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아이들 [1] by 클라이브 바커

읽을꺼리 2007.05.09 00:52 posted by 조재형
 스티븐 킹이 "호러의 미래"라고 격찬했던 클라이브 바커는 소설(피의 책), 영화(헬레이져), 그림, PC게임(언다잉), 액션피겨인형(Tortured Souls) 등 공포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포영화 감독/제작자로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이제까지 수십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입니다.

   지금 소개하는 단편 "바벨의 아이들"은 바커의 단편집 "피의 책(The Books of Blood)" 제5권에 등장하는 작품으로서, 스티븐 킹의 단편 "옥수수밭의 아이들"을 방불케하는 멋진 낯선 마을 이야기입니다.

바벨의 아이들 [1] by 클라이브 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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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바네사는 표지판 하나 붙어있지 않는 낯선 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일까?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오직 하나님 혼자서만 알 수 있을 것같은 낯선 길의 유혹을 말이다. 너무하다 싶을만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열광적인 그녀의 행동은 과거 여러차례 말썽을 일으키고는 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알프스에서의 조난사고. 강간당할 위기에 처했던 마라케치에서의 사건. 칼을 먹어삼키는 차력사의 수제자와 함께 했던 로워 맨하탄 벌판에서의 모험. 이렇게 과거의 쓰라린 경험들이 그녀에게 값비싼 교훈을 알려 주었건만, 목적지가 명확히 정해진 길과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낯선 길을 앞에 두게 되면, 그녀는 언제나 아무런 거리낌없이 낯선 길을 선택했다.

지금 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쪽 길은 키스노스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가는 길이다. 이 길은 과연 그녀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해줄 것인가? 수풀이 우거진 울퉁불퉁한 맨땅을 달리는 드라이브-우연히 야생염소와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와 도로가 지나는 절벽에서 바라보는 푸른 에게해의 풍경같은 것은 빼고 말이다. 에게해 풍경쯤이야 그녀가 묵고 있는 메리카베이의 호텔방에서도 심지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반면에 그녀가 지금 멈춰있는 교차로에서 뻗어나가는 나머지 길들은 목적지가 너무나도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한쪽은 베니스풍 요새 유적이 있는 로트라로 가는 길. 다른 한쪽은 드리오피스로 가는 길. 로트라든 드리오피스든 그녀는 어느 쪽도 방문해 본 적이 없었지만, 둘 다 매력적인 마을이라는 소리는 들었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너무나도 뻔히 정해져 있다는 사실때문에 그녀는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교차로의 나머지 이쪽 길은 어디로 가게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로 막막한 길이다- 적어도 확실하게 그녀를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집스럽게 이쪽 길로 차를 몰았다.

도로(급속도로 오솔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쪽으로 보이는 풍경은 무척 지루했다. 차로 달리면서 지켜보고 있자니 당초 예상했던 염소들과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식물들은 영양실조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섬은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그림같이 멋진 화산이 있는 산토리니나 호화로운 해변과 그보다 몇 배는 더 호화로운 호텔들로 가득한 마이코노스-사이클라데스의 타락한 소돔이라 불리는 곳-와는 다르게, 키스노스는 여행객에게 자랑할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때문에 그녀는 이 섬을 찾아온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시끌벅적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은 그녀에게 더욱 완벽한 평온함을 선사해 줄 것이다.

