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빛 / Black Light - 스티븐 헌터

읽을꺼리 2009. 12. 20. 22:55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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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Black Light

(1996년 소설)


스티븐 헌터가 쓴 밥 리 스웨거 시리즈 1탄 "탄착점(Point of Impact)"을 읽고 감상문을 올렸던 적이 있다.

[밥 리 스웨거 시리즈 1탄 "탄착점" 감상문]

1탄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어서 2탄 "검은 빛(Black Light)"도 읽어보았고, 이번에도 역시나 즐거운 독서경험을 했다.

베트남전에서 명성을 떨친, 해병대 출신 저격수 밥 리 스웨거가 현대 미국사회에서 펼치는 활약상은 소설 "검은 빛"에서도 여전히 멋졌다.

"검은 빛" 처음 장면에서 독자들은 밥 리 스웨거를 만나지 못한다.

1955년 7월 23일. 주(州) 경찰관 "얼 스웨거"의 등장.
이름에서 연상되다시피 그는 밥 리 스웨거의 아버지다. 2차 세계대전 중 해병대원으로서 큰 공을 세워 훈장까지 받은 그는 제대한 뒤 주 경찰로 열심히 근무한다.

이 날... 그는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맡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피곤한 시간을 보낸다.

이 날... 그는 근무 중 범죄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이것은 시리즈 1탄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소설 "검은 빛" 처음에 얼 스웨거를 등장시킨 작가 스티븐 헌터는 곧바로 40년 뒤 현대 미국사회로 장소를 옮겨 드디어 밥 리 스웨거를 보여준다.

시리즈 1탄에서 활약한 뒤 시골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밥 리 스웨거.
이젠 50살 먹은 시골 아저씨다. 아내가 있고, 4살짜리 딸이 있고, 말을 키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러스 퓨티라는 청년이 밥을 찾아와 논픽션 책을 쓰고 싶다며 얼 스웨거에 대한 자료를 부탁한다.

러스한테 자극받아 밥 리 스웨거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유품을 유심히 들추어본다.
아버지의 죽음이 밥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기에 그 동안 감히 들출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막상 유품을 들추고 보니...

풋내기 범죄자 때문에 순직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의문의 인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의문의 인물은 풋내기 범죄자가 아니라 살인 전문가다.

밥 리 스웨거는 러스 퓨티와 함께 고향으로 달려가 40년 전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파헤친다.

"우리 아버지 건드린 녀석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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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스웨거가 1955년 7월 23일 하루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다 끝내 총에 맞아 죽는 이야기. 밥 리 스웨거가 고향에 내려가 1955년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
소설 "검은 빛"에서는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대로 진행되면서 퍼즐 맞추듯 점차 큰 그림을 완성시켜 나간다.

이런 소설형식은 장르소설 애독자한테는 익숙하다. 익숙한만큼 재미가 있다.
과거의 인물/사건과 현재의 인물/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겨나면서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더욱 큰 흥미를 유발시켜나간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밥 리 스웨거는 막막하기만 하다.
40년이나 지난 사건을 파헤치자니 증거가 될만한 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세월이 너무나 흘렀다.
게다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길 꺼리는 악당은 얼마 안 남은 증거를 고의로 은폐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 "검은 빛"은 밥 리 스웨거가 총만큼이나 머리도 잘 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밥은 저격수로 활약하며 얻은 지식을 총동원해서 가려진 단서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기 시작하고, 한정된 단서들을 끈기있게 연결시켜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해나간다.
독자는 "명탐정" 밥 리 스웨거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그의 매력에 푹 빠져들 것이다.

소설 "검은 빛"이 그렇다고해서 추리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격수"가 주인공인 소설답게 총탄이 빗발치는 액션장면이 화끈하게 펼쳐진다.

밥이 명탐정의 재능을 발휘하며 점점 진실에 가까이 접근하자, 악당은 어설픈 협박이 전혀 안 통할 것 같은 밥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밥은 기꺼이 맞받아친다.

시리즈 1탄의 사건 이후로 밥은 총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리즈 2탄에서 그의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전문 킬러들로 구성된 특공대와 정면충돌하는 장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밥 리 스웨거는 흔들림없이 냉철한 자세를 유지한다.

왜냐고?
밥에게는 루거 미니 14 소총과 콜트 코맨더 45구경 권총이라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이 친구들과 함께라면 밥은 두려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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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의 전문 킬러들을 박살내는 밥 리 스웨거의 시원시원한 액션이 멋지다.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효율적으로 행동하는 그의 사격술을 목격하며 옆에 있는 청년 러스 퓨티가 감탄하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의 솜씨를 보면 언제나 감탄이 나온다.

밥이 적의 저격수한테 쫓기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주로 저격을 하는 입장이었던 밥이 아이러니하게도 저격수한테 저격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밥은 쥐, 적의 저격수는 고양이. 고양이가 쥐를 추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적의 저격수가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총을 발사하며 사격범위를 좁혀오느라 궁지에 몰린 밥 리 스웨거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는 상황묘사가 실감났다.

