 찾아가 큰 오빠가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물어 보았다. 대답을 들은 둘째 오빠는 요정왕국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혹시나하는 기대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막내 오빠의 가슴 속이 괴로움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둘째 오빠마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게 되자, 버드 엘런의 막내 오빠 로울랜드 도련님이 훌륭한 왕비인 어머니를 찾아가 이번에는 자신이 길을 떠날 것이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로울랜드는 마지막 남은 귀한 자식이기 때문에, 만약 그마저 잃게 되면 모든 자식을 잃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간청하고 또 간청했고, 마침내 왕비는 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쓰던 명검을 주었다. 아들의 허리에 검을 매주며, 그녀는 승리의 주문을 불어 넣었다.


자 이제 로울랜드 도련님은 훌륭한 왕비인 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하고, 마법사 멀린이 살고 있는 동굴로 찾아갔다. "한 번만 더, 이번 한 번만 더," 그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여동생 버드 엘런과 두 형들을 어떻게하면 구할 수 있을지 말해 주세요."


"오호, 용감한 아이로군." 마법사 멀린이 말했다. "두 가지 사항을 명심하면 된다. 간단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실천하기에는 좀 까다롭지. 해야 될 것 하나와 하지 말아야 될 것 하나다. 해야 될 것이란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요정의 땅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버드 엘런을 무사히 구할 때까지 누구든 너에게 말을 하는 자는 네 아버지의 검으로 목을 베어버려라. 그리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이란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리 배고프고 목이 마르더라도 한 입도 먹지 말고 한 모금도 마시지 마라. 요정왕국에 있는 동안 한 입이라도 먹거나 한 모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너는 두 번 다시 중간계(Middle Earth)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로울랜드 도련님은 두 가지 사항을 계속 되뇌이며 마음 속에 단단히 새긴 후, 마법사 멀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길을 따라 끝없이 강행군을 계속한 끝에 그는 요정왕국의 왕을 위해 말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 목동과 만났다. 말들의 매서운 눈매를 통해 로울랜드는 마침내 요정왕국에 도착하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말해줘." 로울랜드 도련님이 말 치는 목동에게 말했다. "요정왕국의 왕이 있는 다크 타워는 어디지?"


"너에게 말해줄 수 없어." 말 치는 목동이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소 치는 목동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 걔가 말해줄 거야."


그러자 한 마디 말도 없이 로울랜드 도련님이 명검을 뽑아들고 말 치는 목동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길을 더 가다가 소 치는 목동을 만나게 되자,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에게 말해줄 수 없어." 목동이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닭 기르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자라면 분명히 말해줄 거야."


그러자 로울랜드 도련님이 명검을 뽑아들고 소 치는 목동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회색 망토를 뒤집어 쓴 나이 든 여자를 만나게 되자, 요정왕국의 왕이 있는 다크 타워가 어딨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닭 기르는 여자가 말했다. "가다보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온통 녹색으로 덮여있고 첨탑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둥그스름한 언덕을 발견하게 될 거야. 언던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3번 돌면서, 1번씩 돌 때마다 이렇게 외쳐.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나를 들여 보내줘.


그렇게 3번 외치고 나면 문이 열리게 되고, 너는 그 때 들어가면 돼." 이 말을 듣고 로울랜드 도련님이 서둘러 길을 떠나려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로울랜드 도련님은 명검을 뽑아들고 닭 기르는 여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 후로 길을 따라 계속 계속 한없이 가다보니 둥그스름한 녹색 언덕과 만나게 되었고, 그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3번 돌면서, 1번씩 돌 때마다 그는 소리쳤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나를 들여 보내줘.