하지만 왼편에 늘어선 낮은 언덕들쪽에서 들려온 고함소리는 평온함을 추구하고픈 그녀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절박한 경고를 담고 있는 고함소리. 털털거리는 그녀의 렌트카 속에서도 고함소리는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고물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또한번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이번엔 총소리도 함께였다. 잠시 침묵 후에 두번째 총성이 터졌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차문을 열고나와 오솔길에 발을 내딛었다. 바깥 공기는 야생화들의 향기로 가득했다. 차 안을 맴돌던 역겨운 휘발유 꼬랑내를 말끔히 날려버렸다. 자연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세번째 총소리가 났다. 그녀는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남편이었더라도 몰라봤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잠시 후 봉우리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총성이 서너발 울려퍼지고 나서, 그 사람을 추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총이 또 한 발 발사됐다. 총을 쏘는 모습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겨냥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추적자들은 쫓고 있는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멈추게 하려고 경고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추적자들의 모습은 조금 전의 도망자만큼이나 희미했지만, 한가지 불길한 점이 있었다. 추적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언덕에 올라 저들이 벌이는 술래잡기의 정체를 알아볼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그녀는 차 옆에 서서 망설였다. 총소리는 확실히 유쾌하지 못한 소리였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녀가 지금같은 미스테리의 현장에서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일이 가능한 일이던가? 검은 옷의 사람들은 사냥감을 쫓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동안 그들이 떠난 자리를 응시하더니, 가능한 한 자세를 낮추면서 그들이 있던 지점을 향해 출발했다.

지형이 눈에 띄는 특징없이 단조로워서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모래투성이 언덕들은 어느 것이나 죄다 똑같아 보였다. 나무들 사이를 돌고 돌아 거의 10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도망자와 추적자들이 사라진 지점이 어디였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그녀는 온통 잡풀이 무성한 언덕 위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함소리와 총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 소리라곤 갈매기소리와 발 아래에서 성가시게 울려퍼지는 매미소리뿐이었다.

"씨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야?"

그녀는 근처에 있는 가장 큰 언덕을 골라 모래흙에 익숙치 않아 고생하고 있는 발을 이끌고 꼭대기까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잘하면 차를 두고 온 오솔길을 발견하든지 아쉬운대로 바다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만약 절벽들이라도 보게 되면, 차를 두고 왔던 지점을 어림잡아 정확한 방향을 정해서 쭉 가보면 얼마 안있어 오솔길에 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언덕들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어느 게 어느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똑같은 모양의 봉우리들이 오후 햇살 속에 불쑥 솟아나 있었다. 다급해진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머리 위로 올려 보았다. 언젠가 바람이 바다쪽에서 불어온다고 주워들었었기 때문에 바람방향만 알게 되면 정확한 탈출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바람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만큼 약하게 불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오솔길이 있을법한 방향을 결정하고서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돌릴 틈 없이 5분동안 언덕들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힘겹게 봉우리에 올랐어도, 그녀는 자신의 차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대신 아까 전의 언덕 꼭대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발견되었다. 하얀색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감시탑이 서있고 높은 벽이 건물들 주위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새처럼 보였다. 도망자와 추적자들 모두가 이 곳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건물들 속의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볼 엄두도 못내고 무턱대고 이 황무지를 배회하다가 영원히 그녀의 차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되지는 않을까? 게다가 건물들 모양새를 보니 별로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밝은 색으로 칠해진 벽 위로 삐죽 나온 잎사귀 한 장으로 봐서는 그 안에 정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원한 그늘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이제까지 걸어오던 방향을 바꿔 그녀는 건물촌의 입구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오래된 철문 앞에 도착했다. 안도감이 들면서 피로가 밀려왔다. 언덕들을 헤매느라 지친 허벅지와 정강이가 부르르 떨렸다.

