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 Rage

작품 감상문 2007. 5. 12. 00:31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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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ge

(1977년 리처드 바크먼 소설)

 1966년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스티븐 킹은 "Getting It On"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 후 까맣게 잊고 지내다 한참 후에 지하실 낡은 박스 안에서 썩어가던 그 소설 원고를 발견하게 되었고, 1971년에 원고를 완성시켰다. 1971년 킹은 "Getting It On" 원고를 Knopf 출판사에 투고하게 된다. 그러나 출판사측은 내용이 맘에 안든다는 이유로 출판 부적합 결정을 내린다. 그 후 스티븐 킹은 1974년 장편 데뷔작 "캐리 Carrie"의 대성공으로 유명작가가 되었고, 1977년에는 "Getting It On"을 "Rage"라는 제목으로 바꾼 다음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을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바꾸어 발표했다.

18살 고교생 찰리 데커. 오전에 수학수업을 듣던 중 교장실로 불려간다. 찰리는 과학선생님을 스패너로 후려쳐서 죽을뻔하게 만든 사건으로 교장에게 추궁을 듣던 중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교장을 격분하게 만들고 급기야 학교에서 사라지라는 명령을 받는다.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 찰리는 사물함에 숨겨 두었던 권총을 빼들고 수학수업이 한창인 교실에 들어와서는 수학선생님을 총으로 쏴 죽이고, 반 친구들을 인질로 잡는다. 그때부터 학교는 몰려드는 경찰, 방송국 기자들, 구경꾼들로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교실을 점거한 찰리는 자신에게 쩔쩔매는 선생들과 경찰들을 실컷 갖고 놀더니, 친구들한테 자신의 불행한 성장기를 털어 놓는다. 찰리가 사적인 비밀을 털어놓자 신기하게도 인질로 잡힌 친구들도 하나둘씩 사적인 비밀을 털어 놓으며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인질 중에는 거만한 모범생 테드 존스가 끼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컴플렉스인 사적인 비밀을 털어놓기를 거부하며, 찰리와 친구들의 행동을 비난한다. 그러자 반 친구들은 교실 커텐을 전부 내려서 밖에서 교실 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모두 하나가 되어 테드에게 달려 들어서는...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별로 기분이 안 좋았고, 읽고 나서도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Rage"는 대단히 폭력적인 정서를 품고 있는 소설이다. 직접적인 폭력장면은 별로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 전반에 흐르는 폭력적인 분위기가 읽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거침없이 등장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조롱과 억눌렸던 울분이 거친 폭력의 형태로 분출되는 과정이 찰리라는 학생의 시점을 통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기존의 도덕관념/사회관념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반도 못 읽고서 책을 집어 던져버릴 것이다.

"Rage"에서 찰리는 불행한 과거 속에서 살아온 불쌍한 아이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말할 상대조차 없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부당하게 대접받으며 살아왔다는 생각에 답답해하던 찰리는 교장실에 불려간 그날 완전히 감정의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찰리는 교실을 점거한 후 자신의 처지를 후련하게 털어놓고 친구들도 한편이 되자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이 고백하는 내용들은 학교가 재수없다, 선생도 재수없다, 부모도 재수없다, 섹스가 궁금하다 등과 같이 학창시절에 누구나 생각해 보게 되는 주제들이다. 그러고 보면 "Rage"라는 소설은 학생들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속시원히 욕을 하고 낄낄대며 스트레스를 푸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폭력이 강렬하게 분출되는 이유는 처음 "Rage" 집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스티븐 킹의 울분이 뿜어져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홀어머니 밑에서 넉넉치 못한 생활을 하며, 낮에는 학교다니고 밤에는 공장다니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투고하는 원고들마다 맨날 퇴짜나 맞고 다니니 앞날이 막막한 킹은 마음 속으로 한이 억수로 맺혔겠지. 아마도 대학을 졸업하고 몇년뒤 떼돈을 버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Rage"같은 엄청난 분노의 소설은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교실을 점거한 찰리가 뒤늦게나마 친구들과 하나가 되어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선생님 둘을 살해하고, 교장을 발광하게 만들고, 카운셀러 선생님을 질질 짜게 만들고, 경찰서장을 바보로 만들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비협조적인 테드에게 집단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오늘 인질수업의 교훈은 뭘까?"하고 묻는 찰리에게 반 친구들이 테드를 손봐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좀 느닷없고 어색하다.) 개인적인 비밀을 다 공개하는 분위기에서 한 개인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집단폭력이 가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찰리. 나는 이 소설에서 학생이 선생을 살해하는 장면보다 집단폭력 장면이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성난 집단이 화풀이를 위해 한 개인을 처단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소설 후반부에 찰리가 군중 속에 뒤섞여 폭력적인 흥분을 맛보는 것을 상상하며 울부짖는 장면도 나온다.)

소설 마지막에서 학교를 떠나 모처에서 생활하고 있는 찰리가 "작은 비밀이 하나 생겼는데 기분이 좋다 다시 사람이 된 듯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무얼 뜻하는 건지. 기껏 학교에서는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다 까발려 놓고는 이제는 도리어 비밀이 생긴 것을 기뻐하고 있으니. 비밀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뜻일까? 인간은 변덕이 죽끓듯 한다는 뜻인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하다가 '나 한순간에 새됐어'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인가? "Rage"의 결말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찰리는 과연 정상인이 된 것인가? 더욱더 사이코가 된 것인가? 찰리가 가해자고 인질친구들이 피해자인가? 아니면 반대로 찰리가 결국 피해자고 인질친구들이 가해자인가?

이제까지 말했듯이 "Rage"는 대단히 위험한 소설이다. 현재의 사회에 만족하며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는 바른생활 사나이와 바른생활 소녀에게는 이 소설을 권하고 싶지 않다. 읽다가 분개한 나머지 미국대사관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어질 테니까. 현실이 무척이나 불만이고 괴로워서 '확 전쟁이나 나서 세상 다 뒤집어 엎어져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삶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바른생활"과 "현실파괴"의 극단적인 세계관을 벗어난 그냥 보통사람이라면 "Rage"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장점은 바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폭력적인데도 읽다보면 끝까지 다 읽을 수 밖에 없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나도 끝까지 다 읽고야 말았다. 나는 주인공 찰리가 불쌍하다고 느껴지지만 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전혀 맘에 들지는 않는다. (기성세대를 위협하는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소설에 찜찜해하는 이유는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까? 그럴지도...) 그런데도 재미를 느끼고 끝까지 이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은 솔직한 폭력이 전해주는 섬칫한 재미때문인 것 같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이 매우 폭력적이고, 실제로 소설내용과 유사한 고등학교 총기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유로 "Rage"의 출간을 중지시켰다.(젊은 시절 직접 이 소설을 창조한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 소설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나이탓일까 아닐까?) 그래서 오늘날 "Rage"를 미국의 일반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헌책은 쉽게 구할 수 있다. 나도 "Rage"가 수록된 "The Bachman Books"를 인터넷서점 아마존이 연결시켜준 헌책 딜러한테서 구입했다.("The Bachman Books"에는 리처드 바크먼의 초기소설 4편 Rage, The Long Walk, Roadwork, The Running Man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