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아이들 [5]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 5. 9. 01:17 posted by 조재형

"제이프 부인? 제이프 부인?"

누군가의 부름에 바네사는 눈을 떴다. 머리도 쑤시고 팔도 쑤신 상태였다. 최근에 아주 안좋은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잠깐동안의 고민 끝에 기억이 돌아왔다.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문짝이 떨어져 나간 공간을 통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었다. 차는 가라앉았고, 그녀 주위엔 온통 광란의 비명소리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차 밖으로 탈출하려 기를 쓰고 있을 때, 그녀 옆으로 플로이드의 몸이 떠다녔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육체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 때의 일을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다.

"죽었습니다."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그 사람들 전부 다 사망했습니다."

"그럴수가."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클라인의 얼굴대신 그의 제복에 묻은 초콜렛 얼룩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들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쓰지 말라구요?"

"제이프 부인, 그보다 더 중요한 비지니스가 있습니다. 빨리 정신차리고 일어나세요."

클라인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다급한 분위기에 이끌려 바네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들이 있는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네, 아침입니다." 클라인이 조바심을 내며 대답했다. "이제 저랑 같이 가실까요? 보여줄 게 있습니다." 그가 문을 열었고, 그들은 침침한 통로로 나갔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로 앞쪽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수많은 사람들 목소리가 언성을 높이고, 저주를 퍼붓고, 격렬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무슨 일 났어요?"

"세상이 망할까봐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진흙 레슬링 선수들을 봤던 방으로 안내했다. 이제는 방 안의 모든 비디오 스크린들이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고, 각각의 화면에는 전부 다른 실내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 지휘소, 대통령 집무실, 각료 회의실, 그리고 국회 의사당들. 각각의 모든 장소에서는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당신은 꼬박 이틀동안 의식이 없었습니다." 클라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눈 앞에 보이는 혼란스런 광경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서가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모든 화면들을 두리번거렸다. 워싱턴에서 함부르크에서 시드니에서 리오 데 자네이로까지. 전세계 모든 나라의 권력자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식을 전해줄 신의 사도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저 사람들은 그저 심부름꾼입니다." 고함소리가 흘러나오는 화면들을 손짓하며, 클라인이 말했다. "서로 도와 어깨를 잡고 2인 3각 경주를 할 줄도 모르죠. 세상이 어찌되든 상관 안합니다. 점점 이성을 잃고 있어요.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근질근질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보고 뭘 어쩌라구요?" 바네사가 물었다. 허무한 바벨탑의 실체를 보고 있는 바네사는 우울해졌다. "나는 국제정치 전략가가 아니에요."

"고옴과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아주 오래 전엔 전략가의 신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그런 신분따위 쓸모없게 됐으니까요."

"시스템이 썩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스템만의 문제라고 할 순 없죠. 제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는 이미 위원회 멤버 중 절반이 죽고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서는-"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어요. H.G.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네, 맞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뭐 그럭저럭." 클라인이 대답했다.

"무슨 뜻이죠? 그럭저럭?"

클라인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눈물을 쏟을 것만 같다.

"고옴이 말 안하던가요? 제이프 부인, 그들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들은 투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멤버들간의 의견교환이 지겨워지면, 토론같은 건 집어치우고 동전을 던져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럴리가."

"그리고 개구리경주 같은 것도 요긴하게 써먹었죠. 그들이 제일 좋아하던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 고위층들이-"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허술하게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일 리가-"

"그 사람들이 그런 거 상관이나 하는 줄 알아요?" 클라인이 말했다. "그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한 그들한테 중요한 게 뭐겠습니까? 아랫것들한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잡담꺼리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말들이 얼마나 합리적인 과정으로 도출되었느냐 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결정이든 상관없다?" 그녀가 말했다.

"왜 아니겠어요? 그것은 매우 훌륭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양의 내장으로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했으니까요."

