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소부인 바람났네>와 나

읽을꺼리 2007. 5. 9. 03:16 posted by 조재형
이것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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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반 때 일이다.

그 때 한시네마라는 에로 비디오 제작사가 내놓은 한 영화가 장안을 강타했다. 그 이름 <젖소부인 바람났네>. 그 명성에 감동한 나는 며칠간을 설렘과 망설임으로 고민하던 끝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빌려다 보고야 말았다.

젖소부인 역을 맡은 배우 진도희 씨는 최고였다. 사실 그저 최고가 아니였다. 최~에~고였다. 진도희 씨의 도발적인 매력에 나는 눈물을 쏟고 콧물을 터뜨리고 침을 질질 방출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에로계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실망이었다. 줄거리가 엉성한데다 끝내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나는 놀랬다. 아니, 어떻게 이런 줄거리로 한국의 에로 비디오계를 석권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써도 이거보다는 잘 쓰겠다. 그것은 내가 쓰면 대박 확실이란 얘기? 그래, 써보자! 에로영화 시나리오를 쓰자! 도전하는 젊음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남들이 안가는 길에 도전하고 대박을 터뜨리자!

남들은 대학 4학년이라 취업에 힘쓰던 그 시간에 나는 일주일간을 에로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 매달렸고, 감동적인 작품이 하나 탄생하고야 말았다.

제목은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된 조모씨. 출중한 외모와 넘치는 힘으로 다양한 개성과 몸매를 자랑하는 회사 여직원들의 육탄공세에 빠져 행복한 신음소리를 내지르지만 결국엔 끈질긴 관심과 애정을 피력한 여사장님과 진정한 (육체적인) 사랑을 이루고 만다는 상당히 교훈적인 내용이다.

이제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니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만든 한시네마를 찾아가 교섭하는 일만 남았다. 과연 이 불후의 명작 시나리오를 그들은 얼마에 살 것인가? 천만원? 삼십억? 나는 인생대박의 꿈에 젖어 식음을 전폐한 채 방구석에서 혼자 실실 웃고 지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은근슬쩍 <젖소부인 바람났네> 비디오 케이스를 훔쳐봐서 한시네마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죽이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보여드리고 싶군요." 전화를 받은 한시네마 시나리오 담당자라는 사람은 순순히 한시네마 위치를 알려 주었다.

조금 헤맨 끝에 찾아가 보니 100층짜리 인텔리전트 빌딩인 줄 알았던 한시네마는 2층짜리 가정집이었다. 그래도 우리집보다는 100배 좋은 집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일반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이 나를 맞는다. 글래머 에로배우가 손님을 맞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좋아했던 내 예상을 잔인하게 배반하는 순간이다. 시나리오 건으로 왔다고 했더니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한다. 나는 유리 탁자가 있는 거실 탁자에 앉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합이 8근.

잠시 후 누가 거실로 나왔다. 앗! 이 사람은 한시네마의 사장 한지일 씨였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서도 봤었던 영화배우 출신이다. 사실은 <정사수표> 10탄에 출연했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지만.

하여간 한시네마 한지일 사장이 내 앞에 앉는다. "시나리오 담당자가 영상물 심의위원회에 나가느라 자리를 비워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동안 나는 <정사수표>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사인을 받을까 하다가 관뒀다. 비지니스 협상에서 쫄싹거리는 행동은 일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의젖하게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나는 <사장님, 이러시면 안되요> 시나리오를 건넸다. 그가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각본을 쓸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을 봤는데 줄거리에 실망했다, 내가 쓰면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물을 가져왔다, 자 보시오!

그는 내가 쓴 시나리오를 훌훌 넘겨본다. "음... 이렇게 코믹하게 처리한 건 좋네.... 등장인물이 적은 것도 좋고..." 이랬던 그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런데 저희가 원하는 각본은 아니군요."

허걱, 왜냐?

"너무 짧아요." 그는 내가 쓴 A4용지 15장짜리 시나리오를 흔들며 말했다. "보통 70씬, 80씬, 많으면 90씬도 넘어가는데 뿅망치님(본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 처리)께서 쓰신 각본은 너무 짧아서 쓸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한시네마에서 준비 중이라는 한 영화의 각본을 보여주었다. 갱지에 인쇄가 되어있는 그 시나리오는 정말 한지일 사장 말대로 분량이 많았다.

아아~ 그렇다. 나는 처음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거라 정확히 얼마만큼의 분량으로 써야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내 맘대로 썼던 것이다. 경험부족에서 오는 슬프고도 필연적인 어설픔의 미학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막혔다. 생전 처음으로 에로 영화사 사장한테서 직접적인 거절통지를 경험하게 된 나는 경황이 없었다. 그저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저기, 이거 가져가셔야죠." 한지일 사장이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 시나리오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순간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왠지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것 같아 그 시나리오를 그냥 놔두고 왔다. 가져가라고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그 시나리오를 그냥 가져와 버리면 나의 패배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그렇게 얕보던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세계에 깔려 항복선언을 하는 것 같았다. 패배자를 향한 확인사살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 시나리오를 그냥 한시네마에 놔두고 왔다. 나중에 쓸 일 있으면 그냥 쓰라는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말을 하면서.

한시네마를 나와 길을 내려갔다. 큰 길까지 나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자동차가 한 대 와서 멈췄다. 한지일 사장이 얼굴을 내민다. "저 지금 명동 나가는 길인데, 타시죠. 가는 길에 태워드릴께요."

나는 거절했다. 그와 같은 차를 타고 간다면 더 우울할 것만 같았다. 그는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나는 그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쳐다보며 슬픈 자태로 걸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얼마전 나는 신문에서 기사를 봤다. 한지일 사장이 여배우 진도희 씨한테 소송을 당해서 젖소부인의 새로운 시리즈를 내보내기가 어렵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한지일 사장은 1인 시위를 벌이며 젖소부인 비디오테이프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그가 측은한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또 들었다. 그와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저...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 시나리오 아직도 갖고 계세요? 있으면 저에게 돌려 주시와요."

어쩐지 나는 아직도 그 <사장님, 이러시면 안돼요>가 한국 에로영화계를 혁신시킬 문제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 시나리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진다. 아아~ 그리워라~ 나의 걸작이여~

[조재형, 2003년 9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