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 Insomnia

작품 감상문 2007. 5. 11. 23:25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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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omnia

(1994년 소설)

스티븐 킹의 "It"에서 살인마 삐에로가 설쳐대던 공포의 도시 데리에 또다시 피의 축제가 시작된다.

늙으면 잠이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70살의 홀아비 랄프는 어느날 갑자기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별짓을 다해봐도 점점 더 잠드는 시간이 줄어들뿐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한 능력이 생겨버린다.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연기같은 오라(aura)를 볼 수 있게 된다. 오라의 모양과 색깔을 통해서 랄프는 남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또한 남의 기를 흡입할 수도 있게 되어 랄프의 외모가 젊음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한편, 데리시는 난장판이다. 낙태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 으르렁대면서 대치중인데다가, 코앞으로 다가온 낙태찬성파를 대표하는 여성운동가의 연설회 때문에 두 파가 여차하면 큰일낼 태세다. 랄프가 친하게 지내는 이웃사람 에드는 성격이 이상해지는가 싶더니 TV에 데리시 낙태반대파의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데리시를 뒤흔들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날 밤, 랄프는 잠이 안와서 뒤척이다가 창문으로 보이는 옆집 현관에서 작은 대머리박사 둘을 보게 된다. 음산하게 생긴 그들은 손에 커다란 가위를 들고 있다. 그들이 옆집으로 들어간다. 허걱, 괴물들이 옆집사람을 죽이려 하는구나. 랄프가 경찰에 신고하지만, 대머리 박사들은 사라지고, 그대신 옆집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제 불면증과 함께 랄프는 난생처음으로 겪어보는 위험하고 슬픈 모험에 빠져들게 된다.

Insomnia의 주인공은 70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얘기니 참 따분하겠다고? 사실 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엔 무척 졸았다. 왜 그렇게 졸리던지. 제목은 불면증인데 자꾸만 잠이 쏟아지니 이거원. 책에 집중하려 해도 꾸벅꾸벅...(스티븐 킹, 미안해요  -_-) 이 소설의 처음부분은 랄프라는 주인공, 주변 인물들, 데리시의 상황 등을 설명하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캐릭터의 성격을 부각시키는데는 효과적이겠지만, 그 결과로 처음부분은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좀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랄프라는 노인을 독자들이 더 잘 알게 되고, 나중 결말부분에 가서는 그를 무척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난 그랬다.)

처음부분을 지나면 소설은 무섭게 상승하기 시작한다. 랄프라는 70살 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격렬한 액션이 펼쳐지는 것이다. 낙태반대파의 살인폭력에 걸려들기도 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테러리스트와 맞서기도 하고, 격렬한 공중전도 치른다. (써놓고보니 무슨 007영화얘기 같다.) 이 모든 흥미진진한 모험을 뒤로한채 맞이하는 쓸쓸한 결말은 독자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실 것이다.(난 그랬다.)

Insomnia에는 작은 대머리박사들 세명이 나온다. 이름은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그 이름들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세여신 이름이다. 클로토는 실을 만들어낸다. 즉,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라케시스는 실의 길이를 결정한다. 즉, 인간의 수명을 결정한다. 아트로포스는 때가 되면 가지고 다니던 가위로 그 실을 잘라내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서 생명을 걷어가고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운명의 세여신을 작은 대머리박사들로 바꾸어 놓았다. 대머리박사들은 신화 속의 세여신처럼 인간의 죽음을 관리하며, 그들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위험에 랄프라는 70살 노인을 끌어들이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목적과 우연, 모순을 다루고 있다. 언젠가 이런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 낙태반대자가 낙태수술 의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뱃속에 들어있는 작은 태아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미 생명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을 살해하다니 아이러니 아니던가. Insomnia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노인들이 많으므로 소설 속에서 죽음을 맞게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린 나이면서도 죽음에 처한 아이도 있다. 저마다 다른 나이, 다른 계기로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사람들과 세명의 작은 대머리박사들과의 관계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이 마치 집구석에 걸린 거미줄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고 가늘어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손길 한번에 확 무너져내리기도 하는 가벼운 존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꽤 복잡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랄프가 겪게 되는 모험의 목적은 결국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 다크타워시리즈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밝혀진다. 위험에 처한 한 영웅을 구해냄으로써 전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고 다크타워의 운명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Insomnia는 다크타워시리즈를 읽어보았던 독자들이라면 더욱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크타워시리즈를 모르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중반쯤에 랄프가 아트로포스의 비밀기지로 쳐들어가는 장면이다. 아트로포스는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면서 기념으로 죽을 사람의 물건을 하나씩 수집하는 버릇이 있다.(변태요정?) 아트로포스의 비밀기지에는 그렇게 해서 모은 죽은이들의 물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불면증으로 인해 초능력을 얻게된 랄프는 수많은 유품들을 지나가면서 물건들의 주인이 아트로포스에 의해 어떻게 죽음을 당했는지를 속속들이 느끼게 된다. 랄프는 아트로포스가 미워진다. 나도 랄프를 따라 아트로포스가 미워졌다. 여러분도 책을 읽으며 나같은 감정을 느껴보시길 권한다.

Insomnia의 한국어판은 고려원에서 3권짜리로 출간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구해다가 읽어보고 중년의 스티븐 킹이 얼마나 원숙하게 소설을 이끌고 가는지를 확인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