3번째 외침에 언덕의 문이 열렸다. 그가 들어가자 문이 쿵소리를 내며 닫혔다. 로울랜드 도련님은 어둠 속에 혼자 있게 되었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고, 어슴푸레 빛이 남아 있었다. 주위에는 창문이나 촛불이 있는 게 아니어서, 벽과 천장이 아니라면 어디로부터 빛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좀 더 걸어보니 벽과 천장이 표면이 울퉁불퉁한 바위로 반원형 아치를 이루고 있었는데, 속이 비치는 투명한 바위 위를 빛이 나는 돌들이 뒤덮고 있었다. 주위가 바위로 막혀 있었지만, 요정왕국의 다른 곳들처럼 공기는 아주 따뜻했다. 그래서 그는 이 통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넓고 높다란 문 두 개가 살짝 열려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어보니, 너무나 놀랍고도 멋진 광경이 보였다. 커다랗게 확 트인 홀이 보였는데, 어찌나 커다랗던지 녹색 언덕만큼 길고 넓은 것 같았다. 천장을 멋진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는데, 어찌나 커다랗게 높이 솟아있던지 그에 비하면 대성당에 있는 기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기둥들은 모두 금과 은이었고 겉에는 정교한 격자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기둥 사이사이와 그 부근에는 꽃밭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꽃밭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꽃밭들에는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그 밖에 모든 귀한 보석들이 피어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 둥글게 구부러지 아치들 중앙에 박혀 있는 머릿돌을 다아아몬드, 루비, 진주, 그리고 수없이 많은 귀한 보석들이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아치들이 천장 한가운데서 만나는데, 그 곳에는 매우 투명하고 거대한 진주알을 파서 만든 큰 램프가 금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램프 가운데에 박힌 크고 거대한 홍수정이 끊임없이 빛을 발산했다. 그래서 홀 전체를 환하게 만들어 주었고, 지는 해가 빛을 내는 것처럼 밝았다.


홀 안을 장식하고 있는 가구들도 모두 으리으리한 것이었고, 한쪽 끝에는 벨벳천과 비단과 금으로 된 화려한 소파가 있었다. 그 소파에 버드 엘런이 앉아서 은빗으로 그녀의 금발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로울랜드 도련님을 보고는 얼어나서 말했다.


신께서 오빠를 불쌍히 여기시겠구나, 불쌍하고 불쌍한 바보 같으니.

여긴 뭐하러 왔어?


내 말 잘 들어, 막내 오빠야.

그냥 집에 편히 있지 그랬어?

오빠 목숨이 십만개 붙어있다해도

여기서는 단 하나도 건질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우선 여기 앉아봐. 하지만 불쌍해, 오 불쌍해라.

불쌍한 오빠의 운명.

이제 요정왕국의 왕이 들이닥칠 테니까

오빠의 운도 이젠 끝장이야.


로울랜드는 슬픔에 젖어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검을 뽑아들고 그녀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보니 동생이 그의 앞에서 온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왔던 두 오빠들은 자기가 말을 했을 때 자기 목을 베어버릴 만한 용기를 내지 못해서 일을 그르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로울랜드 도련님과 동생은 소파에 함께 앉았다. 로울랜드 도련님은 동생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했다. 그리고 동생은 로울랜드 도련님에게 이전에 다크 타워에 왔던 두 오빠들이 요정왕국의 왕에 의해 마법에 걸려 죽은 뒤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동생과 서로 이야기를 길게 나누다보니, 로울랜드 도련님은 오랜 여행으로 인해 배가 고프기 시작했고, 마법사 멀린의 경고는 잊어버린 채 동생 버드 엘런에게 배가 너무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했다.


버드 엘런은 로울랜드 도련님을 슬프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마법에 걸려있는 몸이라서 오빠에게 경고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황금접시에 빵과 우유를 한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로울랜드 도련님이 빵과 우유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동생과 눈이 마주쳤고, 자신이 이 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기억해냈다. 그래서 그는 접시를 땅에 내던져 버리고 말했다. "나는 한 입도 먹지 않을 것이며,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버드 엘런이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고,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잡아, 잡아, 잡아 먹자.

기독교를 믿는 사내의 피냄새가 나는구나.

그 녀석의 목숨이 나의 검에 달려있다.

그 녀석 머리통을 쪼개 뇌를 박살내 주마.


그리고 홀 출입문이 활짝 열리고, 요정왕국의 왕이 뛰어들어 왔다.