거대한 양쪽 철문 중 한 쪽이 열려 있어서, 그녀는 그리로 들어갔다. 철문 뒤에 펼쳐진 마당은 잘 다듬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비둘기 똥이 얼룩져 있었다. 똥 싼 장본인들 중 몇몇이 나무 위에 앉아서 그녀를 보고 울어댔다. 지붕이 씌워져 있는 길들이 마당으로부터 뻗어나가 건물들이 몰려있는 미로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험을 앞에 두고 낯선 길을 좋아하는 그녀의 괴팍스런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고, 맘에 드는 길을 하나 골라 걸어갔다. 햇빛을 피해 길을 걸어가니 평범한 모양의 벤치들이 늘어선 통로를 걷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작은 울타리 벽이 둘러쳐진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울타리 벽 한 쪽엔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벽이 움푹 들어가 있는 부분에 성모 마리아상이 서있었다. 그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아이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린 채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조각상을 보고 있으니, 이제까지 품어왔던 의문이 확 풀렸다. 외진 장소, 고요함, 단정하게 꾸며놓은 마당과 길. 이 곳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10대 시절부터 쭉 무신론자였고, 지난 25년간 교회 문턱을 넘어본 적도 거의 없다. 현재 41살이 된 그녀가 과거를 따져보니, 이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침입자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종교사원을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단지 오솔길로 가는 방향을 찾으려는 것 뿐이다. 이 곳에서 사람을 만나 길을 물어보고, 그 즉시 떠나면 그만이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조각상을 지날 때, 그녀는 누군가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널드와 함께 했던 결혼생활에서 그녀가 터득한 민감한 육감이 제공하는 믿을 수 있는 정보였다. 석달 전에 끝장난 그녀의 결혼생활 내내 화이트홀이나 워싱턴의 비밀정보부 뺨치는 별의별 방법으로 그녀를 감시하던 남편의 의처증으로 인해 그녀의 육감은 단련돼왔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수많은 눈이 그녀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들의 작은 창문들을 곁눈질로 살펴 보았고, 창문 중 한 군데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도 같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소리쳐 부르지는 않았다. 여기엔 무언의 의식, 침묵의 서약같은 것을 철저히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과 대화하려면 손짓, 발짓을 총동원해야하는 걸까? 뭐, 그렇다면 그렇게하는 거지 뭐.

그녀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여럿이서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통로 아래쪽에서는 철문이 쿵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두근 춤을 추며 온몸을 흐르는 핏 속에 경고신호를 보냈다. 흥분한 심장이 그녀의 얼굴에 튀어올라올 지경이었다. 피곤한 두 다리가 또다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급히 뛰어오는 발소리의 주인공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때 마리아상의 머리가 슬쩍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리아상의 푸른 눈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온 그녀의 행적을 쭉 지켜봤던 것이며, 지금의 그녀의 등 뒤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장승처럼 꼿꼿이 서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 성모상이 있으니 섣불리 도망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됐건 하늘로 솟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수도원 그늘 속에서 수녀님 3명이 수녀복을 펄럭거리며 나타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녀들의 턱에 난 턱수염과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반짝거리는 자동소총은 수녀님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환상을 깨뜨려 버렸다. 그녀는 어색하고 이상한 수녀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수녀들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수녀들은 한마디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수녀처럼 차려입은 중무장한 남자들이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거룩하신 자매님들 셋이 -이 사람들은 그녀가 마치 로마 교황청을 박살낸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다루었다- 그녀를 마당에서 끌어내고는 몸수색을 샅샅이 실시했다. 좀 투덜대기는 했어도 그녀는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순순히 응했다. 수녀들이 겨누고 있는 총구가 한 순간도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복종만이 최선의 행동일 듯 싶었다. 몸수색이 끝나자 수녀들이 그녀에게 다시 옷입을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가서 감금해 버렸다. 잠시 후 수녀 한 명이 맛좋은 렛시너 포도주 한 병과 함께 그녀가 시카고에서 맛 본 적 있는 속이 깊은 접시에 담긴 피자 한 판을 가지고 왔다. 오늘 일어난 석연찮은 일들에 대해 자축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어찌됐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신세가 된 그녀로서는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     *     *     *     *     *     *     *

"착오가 있었던 것 같네요." 몇시간에 걸친 심문 끝에 반들반들한 콧수염의 남자가 바네사의 진술에 호의를 나타냈다. 바네사는 이 남자가 비록 요새 경비대 제복같은 것을 입고는 있지만, 여자 수도원장이 되기 위한 실적을 쌓으려고 불쌍한 민간인을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야망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그의 사무실-진짜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은 별다른 장식이 꾸며져 있지는 않았는데,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장식품은 인간 해골이었다. 해골은 아래턱이 없었는데, 책상 위에 앉아서 텅빈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콧수염 남자는 옷을 제법 맵시나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비 넥타이는 반듯하게 매었고, 바지에는 칼같은 주름이 잡혀있다.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영어를 말했는데, 그녀는 그의 말 속에 담긴 색다른 억양을 감지했다. 프랑스인? 독일인인가? 그가 책상 서랍에서 초콜렛을 꺼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그가 스위스사람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로는, 그의 이름은 미스터 클라인이었다.

