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자들 / The Regulators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49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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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gulators

(1996년 리처드 바크먼 소설)

언젠가 서울대 영문과에서 심각한 회의가 열렸었다고 한다. 회의주제는 "이번 학기 영문과 교재로 스티븐 킹 소설을 채택할 것인가 말것인가?" 거듭되는 국내석학들의 심사숙고 마라톤 회의 끝에 없었던 일로 하자는 걸로 회의는 끝나버렸다고 한다.

이 사례는 현대 영어권 문학에서 스티븐 킹이 차지하는 위치를 상징하는 듯하다. 킹은 미국에서도 통속소설로 취급하는 공포소설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세련된 인문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상류층 지식인들이 좋아할 만한 고상한 문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50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호러장르에 충실한 소재를 가지고 속어, 비어, 욕설을 거침없이 당당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삼류공포소설의 요소를 두루 갖춘 그의 소설은 미국 출판계는 물론 세계 출판계를 호령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우리나라에는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현대 미국 문학계의 빼놓을 수 없는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예술적인 소설작품을 발표하는 미국 소설가들은 많지만, 그들이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스티븐 킹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작가인들 대중들이 읽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비평가들에게만 읽히고 비평가들에게만 칭찬받는 작품을 발표하는 일이 작가에겐 즐거울까? 그에 비하면 킹의 작품들은 "읽는" 재미를 위해 부담없이 누구나 선뜻 집어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건 노벨문학상 작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노벨문학상 작가는 읽는 의욕을 저하시키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이 제일이다.(말도 안되는 논리지만 밀어 부치자.) 스티븐 킹은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소설가다!(역시 난 킹의 열렬한 팬이야.) 스티븐 킹만이 진정한 소설가다!(나도 이렇게까지 뻔뻔스러워질 수가 있구나.)

The Regulators는 또다른 킹의 작품 Desperation과 한날 한시에 동시발표된 소설이다. 그만큼 두 소설간에는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Desperation이 스티븐 킹의 소설로 발표된데 비해서, The Regulators는 킹의 필명 리처드 바크먼 작품으로 발표되었다.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무명소설가는 1985년에 죽었지만, 아내가 뒤늦게 The Regulators 원고를 찾아낸 덕분에 96년에서야 출간되었다는 오묘한 설명과 함께. Desperation에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The Regulators에도 고스란히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그때 그 설정 그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인물설정을 색다르게 고쳐서 등장시켰기 때문에 Desperation을 막 읽고나서 The Regulators를 펴 든 독자라면 무척 산뜻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변치않는 인물(?)이 있다. Desperation에 이어서 Tak이라는 악령이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출연하고 있다.

1996년 7월 15일 오후 3시 45분. 화창한 여름 날씨에 젖어 있는 평화로운 중산층 주거지  poplar street. 두대의 밴 승합차량이 소리없이 들어와서는 주민들을 향해 총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총알세례 속에서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하나둘 목숨을 잃게 된다. 밴에서 총을 쏜 범인들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서부영화와 SF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다. 더 놀라운 건 그때부터 마을이 점점더 이상하게 지형이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다. 사막이 생기고, 선인장이 자라나고, 둥그런 덩굴뭉치들이 굴러다니고, 늑대 비스무리한 동물들이 어슬렁대고... 서부영화에 나오는 마을처럼 변모해 간다. 주민들은 고립된 상황 속에서 살 길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줄거리만으로 보면 참 만화적이다. 서부영화와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현실에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삼류만화같은 줄거리지만,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을 절대로 삼류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끼치는 살육의 현장으로 독자를 이끌어 고립된 공간 속에서의 공포와 고통을 날것으로 맛보게 해준다. 밴에서 내린 괴물들이 벌이는 총격전 현장을 액션영화의 한장면처럼 역동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The Regulators의 서문에 언급한 범죄소설가 짐 톰슨과 서부영화 감독 샘 페킨파의 모습들을 스티븐 킹 식으로 표현한 것 같다.