"그렇다면 한 번 붙어보자, 이 괴물아. 덤벼 봐라." 로울랜드 도련님이 소리높여 외쳤다. 그리고 명검을 들고 요정왕국의 왕에게 돌진했다. 그들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마침내 로울랜드 도련님이 승리하고 요정왕국의 왕이 무릎을 꿇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너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마." 로울랜드 도련님이 말했다. "내 여동생을 마법에서 풀어주고 내 형들을 다시 살려내고 우리가 집에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지 마라. 그러면 네 죄를 용서해 주겠다." "알겠습니다." 요정왕국의 왕이 일어나서 커다란 상자 있는 곳으로 가더니 그 상자에서 피같이 빨간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왕이 죽은 두 형들의 귀, 눈꺼풀, 콧구멍, 입술, 손가락 끝에다 빨간 액체를 바르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두 형들이 즉시 살아나서 벌떡 일어났고, 한 때는 그들의 영혼이 밖으로 나가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왔다고 기쁘게 이야기했다. 요정왕국의 왕이 버드 엘런에게 몇마디 말을 하니 그녀는 마법에서 풀려났다. 그렇게해서 로울랜드 일행 네 명은 홀을 나와 긴 통로를 지나 다크 타워를 빠져나왔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집으로, 훌륭한 왕비이신 그들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버드 엘런은 두 번 다시 교회 건물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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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아이들 [5]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17 posted by 조재형

"제이프 부인? 제이프 부인?"

누군가의 부름에 바네사는 눈을 떴다. 머리도 쑤시고 팔도 쑤신 상태였다. 최근에 아주 안좋은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잠깐동안의 고민 끝에 기억이 돌아왔다.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문짝이 떨어져 나간 공간을 통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었다. 차는 가라앉았고, 그녀 주위엔 온통 광란의 비명소리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차 밖으로 탈출하려 기를 쓰고 있을 때, 그녀 옆으로 플로이드의 몸이 떠다녔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육체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 때의 일을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다.

"죽었습니다."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그 사람들 전부 다 사망했습니다."

"그럴수가."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클라인의 얼굴대신 그의 제복에 묻은 초콜렛 얼룩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들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쓰지 말라구요?"

"제이프 부인, 그보다 더 중요한 비지니스가 있습니다. 빨리 정신차리고 일어나세요."

클라인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다급한 분위기에 이끌려 바네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들이 있는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네, 아침입니다." 클라인이 조바심을 내며 대답했다. "이제 저랑 같이 가실까요? 보여줄 게 있습니다." 그가 문을 열었고, 그들은 침침한 통로로 나갔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로 앞쪽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수많은 사람들 목소리가 언성을 높이고, 저주를 퍼붓고, 격렬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무슨 일 났어요?"

"세상이 망할까봐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진흙 레슬링 선수들을 봤던 방으로 안내했다. 이제는 방 안의 모든 비디오 스크린들이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고, 각각의 화면에는 전부 다른 실내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 지휘소, 대통령 집무실, 각료 회의실, 그리고 국회 의사당들. 각각의 모든 장소에서는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당신은 꼬박 이틀동안 의식이 없었습니다." 클라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눈 앞에 보이는 혼란스런 광경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서가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모든 화면들을 두리번거렸다. 워싱턴에서 함부르크에서 시드니에서 리오 데 자네이로까지. 전세계 모든 나라의 권력자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식을 전해줄 신의 사도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저 사람들은 그저 심부름꾼입니다." 고함소리가 흘러나오는 화면들을 손짓하며, 클라인이 말했다. "서로 도와 어깨를 잡고 2인 3각 경주를 할 줄도 모르죠. 세상이 어찌되든 상관 안합니다. 점점 이성을 잃고 있어요.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근질근질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보고 뭘 어쩌라구요?" 바네사가 물었다. 허무한 바벨탑의 실체를 보고 있는 바네사는 우울해졌다. "나는 국제정치 전략가가 아니에요."

"고옴과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아주 오래 전엔 전략가의 신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그런 신분따위 쓸모없게 됐으니까요."

"시스템이 썩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스템만의 문제라고 할 순 없죠. 제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는 이미 위원회 멤버 중 절반이 죽고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서는-"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어요. H.G.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뭐 그럭저럭." 클라인이 대답했다.

"무슨 뜻이죠? 그럭저럭?"

클라인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눈물을 쏟을 것만 같다.

"고옴이 말 안하던가요? 제이프 부인, 그들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들은 투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멤버들간의 의견교환이 지겨워지면, 토론같은 건 집어치우고 동전을 던져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럴리가."

"그리고 개구리경주 같은 것도 요긴하게 써먹었죠. 그들이 제일 좋아하던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 고위층들이-"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허술하게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일 리가-"

"그 사람들이 그런 거 상관이나 하는 줄 알아요?" 클라인이 말했다. "그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한 그들한테 중요한 게 뭐겠습니까? 아랫것들한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잡담꺼리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말들이 얼마나 합리적인 과정으로 도출되었느냐 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결정이든 상관없다?" 그녀가 말했다.