그러다 밥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고양이와 쥐의 입장이 역전돼버리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짜릿짜릿했다.
그 장면이 나의 머리 속에 대단히 화려한 이미지를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나는 흥분해서 침을 질질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진짜 밥 리 스웨거 너무 멋졌다.

소설 "검은 빛"에서는 밥의 아버지 얼 스웨거의 마지막 하루를 차근차근 소개하는데, 참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항상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경찰이고,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절대 굴하지 않는 곰 같이 우직한 사나이. 이상적인 "정의의 수호자" 이미지라고 부를만하다.

이 캐릭터가 맘에 들었던지 작가 스티븐 헌터는 얼 스웨거 시리즈를 세 작품 발표했다.
1950년 초반, 경찰로 근무하며 나쁜 녀석들과 대결하는 얼 스웨거의 활약이 멋지게 나온다고 한다.
소설 "검은 빛"에서 얼 스웨거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지라, 기회가 되면 얼 스웨거 시리즈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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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리 스웨거는 시리즈 1탄 "탄착점"에서 젊은 FBI 요원과 짝을 이루어 활약했는데, 2탄 "검은 빛"에서는 러스 퓨티라는 젊은 작가 지망생과 짝을 이룬다.
"명탐정 셜록 홈즈" 밥 리 스웨거를 도와 러스 퓨티는 "왓슨"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밥의 추리에 맞짱구쳐주고 모자란 곳을 채워주는가하면, 총을 든 악당들과 밥이 충돌하는 액션장면에서 두려움과 흥분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독자들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작가 스티븐 헌터는 밥 리 스웨거 시리즈 1탄(1993년)과 시리즈 2탄(1996년) 사이에 소설 "Dirty White Boys"(1994년)을 발표했다.
"검은 빛"에서 러스 퓨티는 잔인한 살인마에 의해 자신의 가정이 파탄나버린 과거를 슬퍼하고 그에 따른 악몽에 시달린다.
고속도로 순찰대원이던 아버지가 감옥을 탈출한 잔인한 살인마한테 동료를 잃자 복수에 나서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인데, 소설 "Dirty White Boys"는 바로 이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밥 리 스웨거 시리즈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인연은 있는 작품이고, 독자들의 평도 좋은 터라 "Dirty White Boys"도 읽어보고 싶다. (이러다 스티븐 헌터가 쓴 소설들 다 읽게 생겼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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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리 스웨거 시리즈 1탄 "탄착점"과 2탄 "검은 빛"을 읽고 나니, 밥은 소설 속에서 열심히 진실을 파헤치다 마지막에는 그냥 적당한 선에서 묻어버린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저격수가 총 들고 나오는 소설이니까 눈에 보이는 나쁜 놈들을 다 쏴죽이고 나쁜 음모를 다 까발리고 말겠지라고 생각했던 독자들한테는 조금 아쉬움이 들 것도 같다.

밥이 민간인 신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일 것이다. 경찰이나 CIA 요원 같은 신분을 지닌 상태라면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악의 무리를 발본색원하겠지만, 평범한 시민인 밥에게는 지켜야할 사생활이 있고, 지켜야할 가족이 있다.
시리즈 1탄, 2탄에서 밥 리 스웨거가 총을 들고 싸움에 나선 것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였지, 사회정의 실현 같은 대의명분 때문은 아닌 것이다. 나쁜 놈들을 물리쳐서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고픈 명예심은 전혀 없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에 밥은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해오는 대상은 확실히 처리하지만 그 범위 밖의 대상에게는 총을 거둔다.

소설 "검은 빛"에서 한바탕 총격전을 치르고 난 후 행여나 수사기관 같은 데 꼬투리를 잡힐까봐 탄피를 일일이 주우러다니는 장면은 밥의 치밀한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민간인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정식 수사요원이었다면 애초에 땅에 떨어진 탄피를 줍는 일 따위에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의의 용사가 펼치는 끝없는 무적 액션을 예상하던 독자들한테는 아쉽겠지만, 민간인 신분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현실적인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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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탄 "탄착점"에서 느꼈던 재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만족스러운 속편 "검은 빛".
위기의 순간을 맞더라도 적의 헛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기어이 전세를 역전시키고야마는 "꾀돌이" 밥 리 스웨거의 매력에 푹 빠지는 기분좋은 독서경험이었다.
"검은 빛"은 미스터리와 액션이 아름답게 균형을 이룬 훌륭한 장르소설이다.
다음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지 너무나 궁금해서 독자를 안달나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의 완급을 매끄럽게 조율하는 작가 스티븐 헌터의 능력이 대단했다.

그와 아울러 저격수의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잡학상식을 얻을 수 있어 흥미로웠다.
밥이 육군 저격수와 해병대 저격수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부분이 특히 재미있었다.
겸연쩍어하면서도 은근히 육군을 까는 해병대 출신 밥 리 스웨거의 모습. ㅋㅋㅋ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밥 리 스웨거 시리즈 1탄 "탄착점"이 번역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제발 좋은 번역과 좋은 표지로 우리나라 독자들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으면 좋겠고, 1탄뿐만 아니라 2탄 "검은 빛"도 번역출간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