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아이들 [2]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1:08 posted by 조재형

한 때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바네사의 형부가 그녀에게 알려준 사실에 의하면, 희극을 훌륭하게 공연하기 위해서는 배우가 철저하게 진지한 분위기로 연기해야 한다. 희극작가의 코믹한 의도를 표현한답시고 배우가 관객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려서는 안된다. 배우가 코믹함을 무책임하게 관객들에게 완전히 드러내 놓는 것은, 극의 리얼리티를 훼손시키는 것이고, 배우의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그녀는 완벽히 희극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수염달린 수녀, 주위를 감시하는 마리아상 등등- 현재의 웃기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통 일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 사람들은 그들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고, 그들에게서는 진심을 알아챌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녀에겐 이런 종류의 코미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부족했다. 이 사람들이 배우 선정에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연극무대에서 쫓아내 줄수록, 그녀는 더 한층 행복해질 것이다.

그녀가 미스터 클라인과의 심문을 끝내고 방에 돌아와보니, 사려깊은 누군가가 반쯤 남은 위스키 한 병을 놓고 갔다. 위스키의 도움으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 돼서 그녀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는 깨질듯 아팠고, 혀는 가죽장갑이라도 된 듯 텁텁했다. 잠시동안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 것인지 파악하느라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사이,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에 붙은 작은 창문이 바깥쪽에서 열렸다. 다급한 표정의 얼굴이 창문 구멍에 바짝 붙었다. 부드러운 턱수염에 매서운 눈을 가진 늙은 남자였다. "제이프 부인," 그가 말했다. "제이프 부인. 우리 잠깐 대화 좀 나눌래요?"

그녀는 문쪽으로 가서 창문 속을 보았다. 노인에게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풍겼다. 노인이 그녀보고 더 가까이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창문과 거리를 둬서 노인의 술냄새를 멀리했다.

"누구세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햇볕에 그을려 탄탄한 노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은 것도 같아 물어보았다.

그는 뭔가 기대감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가 말했다.

"내가 당신과 아는 사이였던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엔 당신은 너무 어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알지. 나는 당신이 철문을 지나 이 곳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 때 당신을 말리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만."

"당신도 여기 죄수에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근데 나한테 좀 알려줘... 플로이드를 봤나?"

"누구?"

"플로이드는 여길 도망쳤어. 그저께."

"오," 바네사가 말했다. 대화의 요점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 때 사람들이 막 쫓아가던 사람이 플로이드인 건가?"

"그래, 맞아. 당신이 목격한 대로 그는 여길 몰래 탈출해 줄행랑을 친 거야. 그래서 사람들-바보자식들-이 황급히 그를 추적하느라 그만 철문을 열어놓고 나간거였구. 요즘엔 여기 경비상태가 정말 그지같았어." 그지같은 경비상태의 피해자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도 덕분에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돼서 기쁘긴해."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절박한 심정같은 것을 느꼈다. 슬픔같은 감정에 무너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심정. "우린 총소리도 들었어."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를 잡은거야? 그건 아니겠지?"

"확실히 보진 못했어요." 바네사가 대답했다. "어떻게 됐는지 보러 가보긴 했었는데요, 아무런 흔적도-"

"하!" 표정이 밝아지며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 그는 탈출에 성공했을거야."

바네사는 순간적으로 지금의 대화가 함정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인은 그녀를 심문한 사람의 끄나풀이고, 노인이 여기 온 것은 그녀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한 수작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그런 생각과는 반대였다. 그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삐에로 대장같은 그의 얼굴이 거짓감정을 꾸며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잘하는 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노인을 신뢰했다. 그 밖에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나가게 도와줘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나가야 돼요."

그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벌써?" 그가 말했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난 도둑이 아니에요. 이렇게 감방에 갇혀있긴 싫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신은 갇혀 있기 싫을거야." 그는 방금 전에 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발언을 조용히 질책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성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나는 말주변도 별로 없고..."