"왜 아니겠어요? 그것은 매우 훌륭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양의 내장으로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했으니까요."

"말도 안돼요."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이 곳에서 게임으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저 사람들의 손에 지구의 운명을 고스란히 맡기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일까요?" 그는 화면에 나오는 성난 얼굴들을 가리켰다.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날이 밝았는데도 어느 쪽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어야하는 지 방침이 서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독재자들은 지령을 받지 못해 자기들의 잔혹한 정권이 힘을 잃고 무너질까봐 겁에 질려 있었다. 기관지 천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상 한 명이 보좌관 둘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다른 정치가는 화면에 리볼버 권총을 들이대며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정치가는 가발을 씹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치의 나무가 키워낸 최상품 과실이란 말인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거만하고, 감언이설로 생활하는 바보얼간이들.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튀어야 하는 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졸도 직전까지 몰렸다? 그들 가운데서는 바네사가 여행을 떠날 때 길안내를 믿고 맡길만한 남자나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개구리를 믿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     *     *     *     *     *     *     *

어두컴컴한 벙커에서 나와 넓은 마당에 서니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벙커 속에서 울려 퍼지던 지긋지긋한 고함소리들로부터 해방되어 바네사는 기뻤다. 길을 걸으면서 클라인은 정치인들이 조속히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기까지 적어도 수주일은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바네사가 보았던 인간들이 절망에 빠져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도 있다. 그들은 위원회로부터 판결을 받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이니까. 지금 당장 소원을 풀어주어야 한다.

"골드버그가 아직 살아있어요." 클라인이 말했다. "그가 계속 게임을 해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게임을 하려면 2명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하면 되겠네요."

"골드버그가 나를 싫어해서 안됩니다. 우리 경비병들 모두를 싫어하죠. 그가 당신하고만 게임을 하겠답니다."

골드버그가 월계나무 밑에 앉아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진행되는 놀이였다. 그는 시력이 너무 나빠서 각각의 카드들을 일일이 코 앞에 갖다대고 읽어야만 했는데, 쭉 늘어선 카드의 맨 끝 카드를 읽을 때 쯤이면, 맨 처음 카드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네사가 승낙했어요." 클라인이 말했다. 골드버그는 카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지금 바네사가 승낙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장님이지 귀머거리는 아냐." 여전히 카드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골드버그가 클라인에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바네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가 그 친구들한테 탈출은 실패할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해줬는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바네사는 그의 말 속에서 친구들을 잃은 슬픔을 느꼈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어. 우리는 이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탈출은 소용없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카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때문에 도망을 가? 세상이 변했는데. 나는 알아. 우리가 세상을 바꿔버렸어."

"아주 참혹하진 않았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세상이?"

"동료분들이 돌아가신 사고가."

"아."

"우리는 모두 즐겁게 드라이브를 했어요.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고옴은 지독하게 감상적인 사람이었어." 골드버그가 말했다.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바네사가 있는 쪽으로 튀어나왔다. 그 움직임이 골드버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건 뭐지?" 그가 물었다.

개구리는 바네사의 발을 적으로 생각하고 경계했다. "그냥 개구린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어떻게 생겼어?"

"뚱뚱해요." 그녀가 말했다. "등에 빨간 점 3개가 있구요."

"그건 이스라엘이야."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을 밟으면 안돼."

"정오 쯤엔 판결이 나올 수 있겠죠?" 클라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특히 걸프만 사태가 심각하구요, 또 멕시코 분쟁이랑, 또-"

"알어, 알어, 안다구." 골드버그가 말했다. "이제 여기서 꺼져."

"-피그만에서 또 사건이-"

"나도 이미 다 아는 얘기잖아. 빨리 꺼져! 너때문에 나라들이 불안해 하잖아." 그는 바네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데 자네는 여기에 앉을건가 아니면 딴데 갈 건가?"

그녀는 앉았다.

"잘 좀 해주십쇼." 클라인이 말하며 물러났다.

