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한 [4] by 조재형

읽을꺼리 2007. 5. 8. 23:50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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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음날 아침, 잠을 깼을 때는 지난 밤의 고양이 신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내와 충동적으로 섹스를 벌이던 때에 고양이들이 떠나갔는지, 아니면 우리 부부의 섹스가 끝난 후에도 고양이들이 한참동안 더 섹스쇼를 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내에게 너무도 열중해서 섹스가 끝난 후에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어쨌든 고양이들은 다 가버렸다. 그래서 조용하다. 다행이다. 아침에도 그 자식들이 그 난리를 치고 있었다면 난 화가 나서 돌아버렸을 것이다.

어미 고양이는 왜 수컷들까지 데리고 와서 우리집 지붕에서 난리를 친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재수없는 고양이였다. 다음에 또 얼씬거리면 그때는 정말로 슬럼프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지난 밤의 섹스 때문인지 아침에 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붉게 음탕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남편 노릇 톡톡히 했다는 칭찬의 미소일까?

아침을 먹고 어제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랬던 것처럼 집필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좀 쓸 수 있을까?

노트북을 켜고 원고 파일을 열어 지난 번에 쓰다만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마지막 부분. 동우가 고양이한테 손등을 다쳤을 때, 막 쓰고 있던 부분 말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부분에서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원고를 보기만 해도 전해지는 중압갑, 키보드에 손을 올려 놓기만 하면 느껴지는 막막함. 슬럼프는 나를 떠날 생각이 없나보다. 게다가 지난 밤의 결렬한 애정생활로 인해 피곤하기까지 했다.

나는 원고쓰기를 포기하고 -며칠째 계속 슬럼프가 당연스런 일상으로 느껴졌다- 노트북으로 지뢰찾기 게임을 했다. 한참을 그러다 싫증나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뒹굴거렸다. 그마저도 조금 지나자 답답해졌다. 피곤한 데 잠이나 잘까?

바깥바람을 쐬고 오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가?" 아내가 물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께. 머릿 속이 답답해서 소설이 잘 안 써지네. 한번 휘하고 나갔다 오면 다 잘 될거야." 아내의 불룩한 가슴을 가볍게 만졌다. "갔다 올께요, 가슴씨."

철이 없다는 아내의 핀잔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30분을 기다려 버스를 잡아 타고 읍내로 나갔다.

읍내에는 제법 큰 시장이 있다. 도시의 쇼핑센터같은 화려함이나 편리함같은 것은 없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할 꺼리가 많고 가끔씩은 약장수 차력쇼같은 것까지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모습들을 둘러보고 나니 머리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시원해졌다. 진작에 외출 한번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는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나에겐 기분전환이 필요한 거였어. 이제까지 왜 그 좁은 골방에만 틀어 박혀서 슬럼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을까? 곤경에 빠진 인간은 항상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거든. 가족들 데리고 바닷가 같은 데 갔다오면 기분이 더 나아질지도 몰라.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개장수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빨간 고무통에 강아지들을 담아 놓고 팔고 있었다. 강아지들 모두 예쁘고 귀여웠다. 이 놈, 저 놈 만져보고 쓰다듬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동우 생각이 났다.

고양이가 오지 않은 다음부터 그 애는 활력이 없어졌다. 엄마가 놀아주지 않을 때는 그냥 혼자 놀아야 했으니까. 내가 읍내로 나올 때도 동우는 안방에서 게임기를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애가 게임할 때의 표정을 안다. 시무룩하고 지친 표정. 매일 같은 게임만 해대서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래도 달리 할 수 있는 놀이가 별로 없으니 동우는 게임만 해댄다.

동우에게 강아지를 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요물같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아이의 정서에는 더 좋겠지. 온몸이 푹신한 하얀 털로 가득한 강아지를 샀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됐는지 내 주먹보다도 덩치가 작았다. 개장수는 작은 종이박스에 강아지를 담아 주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종이박스 안의 강아지를 만지작거리며 동우를 생각했다. 강아지를 받으면 얼마나 기쁜 표정을 지을까? 설마 아내가 귀찮게 웬 강아지냐고 화를 내지는 않겠지? 아내에게도 바람 쐬러 우리 식구 모두 바닷가에 한번 갔다 오자고 말하는 것도 꼭 잊지 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골 생활에 지친 아내도 굉장히 기뻐하겠지? 그러고 보면 기분전환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나 혼자서 슬럼프에 허우적대느라 식구들 생각을 진작에 못했던 것이다. 나는 새로운 가능성에 기분 설레였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서 소설에 도전해 보는 거야.

마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집을 향해 걸어 갔다.