"어디선가 당신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모르세요?" 바네사가 물었다. "당신 얼굴이 무척 낯익은 것 같아서요."

"정말?" 그가 말했다. "정말 기분좋은 말이야. 우린 모두 여기에 있느라 완전히 잊혀진 줄로만 생각했거든."

"우리 모두?"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이 곳으로 끌려왔어. 그 당시 우리들 대부분은 이제 막 새로운 연구활동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플로이드가 도망간 것도 그 때문이야. 그는 남은 여생동안 단 몇 달 동안만이라도 연구를 하고 싶어했어. 나도 가끔씩은 그런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그는 우울한 추억회상을 중단하고,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하비 고옴. 하비 고옴 교수야. 지금은 내 전공이 무엇이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지만."

고옴. 흔치 않은 이름이고, 그녀의 머리 속에 뭔가 떠오를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

"나에 관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어?"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일순간 거짓으로라도 말해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랬다간 여기에 와서 유일하게 만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었다.

"아니요... 확실히 기억나는 게 없어요. 뭔가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걸 알려줄래요?"

그러나 노인이 자신의 의문에 찬 과거에 대해 말해주려는 순간, 밖에서 소리가 났다.

"지금은 말할 수 없을 것 같군, 제이프 부인."

"그냥 바네사라고 불러주세요."

"그래도 돼?" 그녀의 호의에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바네사."

"나를 도와줄거죠?" 그녀가 말했다.

"최선을 다할께."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말야 나를 보더라도-"

"-모르는 척 할께요."

"좋았어. 그럼 안녕." 그는 문에 붙은 창문을 닫았다. 바네사는 통로를 따라 사라져가는 노인의 발소리를 들었다. 몇 분 뒤, 그녀의 감시인으로 일하는 길리멋이라는 이름의 친절한 듯 보이는 사내가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선심쓰듯 활짝 웃어주었다.

*     *     *     *     *     *     *     *

어제 마음 속에 있던 불만을 클라인에게 확 터놓고 표출했더니 약간의 결실이 있었다. 아침식사 후에 미스터 클라인이 그녀를 잠깐 불러서 이제부터는 주변을 산책해도 좋다고(물론 길리멋과 함께) 말해주었다. 덕분에 햇빛을 맘껏 쬘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새 옷들도 제공되었다. 사이즈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24시간을 넘게 입어서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뻤다. 그러나 새 옷이 지급됐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속옷까지 전부 갈아입을 수 있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미스터 클라인은 그녀를 지금 당장은 풀어줄 의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묵고 있던 작은 호텔의 우둔한 매니저가 바네사는 객실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려면 얼마나 걸릴까? 알아챘다고 한다면, 그는 어떤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그는 벌써 관계당국에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관계당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길가에 버려진 그녀의 차를 찾은 다음에, 그녀의 자취를 쫓아오다 이 의문의 요새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 속 희망은 오늘 아침 산책길에 무참히 부서져 버렸다. 그녀의 차는 월계수 나무가 있는 철문 옆 담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비둘기들이 차 지붕 위로 무수히 떨어뜨린 응가 덩어리들로 판단해 볼 때, 차는 지금의 위치에 밤새동안 주차돼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영국에 있는 누군가가 불현듯 그녀가 걱정되어, 그녀의 위치를 수소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 때쯤 되면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콱 죽어버렸을 것이다.

요새 안의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다 못해 미쳐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한 취미를 가진 것 같았다. 아침산책으로 바네사와 길리멋이 요새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그 중 하나는 고옴의 목소리였다-가 들려왔다. 목소리들은 전부 흥분해서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겁니다." 길리멋이 대답했다.

"우리도 저기 가서 구경할래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안됩니다."

"나도 게임 좋아하는데."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언제 한 번 게임해볼래요?"

이것은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요구했다가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러죠 뭐." 그녀가 말했다. 감시인의 신임을 얻는 것이 그녀에겐 유리할 수도 있었다.

"포커 어때요?" 그가 말했다.

"그건 한 번도 안해봤는데."