골드버그가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꾸웩-꾸웩-꾸웩. 개구리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 소리에 반응해서 마당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네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가 전에 한 번 생각했던 것처럼, 희극을 연기할 때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야한다. 그 모든 터무니없는 말들을 정말로 믿고 있는 듯이 말이다. 오직 비극만이 웃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개구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바네사와 골드버그는 웃음을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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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아이들 [4]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15 posted by 조재형

그녀는 하루 종일 고옴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큰 곤경에 처해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혼자 있도록 방치되지 않았다. 길리멋이 수시로 그녀에게 들러 음식과 음료를 갖다주었고, 오후에는 같이 카드놀이를 했다. 그녀가 파이브 카드 포커치는 요령을 금새 배워 길리멋과 한두 시간동안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는 동안, 마당에서는 정신병자들이 개구리경주를 벌이며 소리지르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나 목욕 좀 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안되면 샤워만이라도 어떻게 좀..." 그 날 저녁 길리멋이 저녁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몸이 너무 끈적끈적해서 못 살겠어요."

그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목욕할만한 데를 찾아볼께요."

"정말?"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역시 당신은 친절해."

그는 1시간쯤 뒤에 돌아와서 샤워실을 찾아내 허락을 맡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샤워실 가는 것이 좋기만 할까?

"샤워실에서 나 등 좀 밀어줄래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길리멋의 두 눈이 충격으로 껌뻑거렸고, 양쪽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를 따라오세요." 그가 말했다. 조용히 길리멋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녀는 샤워실로 가는 길을 마음 속에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감시인이 없을 경우에 혼자서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그가 안내한 곳으로 들어가 본 거울 달린 샤워실은 시설이 형편없어 실망스러웠다. 사실 지금 그녀가 처리해야 하는 일 중에서 샤워는 그리 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형편없는 시설 따위 상관하지 말자. 샤워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나는 문 밖에 있을께요." 길리멋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네요." 등을 밀어달라는 조금 전 말을 상기시키는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며, 그녀는 샤워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을 세차게 틀어놔서 샤워실 안이 온통 수증기로 가득하게 만들었고, 네 발로 엎드려 바닥을 비누로 문질렀다. 샤워실 안이 수증기 안개로 둘러싸여 앞이 안보이고 샤워실 바닥이 비누칠로 잔뜩 미끌미끌해지자, 그녀는 길리멋을 불렀다. 부르자마자 튀어들어오는 그의 놀라운 스피드에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쭐하는 대신 재빨리 그의 뒤로 돌아가 수증기 속에서 허둥대고 있던 그를 힘껏 밀었다. 그는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샤워기에 부딪혔고, 펄펄 끓는 물이 머리를 덮치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동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정신을 차리려는 그보다 먼저 그녀가 총을 낚아챘다. 그녀는 그의 몸통을 향해 총을 겨눴다. 그녀는 명사수가 아니었고, 지금 그녀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장님일지라도 표적을 못 맞출래야 못 맞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길리멋도 알고 있었다. 그가 양손을 들었다.

"쏘지마."

"만약 니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제발... 쏘지 마요."

"이제... 미스터 고옴과 그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라. 빨리 그리고 조용히."

"왜?"

"시키는 대로만 해." 손에 쥔 총으로 샤워실 밖으로 나가서 앞장 서라는 동작을  취하며, 그녀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어리석은 짓을 하면, 네 놈 등을 쏴버릴거다." 그녀가 말했다. "등 뒤에서 쏘는 게 신사다운 행동이 아니란 건 알지만, 난 신사도 아닌데 뭐. 나는 그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한 여자일 뿐이야. 그러니 나를 열받게 만들지마."

"... 알았어요."

그는 명령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녀를 데리고 샤워실 건물을 나와서 길게 이어진 통로를 지나 종탑과 그 주위에 모여있는 건물촌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항상 이 곳 요새의 중심부는 예배당일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종탑건물의 겉모습은 사각타일이 겹쳐있는 지붕에 하얗게 칠한 벽들이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했다. 바네사와 길리멋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펼쳐진 풍경은 신앙의 장소라기보다는 고풍스런 군사 벙커를 연상시키는 콘크리트 미로였다. 그녀는 이 건물이 핵폭탄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모든 통로들이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여기가 정신병원이라면, 소수의 특별한 정신병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곳일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그녀가 길리멋에게 물었다.

"우리들이 안방이라고 부르는 곳이에요." 그가 말했다.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죠."