도중에 마을 이장을 만났다. 이장은 고양이한테 상처 입었던 애는 어떠냐, 그 강아지는 왠거냐, 요새 소설은 어떻게 됐냐, 별의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물어봤다. 그냥 대충대충 대답하고 서둘러 빠져 나왔다. 그 후로 집이 있는 산골짜기로 걸어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 여럿을 만났다. 한껏 기분이 좋았던 나는 흔쾌히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그 사람들은 생전 마을 사람들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내던 외지인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집에 왔다. 강아지 상자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간만에 식구들한테 깜짝 선물을 줄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나무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이 보이자마자 나는 우리집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붕의 기왓장들 일부가 마당으로 떨어져내려 산산조각 나 있었다. 기왓장이 없어진 지붕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신발도 벗지 않은채 서둘러 마루로 올라갔다.

안방문짝이 방 안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지럽혀진 방 안에 누워있는 아내와 동우를 보게 되었다.

결국 나는 동우에게 강아지 선물을 하지도 못했고, 아내에게 바닷가로 기분전환하러 가자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한테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집에 도착한 지 30분 후에 119 구조차량이 도착했다. 구조할 사람들은 이미 죽은 뒤에. 구조대원의 전화를 받고 그로부터 또 20분 뒤에 경찰차가 도착했다. 잡아갈 놈들은 이미 모두 다 도망가 버린 뒤에.

8.

그 날 이후로 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소설가가 겪은 소설같은 악몽!

신문, 방송은 온통 우리 가족의 비극으로 채워졌다. 심지어는 CNN 뉴스시간에도 나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나에 대한 인터뷰는 물론이고 시골 우리집에도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몰려 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그 작은 시골 마을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난리를 쳤다. 내가 겪은 일들은 언론매체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과장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아내와 동우의 죽음에 고양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언론 앞에 밝혔다. 시체에 난 할퀸 자국과 물어뜯은 자국, 안방의 핏자국에 들러 붙은 짐승 털들, 마당에 떨어진 동우의 동화책에 남겨진 발자국들, 안방 구석에서 발견된 고양이 시체같은 증거로 보아 확실했다.

나는 얼마전 어미 고양이가 동우의 손을 할퀴었다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고양이들을 혼내 주었다는 얘기도 했다. 아마도 그게 고양이를 화나게 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새끼 고양이를 죽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몇대 때려 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미 고양이가 수컷들을 끌고와 우리집 지붕 위에서 섹스쇼를 벌였고, 그 때문에 성적으로 흥분한 내가 아내를 엎어놓고 뒤치기를 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에 고양이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고만 말했다. 부끄러운 진실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고양이들이 일으킨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만 말해 주었다.

"화가 난 고양이가 나에게 원한을 품었나 봅니다. 짐승이 인간한테 그런 감정을 품어서 보복을 했다는 생각이 허황되게 들리겠지만, 하여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어찌됐건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맙게도 고인이 된 내 가족을 위해 발벗고 나서 주었다. 모두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노인들이고 한창 농사일에 바쁘고 한마을에 살면서 우리 가족이랑 별로 친분도 없었지만 이장 어른의 지휘 아래 경찰과 합동으로 산을 샅샅이 뒤져 지랄같은 고양이들을 잡아 들였다. 물론 기자들의 카메라가 줄곧 헌신적인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나중에는 방송국의 요청으로 자원봉사 사냥꾼들까지 합세했다.

일주일이 조금 못되는 수색작업으로 37마리의 산고양이들이 잡혔다. 대부분은 포획 과정에서 죽었다. 나는 기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물학 교수라는 사람 -방송국에서 불렀을 것이다- 과 함께 잡혀 온 고양이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모두 다 수컷. 그 망할 놈의 어미 고양이는 없었다.

그렇게 수색작업은 끝났고, 어미 고양이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고, 나의 유명세도 차츰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9.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더 이상 시골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 참혹한 일이 벌어진 집에서 태연하게 소설이나 쓸 수 있겠는가?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새로 얻은 지하 전세방에 틀어 박혀 술만 마셔댔다. 아내와 동우의 장례식을 치르고, 기자들에 파묻혀 인터뷰 세례를 받고, 시골에서 고양이 수색작업을 지켜보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당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의 의지-주로 언론의 집요한 의지-에 이끌려 피곤하고 정신없는 상태였다. 나 자신의 처지를 차분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몇몇이 위로방문차 찾아왔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 버렸다- 연립주택 지하에 틀어박혀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술을 먹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했다. 예전에 문학기자 같은 사람들과 인터뷰할 때는 마치 글쓰기가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허풍떨기도 했지만, 사실 난 우리 가족을 글쓰는 것보다 몇억만배 정도 더 사랑했다. 내가 소설을 쓰면서 괴로워했던 것은 작품이 완성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보다는 팔릴 소설을 못 쓰면 우리 가족들을 쫄쫄 굶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더 컸다. 나는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특기인 글쓰는 일로 우리 가족을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런 행운의 작가들이 이 세상에는 굉장히 많이 존재하니까.