"내가 가르쳐줄께요." 그가 대답했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근처에서 게임하는 사람들은 이제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었다. 서로들 무엇인가를 격려하는 소리를 질러대는 것으로 봐서 무슨 경주를 벌이는 모양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잠잠해지는 것을 보니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했나보다. 길리멋이 그녀가 소리나는 쪽으로 귀 기울이는 것을 보았다.

"개구리에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구리경주를 벌이는 겁니다."

"궁금하다."

길리멋이 다정해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신경끄는 게 신상에 좋아요."

길리멋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일단 게임하는 소리에 솔깃해진 그녀의 머리에서는 개구리경주가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게임은 오후에도 계속됐고, 고함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가끔씩은 웃음소리도 나오기도 했고, 가끔씩은 언쟁을 벌이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게임을 하는 고옴과 그의 친구들이 개구리경주같은 하찮은 일때문에 말다툼하는 것을 들으니, 그들이 마치 어린애같았다. 그렇다고해서 더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라고 격려는 못할망정 그들을 유치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날 저녁 바네사의 문창에 고옴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말했다. "오늘 아침에 산책 나갔다가 당신 목소리를 들었어요. 오후에도 들었구요. 당신들은 정말 재미있게 지내는 것 같더군요."

"오, 게임하는 거 말이로군." 고옴이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 바쁜 날이었어. 경주할 게 어찌나 많던지."

"당신 친구들을 설득해서 나도 같이 게임해도 돼요? 여기서 가만히 있는 건 너무 지루해요."

"불쌍한 바네사.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실 그러는 건 불가능해. 플로이드가 도망간 것 때문에, 지금 당장은 우리 모두 과로했거든."

과로했다구? 그녀는 생각했다. 개구리 경주시키느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범죄자같은 것은 아니겠죠?"

고옴의 얼굴이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범죄자라구?"

"죄송해요..."

"아니야. 자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이해해. 우리가 이 곳에 잡혀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아냐, 우린 범죄자는 아니야."

"그럼 뭐죠? 저한테 무슨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어요?"

고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 대답했다. "만약 내가 자네한테 비밀을 말해주면," 그가 말했다. "우리가 여길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겠어?"

"어떻게 탈출해요?"

"당신 차. 요 앞에 주차돼 있어."

"나도 봤어요..."

"우리가 그 차에 타면, 운전해 줄꺼지?"

"당신들은 모두 몇 명인데요?"

"넷. 나도 있고, 이레냐도 있고, 모터스헤드도 있고, 골드버그도 있어. 물론 플로이드도 저멀리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는 자기가 알아서 처신하겠지. 안그래?"

"내 차는 작은 차에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우리도 작은 사람들이야." 고옴이 대답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말라비틀어진 과일처럼 쪼그라드는 법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 정도로 나이를 먹었어. 플로이드까지 해서 우리 나이를 전부 합치면 398살이나 된다구. 우리 모두 이 나이 되도록 모진 경험을 참 많이도 했어."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현명해지지는 못했어."

갑자기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고옴은 문에서 잠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는 짧게 중얼거렸다. "놈들이 그를 찾아냈어. 오 마이 갓. 놈들이 그를 찾아냈다구." 그리고서 그는 가버렸다.

바네사는 창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밑에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자매님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소동의 한가운데서 경비원 두 명의 손에 잡혀 몸부림치고 있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 보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도망갔던 플로이드였다. 밤낮으로 도망자 생활을 하느라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는데, 축 늘어진 얼굴은 때에 쩔어있었으며, 강렬한 햇볕에 과다하게 노출된 대머리는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서 바네사는 미스터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었고, 잠시 후 그가 마당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플로이드에게 다가가서 인정사정없이 호되게 화를 냈다. 바네사는 클라인의 말을 명확하게 들을 수는 없었는데, 클라인의 냉혹한 질책에 노인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녀는 창문에서 몸을 돌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간식으로 먹는 초콜렛이 목에 걸려 클라인이 숨막히게 해달라고.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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