지금은 별다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통로에 붙어있는 사무실 대부분에 불이 꺼져 있었다. 한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없는데, 컴퓨터 한 대가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다른 사무실에서는 텔렉스 기계가 글씨로 가득찬 종이용지를 뱉어내고 있었다. 바네사와 길리멋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계속 건물 심층부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모통이 하나를 돌자마자 엎드려서 리놀륨 바닥을 닦고 있는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갑작스런 만남에 양쪽 모두 당황하고 있는 틈을 길리멋이 재빨리 이용했다. 그는 바네사를 벽으로 확 밀치고 달아났다. 그녀가 몸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얼마 안있어 비상벨이 울리고 경비병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녀는 낯선 곳에서 막막해졌다. 앞에는 똑같이 불길하게 보이는 출구 3개가 있었는데, 그녀는 망연자실해서 굳어있는 청소부를 뒤에 내버려두고 간단히 가장 가까운 출구로 뛰어갔다. 그녀가 선택한 출구는 또다른 모험을 안겨주었다. 출구를 따라서 수많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방에는 시계 수십개가 붙어 있어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표시하고 있었다. 다음 방에서는 검은 전화기 50대가 윗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다음 방은 제일 큰 방이었는데, 모든 벽에 TV 스크린들이 붙어 있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스크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스크린이 꺼져 있는데, 딱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유일하게 켜져있는 스크린에서는 얼핏 보기에 진흙 레슬링 경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사실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포르노 영화였다. 맥주캔을 배 위에 올려놓고 의자 속에 몸을 쭉 편 채 포르노를 보고 있는 것은 콧수염 달린 수녀 한 명이었다. 바네사가 들어오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반항하면 죽여버리겠어."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젠장."

"고옴과 동료들은 어디 있어?"

"뭐?"

"그 사람들 어디 있냐니까! 어서 말해."

"홀 밑에. 왼쪽으로 돌아서 한 번 더 왼쪽으로 돌면 돼." 그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난 죽기 싫어."

"그럼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있어." 그녀가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신앙심이 깊어서 칭찬받겠구만." 그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방을 나자가 그는 무릎이 꺽이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뒤에서는 신나는 진흙 레슬링이 펼쳐지고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 또다시 왼쪽으로. 길을 따라 가보니 방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녀가 한 군데를 골라 방문을 노크하려는 순간 건물 전체로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조심성 따위는 던져버리고 요란하게 문들을 열어 제꼈다. 방 안에서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 투덜대면서 왜 이렇게 비상벨이 요란하냐고 묻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세번째 방에서 고옴을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바네사." 복도로 튀어나오면서 그가 말했다. 그는 긴 조끼만 걸치고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정말 당신이야? 어? 정말이구나!"

잠에 취한 눈으로 다른 방에서도 사람들이 나왓다. 이레냐, 플로이드, 모터스헤드, 골드버그. 쪼글쪼글한 얼굴들을 보니 바네사는 그들의 전체 나이가 400살에 육박한다는 고옴이 말이 믿겨졌다.

"정신차려, 이 늙은이들아." 고옴이 말했다. 그는 바지 하나를 찾아내서 입었다.

"비상벨이 울리는데-" 동료 한 명이 말했다. 하얗게 세버린 그의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사람들이 금방 올거야-" 이레냐가 말했다.

"상관없어." 고옴이 대답했다.

플로이드는 벌써 옷을 다 차려 입었다. "난 준비됐어."

"그런데 우리는 인원이 너무 많아요." 바네사가 걱정이 돼서 말했다. "우리는 살아선 여길 못나갈 거에요."

"이 여자 말이 맞아." 동료 한 명이 그녀를 훓어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주둥이 닥쳐, 골드버그." 고옴이 쏘아붙였다. "바네사는 총을 갖고 있단말야, 안 그런가?"

"딱 한 개." 백발노인이 말했다. 바네사는 그가 모터스헤드 일거라 생각했다. "총 하나로 경비병들을 모두 다 상대하겠다는 거로군."

"다시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 골드버그가 말했다.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야." 고옴이 말했다. "어쩌면 우리한테 남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고옴 말이 맞아." 이레냐가 말했다.

"그럼 게임은 어떻게 되는 건데?" 골드버그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게임은 잊어버려." 플로이드가 말했다. "개구리로 국이나 끓여 먹으라지."

"너무 늦었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놈들이 오고 있어요." 통로 양쪽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린 갇혀 버렸어요."

"좋구만." 고옴이 말했다.

"당신 미쳤군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우릴 쏴버릴 수 있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플로이드가 투덜댔다. "난 죽어서 여길 나가고 싶지는 않아."