The Regulators는 소설 속에서 꼬마아이가 즐겨보는 서부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그 영화에서 한 총잡이가 이런 대사를 남긴다. "우린 이 마을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들거야!"

킹은 이 소설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선사하기 위해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설 중간중간 틈틈이 보여준다. 맨처음 우체국 소인이 찍혀있는 엽서로부터 시작해 일기, 신문기사, 영화평론서, 완구잡지 기사,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편지, 꼬마가 그린 그림(자동차에 탄 사람들이 집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그림), 영화시나리오 등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그 효과는 정말 대단해서 수많은 허구의 자료들을 접하는 동안 나는 이 소설이 진짜 일어났던 사건을 쓴 것처럼 실감나게 느껴졌다. 킹은 "읽는" 재미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까지 선사하는 작가라는 것이 실감났다. 킹의 작품들을 보면 어느 순간 글씨체가 바뀐다거나 기호와 그림이 나오는 등 시각적인 면을 자극하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점이 킹의 소설을 더 매력적으로 읽게 만든다.

Desperation의 Tak이 동물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능력을 주특기로 삼았던 데 반해, The Regulators의 Tak은 침투한 인간의 마음 속 생각을 현실에 구체화시켜 환상이 힘을 발휘하게 만든다. 그런 점은 It의 삐에로나 Four Past Midnight의 도서관경찰에 나오는 여자 도서관장과 통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 친척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행패를 부리면 스티븐 킹 조차도 말리지 못할 것이다.

The Regulators는 습격받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들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 속에서는 서로를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가하면, 나 먼저 살겠다고 남을 못살게 구는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도 묘사된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아웅다웅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읽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한 주민이 어깨부상을 당해서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다. 주위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하지만 환자는 고통때문에 마구 몸부림치며 정신을 못차린다. 사람들은 허리띠로 두 팔과 몸통을 한데 묶어 환자의 몸을 고정시키려 하는데 환자가 너무 발작하는 바람에 환자의 몸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부분이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안쓰럽고 섬칫한 장면이지만, 옆에서 환자를 잡고 있다가 놀라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생각하면 황당한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나왔다. 마치 상가집에 가서 문상하다가 살아생전 고인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상주 앞에서 왈칵 웃음이 터져나와 버리는 격이랄까. 여러분도 한번 그 부분을 읽어보시고 나처럼 황당한 기분을 느끼고 상큼해지시길 기원합니다.

이 소설은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림으로 끝난다. 소설 앞머리에 나오는 그림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마을의 약도이다. 손으로 그려진 약도에는 집들이 꼼꼼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소설을 읽는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다. 소설을 읽다가 약도를 참고해서 '아 지금 얘네들이 있는 위치가 여기구나', '밴이 여기서 나와서 이리로 지나갔군'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그림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국내번역판에는 이 약도가 빠져있어 아쉬웠다.)

소설 맨끝에 나오는 그림은 꼬마아이가 그린 그림 한장이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뜨거워진다. 잔잔한 에필로그에 딱 어울리는 푸근한 그림이며, 현실에서 고통받던 사람이라도 부디 저세상(?)에서는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게 만드는 그림이다. 저세상이란게 어떤 세상인지 스티븐 킹만이 자세히 알겠지만. 부디 행복하길...

첩혈쌍웅이나 영웅본색같은 홍콩영화 속 장면처럼 처절한 총격전이 일품인 The Regulators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형제격인 Desperation이 넓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느라 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The Regulators는 고립된 일정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는 액션영화같아서 재밌게 읽을수 있다. 이 소설은 황금가지에서 "통제자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판이 출간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왜 마을이 서부시대로 변했는가이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밴 승합차량은 SF애니메이션 MotoKops의 주인공들 것인데. 마을이 우주공간으로 변하고 우주기지같은 게 등장하고 그랬으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그러면 너무 소설이 삼류만화처럼 유치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