"말도 안돼요."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이 곳에서 게임으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저 사람들의 손에 지구의 운명을 고스란히 맡기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일까요?" 그는 화면에 나오는 성난 얼굴들을 가리켰다. 민주주의 정치가들이 날이 밝았는데도 어느 쪽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어야하는 지 방침이 서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독재자들은 지령을 받지 못해 자기들의 잔혹한 정권이 힘을 잃고 무너질까봐 겁에 질려 있었다. 기관지 천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상 한 명이 보좌관 둘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다른 정치가는 화면에 리볼버 권총을 들이대며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정치가는 가발을 씹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치의 나무가 키워낸 최상품 과실이란 말인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거만하고, 감언이설로 생활하는 바보얼간이들.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튀어야 하는 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졸도 직전까지 몰렸다? 그들 가운데서는 바네사가 여행을 떠날 때 길안내를 믿고 맡길만한 남자나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개구리를 믿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     *     *     *     *     *     *     *

어두컴컴한 벙커에서 나와 넓은 마당에 서니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벙커 속에서 울려 퍼지던 지긋지긋한 고함소리들로부터 해방되어 바네사는 기뻤다. 길을 걸으면서 클라인은 정치인들이 조속히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기까지 적어도 수주일은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바네사가 보았던 인간들이 절망에 빠져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도 있다. 그들은 위원회로부터 판결을 받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이니까. 지금 당장 소원을 풀어주어야 한다.

"골드버그가 아직 살아있어요." 클라인이 말했다. "그가 계속 게임을 해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게임을 하려면 2명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하면 되겠네요."

"골드버그가 나를 싫어해서 안됩니다. 우리 경비병들 모두를 싫어하죠. 그가 당신하고만 게임을 하겠답니다."

골드버그가 월계나무 밑에 앉아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진행되는 놀이였다. 그는 시력이 너무 나빠서 각각의 카드들을 일일이 코 앞에 갖다대고 읽어야만 했는데, 쭉 늘어선 카드의 맨 끝 카드를 읽을 때 쯤이면, 맨 처음 카드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네사가 승낙했어요." 클라인이 말했다. 골드버그는 카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지금 바네사가 승낙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장님이지 귀머거리는 아냐." 여전히 카드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골드버그가 클라인에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바네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가 그 친구들한테 탈출은 실패할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해줬는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바네사는 그의 말 속에서 친구들을 잃은 슬픔을 느꼈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어. 우리는 이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탈출은 소용없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카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때문에 도망을 가? 세상이 변했는데. 나는 알아. 우리가 세상을 바꿔버렸어."

"아주 참혹하진 않았어요." 바네사가 말했다.

"세상이?"

"동료분들이 돌아가신 사고가."

"아."

"우리는 모두 즐겁게 드라이브를 했어요.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고옴은 지독하게 감상적인 사람이었어." 골드버그가 말했다.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바네사가 있는 쪽으로 튀어나왔다. 그 움직임이 골드버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건 뭐지?" 그가 물었다.

개구리는 바네사의 발을 적으로 생각하고 경계했다. "그냥 개구린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어떻게 생겼어?"

"뚱뚱해요." 그녀가 말했다. "등에 빨간 점 3개가 있구요."

"그건 이스라엘이야."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을 밟으면 안돼."

"정오 쯤엔 판결이 나올 수 있겠죠?" 클라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특히 걸프만 사태가 심각하구요, 또 멕시코 분쟁이랑, 또-"

"알어, 알어, 안다구." 골드버그가 말했다. "이제 여기서 꺼져."

"-피그만에서 또 사건이-"

"나도 이미 다 아는 얘기잖아. 빨리 꺼져! 너때문에 나라들이 불안해 하잖아." 그는 바네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데 자네는 여기에 앉을건가 아니면 딴데 갈 건가?"

그녀는 앉았다.

"잘 좀 해주십쇼." 클라인이 말하며 물러났다.

골드버그가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꾸웩-꾸웩-꾸웩. 개구리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 소리에 반응해서 마당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네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가 전에 한 번 생각했던 것처럼, 희극을 연기할 때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야한다. 그 모든 터무니없는 말들을 정말로 믿고 있는 듯이 말이다. 오직 비극만이 웃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개구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바네사와 골드버그는 웃음을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