"협박해! 협박하란 말이야!" 고옴이 말했다. "놈들한테 허튼 짓하면 우릴 모두 총으로 죽여버리겠다고 말해!"

이레냐가 웃었다. 틀니를 침실에 두고 와서 입 언저리가 움푹 들어갔다.

"당신 얼굴 표정이 유난히 이뻐보여." 고옴이 이레냐에게 말했다.

"고옴 말이 맞아." 플로이드가 말했다. 이제는 싱글벙글 기쁨에 젖어있다. "우리 목숨이 위태로운데 놈들이 감히 쓸데없는 짓은 못할 거야. 우리를 순순히 놔 줄 수 밖에 없겠지."

"너희들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골드버그가 궁시렁댔다. "외부로 나간다해도 우리를 반겨줄 곳은 아무데도 없어..."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곧 이어 복도 양끝으로 경비병들이 몰려와 막아버렸다.

고옴은 바네사의 총을 잡고 자기 심장을 향해 총부리를 갖다댔다.

"침착하게 잘 해." 그는 조용히 속삭이면서 입술로 살짝 키스를 보냈다.

"제이프 부인, 무기를 내려 놓으시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미스터 클라인이 나타났다. "이제 그만해요. 당신은 완전히 포위됐으니까."

"이 사람들 다 죽여버리겠어." 약간 머뭇거리며 바네사가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는 현재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당신들한테 경고하겠어. 나 지금 이판사판이야. 날 쏘면 이 사람들도 전부 죽일거야."

"알았어요..." 클라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왜 당신은 그 사람들이 죽을까봐 내가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일 뿐인데. 전에 내가 말했잖아요. 모두 정신병자라고, 살인자라고..."

"우린 둘 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텐데." 클라인의 얼굴에 나타난 불안한 표정을 보고, 바네사는 더욱 확신을 얻었다. "지금 당장 요새의 철문을 열어놓고, 내 차 시동장치에 차 키를 꽂아놔. 미스터 클라인, 당신들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하면 여기 인질들을 가차없이 쏴버리겠어. 자 이제 당신 똘마니들 여기서 내보내고 내가 요구한 대로 준비해."

미스터 클라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부하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옴의 눈이 반짝거렸다. "잘 했어." 그가 속삭였다.

"길 안내 좀 해줄래요?" 바네사가 고옴에게 부탁했다. 고옴의 뒤를 따라 바네사 일행은 시계와 전화기와 비디오 스크린이 가득한 방들을 지나 복잡하게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갔다. 한 걸음씩 내딪을 때마다 바네사는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올까봐 불안했지만, 확실히 미스터 클라인은 그녀의 협박대로 노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았다. 바네사 일행은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건물 밖으로 무사히 나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경비병들이 어디엔가 숨어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차가 준비되어 있는 마당으로 가는 동안, 바네사는 계속해서 인질들 4명 쪽으로 소총을 겨냥했다. 차 있는 곳에 와보니 철문이 열려 있었다.

"고옴." 그녀가 속삭였다. "차 문을 열어요."

고옴이 문을 열었다. 그가 전에 말한대로 나이가 들어 늙으면 몸이 쪼그라든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작은 차에 5명이 탄다는 것은 상당히 빠듯한 일이었다. 바네사가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 운전석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숙이는데 총알 하나가 날아왔다. 그녀는 어깨를 후려치는 고통을 느꼈다. 소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개새끼들." 고옴이 말했다.

"그 여잔 그냥 놔두고 빨리 가자." 뒷좌석에 앉은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옴은 이미 차에서 내려 바네사를 뒷좌석 플로이드 옆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운전석으로 달려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운전할 줄 알아?" 이레냐가 물었다.

"물론이지. 내가 운전 하나는 끝내준다구!" 그가 소리쳤다. 기어를 삐걱거리며 자동차는 철문을 지나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네사는 과거에 총에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이제 경험을 하고 보니 -만약 이 난리통에서 목숨을 건진다면- 다시는 총상을 입고 싶지 않았다. 어깨에 난 상처에서 출혈이 심했다. 옆에서 플로이드가 그녀의 상처를 지혈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고옴의 난폭한 운전 속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저기 길이 있어요-"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고옴에게 말했다. "저쪽에."

"저쪽이란 게 어느 쪽이야?" 고옴이 소리쳤다.

"오른쪽이요! 오른쪽!" 그녀도 소리질렀다.