"착오라구요?" 그녀가 말했다. "당연하지. 당신 말대로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구요!"

"우리는 당신 차를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묵고 있다는 호텔쪽도 체크해 봤습니다. 이제까지 한 당신의 진술은 사실이더군요."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미스터 클라인이 우호의 표시로 초콜렛을 건네주었지만, 그녀는 전혀 우호적인 상태가 될 생각이 없었다. 이 곳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 속 수많은 방들 중 하나, 별다른 장식도 없는 밋밋한 작은 방에 시계도 없이 갇혀 있어 정확히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현재 시간이 밤이 꽤 깊은 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미스터 클라인과 그의 부하랑 함께 하는 심문시간이 너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그녀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다. "늦게라도 당신이 내 말귀를 알아듣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제 나를 호텔로 돌려보내주는 거죠? 피곤해 죽을 지경이에요."

클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그가 말했다. "허락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

바네사는 벌떡 일어나서, 격한 동작으로 의자를 뒤엎어 버렸다. 의자소리가 난 지 1초도 안되서 문이 열리더니 턱수염 자매님 하나가 권총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괜찮아, 스타니슬라우스." 클라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제이프 부인이 내 목을 절단낸 것도 아닌데 뭐."

스타니슬라우스 자매님은 문을 닫고 나갔따.

"왜?" 바네사가 말했다. 그녀의 분노는 경비원의 출현때문에 좀 수그러 들었다. "왜 안된다는 건데?"

클라인은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한 시간 전부터 놓여있던 커피 주전자에 손을 대보고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지 살펴봤다. 그는 컵에 커피를 따르고나서 대답했다. "제이프 부인, 내 생각에는 당신이 지금 상황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가능한 한 신속하게 당신을 풀어드리겠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약속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상황을 그저 게임이라고 생각하세요... " 그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 사람들은 원래 게임을 좋아하잖습니까."

"누가 그 따위 소릴 해요?"

클라인이 표정을 찡그렸다. "신경쓰지 마요."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가 당신의 기억을 없애기 위해 괴롭히는 일도 적어질 것입니다."

그녀는 해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게 하나도 이해가 안돼." 그녀가 말했다.

"굳이 이해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미스터 클라인이 대답했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제이프 부인, 당신은 이 곳에 발을 들여놓는 안타까운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당신이 들어오도록 방치한 실수를 한 것이구요. 평상시에는 당신이 목격한 것보다 우리의 경비태세가 훨씬 철저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경계가 느슨해진 순간에 이 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이봐요," 바네사가 말했다. "나는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가서 남은 휴일을 평화롭게 끝마치는 것 뿐이라구요." 심문관의 얼굴표정으로 보건대, 그녀의 호소는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거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짓도 않했어요. 아무 것도 보지 않았구요. 도대체 뭐가 문제에요?"

미스터 클라인이 일어섰다.

"문제라," 그는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문제가 하나 있긴 하지." 하지만 그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부하를 불렀다. "스타니슬라우스?"

문이 열리고 수녀가 들어왔다.

"제이프 부인을 방으로 모시고 가주게."

"우리 대사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분노로 불타오르며, 바네사가 말했다. "나한테는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구요!"

"제발 부탁입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미스터 클라인이 말했다. "소리 지른다고 아무 것도 도움이 될 건 없어요."

수녀가 바네사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권총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같이 가실까요?"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안가면 안될까?" 그녀가 말했다.

"장난치지 마쇼."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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