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워커스 / Sleepwalkers

작품 감상문 2007. 5. 12. 22:23 posted by 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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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walkers

(1992년 영화)

<Sleepwalkers>는 스티븐 킹이 쓴 창작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다. 우리나라에는 <슬립워커스>라는 제목으로 비디오와 DVD로 출시되어 있다.

내가 젊었을 때(=아기 피부를 간직하고 있던 시절) 이제 막 스티븐 킹의 팬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슬립워커스>라는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의 기존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아니라 창작 시나리오로 만든 첫 영화라니 궁금했다. 어떤 내용일까?

어느 한적한 마을의 고등학교에 음흉한 미소를 질질 흘리는 남학생이 전학 온다. 엄마와 단 둘이 사는 그 남학생은 굉장히 예쁜데도 불구하고 그 때 마침 애인이 없던 여학생에게 접근한다. 여학생은 그 남학생에게 점점 더 끌리게 되고 행복한 앞날을 꿈꾸게 되는데, 그 남학생과 그의 엄마가 슬립워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몰랐다. 진짜로 몰랐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쓴 스티븐 킹의 배려로 그 어여쁜 여학생도 슬립워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처녀의 원기를 빨아먹고 사는 슬립워커라는 괴물 종족을 다룬 이야기다.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짐승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는 괴물 종족 슬립워커. 괴물이 나오니까 이 괴물이 인간들을 농락하며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해주는 영화가 될 것 같지만, 영화를 보면 그렇지가 않다.

<슬립워커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이 괴물 종족들의 과거 활약상(=인간들을 막 못살 게 괴롭힌다)을 암시하는 고대 문서들을 보여주며 한껏 폼을 잡지만, 현대에 이르러 슬립워커들은 전설의 존재일 뿐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슬립워커 엄마와 아들은 자신들의 종족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하는 희망만 품고 쓸쓸히 살아갈 뿐이고, 현재로서는 슬립워커가 자기들 둘 뿐이니 우린 죽으나 사나 단결해야 한다면서 상부상조 정신을 강조하다 그만 금단의 사랑으로까지 치닫고 만다. 그 뿐이 아니다. 외롭게 살아가는 괴물들이지만 입은 고급이라서 인간 처녀들의 원기를 빨아 생명을 유지하느라 인간을 습격하고 나면 성난 인간들의 공격을 피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며 살 수밖에 없다.

영화의 주인공격인 괴물이 이렇듯 연약한 면모를 보여주니 공포스러운 면은 많이 깎인다. 게다가 처녀를 납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슬립워커가 자꾸만 기회를 놓치고 도리어 공격까지 받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니 주객이 전도된 듯한 기분이다. 또한 공포영화에서 카리스마를 자랑해야할 괴물이 자기 몸에 상처가 나는 상황들 속에서 자꾸 썰렁한 농담을 해대니 보는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오묘해지기도 한다.

또한 괴물의 모습을 드러내는 슬립워커의 분장 또한 어설픈 티가 많이 난다. 딱 보면 인형옷을 뒤집어 썼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면에서 괴물로서의 공포스런 면모는 또다시 상당히 깎인다.

킹이 소설로 썼으면 좀 더 실감나게 묘사됐을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어긋나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내가 젊었을 때(=아기 피부를 간직하고 있던 시절)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슬립워커스>를 빌려다 보고 느꼈던 인상이다.

그 후 세월은 흘러 현대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비디오 테이프에 이어 DVD 매체가 등장했고, 우리나라에 영화 <슬립워커스> DVD가 출시되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 DVD가 나오면서 출시사에서 홍보했던 내용은 무삭제 그대로 국내에 출시했다는 것이었다. 국내에 나왔던 <슬립워커스> 비디오가 삭제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무삭제의 매력에 풍덩 빠져보고 싶어서 DVD 타이틀을 샀다. 그리고 정말로 오랜만에 <슬립워커스> 영화를 감상했다.

비디오로 봤을 때는 영화가 실망이었지만, 이번에 DVD로 보니 상당히 재밌었다.

예전에는 실망스런 요소로 느껴졌던 요소들이 지금 보니 아기자기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여전히 공포를 전해주기엔 역부족이지만, 부담없이 볼 수 있는 B급 공포영화로는 제격이었다. 스티븐 킹의 B급 정서가 유감없이 발휘된 영화였던 것이다. 한 판의 축제같은 B급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만 하다.

게다가 비디오로 봤을 때는 지나쳤던 슬립워커의 슬픈 면모가 가슴 절절하게 느껴졌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궁상맞게 감상적이 됐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암튼지간에 DVD로 보면서 슬립워커의 눈물 겨운 투쟁에 정말로 진짜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미녀를 잡아다 슬립워커한테 선물해 주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었...으나, 미녀가 있으면 내가 사귀어야지 왜 남을 주나?

영화 전반부를 장식하는 아들 슬립워커의 엄마를 향한 극진한 효도, 영화 후반부를 장식하는 엄마 슬립워커의 아들을 향한 극진한 애정. DVD로 영화를 보는 내내 이들 모자의 고독과 삶에 대한 집착이 슬프게 느껴졌다. 정말 이런 부분은 킹이 소설로 펴냈다면 더욱 멋지게 묘사되었을 것 같은 부분이다.

그리고 영화의 수준은 곧 그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들의 수준이 좌우한다고 믿는 나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정말 걸작이었다. 엄마 슬립워커를 연기한 여배우의 농염한 매력과 슬립워커의 함정에 빠져드는 여고생을 연기한 여배우의 앵두같은 싱그러움에 나는 침을 흘리며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카메오 출연한 인물들이 의외로 쟁쟁하다. 영화 첫부분에서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크 해밀이 나오더니 영화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클라이브 바커, 존 랜디스, 토브 후퍼, 조 단테와 같은 공포영화계의 유명인들이 얼굴을 비춘다.

카메오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배우는 영화 후반에  경찰로 나와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는 론 펄먼이다. 영화 <헬보이>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TV시리즈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역할을 맡았던 이 배우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야수나 헬보이가 아니라 그냥 사람 역할로 나오는데도 그의 독특한 얼굴은 너무도 강렬하다. 솔직히 괴물같은 슬립워커의 모습보다 론 펄먼의 맨얼굴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인물은 바로 스티븐 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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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과 클라이브 바커

킹은 영화 속에서 묘지 관리인으로 카메오 출연하는데, 묘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고 방황하는 고도의 심리연기를 보여준다. 그것도 잠깐 얼굴을 비치는 식이 아니라 꽤 긴 시간동안 나와서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특히 보안관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려다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순간 킹의 표정연기는 절묘하다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감칠맛 난다. 예전에 비디오로 볼 때도 킹의 출연장면에 무한한 쾌감을 느꼈지만, 이번에 DVD로 보면서도 역시 무한한 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슬립워커스>는 무섭지는 않다. 의외로 슬픈 영화다. 안 보면 후회할 만한 걸작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B급 정서에 충실한 슬픈 공포영화를 보고픈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게다가 스티븐 킹의 연기력을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사람들한테는 강제로라도 권하고 싶다.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여성이 감미롭게 읊조리는 노래가 무척 좋다. 오늘밤도 그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으으음~ 음음~ 으으음~ 음음, 으으음~ 음음~ 으으음~ 음음, 으으음~ 음음~ 으으음~ 음음(무한반복).