고옴이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오른쪽이 어느 쪽이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옆에 앉은 이레냐가 고옴의 손을 다시 운전대로 끌고 갔다. 자동차가 춤추듯이 흔들렸다. 이리저리 덜컹거릴 때마다 바네사는 고통때문에 신음했다.

"찾았다!" 고옴이 말했다. "저기 길이 보여!" 그는 액셀을 밟아 속력을 더 높였다.

엉성하게 닫혀있던 차 뒷문 하나가 열려서 바네사의 몸이 밖으로 떨어지려 했다. 모터스헤드가 플로이드 쪽으로 몸을 날려 가까스로 그녀를 안전하게 끌어당겼다. 열린 문은 다시 닫을 새도 없이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서있던 이정표 바위에 충돌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이쯤에서 한숨 돌려도 되겠어." 운전을 계속하며 고옴이 말했다.

에게해의 밤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은 고옴 일행의 차만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서 불빛이 따라오고 있었고, 맹렬히 추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가 수도원에 소총을 떨어뜨리고 갔기 때문에, 클라인으로서는 그녀가 인질을 총으로 쏴죽일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빨리 가야겠어!" 플로이드가 말하며 입이 찢어질 듯 활짝 미소지었다. "놈들이 우릴 쫓아오는데."

"무슨 짓을 해서든 저 놈들을 따돌릴테다." 고옴이 말했다.

"헤드라이트 꺼." 이레냐가 말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 눈에 덜 띄지."

"그럼 나보고 어떻게 길을 보란 말야." 시끄러운 엔진소리 속에서 고옴이 불평했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 길도 아닌데도 아무데나 막 달리고 있으면서."

모터스헤드가 웃음을 터뜨렸고, 바네사도 -그녀의 이성이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웃음을 터뜨렸다. 피를 많이 흘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백발노인 4명과 바네사를 태우고 문짝이 하나 빠진 자동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미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몰고 갔을 것이다. 이 노인들이 클라인의 말처럼 정신병자들이 아니라는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를 바네사는 보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노인들은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고옴은 운전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베르디의 노래를 부르는가 싶더니 "오버 더 레인보우"를 가성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만약 어질어질 기운없는 그녀의 마음이 확신하는대로 이 노인들이 그녀처럼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먼젓번에 고옴이 그녀에게 설명했던 얘기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부 사실이란 말인가? 지금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이 노인들이 인류의 멸망을 막아냈다는 것이 사실일까?

"놈들이 우리 뒤를 따라붙었다!" 플로이드가 말했다. 그는 뒷좌석에서 무릎 꿇고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젠 다 글렀나본데." 웃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모터스헤드가 말했다. "우리 모두 다 죽게 생겼어."

"저기 봐!" 이레냐가 외쳤다. "저기 또 길이 있어! 저기로 가자! 빨리 저기로 가!"

고옴이 운전대를 힘껏 돌리자, 차는 거의 넘어질듯이 기우뚱거리면서 달리던 길을 벗어나 새 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리느라 앞에 보이는 길이 겨우겨우 흔적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어두웠지만, 고옴의 운전 스타일은  그런 사소한 불편 정도에 벌벌 떠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는 엔진이 숨 넘어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까지 속력을 올렸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뒷좌석으로 튀어오른 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멋 모르고 길 한가운데 서있던 염소 한 마리가 차와 충돌하기 직전 가까스로 달아났다.

"우리 지금 어디가는 거에요?" 바네사가 소리쳤다.

"난 모르겠는데." 고옴이 대답했다. "자네는 아는가?"

그들이 어디로 가던지간에 그들의 스피드는 적당하게 빨랐다. 이번 길은 방금 지나왔던 길보다는 평평했기 때문에 고옴이 운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는 또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터스헤드가 몸을 숙여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가 바람에 마구 날리는 가운데 그는 추적자들이 쫓아오는지 살펴 보았다.

"우리가 놈들을 따돌렸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쳤다. "우리가 놈들을 따돌렸다구!"

나머지 동료들도 기쁨에 겨워 들썩거렸다. 모두들 H.G.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길이 사라진 것 같다고 모터스헤드가 말하는 소리를 고옴은 미처 듣지 못했다. 고옴은 자기가 낭떠러지로 차를 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곧이어 자동차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낭떠러지에서 추락했고, 차 안의 사람들은 낭떠러지 아래 바닷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5]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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