나는 어떻게든 우리 가족들한테 아픔을 주는 사람이 되긴 싫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가족을 시골 촌구석으로 끌어 들였고, 고양이가 우리 가족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치했으며, 어미 고양이가 앙심을 품도록 동우의 상처를 빌미로 또 슬럼프를 빌미로 새끼 고양이를 죽여 버렸고, 결국 아내와 동우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치도 못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가족의 죽음은 고스란히 나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맨정신으로는 그 거대한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가족들이 죽은 뒤로 거의 2달 동안을 술에 쩔어 살았다. 강아지와 함께. 동우에게 선물하려고 읍내 시장에서 샀던 그 하얀 강아지말이다.

일부러 챙긴 것은 아니었는데, 전세방에 짐을 풀고 보니 강아지도 실려 있었다. 그래서 그냥 방에다 놔두었다. 특별히 돌봐주지는 않았다. 먹이를 준 적이 한번도 없어서 강아지는 내 술안주 쪼가리나 훔쳐 먹으면서 연명했고, 방에다 오줌을 싸든 똥을 싸든 치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지하 전세방의 모습은 엉망이 되었다. 불도 제대로 안켜서 어두운 방 안에는 개 배설물에 이리저리 널린 술병들, 김치같은 술안주들이 어울려서 누구나 감탄할 만한 악취 중의 악취가 가득했다. 난 방 안을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냄새가 나같은 놈에게 딱 어울리는 냄새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나같은 좃같은 놈한테는.

강아지에게는 내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는 술에 잔뜩 취하면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했다. 강아지 이름은 내 이름이니 나한테 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내 이름을 구실로 강아지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기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장에서 너를 사지 않고 서둘러 집에 왔었어도 가족을 살릴 수 있었어!

어쨌든간에 나는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대며 강아지한테 온갖 욕을 다했다. 이 씨발놈아, 이 좃같은 놈아, 이 똥같은 놈아, 이 참새 보지같은 놈아, 이 개같은 놈아.... 웃다가 울다가 정신없이 욕하면서 술을 들이부으면서 나의 무능력함을 자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오후 내내 잠으로 시간을 보내다 밤에서야 깬 것이었다. 창문을 통해 옆집의 불빛이 희미하게 나의 방을 비췄다. 나는 더듬더듬 술병을 찾아 또 버릇대로 소주를 마셨다. 2병을 단숨에 비웠다. 머리 속이 빙빙 돌았다. 방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내 주위가 온통 비현실적인 몽롱하고 흐릿한 분위기로 변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강아지가 있었다. 먹을 것을 못먹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병에 걸린건지 배를 드러낸채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평소대로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날은 그렇지 못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얼큰하게 올라온 취기 속에서, 옆집 조명이 연출하는 무겁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강아지의 불룩하게 솟은 하얀 배가 빛을 내고 있었다. 캄캄한 밤하늘에 홀로 떠있는 보름달같이 눈부신 빛을 내고 있었다.

나에게 빛은 어울리지 않어. 나는 어둠 속에 찌그러져 있어야 마땅한 놈인데. 저 지랄같은 개새끼는 왜 저렇게 환하게 빛나는 거지? 뭐가 좋다고?

빛을 꺼뜨리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술이 그렇게 하라고 속삭였다.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왔다. 식칼을 주제넘게 빛을 내고 있는 강아지의 배에 갖다댔다. 강아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강아지가 죽어 있었는지, 아니면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어도 숨은 붙어 있었던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물보호협회나 보신탕 금지 추진본부나 개사랑 동호회 같은 데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주저않고 단숨에 강아지 배를 갈랐다. 순식간에 강아지 배에서 빛이 사라졌다. 배가 식칼에 잘리고 갈라지면서 속이 드러났다. 뱃속에서 검은색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어둠의 피가 분출했고, 어둠의 내장이 튀어나왔다.

죽은 강아지에 대한 눈꼽만큼의 연민도 없이 계속 소주를 마셨다. 어두운 방 안에 어울리지 않게 깝죽대던 빛이 사라져서 기분이 좋았다.

빛은 타인의 것, 어둠은 나의 것. 어둠은 당연히 나의 것. 패배자의 것. 실패자의 것. 미친 놈의 것.

나는 어둠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갈라진 강아지의 뱃 속에서 흘러나온 꼬불꼬불한 내장을 식칼로 잘라가면서 씹어 먹었다. 씹을 때마다 입 안 가득 국물이 흘러 나왔다. 무척 질겼는데, 별다른 맛이 느껴지진 않았다. 술에 단단히 취했던 탓이겠지. 그래도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듯이 강아지의 내장을 술안주로 삼아 꾸역꾸역 먹었다.

술에 취한 건지, 배가 부른 건지 나는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아내와 동우와 고양이가 나오는 꿈을. 악몽을.

[5]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